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 속 이야기서양의 문명이기(文明利器)와 창생의 편의
페이지 정보
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22.06.05 조회3,353회 댓글0건본문
근대 이후 서양에서는 천문학, 물리, 화학 등에서의 과학적 실험과 발견을 바탕으로 눈에 띄는 물질문명의 발전을 이루었다. 산업혁명이 일어난 이후 지속적인 연구개발로 증기선, 기차, 비행기 등 기계적 운송 장치들이 개발되었고, 특히 전기 및 전자기학의 연구성과를 토대로 발명된 전신, 전화, 전등, 전차 등은 일상생활의 판도를 크게 바꾸고 있었다. 서양 문물이 조선에 전해졌을 때, 서양 문물은 호기심 또는 적대감이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특히, 경부선 철도01가 건설(1901~1904)되던 시기에 전국 각지의 유생(儒生)들은 연기를 내뿜고 달리는 ‘괴물’ 같은 기차가 들어온다는 소식에 격렬하게 반발하기도 했다.02 이러한 서양 문물에 대해 상제님께서는 “그대로 두어 이용함이 창생의 편의가 될까 하나이다”라는 종도의 대답을 옳다고 이르셨다. 이와 관련하여 이 글에서는 당시 전등, 전차, 기차 등 서양의 문명이기가 조선에 전해지게 된 배경과 시대적 상황을 알아보고, 서양 문물과 관련된 상제님의 공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구한말 서양 문물의 유입
서양 문명의 이기(利器)가 비교적 일찍이 조선에 전해진 것은 고종(高宗, 재위: 1863~1907)의 서양 문물에 대한 적극적 관심이 큰 역할을 했다. 커피 애호가이자 곤룡포에 선글라스 낀 모습으로도 유명한 그는 쇄국정책을 고수하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과 달리 서양 문물의 도입을 통해 기울어가던 조선의 국운 회복을 꿈꾸었다. 고종은 부국강병의 의지를 담아 신식 군대 별기군을 창설(1881)하였고,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1882) 후,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 유길준 등을 보빙사(報聘使, 1883)03로 미국에 보내 서양 선진 문물을 배워 오도록 했다. 당시 미국은 전신(1837), 전화(1876), 전구(1879) 등 새로운 발명품이 주목받으며 급속한 발전을 이루던 시절이었다. 사절단은 미국 대통령과 2차례 회동하였고, 세계 박람회, 전기회사, 철도회사를 비롯해 소방서, 병원 등 공공기관을 시찰하며 선진 문물을 견학하였다. 이러한 보빙사의 미국 방문은 이후 국내의 우정국 설치, 경복궁의 전기시설 및 경인선 철도04 등을 건설하는 계기가 되었다.
▲ 고종의 어가, 선글라스 낀 모습,‘알렌이 본 19세기 말 조선’ 사진전, 2012.4.10~20, 연세의료원.
서양의 문명이기 중 당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은 것은 전등, 전화, 전차 그리고 기차였다. 조선 정부는 에디슨 전등회사에 발주하여 경복궁 안에 처음으로 발전소를 건립(1887)하였고, 그해 경복궁 안의 건청궁(乾淸宮)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전깃불을 밝혔다. 이러한 조명 설비를 갖춘 것은 중국이나 일본보다도 2년 앞선 일로서,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84) 등을 경험한 고종이 밤을 이용한 소요사태를 경계하여 궁궐 내 전등을 많이 켜 새벽까지 환하게 밝히도록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05 이뿐 아니라 정부는 경운궁(慶運宮)에 전화를 개설(1898)하였으며, 서울[당시 한성(漢城)]의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노선(서대문~종로~청량리)을 따라 처음으로 전차를 개통(1899.5)하여 운행하기 시작했다.
▲ 1899년 ‘전차 개통식’, 흥인지문 앞, ‘서울의 전차’ 사진전, 2019.12.20.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 B.
우리나라 최초의 전차가 개통되던 날, 고종 황제가 전차를 시승하였고 이를 보기 위한 인파가 몰리며 서울의 동대문과 종로 인근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듬해에는 전차의 야간 운행을 위해 종로의 전차 매표소 앞에 3개의 가로등이 처음으로 점등(1900)되어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06 당시 전차는 공중에 달린 전깃줄에 긴 쇠막대기가 이어져 번갯불을 번쩍번쩍 튀기며 달리는 모습으로 인해 ‘번갯불 먹는 괴물’ 또는 ‘쇠달구지’라 불리기도 했다.07 그리고 신분에 상관없이 전차를 타볼 수 있어 시골 사람이 어쩌다 서울의 전차를 한번 타고 오면 그 동네의 인기스타가 되어 밤새도록 이야기꽃을 피웠으며, ‘효도 전차계’08라는 계모임이 유행하여 부모님께 전차를 태워 드리는 것이 하나의 효도로 여겨지기까지 했다고 한다.
또한, 경인선 철도가 개통(1899.9)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화륜거(火輪車, 기차)가 인천 제물포와 서울 노량진 사이를 오가며 소달구지로 11시간 걸리던 거리를 1시간 40분 만에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한강철교가 건설(1900.7)되고 전차의 출발지인 서대문까지 철도가 연결(1900.11)되면서 인천에서 서울까지의 사람과 물자의 수송은 더욱 빠르고 원활해졌다.
서양 문물과 관련된 상제님의 공사
당시 서양 신문물에 대해 모두가 긍정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1845년 영국의 군함 샤마랭 (Samarang)호가 조선의 바다를 탐사하면서 전라도 서해에서 대포를 펑펑 쏘며 주민들을 위협하였을 때, 당시 그 지방의 수령은 “높은 굴뚝에서 검은 연기를 뿜으며 양 옆구리에 붙은 큰 물바퀴를 돌려 쏜살같이 달리는, 산채보다 큰 무쇠덩이 이양선이 화포를 쏘며 쳐들어온다.” 09라고 장계(狀啓)10를 올렸다. 이같이 이양선(異樣船)이라 불렸던 서양 군함의 출몰을 경험한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아직 서양 문물에 대한 적대감과 두려움이라는 선입견이 남아 있었다.
또한 서울에서 전차를 운행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린아이가 전차에 치여 사망하는 사건이 생기자 이에 항의하며 전차를 부수는 등 폭동이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전차 운행이 한동안 중단되기도 하였다. 그뿐 아니라 경부선 철도(1905.1.1. 개통)를 놓기 위해 토지를 매입하는 과정에서 헐값에 땅을 빼앗기게 된 토지 지주들의 반발이 거셌고, 조상님께서 잠들어 계신 선산 옆으로 괴물이 연기를 뿜고 지나간다, 혹은 지맥(地脈)을 끊는다는 등의 이유로 철도가 놓이는 것에 대한 지역 유생들의 반대가 그치지 않았다.11
이처럼 서양 문물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감정이 혼재하던 시기에 상제님께서는 서양 사람이 발명한 문명이기와 관련된 공사를 행하셨다.
상제께서 어느 날 경석에게 가라사대 “전에 네가 나의 말을 좇았으나 오늘은 내가 너의 말을 좇아서 공사를 처결하게 될 것인바 묻는 대로 잘 생각하여 대답하라” 이르시고 “서양 사람이 발명한 문명이기를 그대로 두어야 옳으냐 걷어야 옳으냐”고 다시 물으시니 경석이 “그대로 두어 이용함이 창생의 편의가 될까 하나이다”고 대답하니라. 그 말을 옳다고 이르시면서 “그들의 기계는 천국의 것을 본 딴 것이니라”고 말씀하시고 또 상제께서 여러 가지를 물으신 다음 공사로 결정하셨도다.12
1907년 이후의 일로 추정되는 이 공사에서 상제님께서는 서양 사람이 발명한 문명이기에 대해 “내가 너의 말을 좇아서 공사를 처결하게 될 것인바 … 잘 생각하여 대답하라”라고 말씀하신 후 “그대로 두어 이용함이 창생의 편의가 될까 하나이다”라는 차경석의 대답을 옳다고 이르시며 서양의 문명이기를 그대로 두는 방향으로 공사를 정하셨다.
이외에도 상제님께서는 “기차와 윤선으로 百만 근을 운반하리라.” 혹은 “운거(雲車)를 타고 바람을 제어하여 만 리 길을 경각에 왕래하리라.”13라고 하시며 앞으로 기차, 기선, 비행기가 문명의 이기로 널리 활용될 것을 말씀하시기도 하였다. 또한,
“앞으로 오는 좋은 세상에서는 불을 때지 않고서도 밥을 지을 것이고 손에 흙을 묻히지 않고서도 농사를 지을 것이며 도인의 집집마다 등대 한 개씩 세워지리니 온 동리가 햇빛과 같이 밝아지리라. 전등은 그 표본에 지나지 않도다. 문고리나 옷걸이도 황금으로 만들어질 것이고 금당혜를 신으리라”14
라고 하시며, 천지공사를 통해 펼쳐질 미래의 모습에 관해서도 언급하셨다. 위의 내용에서 불을 때지 않고 밥을 짓는 도구로는 오늘날 사람들이 널리 사용하고 있는 전기밥솥이, 흙 없이 농사를 짓는 것으로는 LED 조명과 물로만 농사를 짓는 혁신기술인 스마트팜15이 연상된다. 전기밥솥뿐만 아니라 생활가전(生活家電)이라 불리는 냉장고, 에어컨, 세탁기, 공기청정기 등의 다양한 제품들도 오늘날 많은 사람에게 생활의 편의를 제공하고 있으니 이 또한 상제님의 공사로 과학 문명이 지속해서 발전하여 이루어진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가는 말
서양의 문명이기에 대한 상제님의 공사 이후, 현대의 과학 문명은 눈부실 정도의 발전을 거듭하여 인류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생활의 편의를 누리고 있다. 온 가족의 세탁물을 직접 손으로 빨고 말려야만 했던 옛 주부들의 힘든 노동은 이제 찾아보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무더운 여름날, 사무실에서 에어컨을 쐬며 시원하고 쾌적한 근무를 하고, 인터넷을 통해 집에 있는 밥솥의 버튼을 눌러 밥을 미리 지으며, 말 한마디로 인공지능 스피커를 움직여 원하는 TV 프로그램을 볼 수도 있는 시대를 우리는 살게 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우리는 이마두(利瑪竇, 1552~1610)가 사후(死後)에 문명신(文明神)을 서양으로 데려가 발전시킨 서구 근대 문명이 물질에 치우친 까닭에 위기를 초래하였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더불어 과학 문명의 편의를 누리는 가운데서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도전님께서도 훈시하신 바와 같이 “물질 위주의 현세주의가 우리 생활의 풍토를 삭막하게 만들고 있으니, 물질적 성장만큼 중요한 정신적 성장을 이루어 나가는 것”16이다. 이처럼 정신문명과의 균형 속에서 물질문명을 발전시키는 것이 물질에 치우쳐 실패했던 서구 근대 문명의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는 길이며, 상제님께서 열어 주신 고도의 과학 문명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중요한 점이 아닐까 한다.
01 서울~대전~부산 432km 구간. 426만 명의 백성들을 동원하여 3년 6개월 만에 완공.
02 이동훈, 「공주, 110년 만에 철마가 달린다」, 《주간조선》 2341호, 2015.01.19 참조.
03 외국에 친선, 우호 및 교섭을 위해 파견하는 사절단.
04 ‘전등 및 철도 신설계획 요청’의 공문(1887.2)을 보내는 등 미국이 일찍부터 경인선 철도에 관심을 기울이던 가운데, 마침내 미국인 제임스 모스(James Morse)가 경인선 철도부설권(1896)을 얻어 착공(1897)하였으나, 일본이 이를 인수(1898)하여 다시 기공식(1899.4)을 하고 공사를 진행하여 완공(1899.9)하였다.
05 권홍우, 「1882년, 전기 시대가 열리다」, 《서울경제》 2017.09.04.
06 이성훈, 「1900년 4월 종로 불 밝힌 3개의 가로등」, 《조선일보》 2011.02.08.
07 황장석, 「근대의 풍경 20선, 경성상계」, 《동아닷컴》 2008.09.01. ; 홍남일, 「‘쇠 달구지’ 전차 이야기」, 《글로벌이코노믹》 2015.02.15 참조.
08 조두진, 「자동차 역사 110년, 한국이 달려왔던 길은」, 《매일신문》 2010.09.30.
09 편집부, 「근대 한국의 교통혁명 서양 증기선, 조선을 뒤흔들다」, 《자동차생활》 2004.08.17 참조.
10 지방의 신하가 관하의 중요한 일을 왕에게 보고하는 일.
11 변평섭, 「경부선 철도로 탄생한 대전…사실은 태전이었다」, 《충청투데이》 2019.01.24 참조.
12 공사 1장 35절.
13 예시 75절.
14 공사 1장 31절.
15 최정락, 「과학 그곳에서: 4차 산업시대의 농업 혁신, 스마트팜(Smart Farm)」, 《대순회보》 217 (2019).
16 《대순회보》 2호, 「도전님 훈시」 참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