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 속 이야기전주(全州)의 상제님 성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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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22.12.10 조회2,861회 댓글0건본문
전주(全州)는 상제님께서 강세하신 전라도(全羅道)의 중심지로 오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곳이다. 언뜻 상제님께서 정읍, 태인 등지에서 주로 활동을 하신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전라북도 여러 지역을 두루 다니셨다. 특히, 이곳 전주지역에서 중요한 행적을 남기시어 의미 깊은 성적지(聖蹟地)들이 남아 있다. 중요 성적지인 금산사, 동곡 약방, 대원사가 지금은 김제시나 완주군의 관할지역이지만 상제님 재세 시는 모두 전주지역에 속했으며, 이외에도 불가지(佛可止), 신령(神嶺), 관성묘(關聖墓), 용머리고개 등이 전주의 지명으로 나타난다.
상제님께서는 천지공사를 행하시는 데 있어, 지역의 지명(地名)이나 풍수지리적인 물형(物形)을 근거로 공사를 행하신 사례가 많은데, 이는 지명이나 물형에 내재된 기운이나 역사적 관련성 또는 의미의 상징성을 쓰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정음정양(正陰正陽)의 새로운 운기가 전 우주로 퍼지도록 상제님께서는 천하음양신(天下陰陽神) 전주운회(全州運回)의 공사를 보셨다.01 전주에는 만사만물(萬事萬物)이 생성될 수 있는 음양이 한곳에 모인 건지산(乾止山)과 곤지산(坤止山)이 있다.02 건지산은 전주의 주산이며, 곤지산과 인접한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완산칠봉도 있어 그 풍수지리적 의미도 살펴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100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탓에 상제님 재세 시에 형성했던 전주의 모습은 달라져 많이 변모했지만, 상제님의 발자취가 서린 곳으로 지명의 유래와 함께 전주를 살펴보고자 한다.
전주의 유래와 역사
전주는 삼한시대 마한(馬韓)의 영토였으며, 백제가 이 땅을 영유하면서 완산(完山)이라 칭하였다. 그 후 통일신라 시대인 756년(경덕왕 15)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완산’에서 ‘전주(全州)’로 개칭되었다. 고려 시대에 와서 1018년에는 순의군(順義軍), 1392년에는 완산유수부(完山留守府)라는 다른 지명으로 불리다가, 조선 시대에 이르러 1403년 다시 전주로 불리게 되었다. 그 이름이 고착되어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전라도의 천 년 역사의 중심지인 전주는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오랫동안 호남에서 가장 큰 도시로서 그 역할을 해왔고, 조선 제일의 곡창지대에서 나오는 풍부한 물산과 사통팔달로 이어진 교통의 요지였으며, 상제님 재세 시에는 한양, 평양을 이은 조선의 3대 도시로 정치ㆍ경제ㆍ문화의 중심지였다.03 조선 시대에는 전라도와 제주도를 관할했던 전라 감영(監營)의 소재지였는데, 감영은 오늘날의 도청(道廳)에 해당하는 곳으로 관찰사가 그 지방의 경찰권ㆍ사법권ㆍ징세권 등 행정상의 업무를 보는 관아였다. 전주가 행정구역의 중심지인 동시에 많은 물류가 유통되고 시장 경제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호남지역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였으니, 호남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중국 상인이나 다른 지역의 사람들까지도 전주로 모여들었다고 한다.
천년고도(千年古都)로서 전주의 역사는 후백제에서 시작된다. 일찍이 견훤이 세운 후백제의 왕도(王都, 900년에 전주를 도읍지로 함)로 자리하였고, 오백 년 역사를 이끈 조선의 창업 군주 태조 이성계의 본향(本鄕)으로, 태조의 고조부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 ?~1274)가 동북면(東北面: 지금의 함경도)으로 이주해 갈 때까지 선조들이 대대로 이곳에 살았던 까닭에 조선왕조의 발상지 또는 풍패지향(豐沛之鄕)04으로 추앙되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지질(紙質)이 부드럽고 빛깔이 은은하여 우수한 품질로 인정받는 전주 한지(韓紙)가 고려 시대부터 임금에게 올리는 문서와 대부분의 외교 문서에 사용되었으니,05 전주는 한지의 생산지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지금의 전주시 다가동 우체국과 완산교 사이의 서문장에는 한약재가 거래ㆍ유통되는 약령(藥令)시장이 함께 개설되었는데, 전주 약령시는 대구 약령시와 함께 조선의 2대 약령시장으로 명성을 얻기도 하였다.06
전주의 풍수지리
전라도의 중심지로서 오랫동안 역할을 해 온 전주의 산천(山川)과 마을 지명은 어떤 특별함을 지니고 있을까? 먼저 공사 3장 39절에는 상제님께서 공사를 행하시며 쓰셨던 글에 대한 소개가 나타나 있는데, 그중 “천하음양신 전주운회(天下陰陽神全州運回)”라는 글귀는 전주에 있는 건지산(乾止山), 곤지산(坤止山)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07
▲ 건지산과 곤지산 위치 (출처: kakao map)
풍수지리에서 진산(鎭山)이라 하면 ‘도읍지나 각 고을에서 그곳을 지키는 주산(主山)으로 정하여 제사하던 산’을 의미하며, 주로 도읍지나 고을 북쪽에 위치하여 보행인이나 그 마을 외부인들에게 마을의 위치를 알리는 역할을 하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08과 『완산지(完山誌)』 09 등의 옛 문헌에 따르면 건지산이 전주의 진산이다. 건지산은 지금의 전북대학교 인근 북쪽에 위치한다. 이곳에는 조선 왕실의 시조 이한(李翰)10의 묘역을 기념하고 그에 대한 제사를 거행하기 위한 조경단(肇慶壇)이라는 제단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를 북두칠성 제1성 탐랑(貪狼) 기운이 조경단으로 출맥(出脈)한 군왕지지(君王之地)의 형국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11 이러한 건지산으로부터 약 6km 거리의 남쪽에 곤지산이 있으니, 전주시청을 가운데에 두고 두 산이 전주의 중심지역 위와 아래에 각각 자리 잡은 형국을 보여준다.
이 산들의 이름 속에, 주역 팔괘의 대표적인 괘로서 건(乾)은 ‘하늘’의 뜻으로 순양(純陽: 순수한 양)을 상징하며, 곤(坤)은 ‘땅’의 뜻으로 순음(純陰: 순수한 음)을 상징한다. 따라서 상제님께서 ‘천하음양신 전주운회’라는 글귀를 쓰실 때, 건지산과 곤지산이라는 음양을 상징하는 이름을 가진 산을 근거로 하여 공사를 행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특히, 진안의 마이산이 음양이 상합한 세계 유일의 부부봉(夫婦峰)으로 음양산(陰陽山)이라고도 불리는 까닭에, 조선 후기 전주지역을 소개한 『완산지(完山誌)』12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건지산의 산줄기가 진안현 마이산으로부터 내려와 연결된다는 점은 더욱 흥미를 끄는 대목이다.
이외에도 전주에는 곤지산 인근에 완산칠봉이 있다. 완산칠봉은 최고봉인 장군봉으로 시작해서 북두칠성의 국자 모양으로 일곱 봉우리가 연결되어 있어 풍수지리적 해석으로 북두칠성을 상징한다. 이와 함께 전주에는 삼태성(三台星)의 이름에서 유래한 삼태(三台)마을13이 있다. ‘삼태’라는 명칭은 삼원(三垣: 북쪽 하늘 중심에 있는 자미원, 태미원, 천시원 등의 별자리군) 중 태미원(太微垣)에 있는 삼태성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는데, 그 역할은 ‘사람의 운명과 복록을 배달하는 북두칠성을 보좌한다’라고 한다. 14 우리 주문의 신장주(神將呪)와 『전경』 교운 2장 42절의 개벽주(開闢呪)에도 ‘삼태칠성제대신장(三台七星諸大神將)’으로 묶어서 등장함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전주에 북두칠성과 북두칠성을 보좌하는 삼태성을 상징하는 지명이 함께 존재한다는 점이 주목되며, 이로 인해 풍수가들은 전주의 터를 일컬어 ‘우주를 담은 천기(天器)’라고 말하기도 한다.15
또한 전주는 용(龍)과 깊은 관련이 있는 곳이다. 전주의 터는 전주천(全州川)의 숫용과 삼천(三川)의 암용이라는 두 마리의 큰 용을 품고 있어 상서로운 기운을 가지며, 이와 더불어 새끼 용들이 여기저기 머물러 있다고 한다.16 그런 탓인지 전주에는 덕진구 용정동(龍亭洞), 완산구 용복동(龍福洞), 금암동 용산평(龍産坪), 삼천동 용산리(龍山里), 여의동 용정리(龍井里), 효자동 구룡리(九龍里), 용머리 고개[龍頭峙] 등 유달리 용(龍)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지명이 많다.
특히, 『전경』에 따르면 용머리 고개를 동학혁명 당시 임시 형장으로 사용하였다고 하며, 또한 상제님께서 용머리 고개의 주막에서 아전과 일진회가 서로 화해하도록 하신 공사를 행하기도 하셨다.17 그곳에는 전주천에서 천년을 자란 용이 전주천의 물을 모조리 삼키며 승천하려 했으나 천년에 하루가 모자라서 그만 떨어지고 말았다는 전설이 전해지는데, 그때 용의 머리가 떨어진 곳이 바로 용머리 고개라고 한다.18 이 용머리 고개는 훗날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전주의 왕기(王氣)를 끊으려고, 해당 자리에 도로를 개설하고 확장하는 도시계획을 통해 풍수적 의미에서 완산칠봉의 용(龍)의 목을 잘라낸 탓에 그 상서로운 기운이 쇠약해졌다는 구전이 전해지기도 한다.19
▲ 용머리고개 임시 형장 터, 2022년 8월 1일 촬영
전주의 행정구역과 성적지(聖蹟地)
상제님께서는 전주를 빈번하게 왕래하시면서 천지공사를 행하시기도 하고, 여러 종도를 만나시기도 하셨다. 이러한 상제님의 성적(聖蹟)과 관련하여 당시 전주의 행정구역20이 어느 지역을 포함하였는지 먼저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전경』에 “상제께서 신축(辛丑)년 五월 중순부터 전주 모악산 대원사(大院寺)에 가셔서…”21와 “부모산은 전주 모악산(母岳山)과 순창(淳昌) 회문산(回文山)이니라.”22, 그리고 “전주군 우림면 동곡(全州郡雨林面銅谷) 뒷산에 있는 학선암(學仙庵)으로 가셨으나…”23라고 표기되어 있다. 모악산 금산사와 동곡 약방이 지금은 전북 김제시 금산면에, 대원사는 전북 완주군 구이면에 속해 있다. 하지만 모악산 금산사는 최제우에게 천명과 신교를 내리신 1860년 당시를 기준으로 한다면 전라도 전주부 금구현(金溝縣) 수류면(水流面)24에 속했고, 모악산 대원사 역시 대원사 공부를 하신 1901년을 기준으로 전라북도 전주군 구이면 원기리(元基里)25에 속했으며, 1908년에 지어진 동곡 약방은 전라북도 전주군 우림면 동곡리(銅谷里)26에 속했다. 즉, 이 세 곳 모두가 상제님 재세 시에는 전주지역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전주에서의 상제님 성적(聖蹟)의 내용을 살펴보자. 교운 1장 9절에 언급되어 있듯이 상제님께서는 “천하를 대순(大巡)하다가 이 동토(東土)에 그쳐 모악산 금산사 삼층전 미륵금불에 이르러” 30년을 지내시다가 최제우에게 천명과 신교를 내리셨다. 이후 최제우가 천명과 신교의 참뜻을 밝히지 못하자 직접 강세하셨으니, 천하를 대순하시다가 영(靈)으로 임어(臨御)하신 자리가 바로 이곳이었으며, 인간의 몸으로 현신(現身)하시기 전까지 머무르신 곳이 바로 금산사였다.
▲ 금산사, 2018년 11월 10일 촬영
또한 1901년(辛丑) 5월에 상제님께서 전주 모악산 대원사에서 주지승 박금곡(朴錦谷)에게 조용한 방 한 간을 마련케 하고, 49일 동안 불음불식으로 천지대도(天地大道)를 여시는 공부를 하셨다.27 이곳을 다녀가신 도주님께서 대원사를 일컬어 천지신명을 심판한 곳이라고 말씀하셨다.28 대원사에서의 공부를 마치신 후, 상제님께서는 그해 겨울 객망리 본댁에서 행하신 9일 동안의 공사가 천지공사의 시작점이었다.29 따라서 대원사 공부는 천지공사를 시작하기 위한 사전 준비로서, 천지신명을 심판하신 신명 공사로 이해된다.
▲ 대원사, 2018년 11월 9일 촬영
그뿐만 아니라, 상제님께서는 구릿골[銅谷]에 약방을 차리셨는데, 1908년 전주 부호 백 남신으로부터 돈 천냥을 받으신 후, 목수 이경문(李京文)을 불러 약장과 모든 기구의 크기와 만드는 법을 일일이 가르치고 기한을 정하여 짓도록 하셨다.30 동곡 약방은 만국의원 공사(萬國醫院公事), 대두목 공사 등 중요한 천지공사가 행해진 곳이다, 약방을 수리하실 때 고부 두승산에 있는 선인포전(仙人布氈)이라는 대혈(大穴)의 기운을 쓰기도 하셨으며, 1909년 6월 상제님께서 화천하신 장소이기도 하다.
이렇게 상제님께서 30년 동안 영으로써 임어(臨御)하셨던 모악산 금산사, 천지공사를 시작하시기에 앞서 천지신명을 심판하신 대원사, 만국의원공사를 행하신 동곡 약방 등 중요 성적지(聖蹟地)가 모두 전주(全州) 지역에 자리하였으니, 전주는 상제님께서 강세하신 전라도의 중심지이자 천지공사를 행하신 중요 지역의 하나로 주목된다.
이외에도 지금은 완주군에 속하지만, 당시에는 전주군에 속했던 이서면(伊西面)의 불가지(佛可止)와 신령(神嶺)31이라는 곳 역시 “불가지(佛可止)는 불이 가히 그칠 곳이라는 말이오. 그곳에서 가활 만인(可活萬人)이라고 일러 왔으니 그 기운을 걷어 창생을 건지리라”32고 말씀하셨듯이 전주의 불가지가 가진 가활 만인의 기운 역시 의미가 깊다고 생각한다. 우리 주문의 운장주(雲長呪)와 해마주(解魔呪)에 ‘관운장(關雲長)’이 등장하는데, 전주가 관성제군을 모시는 관성묘(關聖廟)33를 갖추고 있다는 점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처럼 상제님의 발자취가 남겨진 중요 성적지가 전주에 다수 속해 있었던 점을 고려할 때 전주가 ‘완전한 고을, 온전한 고을’로 불리듯이, ‘부족함 없는 완전체’로서 그 무언가를 갖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가는 글
지금까지 살펴본바, 전주는 후백제 시기부터 오랜 역사와 문화의 숨결이 서린 천년고도이자, 조선 시대 3대 도시로서 전라도의 행정과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상제님의 중요 성적지인 금산사, 대원사, 동곡 약방이 재세 당시 모두 전주지역에 있었다는 점은 주목되는 사실이다. 또한, 전주가 ‘천하음양신전주운회’ 공사의 근거지로 생각되는 건지산(乾止山)과 곤지산(坤止山)을 갖추고 있고, 우주의 천체(天體)인 북두칠성과 삼태성의 이름과 관련된 마을이 존재하며, 만국의원공사를 행하신 동곡 약방에 걸맞게 약령시가 크게 열렸던 곳이라는 점도 특징적이다. 이처럼 전주는 상제님의 강세지인 전라도의 중심지로서 천지공사에서도 그에 걸맞는 중요한 발자취가 남아 있는 의미 있는 곳이라 생각된다.
01 김홍철, 「여성해원공사의 심층적 의미」, 《대순회보》 12 (1989), p.9.
02 장병길, 『증산종교사상』, (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1976) p.50.
03 조규제, 「전주성의 사문, 서천교, 용머리고개(용두치)」, 《대순회보》 163 (2014), p.29 참조.
04 중국 한나라를 건국한 유방의 고향으로 왕조의 고향을 빗대어 일컫는 말.
05 한국문화관광콘텐츠개발 외 2인, 「전주 한지」, 『지역 특산물을 찾아가는 체험여행』 (서울: 한국지역진흥재단, 2009) 참조.
06 김종량, 「‘전주약령시 한방엑스포’ 17일 개막」, 《연합뉴스》 2008.10.17 참조.
07 「천하음양신 전주운회(天下陰陽神 全州運回)」, 《대순회보》 19 (1990) 참조.
08 『신증동국여지승람』 卷之33, 「全州府, 山川」, “乾止山, 在北六里, 鎭山.”
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완산지」, “작자와 편찬 시기(조선 후기 추정) 미상이나 고종 때 발간된 『호남읍지』의 저본으로 사료가치가 크며, 전주지역의 지방제도, 인물, 지리 등 풍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10 전주 이씨의 시조로 신라 말 사공(司空) 벼슬을 했다고 전해지며, 그의 22세손이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이다. 그의 무덤이 전주 건지산에 있어 조선 왕실로부터 보호받았다고 한다.
11 김상휘, 『풍수담론1-모악산 평설』 (서울: 계산문예, 2015), pp.44~45.
12 『완산지(完山誌)』 卷上,「山川」, “乾止山, 自鎭安縣馬耳山來爲府之鎭山, 在府北十里.”
13 삼태마을은 지금은 완주군 이서면 상개리에 속해 있지만, 1934년 이전에는 전주군에 속했던 곳이다.
14 차선근, 「칠성주의 문곡과 육순」, 《대순회보》 237 (2020), p.82.
15 김상휘, 앞의 책, p.20.
16 같은 책, p.23.
17 행록 1장 26절, 행록 3장 14절.
18 전주시청, 「명칭유래 - 용머리고개」, 《전주시청 홈페이지》, 2007.11.11.
19 김상휘, 앞의 책, pp.114~116.
20 조선은 개국 이후 전국을 8도로 행정구역을 정비하였고, 전주는 중앙으로부터 전라도 관찰사가 파견되어 5군 11현을 관할하는 감영 소재지로서 전주부(全州府)라 칭하였다. 1895년 8도제를 폐지하고 23부(府)제로 개편하였으며, 지방 행정구역을 총 337개의 군으로 단일화하고, 이를 23부 아래에 분속시켰다. 다음 해 1896년 아관파천 이후 조선의 지방제도는 23부제에서 한성부와 13도로 개편되면서 전라도가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로 바뀌었다.
21 행록 2장 12절.
22 공사 3장 6절.
23 행록 1장 21절.
24 종단역사연구팀, 「수류면(水流面), 용화동, 환평리」, 《대순회보》 156 (2014), pp.37~38.
25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완주군」, “구이면은 원래 전주군 관할이었으나, 1935년에 전주군 전주읍이 전주부로 분리ㆍ승격되면서 전주군이 완주군으로 개칭되었고 구이면은 완주군에 편입되었다.”
26 교무부, 「2013년 종단역사사진전 (2) 상제님」, 《대순종교문화연구》, 2017.02.01.
27 행록 2장 12절 참조.
28 교운 2장 21절 참조.
29 공사 1장 1절 참조.
30 공사 2장 7절 참조.
31 신령(神嶺)은 이서면에 있는 불가지 인근의 고개의 이름이다.
32 예시 54절; 교운 1장 24절 “전주 이서면 불가지(全州伊西面佛可止) 김 성국(金成國)의 집”.
33 전주의 관성묘는 고종 32년(1895) 전라도 관찰사 김성근(金聲根)과 남고산성을 책임지던 무관 이신문(李信文)이 제안하여 각 지역 유지의 도움을 받아 건립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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