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절 신명우수(雨水) 절후를 관장하는 방현령(房玄齡)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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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1.21 조회5,298회 댓글0건본문
▲ 방현령(房玄齡)
태종이 신하들에게 “나라를 세우는 것과 전대(前代)의 법을 이어 나라를 잘 다스리는 것, 이 중에 어느 것이 더 어려운가?”라고 물었다. 이른바 창업(創業)과 수성(守城)에 관한 질문이었다.
방현령이 대답했다. “바야흐로 나라가 교체될 때에는 군웅(群雄)이 각축전(角逐戰)을 벌이게 되고 이 싸움에서 지면 항복해야 합니다. 군웅들과 싸워 승리하지 못하면 창업할 수 없으니 창업이 어렵습니다.”
위징[魏徵, 입춘(立春) 절후를 관장]이 대답했다. “임금은 세상이 어지러울 때 일어납니다. 이 어지러운 틈에 어리석고 잔악한 이들이 세상을 뒤덮는 것은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천하를 평정하고 나면 교만(驕慢)과 안일(安逸)에 빠지게 됩니다. 백성들이 안정을 바라지만 부역(賦役)으로 그들을 괴롭게 하고 세상이 피폐한데도 가혹한 세금으로 그들을 더욱 곤궁케 하여, 이로써 나라가 쇠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라를 잘 다스리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태종이 말했다. “방현령은 나를 따라 천하를 평정하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구사일생(九死一生)의 위기를 겪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라를 세우는 것이 어렵다고 본 것이다. 위징은 천하가 평안해져 부귀하게 되면 교만해지고 교만해지면 위태로워지고 위태로워지면 망하게 되니 잘 다스리는 것이 쉽지 않다고 본 것이다. 나라를 세우는 일이 어렵다 해도 그것은 이미 지나간 일. 이제 그대들과 더불어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신중히 하리라.”
마침 방현령을 비롯한 공신들에게 대대로 세습(世襲)할 수 있는 벼슬을 하사했다. 이때 현령에게는 송주자사(宋州刺史)라는 벼슬을 내렸고 다시 양국공(梁國公)에 임명하려 했는데 신하들이 벼슬을 세습하는 일을 반대함으로 자사 벼슬은 폐하고 양국공에만 임명했다.
얼마 되지 않아 방현령은 태자를 보좌하는 소사(少師)가 되었는데 동궁(東宮)에 처음으로 가니 태자가 절을 하고자 했다. 현령이 사양하며 감히 태자를 알현(謁見)하지 못하니 태자가 절하기를 그만두었다. 이 사례로 알 수 있듯이 장차 다음의 임금이 될 태자에게도 방현령은 어려운 인물이었다. 방현령은 당의 창업과 태종의 즉위에도 큰 공로를 세웠고 재상(宰相)의 자리에서 15년을 지냈다. 또한 그의 딸은 왕비가 되었다. 방현령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임금의 총애와 권세가 극에 달했다고 여겨 여러 번 사퇴의 뜻을 비쳤으나 태종은 승낙하지 않았다. 태종은 방현령의 사퇴를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사공(司公)으로 진급시켜 조정의 일을 총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현령이 굳이 사양하니 태종이 말하길 “사양(辭讓)이란 미덕(美德)임에 틀림없지만 국가가 오래도록 아끼고 의지해 왔는데 하루아침에 좋은 보필을 잃으니 마치 양손을 잃은 것과 같소. 짐이 보건데 공은 아직 근력(筋力)이 남아 있으니 그리 심하게 사양하지 마시오.”라고 했다.
진왕(晉王)01이 태자가 되자 태자(太子) 태부(太傅)가 되어 문하성(門下省)의 일을 살폈다. 방현령이 모친상을 당하자 임금이 묘지로 소릉(昭陵) 동산을 내렸다. 그리고 태종은 방현령이 상(喪)을 마치고 다시 그 자리에 복귀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또한 방현령이 노년(老年)에 병이 많으니 태종이 그로 하여금 누워서도 정사(政事)를 처리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런데 그가 더욱 야위어 가자 가마를 타고 궁궐에 들어오는 것도 허락하였다. 태종이 방현령의 야윈 얼굴을 보고 눈물을 흘리니 현령 또한 감격하여 울었다. 태종은 명의(名醫)로 하여금 돌보도록 하고 조금이라도 차도가 있다 하면 기쁜 빛을 감추지 못했다.
태종이 고구려 정벌에 나설 때 그에게 수도 경비를 맡게 했다. 태종이 말하기를 “공이 소하(蕭何)의 역할을 할 것이니 짐은 서쪽을 염려치 않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이로써 수도 경비는 물론이거니와 원정군의 양식과 무기, 수레와 군대의 행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방현령이 총괄하게 되었다.
그러나 방현령은 고구려 원정에 극력 반대했다. 그는 수차례 글을 올려 적을 가벼이 보지 말 것을 주장하며 고구려 원정에 반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방현령이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길 “이제 폐하께서는 고려(高麗)02를 토벌해야 할 만한 부득이한 사정이 없음에도 고려를 정벌하겠다는 마음을 꺾지 않으십니다. 폐하께서 노기(怒氣)를 나타내실까 두려워 군신(群臣)들이 감히 이 고려 원정에 반대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때에 말씀드리지 않는다면 현령은 죽어서도 부끄러움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상소(上疏)를 올렸다.
폐하께서는 예로부터 중국에 신하노릇을 하지 않던 자들도 모두 신하로 만드셨습니다. 폐하께서는 예로부터 다스려지지 않던 자들도 모두 다스리고 계십니다. 이제 중국(中國)의 근심은 더 이상 돌궐(突厥)과 같은 북방민족의 침입이 아닙니다. 변방의 크고 작은 칸[汗]들이 차례로 항복하여 변발을 풀고 칼을 차고 변방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고려(高麗)만은 역대로 명령을 내렸음에도 다 토벌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폐하께서 고려가 신하로서 임금을 시해(弑害)한 죄를 문책하시기 위해 몸소 육군(六軍)을 거느리고 그 먼 곳까지 군대를 진군시키신다면 열흘이 못되어 요동(遼東)을 정벌하실 것이요, 포로 수십만을 잡으실 것이며 그렇게 되면 나머지 무리들은 기가 죽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폐하의 업적은 전대(前代)의 배(倍)가 되실 것입니다.
그러나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나아감과 물러남, 존속함과 망함을 알아 그 바름을 잃지 않는 자는 오직 성인뿐이련가.”라고 하였습니다. 무릇 나아갈 때에도 물러나야 할 때가 있는 것이며 존속할 때에도 망할 틈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제가 폐하를 위해 애석하게 생각하는 점입니다. 전(傳)하는 말에 “족(足)한 줄을 알면 욕(辱)되지 아니하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라고 하였습니다. 폐하의 명성과 업적은 이미 족하다고 할 수 있고, 땅을 개척하여 국경을 넓히는 것 또한 그칠 때가 되었습니다.
고려와 같은 변방의 오랑캐들은 인의(仁義)로 대하기에는 부족하니 상례(常禮)로 문책하시면 됩니다. 그러기에 옛 사람들은 이들을 짐승이나 물고기 기르듯 하셨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들을 절멸(絶滅)시키려 하신다면 궁지에 몰린 그들은 죽음으로써 저항할 것이니 이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사형(死刑)을 판결하실 때에 여러 번 상황을 진술케 하시고 거듭 자세히 살피셨습니다. 그리고 이때는 기름진 음식을 피하시고 음악도 멈추도록 하셨으니 이는 인명(人命)의 귀중함을 절감하셔서 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어찌하여 아무 죄도 없는 백성을 군대에 소집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칼과 화살이 쏟아지는 곳에 버려두시고자 하십니까. 어찌하여 그들을 전쟁에 몰아넣어 그들의 간과 뇌를 땅에 바르도록 하시는 것입니까. 이제 그들이 죽어 돌아오면 그들의 늙은 아비와 어린 자식들, 홀로된 아내와 자애로운 어미들은 그 해골을 부여안고 통곡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실로 천하의 크나큰 고통이 될 것입니다.
고려가 신하의 절개를 어겼다면 죽이는 것이 옳고 우리를 침공하여 우리 백성들을 죽였다면 멸망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고려 정벌에는 아무런 명분이 없습니다. 아무 명분 없는 원정(遠征)으로 폐하께서는 공연히 나라를 번거롭게 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안으로는 수(隋)나라의 치욕(恥辱)을 씻고 밖으로는 신라(新羅)의 원수를 갚아주신다고 합니다만 고려 원정으로 보존되는 것은 작고 잃는 것은 크지 않겠습니까?
신은 폐하께서 성은을 내려 주시길 바라옵니다. 폐하께서 성은을 내려주셔서 고려가 스스로 쇄신할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고려 정벌을 위한 배를 불사르시고 소집한 군사들을 해산하여 돌려 보내주십시오. 이렇게 해 주신다면 신은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태종이 이 상소문을 읽고 고양(高陽) 공주에게 말하길 “이미 늙고 병든 사람이 아직도 나라 일을 걱정하고 있구나.”라고 했다. 그러나 태종이 말은 이렇게 했지만 이미 그 누구의 간언(諫言)도 그의 결심을 꺾지 못했다. 당 태종 이세민으로선 언제나 수나라의 실패를 거울로 삼아 조심하였지만 이때쯤 되면 자신이 이룬 성과에 만족하고 있었고 또한 수나라도 하지 못한 고구려 원정에 성공함으로써 집권 말기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에는 자신이 있었던 당 태종은 신하들의 반대를 외면하고 감행한 고구려 원정을 성공하지 못하고 안시성(安市城)에 막혀 군대를 돌려야 했다.
방현령의 병이 심해지자 태종은 동산의 담장을 뚫어 현령의 안부를 물으러 가기에 편리하도록 했다. 그리고 몸소 현령의 손을 잡고 이별했다. 또한 태자를 불러 가서 살피도록 명했다. 태종의 배려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방현령의 두 아들을 불렀다. 태종은 방유애(房遺愛)를 우위중랑장(右衛中郞將)으로 방유칙(房遺則)을 조산(朝散) 대부(大夫)로 임명하고 나서 그들이 알현(謁見)토록 했다.
정관 22년(648) 방현령이 죽으니 그의 나이 71세였다. 태위(太尉)와 병주도독(幷州都督)을 추증(追贈)하고 시호(諡號)를 문소(文昭)라고 했다. 반검(班劍)03과 우보(羽)04와 북, 비단 1,000필과 곡식 2,000 곡(斛, 10말)을 하사하고 소릉(昭陵)에 장사 지내도록 했다. 고종(高宗)이 즉위하니 조서(詔書)를 내려 방현령을 태종(太宗)의 묘당(廟堂)에 배향(配享)토록 했다.
방현령은 국가의 일을 맡아서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수고를 아끼지 않았고 공직에 임해서는 충절을 다했으며 사리사욕(私利私慾)이 없었다. 다른 사람을 시기할 줄 몰랐고 다른 사람의 장점을 들으면 마치 자기 일처럼 좋아했으며 관리로서 행정(行政)에도 통달했다. 그는 법을 처리하고 명령을 내릴 때에는 공평하고 관대하기를 힘썼다. 자기의 장점으로 남을 평가하지 않았으며, 사람을 쓸 때는 비록 미천한 사람일지라도 지닌 바의 능력을 모두 발휘할 수 있도록 했다. 간혹 일 때문에 양보를 받으면 반드시 머리를 조아려 송구스러움을 표하고 삼가 두려워했다고 한다.
01 이치(李治, 628~683). 어머니는 장손황후. 태종을 이어 649년 즉위하니 그가 당의 세 번째 황제인 고종(高宗)이다. 재위(在位) 34년.
02 『신당서(新唐書)』를 보면 ‘고려(高麗)’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자전(字典)에서 ‘려(麗)’를 찾아보면 본음(本音)은 ‘리’이다.
03 진대(晉代) 조회(朝會)에서 찼던 무늬가 새겨진 목검. 한대(漢代) 진검을 차던 것을 바꾼 것으로 호랑이 가죽으로 장식했다고도 한다. 뒤에 의장용으로 쓰여 무사가 차거나 천자가 공신에게 하사하였다.
04 장례 때 사용하는 의장(儀仗)의 일종. 새털을 깃대 꼭대기에 모아 일산(日傘)과 같이 만든 물건.
<대순회보 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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