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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인물불교종장 진묵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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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1.26 조회6,70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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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종장 진묵대사의 생애

 


 

석가모니불의 화신(化身)

신통력이 뛰어나고 효성 지극했던 고승
유 ∙ 불 ∙ 선(儒佛仙) 합일의 경지에 이르렀던 한국불교사상 가장 독특한 인물 중의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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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묵은 한국의 역대 고승들 중에서 가장 신비로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숱한 기행이적(奇行異蹟)과 불가사의한 신통력을 보였으며 석가불의 화신(化身)으로까지 일컬어지고, 유 ∙ 불 ∙ 선(儒 ∙ 佛 ∙ 仙)합일의 경지에 이르렀던 한국 불교 사상 가장 독특한 인물 중의 한사람이다. 전경에 김봉곡(金鳳谷)에게 처참히 죽은 후 원(冤)을 품고 동양의 도통신을 거느리고 서양에 가서 문화 개발에 역사 하였으나, 해원시대(解冤時代)를 맞이하여 불교종장(佛敎宗長)이 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진묵대사(震默大師)에 대하여 알아본다.
    진묵은 조선조 명종 17년(1562년) 전북 김제군 만경면 불거촌(佛居村) 화포리(火浦里)에서 태어나 인조 계유년(癸酉年, 1633년)에 전주 봉서사(鳳棲寺)에서 입적(入寂)했다. 법휘(法諱)는 일옥(一玉), 진묵은 자호(自號)이다. 모친은 조의(調意)씨이다. 진묵은 일곱 살에 전주 봉서사로 출가하였다. 이 때부터 슬기롭고 영명한 재질이 드러나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도 현묘한 이치를 정확히 밝혔다고 한다. 이미 머리를 깎고 사미승이 되었을 때 주지는 그의 나이가 어리고 행(行)이 깨끗하다 하여 신중단(神衆壇)의 향 피우는 소임을 맡겼다. 그런데 그 일을 맡아 본지 얼마 안되어 금강밀적신장이 주지승의 꿈에 나타나 『우리들 제천(諸天)은 모두 부처님을 호위하는 신이거늘 어찌 감히 부처님의 예를 받겠는가. 급히 향 받드는 소임을 바꾸어서 우리들로 하여금 아침과 저녁을 편히 지내게 하여다오』라고 하였다. 금강밀적신장의 현몽으로 대사의 나이 7세 때 부처님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때부터 모두들 대사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기 시작했다. 그는 만년에 항상 봉서사에 머물렀다고 전한다. 그가 어느 날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는 지팡이를 끌면서 개울을 따라 거닐다가 물가에 서서 물 속에 비친 자기의 그림자를 가리키며 시자에게 말하기를 『저것이 바로 석가모니불의 그림자이니라』고 하니, 시자가 대답하기를 『이것은 바로 화상의 그림자입니다.』라고 했다. 대사는 『너는 다만 화상의 가짜 그림자만 알았지, 석가모니의 참모습은 알지 못하는 구나』라고 말했다. 이런 일화를 통해 그는 사람들로부터 석가불의 화신(化身)이라고 회자되어 왔다.
    그는 술을 무척 좋아했던 것으로 전한다. 술이라면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동이째 마셔 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술이라면 먹지 않고 반드시 곡차(穀茶)라고 해야만 마셨다. 그가 남긴 게송(偈頌)은 아직까지도 전해지고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하늘을 이불로 땅을 자리로 삼고 산을 베개삼고 달을 촛불 삼아 구름을 병풍 삼고 바다를 잔으로 삼아 크게 취하여 거연히 일어나 춤을 추니 도리어 긴 소매가 곤륜산에 걸릴까 하노라』그가 주로 거닐던 만경평야는 그야말로 비산비야(非山非野)의 지대로서 비승비속지간에 승속일여(僧俗一如)의 경지를 펴기에 알맞은 곳이라고도 한다. 진묵의 탄생지와 활동무대가 이곳이었다는 점도 깊이 음미해 볼만한 대목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지역에서 그는 농사꾼들과 혹은 유생들과 어울려 기행이적을 보이고 때로는 학문을 논하며 유 ∙ 불 ∙ 선(儒 ∙ 佛 ∙ 仙) 어느 하나에 매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신통력은 당시 시들어 가는 불법의 진수를 드러내는데 중요한 몫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이 같은 신통력은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지만 수도승 자신들의 정수리를 내리치는 듯한 것도 눈에 뛴다. 대사가 어느 때 모악산 대원사에 머물고 있을 때이다. 그때 그는 식사 때에 줄곧 거치른 밀기울만 물에 타서 먹곤 하였다. 그것을 싫어한 중승(衆僧)들은 그 밀기울을 먹지 않음은 물론, 그를 박대하여 그 밀기울에 오물을 넣어 더럽혀 놓기까지 했다. 몇 년 지난 후 대사는 여러 승려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의 절은 앞으로 일곱 대에 걸쳐 액운을 만날 것이다.』라고 했는데 과연 그러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진묵은 그의 모친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한다. 이는 속세의 인연을 끊는 것을 전통으로 하던 당시 불가의 생리를 돌아본다면 매우 독특한 태도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출가인으로서 어머니를 절 가까운 곳에 잘 받들어 모셨다. 어느 여름에 어머니가 모기 때문에 괴로워하자 그가 신령에게 고하여 모기떼를 다 쫓아 버렸다. 그 후로부터 지금까지 그 마을에는 모기떼의 괴로움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의 모친이 돌아가자 그가 다음과 같은 제문(祭文)을 지어 올렸다고 한다.
     『열 달 동안 태중에서 길러 주신 은혜를 어찌 갚사오리까. 슬하에서 삼 년을 키워 주신 은혜를 잊을 수가 없나이다. 만세를 사시고 다시 만세를 더 사신다 해도 자식의 마음은 오히려 만족치 못할 일이 온데 백년도 채우지 못하시니 어머니 수명이 어찌 그리도 짧으시옵니까. 표주박 한 개로 노상에서 걸식하며 사는 이 중은 이미 그러하거니와 비녀를 꽂고 규중에 처하여 아직 시집가지 못한 누이동생이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상단 공양도 마치고 하단 제사도 마치고 중들은 각기 방으로 돌아갔으며 앞산은 첩첩하고, 뒷산은 겹겹이 온데 어머님의 혼신은 어디로 가셨습니까. 아! 슬프고 슬프도다.』 간결하고 애절한 명문장이다. 또 그는 풍수지리에도 밝아 모친을 위해 자손이 없어도 천년 동안 제사를 받고 벌초해줄 땅 천년향화지지(千年香火之地)를 보아 놓고 있었다. 김제, 만경에 있는 명당자리였다. 사람들이 혹 질병이 나면 그 묘에 가서 향불을 올리며 벌초하고 성묘하면 그 병이 곧 낫기 때문에 먼 곳이나 근처의 주민들이 너나없이 지금도 앞다투어 향화나 음식을 올리고 이 묘를 보살핀다고 한다. 그래서 자손이 있는 묘보다 더 깨끗하게 가꾸어지고 향연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진묵을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김봉곡(金鳳谷)이다. 봉곡은 그의 호이며, 이름은 동준(東準)이다. 그는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의 문하생이었다. 봉곡과 진묵은 매우 긴밀한 왕래가 있었던 사이었다. 『봉곡은 시기심이 강하였다. 진묵은 하루 봉곡으로부터 성리대전(性理大典)을 빌려 가면서도 봉곡이 반드시 후회하여 곧 사람을 시켜 찾아가리라 생각하고 걸으면서 한 권씩 읽고는 길가에 버리니 사원동(寺院洞)입구에서 모두 버리게 되었다. 봉곡은 과연 그 책자를 빌려주고 진묵이 불법을 통달한 자이고 만일 유도(儒道)까지 통달하면 상대할 수 없게 될 것이고 또 불법을 크게 행할 것을 시기하여 그 책을 도로 찾아오라고 급히 사람을 보냈다. 그 하인이 길가에 이따금 버려진 책 한 권씩을 주워 가다가 사원동 입구에서 마지막 권을 주워 돌아갔다. 그 후에 진묵이 봉곡을 찾아가니 봉곡이 빌린 책을 도로 달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 진묵은 그 글이 쓸모가 없어 길가에 다 버렸다고 대꾸하니 봉곡이 노발대발하였다. 진묵이 내가 외울 터이니 기록하라고 말하고 잇달아 한편을 모두 읽었다. 그것이 한자도 틀리지 않으니 봉곡은 더욱더 시기하였다. 그 후에 진묵이 상좌에게 「내가 팔일을 한정하고 시해(尸解)로서 인도국에 가서 범서와 불법을 더 익혀 올 것이니 방문을 여닫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고 입적하였다. 봉곡이 이 사실을 알고 절에 달려가서 진묵을 찾으니 상좌가 출타 중임을 알렸다. 봉곡은 상좌가 말렸으나 억지로 방문을 열었다. 봉곡은 진묵의 상좌에게「어찌하여 이런 시체를 방에 그대로 썩게 하느냐 중은 죽으면 화장 하나니라」고 말하면서 마당에 나무 더미를 쌓아 놓고 화장하니라 봉곡은 살 한 점도 남기지 않고 모두 태웠다. 진묵이 이것을 알고 돌아와 공중에서 외쳐 말하기를 「너와 나는 아무런 원수진 것이 없음에도 어찌하여 그러느냐」고 말했다. 상좌가 자기 스님의 목소리를 듣고 울기에 봉곡이「저것은 요귀의 소리라. 듣지 말고 손가락뼈 한 마디도 남김없이 잘 태워야 한다」고 말하니 진묵이 소리쳐 말하기를「네가 끝까지 그런 다면 너의 자손은 대대로 호미를 면하지 못하리라」하고 동양의 모든 도통신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옮겨갔도다.』 (공사 3장 14, 15절)
    진묵은 천상에 올라가서 온갖 묘법을 배워 인세에 그것을 베풀고자 하였으나 김봉곡에게 참혹히 죽은 후에 원(冤)을 품고 동양의 도통신을 거느리고 서양에 가서 문화개발에 역사 하였으나, 해원시대를 맞이하여 불교종장이 되었다. 이는 상제께서 그를 해원시켜 고국으로 데려와서 선경(仙境)건설에 역사케 함이었다. (권지 2장 37절) 이 일화는 김제지방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이며 실제로 만경장 강줄기가 봉곡이 살던 마을에서 다른 쪽으로 흐르게 되었다고 한다.
    진묵은 불가에 귀의한 몸이면서도 모친에 대한 효성이 극진하였고 종교의 본의(本意)를 알고 살아서는 중생교화에 세인들의 귀감이 되었고 죽어서도 인류를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 열정으로 여러 사람의 흠모와 추앙을 받고 있다. 멸(滅)했으면서도 멸 할 수 없는 그의 발자취가 혼미에 빠진 오늘의 세상을 크게 빛나게 할 날이 있으리라.

 
《대순회보》 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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