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절 신명소한(小寒) 절후를 관장하는 효공(孝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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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1.26 조회5,357회 댓글0건본문
하간(河間)01왕(王) 효공(孝恭, 591~640)은 당(唐) 왕실의 종친(宗親)으로 어려서부터 침착, 민첩하고 학식과 도량이 있었다.
당(唐)의 첫 번째 황제인 이연(李淵)이 장안(長安)을 평정하고 그를 산남(山南)02 초위대사(招慰大使)에 임명하여 현재의 사천성(四川省) 지방인 파촉(巴蜀)03을 순행(巡行)케 하니 30여 주(州)가 항복하였다. 효공이 주찬(朱粲)04을 격파하고 그 병사들을 포로로 잡자, 여러 장수들이 말하기를 “주찬의 무리들은 인육(人肉)을 먹는 사나운 적(賊)들입니다. 우리에게 주는 해가 실로 막심할 것입니다. 모두 묻어 죽이십시오.”라고 하였다. 효공이 말하기를 “안 된다. 지금 각 성(城)마다 우리의 적이 가득한데 만약 이들을 죽인다면 과연 항복하는 자가 있겠는가?” 하니 모두가 그 말을 따랐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각 지역에 격문(檄文)을 돌리니 효공이 이르는 곳마다 도적들이 투항(投降)하였다.
전시(戰時)에 포로 처리는 중요한 문제이다. 그런데 중국사를 보면 이 문제의 해결책의 하나로 이용된 것이 ‘생매장’이었다. 포로의 숫자가 많은 경우, 그들이 먹고 마시고 잠자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또한 반란의 우려를 해소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채택된 것이다. 전국(戰國)시대 진(秦)의 장수 백기(白起, ?~BC257)가 포로로 잡은 조(趙)의 40만 대군을 생매장했다는 기록을 볼 때 오래전부터 이용되던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포로를 생매장하는 방법은 이들과 대적하는 집단에게 필사적인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만약 효공이 주찬의 무리를 생매장하였다면 파촉의 다른 도적떼들은 필사적인 저항 이외에 다른 길이 없었을 것이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하는데 아군의 입장에서도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무리를 쉽게 진압하기 어렵고 그 과정에서 아군의 피해가 커질 수밖에 없다. 효공은 바로 이 점을 고려한 것이다. 따라서 항복한 주찬의 무리를 살려 줌으로써 여러 도적들의 투항을 유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사천성(四川省)을 안정시킨 공로로 효공은 다음 해인 무덕(武德) 2년(619) 사천성 전체를 책임지는 신주(信州)05 총관(總管)에 임명되고 공식 휴가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는 수나라 말기에 일어난 도적들이 중국 전역에 산재하였다. 이러한 도적들의 토벌은 아직 기반을 확고히 하지 못한 당에게 국정의 첫 번째 과제였다. 효공은 휴가 기간이었음에도 양자강 유역에 위치한 강릉(江陵)06을 점거하고 있던 소선(蕭銑)07을 공격할 계책을 상신하였고 고조(高祖)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효공은 양자강에서 전개될 수전(水戰)에 대비하여 전함(戰艦)을 크게 건조(建造)하였다. 그리고 효공은 군사 전략에 능통했던 이정[李靖: 청명(淸明) 절후를 관장]을 만나 그의 계책에 따라 강릉을 공격하고자 했다. 그 준비의 하나로 효공은 자신의 관할 아래에 있던 파촉(巴蜀) 수령(首領)들의 자제들을 불러들여 이들을 대거 등용하여 좌우에 배치하였다. 이는 대외적으로는 인재를 발탁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나 실은 이들을 인질로 삼아 이 지역의 수령들이 반란을 모의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이렇게 소선을 공격하기 위한 준비가 마무리되자 효공은 형주도(荊州道) 상주도(湘州道)의 총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육군과 해군을 포함하여 총 12군(軍)을 거느리고 이릉(夷陵)08을 출발하여 소선(蕭銑)의 두 진(鎭)을 연달아 격파하였다. 이때 노획한 전함을 강에 풀어 놓으니 효공 휘하의 장수들은 그의 이러한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전함은 아군이 거두어 쓰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버려 적(賊)들이 쓰게 하는 것은 어떤 이유입니까?”라고 물었다. 효공은 “소선의 진영은 지세가 험준하고 병사 또한 많다. 만약 우리가 성을 함락시키지도 못했는데 적의 원군(援軍)이 이르게 되면 양쪽에서 협공을 받게 된다. 이렇게 진퇴양난이 되면 배가 많다고 한들 그것이 아군에게 무슨 보탬이 될 것인가. 그러나 지금 소선의 진영은 강가에 있지 않은가. 만약 소선의 원군(援軍)이 오더라도 그들의 전함이 강을 덮은 것을 보게 되면 소선이 이미 패했다고 생각하여 상황을 파악하느라 구원의 시기를 늦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적들이 시간을 지체하는 사이에 아군이 강릉을 함락시키면 된다.”고 말했다.
과연 효공의 예측과 같이 소선의 원군은 파릉(巴陵)09에 도착하였지만 강에 있는 배를 보고 더 이상 진격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내외가 끊어진 소선은 마침내 항복하였다. 임금이 기뻐하여 효공을 형주대총관(荊州大總管)으로 승진시키고 소선을 무찌르는 장면을 그려 올리라 명령하였다.
형주대총관이 된 효공은 둔전(屯田)10을 설치하고 구리를 주조하여 백성들을 이롭게 하였다. 그리고 양주도(襄州道) 행대좌복야(行臺左僕射)로 벼슬을 옮겼다. 이때 영표(嶺表)11가 평정되지 않아 사신을 두루 보내 민심을 위로하니 귀순(歸順)한 주(州)가 49주나 되었고 이로써 당 조정의 명령이 남중국해(南中國海)까지 미치게 되었다.
얼마 후 수나라 말기에 일어난 도적의 무리 중에서 당에 투항(投降)하였던 보공석(輔公)12이 반란을 일으켜 수양(壽陽)13을 노략질하니 효공을 행군원수(行軍元帥)로 임명하여 토벌하게 하였다. 그는 병사들을 이끌고 동정호(洞庭湖)로 가서 출병하기 전에 크게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 잔에 있던 술이 갑자기 피로 변하였다. 좌중에 있던 장졸들이 모두 새파랗게 질렸으나 그는 태연자약했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화와 복은 본디 정해진 것이 아니고 오직 사람이 부르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세상에 누 끼친 바 없고 군주의 근심을 가중시키지도 않았다. 그러나 보공석은 이미 조정에 투항하여 벼슬을 받았음에도 다시 사악한 마음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니 이는 그 자신이 부른 화(禍)이다. 지금 임금이 그의 죄를 물으려 하는데 잔 안에 피가 고인 것은 바로 역신(逆臣)을 참수(斬首)하라는 상서로운 징조가 아니겠는가.” 하고 잔치를 파하니 병사들의 마음이 안정되었다.
보공석이 험준한 곳에 진을 치고 싸움을 걸어왔지만 효공은 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효공은 보공석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적을 굶주리게 하였다. 다음날 효공은 병사를 매복(埋伏)시켜 놓고 보공석에게 싸움을 걸었다. 싸움이 시작되고 나서 잠시 후 효공의 군대가 작전상 후퇴하였다. 보공석의 군은 효공의 군을 쫓다가 매복에 걸려 대패(大敗)하였다. 효공이 승세를 몰아 다른 진(鎭)까지 격파하니 보공석이 단양(丹陽)을 버리고 도망하였는데 끝까지 추적하여 그를 사로잡았고 이로써 강남(江南)이 평정되었다.
이 공로로 그는 양주대도독(揚州大都督)이 되었다. 임금이 그의 공로를 칭찬하고 좋은 저택과 노비 700명을 하사하고 셀 수 없을 정도의 보석을 내렸다. 이후에도 효공은 다시 큰 적들을 물리쳐 공을 세우게 되었다. 그 공로로 1,200호를 식읍(食邑)으로 받았고 정관(貞觀) 초에 예부상서(禮部尙書)가 되었다가 하간왕으로 옮겨졌다.
효공은 성품이 관대하고 겸손하여 자기를 자랑하는 태도가 없었으므로 태종 이세민은 이 때문에 그를 친애하며 중용함이 종친 중 다른 사람들에 비할 바 아니었다.
효공이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지금 사는 집은 상당히 크고 화려하지만 이것이 내 원하는 바는 아니다. 마땅히 다른 곳을 거처로 삼아 대충 내 할 일이나 하면서 지내기만 하면 된다. 내가 죽은 후에 내 아들이 재능이 뛰어나면 자중하게 하고 재능이 없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이용당하지만 않으면 된다.”
정관 14년(640)에 술을 마시다 갑자기 죽으니 이때 그의 나이 50세였다. 태종이 통곡하며 사공(司空), 양주도독(揚州都督)의 벼슬을 내리고 시호(諡號)를 원(元)이라 했다. 그리고 태종이 몸소 고조(高祖)의 능인 헌릉(獻陵)에 안장하였다.
<대순회보 81호>
01 현재 하북성(河北省) 하간시(河間市).
02 태화산[太華山: 오악(五嶽)의 하나로 화산(華山)이라고도 한다·]·종남산[綜南山: 섬서성(陝西省) 장안(長安) 남부에 있는 산] 두 산의 남쪽 지방.
03 사천(四川)의 별칭. 파(巴)는 지금의 사천성(四川省) 중경(重慶) 지방. 촉(蜀)은 사천성 성도(成都) 지방.
04 주찬(朱粲, ?~621) 현(縣)의 관리였으나 수(隋)나라 대업(大業) 말년에 장백산(長白山)의 반란을 진압하러 갔다가 오히려 무리를 끌어 모아 반란을 주도하였다. 노략질을 일삼다 소득이 없자 인육(人肉)을 식량으로 사용하여 악명이 높았다. 무덕 2년(619) 고조 이연에 항복하였다가 다시 왕세충(王世充)에 투항하였으나 낙양이 평정된 후 참수되었다.
05 주(州) 이름. 사천성(四川省)에 있었다.
06 현재 호북성(湖北省) 강릉현(江陵縣).
07 소선(蕭銑:583~621) 후량(後梁) 선제(宣帝)의 증손(曾孫)으로 수(隋)나라 말기인 617년 악주(岳州) 교위(校尉) 동경진(董景珍) 등이 기병(起兵)하면서 왕으로 추대되어 양왕梁王)이라 하였다. 다음해 칭제(稱帝)하고 강릉(江陵)으로 천도遷都) 하였다 성품이 외면적으로는 관후(寬厚)하나 안으로는 시기심이 많았다. 이로 인해 대신과 장군들을 의심하게 되니 이들이 모반하면서 병세(兵勢)가 약해졌다. 무덕(武德) 4년(621) 당 고조가 병사를 이끌고 토벌하였는데 성이 함락되기 전에 항복하였고 장안(長安)에서 참수(斬首)되었다.
08 현재 호북성(湖北省) 의창시(宜昌市) 동남(東南).
09 호남성(湖南省) 악양현(岳陽縣)에 있는 군(郡).
10 둔경(屯耕)이라고도 한다. 군대가 주둔하면서 농사를 짓는 것.
11 오령五嶺) 이남의 지역 곧 광동廣東). 광서(廣西)와 안남(安南) 지역.
12 보공석(輔公祏, ?~624) 수나라 말에 일어난 여러 군도(群盜)들 중 하나이다. 당에 투항하여 서국공(舒國公)에 봉해졌다. 그러나 무덕6년(623)년에 반란을 일으켜 국호를 ‘송宋)‘이라 하고 칭제(稱帝)하였으나 이듬 해(624년)에 진압되어 참수되었다.
13 안휘성(安徽省) 수현壽縣) 지역의 현(縣). 수춘(壽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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