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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이야기왜(倭)의 침입에 대비했던 금강산 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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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6.14 조회4,95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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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주서(孟胄瑞, 1622~?)는 1654년(효종 5)에 과거 급제 후 언관직(言官職)에 있으면서 청렴하고 강직한 벼슬 생활을 하였고, 외직에 나아가서는 많은 선정을 베풀었던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황해도관찰사로 재임할 당시에는 도민들이 흉년으로 곤란을 겪자 진휼청(賑恤廳)01의 곡식 4,000석을 풀어 기근을 해소하였고, 안동부사로 있을 때에는 조정으로부터 선정을 베푼 공로를 인정받아 벼슬이 종2품 가선대부에 이르렀다. 그는 관원으로서 분주한 나날을 보냈지만 틈틈이 명승지를 찾아 유람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특히 아름다운 금강산을 사랑하여 여러 차례 그곳을 찾은 바 있었다.

  어느 날 금강산의 깊은 골짜기 안으로 들어갔던 맹주서는 다리도 쉴 겸 해서 한 암자에 들렀다. 암자에는 건장하고 인품 있어 보이는 고령의 스님 한 분이 있었는데 맹주서는 그 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생각이 부쩍 동하여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하였다. 스님은 쾌히 승낙하며 함께 저녁을 먹었다. 식사 후 스님은 상을 내어가는 사미02에게 “내일은 내 스승의 기일이니 제물을 잘 챙겨야 한다.”고 일렀다.

  이튿날 새벽 맹주서가 깨어나 보니 그 스님이 소박한 제사상을 앞에 놓고 슬프게 곡을 하고 있었다. 그는 스님이 하도 슬퍼하기에 필경 그 스승이란 사람이 대단한 인물이었을 것이란 생각에 공손히 물었다.

  “보아하니 스님의 스승은 학식과 덕망이 높은 분이셨던 것 같은데 존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노승은 고인에 대한 추억을 더듬는 듯 한동안 말이 없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제 와서 숨겨 무엇하겠소. 나는 본시 조선 사람이 아니라 왜(倭)에서 온 사람이외다. 나의 스승은 중이 아니라 선비였소. 처음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임진년(1592) 전으로, 그때 왜는 사리(事理)에 밝고 날쌘 이 8인을 뽑아 조선에 보냈는데 나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소이다. 우리의 첫 번째 임무는 조선팔도를 각자 하나씩 맡아 그 산천의 지세와 곳곳의 방어시설을 염탐하여 기록해 두는 것이고, 두 번째는 조선인들 가운데 지략과 용맹을 겸비한 자를 만나는 족족 죽이라는 것이었소이다.

  우리들은 조선말을 익힌 다음 동래왜관에 들어와 스님 행색을 하였소. 그리고 각 도(道)로 떠나기 전에 조선의 영산(靈山)인 금강산에 기도를 드리기로 하였지요. 10여 일만에 금강산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누런 소를 타고 산골짜기에서 내려오는 한 선비와 마주쳤소이다. 지난 며칠간 끼니를 때우지 못해 기력이 쇠해졌던 일행은 그 선비를 죽이고 소를 잡아먹으려고 그에게 다가갔지요.

  선비는 어떻게 알았는지 우리를 보더니 다짜고짜 “네놈들은 왜국의 염탐꾼이지. 내가 모를 줄 아느냐! 만난 김에 모두 없애버리고 말겠다.”고 소리치는 게 아니겠소. 깜짝 놀란 일행은 검을 빼들고 동시에 그를 덮쳤는데 그 선비는 소의 등에서 훌쩍 뛰어내리더니 귀신같은 솜씨로 우리를 때리자 순식간에 머리가 터지고 다리가 부러져 죽은 자가 다섯 명이나 되었소이다. 형세가 이미 기울었다고 판단한 나머지 세 사람은 모두 땅바닥에 엎드려 제발 목숨만 살려달라고 빌었지요. 그러자 선비는 “너희들이 진정으로 항복하려면 나와 생사를 함께해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묻기에 우리 셋은 머리를 조아리며 그렇게 하겠다며 하늘을 우러러 맹세하였소이다.

  선비는 우리를 데리고 집으로 가더니 “너희들이 비록 왜의 지시로 우리나라를 염탐하러 왔지만 진심으로 항복했으니 이제부터 검술을 가르쳐 줄 것이다. 장차 왜병이 우리나라를 침노하면 내가 군사를 일으켜 대마도를 치러갈 때 길을 안내하여 그 은혜를 갚도록 하라.”고 하였소이다. 그 후 그가 가진 훌륭한 검술을 다 가르쳐주었으므로 우리는 깍듯하게 그 선비를 섬겼지요. 그런데 어느 날 아침잠에서 깨어나 보니 우리와 함께 자던 선비의 몸에 피가 낭자해 있는 것이 아니겠소. 크게 놀란 나는 선비를 살해한 것은 틀림없이 함께 온 일행의 소행이라 짐작하고 엄하게 따졌소이다.

  “그대들이 무슨 짓을 한 겐가?”

  “우리가 비록 이 사람을 섬겨왔지만 함께 온 자들이 모두 그에게 죽고 세 명만 남았으니 이는 큰 원수라 어떻게 잠시라도 잊을 수 있겠나. 오랫동안 기회를 노려왔으나 틈이 없다가 다행히 이번에 원수를 갚을 수 있었네.”

  다시 태어난 은혜와 하늘에 맹약한 의리는 부자간과 같을진데 원수 운운하는 말에 격분한 나는, 그들을 크게 꾸짖고 엎드려 통곡하다가 분연히 일어나 두 놈을 죽이고 금강산의 중이 되었소이다. 그 뒤 사미 한 사람과 더불어 이 암자에서 염불을 외우며 지금까지 살아왔지요. 그 스승의 재주와 지략, 그리고 그분의 의리가 깊고 정이 두터웠던 것을 생각하면 애석하기 그지없고 통분하기 이를 데 없었소. 그래서 기일이 되면 애통함을 이기지 못했는데 세월이 흘렀건만 그 생각은 조금도 덜하지 않소이다 ….

  맹주서가 다 듣고 나서 감탄을 금치 못하며 다시 물었다. “당신의 스승이란 분은 그처럼 앞날을 밝게 내다보고 신비스러운 용맹을 지녔는데 어찌 두 사람이 흑심을 품은 것을 모르셨을까요?”

  “우리 스승이 어찌 그걸 몰랐겠소. 다만 그 재간을 사랑하고 두터운 은혜를 베풀어 그들이 마음을 바르게 갖길 원했고, 그 지략이 능히 그들을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지요. 특히 스승은 나의 재간과 식견이 출중하다며 사랑해 주셨소. 내가 고향도 친척도 잊은 채 지금 이렇게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소이다.”

  늙은 스님은 스승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자 한숨을 쉬면서 “나는 이제 오래지 않아 죽을 것이요, 나 역시 나의 행적이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 답답해 젊은 분에게 이야기한 것이었소.”라고 말하였다.

  맹주서는 그 스님의 기이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조정의 부패하고 무능한 관료들이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이미 앞날을 내다보고 왜의 침입에 대비했던 이름 없는 선비의 행적에 충격과 깊은 감명을 받았다. 

<대순회보> 9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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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조선시대 물가조절과 빈민구제를 담당했던 관청.

02 아직 초보적 계율인 십계(十戒)만을 지키는 어린 남자 승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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