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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이야기서산대사와 사명당의 도술겨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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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9.12.18 조회5,55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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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금강의 만천(萬川)구역에서 울소[鳴淵]와 삼불암(三佛岩)을 지나 금강문까지의 골짜기 안과 그 주변일대의 경치 좋은 지역을 표훈동이라 한다. 이곳은 넓은 골짜기 안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으며 기암괴석을 머리에 인 청학대, 방광대, 천일대 등이 둘러싸고 있어 비교적 아늑하다. 특히 표훈사(表訓寺) 뒤편의 산등성은 전망이 대단히 좋은 곳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표훈동은 위치상으로나 전망으로 보아 내금강의 중심부라 할 수 있다.

 

  삼불암에서 표훈사로 올라가는 길 오른쪽 길목에는 ‘백화암(白華庵)’ 터가 자리하고 있다. 백화암터는 비록 낮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나 주변에 전나무들이 우거져 있어 아늑한 감을 주며 앞이 환히 틔어 있어 만천구역의 절승경계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이곳은 원래 고려 후기에 도산사(都山寺)가 있던 자리인데 백화암이 언제 누구에 의해 창건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암자는 여러 차례 중수(重修)되었다가 1914년에 불에 탄 후 서산대사, 사명당 등 임진왜란 당시 승군(僧軍)을 일으킨 명승(名僧)들의 진영을 모신 수충영각(酬忠影閣)이란 건물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마저 한국전쟁 때 소실됨으로써 현재는 터만 남았는데 다만 7개의 부도(浮屠)와 3개의 비(碑)만이 어우러져 부도밭을 이루고 있다.

 

  부도밭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인조(仁祖) 10년(1632)에 세워진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 1520~1604)의 부도비이다. 임진왜란 때 승려 수천 명을 이끌고 의병과 함께 왜군을 물리쳤던 서산대사는 백화도인(白華道人)으로도 불렸는데, 이는 그가 이 암자에 오래 머물렀기 때문이다. 대사가 열반에 든 뒤 그의 사리를 나누어 묘향산 보현사와 이곳 백화암에 안치하고 똑같은 비석을 세웠다. 부도밭에는 서산대사의 부도와 비 외에도 문하(門下)의 대표적인 승려들의 부도와 비들이 있다. 지난날 서산대사가 이곳에 거처할 때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 1544~1610)이 찾아와 도술을 겨뤘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묘향산에 있던 서산대사는 한동안 내금강 표훈동의 백화암에 머물고 있었다. 이때 외금강 유점사에는 사명당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당시에 널리 알려진 고승으로서 불도는 물론 도술에도 통달하여 상당한 경지에 있었다. 서산대사와 사명당은 금강산에 있으면서도 서로 만난 적은 없었고 다만 풍문을 통해 서로에 대해 알고 있을 뿐이었는데 사명당은 나름대로 지략이나 도술에 있어서는 조선팔도에서 자기가 제일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명당의 귀에 묘향산에서 도술이 아주 뛰어난 스님이 내금강의 백화암에 와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는 한번 만나 도술로 재주겨루기를 하여 본때를 보여주고 제자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서산대사를 찾아 외무재령을 넘었다. 그러나 백화암에 있던 서산대사는 벌써 사명당의 이러한 속내를 알아차리고 동자 한 사람을 불러 “오늘 나를 찾는 귀중한 손님이 오니 네가 마중을 나가도록 해라.”고 하였다.

 

  동자는 당황하여 “스님! 제가 한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을 마중 나간다 해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분이 어떻게 생겼는지 얼굴과 키를 알려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서산대사는 웃으면서 “이 길로 얼마쯤 내려가면 어떤 사람이 올라올 것이다. 그 사람은 특별하게 생긴 것은 없어도 냇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게 하면서 천천히 올 터이니 곧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일러주었다. 동자는 서산대사가 하는 말을 괴이하게 여겼으나 그의 도술이 비범한 줄 아는지라 감히 두 번 다시 묻지 못하고 시키는 대로 계곡을 따라 마중을 나갔다.

 

  동자가 계곡을 따라 얼마쯤 내려가다가 시냇물을 보니 이상하게도 냇물이 거꾸로 거슬러 흐르고 있었다. 그가 몇 걸음 더 가니 서산대사가 일러준 대로 스님 한 분이 대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짚고 팔을 휘저으며 올라오고 있었다. 동자는 곧 그 스님에게 다가가서 “서산대사께서 마중을 나가라고 하시기에 마중을 나왔습니다.” 하면서 인사했다.

 

  동자로부터 인사를 받은 사명당은 속으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홀로 오는 길이라 내가 오늘 이곳에 당도한다는 사실을 누구도 알 리 없고, 금강산에는 수양 중인 승려들이 많은데 자신을 알아차린 것으로 보아 서산대사의 도술이 보통이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다. 사실 사명당이 시냇물을 거꾸로 흐르게 한 것은 서산대사와 통성명을 하기 전에 그에게 자신의 도력(道力)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는데 이를 서산대사가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이후 백화암 앞으로 흐르는 강물을 역류강(逆流江)이라 불렀다고 한다.

 

  한편 마중 나온 동자를 따라 백화암 뜰에 이른 사명당은 서산대사를 만나자마자 인사도 나누지 않고 날아가는 참새 한 마리를 손에 감싸 쥐고 그에게 “이 참새가 살았겠소? 죽었겠소?” 하고 물었다. 그때 서산대사는 사명당을 맞으러 문턱에 한 발을 내디딘 걸음을 멈추고 서서 “대사님이 초면에 농담을 곧잘 하시는군요. 그래 내가 지금 나가겠소? 들어오겠소?” 하고 되물었으니, 이것이 그들 사이에 있었던 첫인사였다.

 

  사명당을 방안에 맞아들인 서산대사는 동자를 시켜 물그릇에 물고기 몇 마리를 넣어 사명당의 앞에 내놓으며 “우리들은 다 같이 불교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물고기는 먹지 못합니다. 그러나 도로 뱉어 놓아 이전대로 살려주면 아무런 탈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그 물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사명당도 그렇다면 나도 해보자고 하면서 물고기를 먹기 시작하였다. 잠시 후 서산대사가 물고기를 물그릇에다 다시 뱉어 놓으니 종전처럼 물고기가 다시 헤엄을 치고 있었다. 사명당도 그에게 지지 않으려고 애를 써서 물고기를 먹었다가 토했는데 그 물고기는 제 모양을 갖추기는 했지만 살아 움직이지는 못하였다.

 

  이처럼 첫 도술겨루기에서 서산대사에게 뒤진 사명당은 얼굴을 붉히면서 달걀 쌓는 내기를 해보자고 제기하였다. 동자가 달걀을 넣은 바구니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오자 사명당은 그 달걀을 꺼내서 밑에서부터 하나하나 쌓아 나갔다. 이를 바라보던 서산대사는 반대로 달걀을 공중에서부터 쌓아 내려갔다. 그러자 사명당은 속으로 ‘서산대사의 도술은 인간의 경지가 아니구나!’라고 탄복해 마지않았다.

 

  이러다 보니 어느덧 점심때가 되었다. 서산대사는 “이제 우리 점심이나 같이 먹읍시다.” 하면서 동자더러 점심을 차려오게 하였다. 잠시 후 동자는 “맛없는 국수지만 많이 드십시오.” 하면서 밥상 위에 내놓은 것을 보니 그것은 국수가 아니라 긴 바늘이었다. 그것도 놋쇠로 만든 그릇에 두둑이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점심상을 마주한 사명당이 머뭇거리자 서산대사는 넌지시 “시장하실 테니 어서 드시오. 여긴 외진 곳이라 이런 것밖에 없구려.” 하면서 맛있게 먹었다. 사명당은 도저히 젓가락을 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더 이상 서산대사와 도술겨루기를 할 자신이 없었던 사명당은 “대사님, 외람된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저는 지금까지 도술에는 제가 제일이라 생각했지만 이제부터는 대사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한평생 따르고자 합니다.”라고 하면서 그의 앞에 공손히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이후부터 사명당은 서산대사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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