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 속 이야기완주 송광사 법당 기둥
페이지 정보
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22.06.05 조회3,363회 댓글0건본문
상제께서 송광사(松廣寺)에 계실 때 중들이 상제를 무례하게 대하므로 상제께서 꾸짖으시기를 “산속에 모여 있는 이 요망한 무리들이 불법을 빙자하고 혹세무민하여 세간에 해독만 끼치고 있는 이 소굴을 뜯어버리리라” 하시고 법당 기둥을 잡아당기시니 한 자나 물러나니 그제야 온 중들이 달려와서 백배사죄하였도다. 그 뒤에 물러난 법당 기둥을 원상대로 회복하려고 여러 번 수리하였으되 그 기둥은 꼼짝하지 않더라고 전하는도다.(행록 1장 19절)
행록 1장 19절에는 상제님께서 송광사01에 있는 무례한 중들을 꾸짖으시며 법당의 기둥을 잡아당기시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요망한 무리들’이란 어떤 사람들일까? 그리고 상제님께서 완주 송광사에 있던 중들을 향하여 ‘요망한 무리들이 불법을 빙자하고 혹세무민하여 세간의 해독을 끼친다’고 꾸짖으신 까닭은 무엇일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 조선시대의 사회현상을 비롯한 불교계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불법을 빙자한 승려들의 문제는 조선 후기의 주목되는 사회현상 가운데 하나인 농민의 유망(流亡)현상과 관련이 있다. 농민들의 유망이란 생존 기반을 상실한 농민들이 생계를 확보하기 위해 거주지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을 말하는데, 광작(廣作)의 성행, 지주제(地主制)의 확대 등의 사회적 요인과 자연재해 등의 원인으로 인해 많은 빈농(貧農)과 몰락농민이 양산되었고, 이러한 농민들이 생계의 기반을 잃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현상은 시간이 흐를수록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특히, 순조(純祖, 재위 1800~1834) 이래 극성한 세도정치(勢道政治)와 삼정의 문란에 따른 수탈은 이러한 유민 발생을 가속화 했다. 권력을 독점한 세도가(勢道家)는 정권을 장악하고 뇌물을 바치는 자에게 관직을 주는 매관매직을 일삼았고, 돈으로 관직을 산 탐관오리는 투자한 돈을 되찾기 위해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 등의 제도를 사리(私利)를 채우는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그 수탈의 내용을 보면 전정에서는 토지를 가진 지주에게 부과되는 토지세를 갖가지 이유를 들어 소작농에게 전가하기도 했고, 군정에서는 태어난 지 3일 된 갓난아이까지 군적에 올려 군포를 받아내기도 하였다. 환곡은 굶어 죽는 민중을 구제하기 위한 제도인데 오히려 막대한 이자를 붙여 그것을 수탈하는 도구로 이용하였다. 이와 같은 삼정의 문란과 탐관오리들의 수탈로 인해 생활의 기반을 잃고 떠돌아다니던 농민들의 다양한 생존방식 중 하나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것이었다.02
▲ 안동하회마을 하회별신굿탈놀이 풍자대상이 된 승려와 양반, 선비
부세와 부역을 피하고자 출가한 승려는 조선 초부터 문제로 지적되어 그 수를 제한하기 위해 도첩제(度牒制)03를 실시하였다. 하지만 관리와 결탁하여 쉽게 도첩을 받을 수 있었고, 임진왜란 이후 피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도첩이 없는 승려를 한시적으로 승역(僧役)에 동원하면서 도첩을 발급하는 경우도 생기고,04 이와 같은 운영상의 문제가 발생하면서 도첩제는 도중에 폐지되었다. 게다가 조선에 있어 승과(僧科)에 관한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규정 역시 조선 말기까지 변동 없이 그대로 존속되었으나,05 승과의 폐지와 복구가 반복되며 사실상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이러한 가운데 전쟁에 참여한 승군(僧軍)의 공로가 인정되고 지도층의 불교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사원에 대한 면역ㆍ면세의 특권이 주어지고, 면역승(免役僧)의 수도 늘어나게 되었다. 열악한 사회적 환경과 느슨한 불교계의 통제 속에서 거의 모든 승려층이 국역을 수행하지 않는 계층이 되었고,06 사원은 군역(軍役)이나 기근(飢饉)에 내몰린 민중들의 피난처로 인식되면서 수행이 목적이 아닌 잡승과 무뢰배들이 흘러들어 사원에 머물게 되었던 것이다.
이긍익(李肯翊, 1736~1806)07은 『연려실기술』에서 조선 불교계의 실상에 대해 잘 묘사하고 있다.
“일없는 평민들이 공연히 마음 내키는 대로 사중(四衆)08이 되니, 아침에 평민이 되고 저녁엔 중이 되는 것이 조금도 어렵지 않다. 따라서 세상에서 죽을죄를 저지르고 도망한 자들이 절간을 목숨을 보전하는 소굴로 보고서 모습을 변화시켜 의복을 바꾸어 입으니, 알아볼 수가 없게 된다. 8도에 이루 셀 수 없게 많은 사찰이 모두 나라의 죄를 저지르고 도망간 무리의 잠복처가 되고 그 무리가 번성하여 호미를 찬 농부나 창을 멘 군졸보다도 많은데 모두 밭을 갈지 않고 옷감을 짜지 않아도 의식이 충족된다. 거사(居士, 남)ㆍ사당(舍堂, 여)도 그 수가 매우 많으며, 국내에 꽉 차서 동냥으로 직업을 삼고 좋은 옷에 배불리 먹고 지내니 민간에 폐해를 끼침이 말할 수 없으며, 병역을 기피하고 관청의 부역에 나오지 않고 종신토록 한 올의 실을 관청에 바치지 않으니 일의 절통한 것이 이보다 더 심함이 없다.”09
『승정원일기』 1884년의 기록에서도 19세기 출가승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승무(僧巫)의 무리가 온 나라에 가득하여 농사를 짓지 않고도 먹고, 베를 짜지 않고도 옷을 입으며, 괴상하고 망녕된 말로 혹세무민하여 풍속을 해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이리 완악한 풍습이 있으며, 이런 무리가 입고 먹는 것은 어디에서 생겨나는 것입니까?”
라고 하며, 괴상하고 망녕된 말로 혹세무민하며 놀고먹는 승려와 무당(또는 무속(巫俗)을 행하는 중)의 무리들이 풍속을 해치는 완악(頑惡)한 행태를 묘사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봉산탈춤이나 강령탈춤에 등장하는 먹중10은 거들먹거리며 등장하여 벽사의식(闢邪儀式)11을 행하며 사람들을 현혹하며, 양주별산대놀이에서도 승려는 여인을 농락하다 취발이에게 힐난(詰難)당하는 모습으로 묘사되는 등 조선 후기 승려들은 전통 가면극에서도 민중들에게 존경받지 못하고 풍자의 대상이 되고 있다.12
▲ 안동하회마을 하회별신굿탈놀이 여인을 농락하는 파계승마당
이와 같은 기록과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보았을 때, 조선 말기에는 잡승이나 무뢰배로서 정식으로 자격을 인정받지 않은 사람들이 사원에 머무르며 승려 행세를 했던 무리가 매우 많았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요망한 무리들이 불법을 빙자하고 혹세무민하여 세간에 해독만 끼친다’고 하신 상제님의 말씀에서 요망한 무리란 바로 사회적 혼란 속에서 당시 사원에 머무르면서 의식(衣食)을 탐하던 하등 승려의 무리들을 지칭하는 것이라 하겠다.
행록 1장 19절에는 상제님께서 송광사에 계실 때 중들이 상제님께 무례하게 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상제님께 무례하게 대했다는 것은 예의를 갖추지 않고 불량하게 대했다는 것이고, 요망한 무리들이 불법을 빙자하여 혹세무민했다는 말씀은 하등의 중들이 사람을 깔보아 기만한 것으로, 몽매한 대중의 불안한 심리를 이용하여 불법을 앞세우고 자신들의 욕심을 채웠다는 의미일 것이다. 상제님께서는 그들의 잘못을 깨우쳐 주고 그와 같은 행위를 더 이상 행하지 못하도록 하시고자 법당의 기둥을 잡아당기며 호통을 치셨을 것이다. 그러자 송광사에 있던 온 중들이 달려와서 상제님께 무례하게 대한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백배사죄하였다고 한 것이다.
01 완주 송광사는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송광리에 있는 종남산 기슭에 자리잡은 사찰이다.
02 변주승, 「조선후기 유민 생존방식의 일면」, 『전주사학』 8 (2004), p.198,
03 승려가 출가했을 때 국가가 허가증을 발급하여 신분을 공인하던 제도로 중종대에 폐지되었다.
04 민순의, 「徭役의 관점에서 본 조선 초 僧役의 이해」, 『종교문화비평』 39 (2021), p.332.
05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승과」.
06 손성필, 「16세기 조선의 정치 사회와 불교계」, 『동국사학』 61 (2016), p.159.
07 이긍익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다. 그는 벼슬을 단념하고 평생 『연려실기술』의 저술을 사업으로 삼았다. 『연려실기술』은 태조 이성계(재위 1392~1398)부터 18대 현종(재위 1659~1674)까지의 야사(野史)를 기록하였다.
08 비구승(比丘僧)·비구니(比丘尼)·우바새(優婆塞)·우바이(優婆夷).
09 김방룡, 「조선후기 미륵신앙의 형성과 전개」, 『한국불교사연구』 12 (2017), pp.232~233. 참조.
10 먹장삼을 입은 승려를 말하며, 봉산탈춤, 은률탈춤, 양주별산대놀이 등에 등장한다.
11 요망하고 간사한 귀신을 물리치는 의식.
12 김경나, 「한국 전통 가면극에 나타난 불교」, 《불교평론》, 2010. 01. 06.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