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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이야기울소와 삼불암에 얽힌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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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9.12.15 조회5,09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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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금강(內金剛)은 태백산맥의 줄기를 따라 남북으로 뻗은 금강산 주능선의 서남쪽 지역을 일컫는다. 천태만상의 기암절벽과 장대한 산악미를 갖춘 외금강이 억세고 강인한 남성적인 미(美)를 자랑한다면 연이은 폭포와 소(沼)들이 기암절벽과 조화를 이룬 내금강은 수려하고 우아한 여성적인 계곡의 미를 보여준다. 내금강은 그 지역의 특성과 탐승노정에 따라 만천구역, 만폭구역, 명경대구역, 비로봉구역 등 여덟 개의 구역으로 나뉜다. 이 중에서도 만천구역의 내강리(內剛里)에서 출발해 만폭동을 지나 비로봉으로 오르는 코스가 가장 유명하다. 산과 계곡 나무와 돌이 어우러진 계곡의 절경에 예로부터 장안사, 표훈사, 정양사, 마하연 등 금강산의 대표적인 사찰들이 자리하고 있으며 지금도 가장 많은 문화유적들이 남아있다.

 

  내금강의 입구인 만천구역은 금강군 내강리로부터 금강문(金剛門)에 이르는 구역을 포괄하는 지대이다. 이 구역은 동쪽으로는 돈도봉, 석가봉, 장경봉이 높이 솟아 있고 서쪽으로는 능허봉줄기인 방광대, 배재령 등이 솟아 있으며 그 아래에 울창한 나무숲이 이루어진 가운데 내금강 중심부의 모든 개울물을 다 받아들여 만천(萬川)의 맑은 물이 굽이쳐 흐르는 아름다운 명승지이다. 내강리에서 희맑은 만천 개울을 따라 올라가는 장안사 길에는 좌우로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 숲이 우거져 있어 마치 터널을 지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 개울을 따라 2km 정도 오르면 ‘신선들이 사는 곳을 향해간다’는 뜻의 향선교(向仙橋)라 불렀던 만천교가 나오고, 다리를 건너면 왼쪽 산언덕에 장안사(長安寺)01 터가 자리하고 있다. 예전에는 장안사에서 500m 아래쪽 골짜기 입구에 만천을 끼고 사하촌이 형성돼, 숙박시설과 매점들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도 없다.

 

  장안사 터를 지나 전나무, 잣나무 숲속으로 만천 개울을 따라 올라가면 약 200m 거리에 걸쳐 유달리 푸른 물이 흐르는 것을 볼 수 있다. 개울 바닥에 청석이 깔려 있어 흐르는 물이 푸르게 보인다는 벽류이다. 이곳을 지나 오른쪽으로 굽이돌면 ‘울소’라는 못에 이르며 못 옆의 큰 바위에 ‘鳴淵(명연)’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물소리가 사람 우는 소리처럼 들린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이 물소리와 소(沼) 앞에 있는 바위들이 결부되어 전설이 생겨났다. 울소 옆에 가로 놓인 바위는 ‘시체바위’, 소 앞에 나란히 놓여 있는 바위는 ‘삼형제바위’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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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소 위의 좁은 개울 목을 돌아 삼불암교를 건너면 길 양쪽에 집채만 한 삼각형의 바위 둘이 마주보고 있다. 이중에서 오른쪽의 더 큰 바위가 전설 속의 나옹이 새겼다는 삼불암(三佛岩)이다. 삼불암 바위의 크기는 높이 8m, 너비 9m이고 세 면에 불상이 새겨져 있다. 바위의 앞면에는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미륵불과 아미타불, 바위의 왼쪽 면에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 입상, 뒷면에는 보살상 60여 구가 가지런히 조각되어 있다. 바위 오른쪽 면에는 조선시대 문인 윤사국(尹師國)이 쓴 ‘三佛岩’이라는 글씨가 크게 새겨져 있는데, 이 삼불암과 울소에 얽힌 전설이 다음과 같이 전해오고 있다.

 

  장안사에 나옹(懶翁)조사가 살고 표훈사에는 김동(金同)거사가 살고 있었다. 나옹은 금강산에서 이름난 스님으로 모든 승려들의 스승의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차츰 여러 제자들 가운데 상좌(上座)로 삼을 만한 사람을 찾게 되었다. 그가 아무리 보아도 표훈사의 김동거사가 가장 적격인 것 같아서 그를 상좌로 삼아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며 불교의 교리를 전수하였다. 그런데 김동은 차츰 야심이 생겨 어떻게 하면 하루라도 빨리 스승인 나옹조사를 금강산에서 내쫓고 자기가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지를 고심하였다. 이런 그의 속내를 알아차린 나옹은 어느 날 김동을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네가 총명하고 지략이 깊기에 나는 자네를 나의 상좌로 삼은 것이네. 내 이제 나이도 많아 이 자리를 자네에게 넘겨줄까 해서 자네의 재간을 시험해보기로 하겠네.”

  김동의 표정을 살피던 조사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나와 바위에 불상을 새기는 내기를 하자는 걸세. 자네가 이기면 이 자리를 넘겨주고, 만약 지면 자격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겠네. 알겠나?”

  김동은 이 노인과 경쟁하면 틀림없이 이길 것이라 확신하며 흔쾌히 승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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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날 조각 경쟁이 벌어졌는데 나옹은 표훈동 입구에 서 있는 바위 앞면에 세 구의 큰 불상을 새겼고, 김동은 그 바위 뒷면에 육십 구의 작은 불상을 새겼다. 다음날 그들은 장안사, 표훈사의 여러 스님들과 함께 그 작품들을 감상하였다. 나옹조사의 삼불은 나무랄 데 없는 걸작이어서 모든 스님들이 한결같이 감탄하였다. 미륵과 석가, 아미타의 세 부처가 모두 살아 있는 것 같고 웃는 눈과 덩실한 코, 열릴 듯 말 듯한 입을 보면 금새 사람들에게 무언가 말하려는 것 같았다. 그런데 김동의 작품은 졸작일 뿐 아니라 60보살 가운데 한 보살은 귀가 없었다.

 

  “아니, 이 보살은 귀가 없네그려. 귀 없는 보살도 있는가?” 하며 모두 혀를 찼다.

  내기에서 김동은 지고 말았다. 이렇게 되고 보니 조사 자리를 탐낸 자신의 탐욕이 몹시 부끄러웠고, 더욱이 나옹스님이 자신의 야심을 알아차리고 이런 내기를 벌인 것을 생각하니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슬며시 그 자리를 빠져 나와 울소로 갔다. 울소 앞의 큰 바위 위에 올라서니 발밑에서는 시퍼런 소(沼)가 감돌고 있었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고 사랑하는 자식들의 모습을 그려본 다음 울소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고 말았다.

 

  뒤늦게야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아들 삼형제는 못가에 엎드려 “아버지!” 하고 부르며 슬피 울다가 슬픔에 못 이겨 함께 물에 뛰어 들었다. 이때 갑자기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울리고 폭우가 쏟아졌다. 날이 개이자 울소 옆에는 길게 누운 큰 바위가 생겨났고, 그 바위 쪽을 향해 엎드려 있는 세 바위가 물 위에 떠올랐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큰 바위는 김동의 ‘시체바위’, 작은 세 바위는 그의 아들 ‘삼형제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소로 떨어지는 폭포 소리가 삼형제의 울음소리를 닮아 구슬픈 소리를 낸다 하여 명연(鳴淵)은, ‘울린다’는 울소로서가 아니라 ‘슬피 운다’는 울소로 그 뜻이 바뀌었다고 한다.

 

 

 

01 장안사는 유점사, 신계사 표훈사와 더불어 금강산 4대 사찰 중의 하나이고, 유점사 다음 가는 대찰(大刹)이었다. 원(元)나라 순제 때는 기씨(奇氏) 황후가 이곳까지 찾아와 불공을 드리고 사찰의 중창에도 크게 기여했을 만큼 유명했는데 한국전쟁 때 완전히 파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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