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 속 이야기상제님의 행방을 찾아 나선 유덕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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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22.10.13 조회2,894회 댓글0건본문
▲ 시루산, 2018. 10. 21. 촬영
행록 1장 26절에는 1895년 상제님의 부친을 대신하여 상제님의 행방을 찾아 나선 유덕안(兪德安, 1860~1930)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다. 그는 동학농민운동 직후 상제님의 행방을 찾아 나섰다가 위험한 지경에 처하였으나 상제님의 덕화로 살아 돌아오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유덕안이 당시 얼마나 위험한 상황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재생하였는지를 분석하여 상제님의 덕화가 얼마나 신비로운 것인지를 확인하고 유덕안이 상제님에 대해 깊은 존경과 믿음을 가지게 된 연유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유덕안은 상제님보다 열한 살이 많았고, 그의 집은 상제님의 생가에서 모퉁이 하나를 돌면 바로 보일 정도로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전경』에는 이러한 상제님과 유덕안의 친분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일화가 언급되어 있다. 13세 때인 1883년 어느 날 상제님께서 모친이 짠 모시베를 팔러 가실 때 유덕안이 정읍장까지 동행하였는데,01 객망리는 강씨 집성촌이라 주변에 친척들이 많았을 것인데도 유덕안은 상제님 모친이 짠 모시베를 들고 정읍장까지 같이 갈 정도로 상제님과의 사이가 각별했던 것 같다. 당시 상제님은 모친의 모시베를 도난당하셨는데, 이 사건은 유덕안으로 하여금 상제님을 잘 살펴줘야 하는 동네 아우 정도로 생각하게 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이를 다시 찾아오신 상제님의 기지와 지혜에 대해서는 놀랐겠지만, 당시 이 정도의 일화는 설화로도 많이 전해지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후에도 유덕안이 상제님을 신인으로 우러러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덕안이 1895년 상제님의 부친을 대신하여 상제님의 행방을 찾아 나선 것도 비범한 동네 아우에 대한 걱정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상제님께서 3년 동안 주유하신 후 객망리 시루봉에서 공부하실 때 밤이 되면 간간이 유덕안의 집에 가서 쥐눈이콩 한 줌을 얻어 냉수와 함께 드시기도 하셨다는 일화는02 유덕안이 상제님을 대하는 마음이 많이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연하의 동네 아우님이 밤에 시루봉에서 내려와 본댁을 지나쳐 그의 집으로 와서 음식과 물을 달라고 하는 것은 당시 유덕안이 상제님에 대한 깊은 존경을 지니고 무조건적으로 신뢰하지 않았다면 상식적으로 통용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1895년 유덕안이 상제님의 덕화를 입어 구사일생하였던 일이 그의 마음을 크게 변화시켰음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는 유덕안이 겪은 구사일생의 경험을 여러 관점에서 보다 입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덕안이 상제님의 행방을 찾아 나서게 된 당시는 동학농민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관군과 일본군이 동학군뿐만 아니라 동학과 관련된 사람들의 색출이 진행되던 때이다. 그 시기 동학과의 연관은 곧 죽음을 의미할 정도로 그 토벌과 색출의 양상은 매우 철저하고 가혹하게 이루어졌다. 토벌대는 마을 곳곳마다 초소를 만들어 감시하고, 산에 불을 지르는가 하면 그물을 치듯 동굴 속까지 샅샅이 수색하는 철저한 소탕작전을 진행하였다.03 그 와중에 일반인이 동학군 혹은 동학 관련자로 오인당하여 죽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 상제님 강세지와 유덕안의 집
일본군은 이 과정에서 포획된 동학군을 고문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살상했으며, 시체를 소각하고, 심지어 마을 전체를 불태워버리는 극단적 방법을 동원하기도 했다.04 호남 일대의 동학농민군 토벌은 죽산부사(竹山府使) 겸 양호도순무영(兩湖都巡撫營)05 우선봉(右先鋒) 이두황(李斗璜, 1858~1916)이 맡았는데 그는 친일 성향이 강한 인물로 동학농민군을 추격하여 닥치는 대로 처형하였다. 이두황은 자신의 일기인 『양호우선봉일기』06에 토벌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길가에는 총과 창이 버려지고 밭두둑에 쓰러진 시신과 머리는 처참하게도 눈에 걸리고 발길에 채였다.”07 그 기록에 따르면, 이두황의 군대는 동학군을 도적의 무리와 동일시했으며, 이들이 인의도덕(仁義道德)을 파괴하고 양민의 곡식과 재물 등을 약탈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처형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토벌은 1896년까지 계속되었으며,08 이 시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는지는 지금까지도 정확한 숫자가 파악되지 않고 있으나, 박은식(朴殷植, 1859~1925)은 이 시기에 사망한 사람을 30여만 명이라고 하였다.09
▲ 용머리고개 임시 형장 터, 2022. 8. 1. 촬영
용머리고개 임시 형장
▲ 전주 완산과 용머리고개 일대(다음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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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으로 조선을 침략하려는 일본에 있어 동학농민군의 진압은 그 시작에 불과했다. 그러한 가운데 국내외의 정치적인 상황은 날로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유생들은 1895년 봄 동학농민운동이 평정되어 세상이 평온해졌음을 자축하는 시회(詩會)를 열었고,10 이런 상황을 지켜보시던 상제님께서는 이때 비로소 광구천하(匡救天下) 하실 뜻을 두셨다.11 상제님께서는 이해 5월이 되어 객망리 본댁을 떠나셨으나 가신 곳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후 관군의 토벌이 계속되자 상제님의 부친께서는 불안한 시국에 집을 떠나 소식이 없는 상제님의 안위가 걱정되어 날마다 노심초사하며 지내셨다.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유덕안은 상제님의 부친을 대신하여 상제님을 찾아 나서기로 하였다. 상제님의 행방을 찾아 나선 유덕안은 객망리를 떠나 태인면 강삼리(현재 태인면 궁사리)를 지나려 할 때 관군에게 의병으로 몰려 체포되었다.
▲ 유덕안의 이동 경로(다음 지도)
당시 의병 혐의가 있는 사람은 재판 없이도 마구 처형할 수 있는 비상시국이었다. 의병과 유덕안은 체포된 태인면 강삼리에서 30km 거리의 전주 용머리고개까지 끌려왔다. 여기서 기적적인 상황이 한번도 아니고 연이어서 전개되었다.
첫째는 용머리고개 임시 형장에서 의병 두 명이 먼저 처형되고 유덕안의 차례가 되었을 찰라,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갑자기 천둥 번개가 번쩍이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관군들이 겁을 먹고 도망치게 된 것이다. 관군들이 겁을 먹을 정도의 천둥 번개와 비라면 어느 정도일지 짐작할 수 있다. 유덕안 역시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는 사실도 이를 잘 보여준다.
둘째는 어두워 질때까지 억수 같은 비가 계속되어 관군들이 돌아오려야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30km를 끌고 온 유덕안을 관군들이 쉽게 포기할 리는 없었지만 계속된 비로 관군들은 어두워질 때까지 돌아올 엄두도 내지 못한 것이다.
셋째는 쏟아지는 빗속에서 간신히 정신을 차린 유덕안이 어둠 속에서 비치던 등불을 따라가다 보니 산중이었다는 사실이다. 빗속의 등불도 이상하지만 대개 등불을 따라가면 사람이 사는 마을이나 집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하지만 유덕안이 정신을 차려보니 등불은 온데간데없는 산중이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기에 유덕안은 이를 호랑이의 눈에서 나온 빛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유덕안이 동네나 민가로 가게 되었다면 탈출한 동학도로 여겨져 다시 체포되어 처형되었을 가능성이 컸지만 불빛이 그를 산중으로 이끌었기 때문에 이를 피할 수 있었다.
무시무시한 천둥 번개, 계속된 억수 같은 비, 기이한 등불의 인도라는 일어나기 어려운 연속된 기적 끝에 유덕안은 포박을 풀고 재생의 기쁨을 안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자신의 구사일생에 대해 기이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유덕안에게 얼마 후에 홀연히 객망리로 돌아오신 상제님께서 “험한 시국에 위급한 환경을 당하여 고통이 많았도다.”라고 하며 그를 위로하시니 유덕안은 겪었던 모든 일을 상제님께서 지켜보셨으며 자신의 재생이 상제님의 덕화였음을 굳게 믿게 되었을 것이다.12 아마도 이후에 유덕안은 상제님을 신인으로 여기고 펼치시는 어떠한 일에도 거의 무조건적인 신뢰를 지니고 협조하였다고 볼 수 있다.
유덕안은 가족 같은 정으로 부친을 대신하여 상제님의 행방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동학도로 몰려 처형될 위기 상황에서 상제님의 덕화로 재생되어 돌아올 수 있었다. 이 일화는 유덕안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살아 돌아온 일을 계기로 그가 상제님을 굳게 믿고 따르게 되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이에 더하여 이 일화는 우리에게 누구나 상제님을 향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상제님께서는 그를 덕화로 늘 살펴주신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다.
01 행록 1장 14절 참조.
02 행록 2장 8절 참조.,
03 김종익, 『번역 오하기문』 역사비평사, 1994, pp.308~309.
04 손기영, 「실패국가, 실패 패권, 근대국가의 홀로코스트 삼중주」, 『일본공간』 24 (2018), p232 참고.
05 1894년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조직된 지휘부.
06 한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타베이스, 동학농민혁명자료총서, 「양호우선봉일기」(https://www.history.go.kr):
「양호우선봉일기」는 갑오동학운동의 진압군이었던 장위영의 군영일지로서, 당시 장위영의 지휘관이었던 이두황이 작성하였다. 당시 진압군이 동학군을 어떻게 보았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들을 진압하였는지를 생생하게 보여 주며, 관군이 동학군을 진압하는 과정에 대한 세부적인 사실들을 알 수 있게 하는 자료이다.
07 이두황, 양호우선봉일기(兩湖右先鋒日記)』제2권, 1894년 11월 17일: “委道之銃鎗沿疇之屍首掛於眼而蹴于足于.”
08 박은식, 「갑오동학당의 대풍운」,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상, (경기도: 서문당, 1972). p.11. “이 변란통에 사망자가 30여 만 명이나 되었으니 미증유한 유혈의 참상이다.”
09 손기영, 「실패국가, 실패패권, 근대국가의 홀로코스트 삼중주」, 동북아역사재단, 2018.
10 행록 1장 24절 참조.
11 행록 1장 25절 참조.
12 행록 1장 26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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