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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인물율곡 이이(李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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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18 조회6,07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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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 이광주

 

  상제께 김형렬이 “고대의 명인은 지나가는 말로 사람을 가르치고 정확하게 일러주는 일이 없다고 하나이다.”고 여쭈니 상제께서 실례를 들어 말하라고 하시므로 그는 “율곡(栗谷)이 이순신(李舜臣)에게는 두률천독(杜律千讀)을 이르고 이항복(李恒福)에게는 슬프지 않는 울음에 고춧가루를 싼 수건이 좋으리라고 일러주었을 뿐이고 임란에 쓰일 일을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고 아뢰이니라. 그의 말을 듣고 상제께서 “그러하리라. 그런 영재가 있으면 나도 가르치리라.”고 말씀하셨도다.(행록 1장 32절) 

 

  위의 구절에서 김형렬은 율곡(栗谷, 1536-1584)이 이순신과 이항복에게 지나가는 말로 임진왜란(1592-1598)을 대비케 한 일화를 상제님께 아뢰었다. 상제님께서 그 사실을 수긍하셨으니, 당시 율곡은 변란을 예견하고 남모르게 그에 대비함으로써 조선의 국운을 건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 일화의 주인공인 율곡 이이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과 함께 한국 유학을 대표하는 성리학자이다. 그는 49년의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문묘(文廟)에 모셔진 ‘동국(東國) 18현(賢)’의 한 분으로서, 영남학파에 비견되는 기호학파를 개창한 사상가이자 경세가였다. 병조판서로 재직 시 그는 경연(經筵)01에서 선조에게 왜군의 침략에 대비해 10만의 병사를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처럼 남다른 선견지명(先見之明)을 가졌던 율곡의 생애와 행적을 살펴보면 도전님께서 “성현(聖賢)으로 추존 받은 옛 사람은 성(誠)을 일생 동안 값진 보배로 삼아 지성(至誠)으로 진리를 수행한 분들이다.”02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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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율곡 이이 영정: 자운서원(紫雲書院) /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소재 

 

율곡의 가계와 성장

  이이(李珥)는 1536년(중종 31) 강원도 강릉부 북평촌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字)는 숙헌(叔獻)이며, 호(號)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등이다. 율곡이란 호는 친가가 있던 경기도 파주 율곡촌에서 딴 것이다. 그는 덕수 이씨의 시조인 고려 중랑장(정5품 무관) 이돈수의 12대 손으로, 아버지 이원수와 어머니 신사임당 사이에서 4남 3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 전날 밤, 신사임당은 흑룡(黑龍)이 큰 바다에서 날아와 침실의 처마 밑에 서리고 있는 꿈을 꾸었다. 그래서 율곡의 어렸을 때 이름을 ‘현룡(見龍)’이라 불렀고, 그가 태어난 방을 몽룡실(夢龍室: 용꿈을 꾼 방)이라 하였다. 

  율곡은 어려서부터 대단히 총명하여 3살 때 말을 배우면서 곧바로 글을 읽을 수 있었다. 6살 때는 어머니를 따라 강릉 외가를 떠나 한양의 본가로 왔다. 이곳에서 그는 일정한 스승 없이 학문과 문장, 그림 등 다방면에 탁월한 재주를 지녔던 신사임당으로부터 학문의 기초를 배웠다. 일찍부터 천재성이 드러난 율곡은 7살 때 문리(文理)가 통해 사서(四書)를 비롯한 여러 경전과 역사서에 능통할 만큼 학문이 일취월장하였다. 이때 이웃집에 살던 진복창이란 사람의 인물됨을 논한 「진복창전(陳復昌傳)」을 지었다. 여기서 그는 진복창을 겉으론 군자(君子)인 척하나 속으로는 욕심이 많은 소인(小人)이라 평하고 그가 벼슬자리를 얻으면 장차 큰 근심거리가 될 것이라고 했다.03 몇 년 뒤 이 예견은 그대로 적중하여 명종(明宗) 즉위년(1545年)에 일어난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진복창이 갖은 악행을 저질렀다.04 이러한 사례는 율곡이 어릴 시절부터 남다른 총기와 안목을 지녔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율곡이 또 10살 때 지은 「경포대부(鏡浦臺賦)」는 어린 소년답지 않게 인생을 달관한 듯, 유가적 삶과 도가적 출세간의 삶에 대해 고뇌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당시 그는 이미 유교 경전을 비롯해서 불교와 노장사상에 관한 책까지 두루 섭렵하여 학문에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불리던 율곡은, 13세에 진사 초시에 합격한 이래 모두 아홉 번을 장원하여 사람들이 그를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높여 불렀다. 

  그의 나이 16세 때 존경하던 어머니 신사임당이 4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모친이 경기도 파주 자운산에 안장된 뒤, 효성이 지극했던 율곡은 3년 동안 시묘(侍墓)살이를 하며 극진한 예를 다했다. 어머니의 별세로 삶과 죽음에 큰 의문을 품은 그는 19세 때 3년 상(喪)을 마친 후 홀연히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 공부에 몰두했다.05 이 사건은 뒷날 그가 정적(政敵)들로부터 두고두고 비난을 받는 빌미가 되지만, 한편으론 그의 학문과 철학이 보다 깊고 넓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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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년 시묘살이 하는 율곡 / 파주 이이 유적지 율곡기념관 소재

 

  이후 율곡은 깨달은 바 있어 1년여의 불교생활을 마감하고 20세가 되던 해 봄에 강릉의 외가에 머물며 다시 학문에 전념했다. 이때 그는 학문의 목표와 실천과제를 담은 『자경문(自警文: 스스로를 경계하는 글)』을 짓고 이를 일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여기서 그는 성인(聖人)을 목표로 삼고 이의 실현을 위한 선결 과제로 ‘입지(立志)’를 강조하였다. 후에 율곡이 저술한 『성학집요』, 『격몽요결』, 『학교모범』에도 모두 입지 장을 첫머리에 두었을 만큼 그는 학문의 성패가 뜻을 세우는 데 달려 있다고 믿었다. 

  율곡은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결혼했다. 이듬해 봄에는 처갓집이 있는 경상도 성주에서 강릉의 외가댁으로 가는 도중에 예안현(안동) 도산(陶山)에 들러 퇴계를 방문하였다. 당시 율곡은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학자였고, 퇴계는 당대의 석학으로 존경받던 원로 학자였다. 이곳에서 그는 이틀간 머물며 퇴계와 학문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가 떠난 뒤 퇴계는 제자 조목(趙穆)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사람됨이 밝고 쾌활하며 본 것과 기억하는 것이 많고, 또 우리 학문에 뜻이 있었네. 그래서 ‘젊은 후배를 두려워할 만하다(後生可畏)’는 옛 성인(공자)의 말씀이 참으로 나를 속이지 않음을 알았네.”06라고 술회했다. 서로의 학문과 인품을 존중했던 두 사람은 여러 차례 서신을 주고받으며 교류하였다. 

  그 후 율곡은 23세 때 치른 과거에서 한 번 실패했지만 퇴계의 격려에 힘입어 그해 겨울 절친한 벗인 구봉(龜峰) 송익필(宋翼弼, 1534-1599)과 함께 별시(別試)에 응했다. 율곡이 이 시험에서 「천도책(天道策)」으로 장원을 하니, 시험관들은 그의 답안에 감탄을 금치 못했고 명나라에도 알려질 만큼 그 명성이 높았다. 당시 율곡이 장원하자 선비들이 그의 주위에 몰려들어 잇달아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그는 대답을 회피한 채 “송익필의 학문이 고명(高明)하고 넓으니 가서 물어보시오.”라고 말했다. 이에 송익필이 여러 사람의 질문에 척척 대답하자 사람들은 그의 학문에 감탄하였다. 이 일로 인해 구봉 또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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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도장원공 율곡 / 파주 이이유적지 율곡기념관 소재 

 

관직 생활의 시작

  1564년(명종 19) 율곡은 29세에 대과에 장원하여 호조좌랑(정6품)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예조와 이조의 좌랑, 삼사(三司)07의 언관직(言官職) 및 주요 판서직을 거쳐 의정부의 우찬성(종1품)까지 오른다. 이러한 중앙관서의 요직뿐만 아니라 청주목사와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하여 지방의 외직에 대한 경험까지 쌓게 된다.  

  당시 조선은 상소제도가 군신(君臣)이 소통하고 민의(民意)를 반영하는 언론의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율곡은 상소를 통해 국정현안에 관한 대책을 임금에게 제시하고자 했다. 예조좌랑과 사간원 정언(正言)을 역임하면서 승려 보우(普雨)의 탄핵과 영의정이자 외척으로 전횡을 일삼던 윤원형의 처벌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를 시작으로 개국 후 2백 년이 경과한 조선을 허물어져 가는 집의 형국에 비유하며 사회체계의 전면적 개혁인 ‘경장(更張)’이 시급함을 강조하였다. 이를 위해 현실의 폐단을 해결할 진단과 처방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수많은 상소문을 올렸다. 그는 평생 130편의 상소문을 올려 개혁을 부르짖었을 만큼 나라사랑과 애민의식이 투철한 사상가였다. 이런 점 때문에 율곡은 조선조 후기 실학(實學)의 선구자로 평가되기도 한다.

  1574년(선조 7) 우부승지로 재직 시 율곡은 자신의 대표적 상소문인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선조에게 올렸다. 무려 만여 자에 달하는 장문의 상소에서 정치는 시세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일은 실질적인 것에 힘써야 하며, 시의(時宜)에 맞게 법을 만들고 개정하여 백성을 구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군정(軍政)08의 폐단과 대책을 상세하게 밝히며 내외의 방비를 굳건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상소는 그의 현실진단과 처방이 가장 체계적으로 제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해 10월에는 황해도 관찰사를 지내면서 군역의 폐단과 진상(進上)의 번거로움을 덜어주고자 하였고 선정(善政)을 베풀어 도민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았다.

  1579년(선조 12)에 율곡이 대사간을 사직할 당시 조정에서는 동·서 붕당의 조짐이 심화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율곡은 사림(士林)을 국가의 원기(元氣)로서 중시하며, 중립적인 입장에서 양시양비론(兩是兩非論)을 내세워 동서 당쟁의 해소를 적극 주장하였다. 그가 동서간의 분당을 타파하려는 까닭은 진실로 사림이 화합하지 못하면 조정이 바로 서지 못하고, 나라를 올바르게 다스릴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45세 때인 1580년에 대사간의 임명을 받들어 복관(復官)한 뒤, 생을 마감하기 전해인 1583년까지 호조·이조·형조·병조의 판서와 우찬성 등을 두루 역임했다. 당시 계속된 당파 싸움으로 인해 신하들이 바른말을 못하던 때였으나, 성품이 의롭고 강직했던 율곡은 나라와 백성을 위한 일에 자신의 주장을 서슴없이 밝혔다. 

  16세기 후반의 국제 정세는 만주 대륙에서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주변 부족을 통일하여 명(明)을 위협하고 있었고, 남으로는 왜(倭)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시대의 혼란을 극복하며 통일국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 율곡은 군사문제에 많은 관심을 갖고 소(疏)·차(箚)·계(啓) 등 갖가지 양식의 건의문과 주요 저술에서 직·간접으로 군사정책의 폐단을 지적하고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1583년 2월에 율곡이 병조판서로 재직시 군사와 국방에 관한 문제를 지적하고 대책을 건의한 『시무육조계(時務六條啓)』09를 올렸다. 이는 그가 평생을 통해 진언한 상소 정신이 집약된 것으로 그 대책 또한 군비, 양병, 조세, 행정, 교화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있었다. 그해 4월 율곡은 경연(經筵)에서 불의의 변란에 대비해 10만의 군사를 양성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국세의 떨치지 못함이 심하니 10년을 지나지 않아 마땅히 멸망의 화(禍)가 있을 것입니다. 원컨대 미리 10만의 군사를 양성하여 도성에 2만, 각 도에 1만씩을 두어, 군사에게 호세(戶稅)를 면해 주고 무예를 단련케 하며, 6개월에 나누어 번갈아 도성을 수비하다가 변란이 있을 때에는 10만을 합하여 지키게 하는 등 완급의 대비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루아침에 변이 일어날 때 백성을 몰아 싸우게 됨을 면치 못할 터이니, 그때는 일이 틀어지고 말 것입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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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소 올리는 율곡 / 파주 이이유적지, 율곡기념관 소재

 

  이에 대해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을 비롯한 중신들은 ‘무사한 때에 군사를 양성함은 화를 기르는 것’이라며 반대하였다. 그러자 율곡은 그에게, “나라의 형세가 몹시 위태로운데도 속유(俗儒)들은 시의(時宜)를 알지 못해 그렇다지만 그대도 또한 이런 말을 하는가?”라며 나무랐다. 훗날 임진왜란이 닥쳤을 때 유성룡은 조정의 수장으로서, “이제 와서 보니 이문정(李文靖: 율곡을 빗대어 이른 말)은 참으로 성인이다. 만약 그의 말을 채용했더라면 국사(國事)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또 그 전후에 건의한 계책을 사람들이 헐뜯고 비난했지만, 지금은 모두 확실히 요점에 맞으니 참으로 따라갈 수 없다. 율곡이 생존했다면 반드시 오늘날에 쓸모가 있었을 것이다.”11라고 하며 그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학술활동과 후진양성

  1569년에 홍문관 교리로 재직시 사가독서(賜暇讀書)12를 하면서 「동호문답」을 저술하였다. 이것은 왕도정치 구현을 위한 정치사상과 당대의 현안을 문답식으로 쓴 저술이다. 37세 때는 병환으로 파주에 머물고 있었다. 이때 율곡은 친우인 성혼(成渾, 1535-1598)과 인심도심(人心道心)을 중심으로 성리학에 관한 논쟁을 벌였다. 이것은 퇴계와 고봉 기대승의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과 함께 조선 유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들은 1년간 9차례 편지를 주고받으며 인심도심을 비롯해 이기론(理氣論)과 사단칠정 등에 관한 논변을 벌였다. 율곡은 성혼을 통해 이황의 학설을 비판했는데 이 과정에서 그의 성리학 이론이 명쾌하게 밝혀졌고 한국 성리학의 심화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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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운서원(紫雲書院) : 율곡 이이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40세 때에는 왕명으로 제왕학인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저술하였다. 이 책은 『대학』의 체계에 따라 유가의 경전과 송대 유학자들의 학설을 종합하고 자신의 견해를 덧붙인 것이다. 후에 경연의 교재이자 유학의 입문서로서 애용된다. 퇴계의 『성학십도(聖學十圖)』가 수기(修己)에 중점을 둔 책이라면 『성학집요』는 수기와 치인(治人)을 결합시킨 정치철학서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한편, 정쟁(政爭)이 심화되는 와중에 율곡은 건강상의 이유로 1576년 10월에 사직했다. 그리고 고향인 파주 율곡리와 해주 석담(石潭)을 오가며 교육과 교화 사업에 종사하면서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저술하였다. 『격몽요결』은 ‘무지몽매함을 깨뜨리는 중요한 비결’이란 뜻인데, 교육입문서로서 조선시대 서당에서 『소학』 다음으로 많이 읽혀진 서책 중의 하나이다. 

  이때 율곡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계모와 형제 및 가까운 친족들을 해주로 불러들여 한 집에 모여 살도록 했다. 또한 향약(鄕約)을 조직하고 사창(社倉)을 실시하여 백성들의 교화와 구제에 힘을 기울였다. 43세 되던 해에는 해주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짓고 독서와 강학을 하여 많은 인재를 육성하였다. 이후 그는 출사와 퇴사를 반복하며 5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교육과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율곡의 문인(門人)으로는 우리나라 예학(禮學)의 종장으로 불리는 사계 김장생을 비롯하여 조헌, 정엽, 안방준 등이 있다. 이후 율곡 문하(門下)의 폭이 넓어짐에 따라 퇴계의 영남학파에 비견되는 기호학파의 학맥을 형성하였다. 그는 당대의 많은 학자들과도 친교를 맺고 교류했으며, 우계 성혼과 송강 정철, 사암 박순, 구봉 송익필 등이 그의 지기(知己)이자 동학이다. 율곡은 당시 이황과 이언적 중심의 주리론(主理論)과 서경덕 중심의 주기론(主氣論)을 개방적이고 비판적으로 종합하여 한국 유학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그의 개방적인 학풍은 훗날 기호학파가 성리학, 예학, 실학, 양명학, 의리학 등 다채롭게 전개되는 데 크게 기여한다. 

  1584년(선조 17) 1월 16일 율곡은 한양 대사동(現 인사동) 자택에서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타고난 총명과는 달리 본래 허약하게 태어난 그는 평생 병에 시달렸지만 병석에서도 나랏일에 대한 걱정을 놓지 않았다. 그가 죽기 이틀 전, 전방 지휘관으로 떠나는 서익(徐益)이 북방 경비의 방략을 듣기 위해 방문했다. 이때 율곡은 사경을 헤매는 병환으로 붓조차 잡을 수 없었지만 아우를 시켜 「육조방략(六條方略)」을 쓰게 하였다. 그 뒤 곧 혼수상태에 빠졌는데, 그날 저녁 부인의 꿈에 흑룡(黑龍)이 침실에서 나와 하늘로 날아올랐다고 한다. 다음 날 율곡이 죽자 임금은 물론 원근의 선비들과 서민, 저 시골의 농부들까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애도하였다. 특히 그의 친구 송익필은 생전에 자신을 알아주었고 나라를 위해 큰 정치를 펴리라 기대했던 율곡의 영전(靈前) 앞에서 애끓는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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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율곡 이이 묘 / 파주 이이 유적지, 율곡 이이 가족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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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율곡 이이 신도비

 

  파주 자운산에 안장된 율곡은 인조 2년(1624년)에 문성(文成)13이란 시호(諡號)를 받았고 숙종 8년(1682년)에는 문묘에 배향(配享)되었다. 그리고 파주의 자운서원과 강릉의 송담서원, 풍덕의 귀암서원 등 전국 20여 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율곡 이이의 졸기(卒記: 죽음에 대한 기록)에, “이(珥)는 성품이 매우 탁월하고 수양이 매우 깊어서 명랑하고 화기에 찼으며 평탄하면서도 영단이 있었다. 대인접물(對人接物)에서 오직 성신(誠信)으로 일관하였고, 남이 싫어하고 좋아함에 개의치 않았다.…(중략)…그가 죽은 후에 그의 예언이 모두 들어맞았고, 그가 건의한 정책은 후에 모두 채택되었다.”라고 적혀 있다.  

  율곡은 16세기 전반에 펼쳐졌던 다양한 성리학 이론을 체계화하여 독특한 사상을 전개했던 성리학자였다. 그는 가장 바람직한 정치란 백성의 경제생활을 넉넉히 한 다음 교화하여 도리와 인륜을 깨닫게 하는 것이라 믿었다. 조정에서는 시대에 맞지 않는 법과 제도를 개혁하여 국정을 바로 잡고 백성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관직에서 물러나 있을 때는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활동에 몰두하며 지역사회의 계도에도 앞장섰다. 이처럼 율곡 이이는 이념과 현실의 조화를 통해 민생을 안정시키고 부강한 나라를 만들고자 헌신했던 대학자였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참고문헌】

『전경』

『대순지침』

『율곡전서』

『퇴계전서』

『명종실록』

강재언, 『선비의 나라 한국유학 2천년』, 경기: 한길사, 2003.

금장태, 『율곡평전: 나라를 걱정한 철인』, 서울: 지식과교양, 2011.

김언수, 『율곡 10만 양병론의 진실』, 서울: 태봉, 2011.

김태완, 『율곡문답』, 서울: 역사비평사, 2008.

이광주, 『고대의 명인 율곡과 임란 일화』, 《대순회보》 66, 2007. 

이이 저, 탁양현 옮김, 『가장 조선인다운 조선인 율곡 이이의 정치철학-위정(爲政)1』, 서울: 퍼플, 2014.

이재호, 「선조수정실록 기사의 의점에 대한 변석」, 『대동문화연구』 19, 1985.

정옥자,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 서울: 현암사, 2002.

최기옥·김삼본, 『세계를 움직인 인물들-이이』, 서울: 범한, 2006.

한정주, 『율곡, 사람의 길을 말하다』, 서울: 위즈덤하우스, 2008.

황의동, 『율곡 이이』, 경기: 살림, 2007.

황의동, 『이율곡 읽기』, 서울: 세창미디어, 2013.

황준연, 『이율곡, 그 삶의 모습』,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대순회보> 1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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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고려ㆍ조선 시대에, 임금이 학문을 닦기 위하여 학식과 덕망이 높은 신하를 불러 경서(經書) 및 왕도(王道)에 관하여 강론하게 하던 일. 또는 그런 자리. 왕권의 행사를 규제하는 중요한 일을 수행하였다.[국립국어원(http://www.korean.go.kr/): 표준국어대사전]

02 『대순지침』, p.41.

03 『율곡전서』, 권33, 「연보(年譜)」.

04 진복창(陳復昌, ?-1563)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척신 세도가였던 소윤 윤원형(尹元衡)의 심복이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 때 대윤에 속한 사림의 숙청에 크게 활약하여 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자 사관(史官)들은 그를 ‘독사(毒蛇)’라고 기록했다. 1550년에는 자기를 추천해 준 구수담까지 역적으로 몰아 사사(賜死)하는 등 윤원형이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앞장서서 옥사를 일으켜 제거했으므로 ‘극적(極賊)’이란 혹평까지 들었다. 대사헌을 거쳐 1560년 공조참판에 올랐으나 윤원형마저 그를 ‘간교ㆍ음험한 인물’로 평하며 배척하여 결국 파직과 유배를 당한 후 귀양지에서 죽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05 『明宗實錄』, 明宗 21년 3월 24일조. “이이는 어려서부터 이미 문장으로 이름이 있었고, 일찍 모친상을 만나 장례를 치르는 데 정성이 지극하였다. 그 부친의 첩이 그를 사랑하지 않았고, 또 부친은 일찍부터 불교경전을 좋아하였다. 율곡의 나이 16, 17세 때에, 어떤 중이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해 복(福)을 빈다는 이야기로 그를 유혹하였으므로, 그는 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의복을 정돈하여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06 『퇴계전서』, 권23, 「답조사경(答趙士敬) 戊午」

07 조선시대 언론을 담당한 사헌부와 사간원, 홍문관을 말한다.

08 조선시대 삼정(三政) 가운데 하나로, 정남(丁男)으로부터 군포(軍布)를 받아들이던 일.

09 여기서 율곡은 어질고 유능한 인재를 등용할 것, 군사와 백성을 양성할 것, 재용(財用)을 풍족히 할 것, 변방의 방비를 굳건히 할 것, 전마(戰馬)를 준비할 것, 교화를 밝힐 것 등 6개 항목을 제시하였다. 황의동, 『이율곡 읽기』 (서울: 세창미디어, 2013), p.63.

10 『율곡전서』, 권34, 부록2, 「연보(年譜)」.

11 이에 관한 기록들은 그의 문인(門人)인 사계 김장생이 저술한 「율곡행장」과 우암 송시열이 편찬한 「율곡년보」, 백사 이항복이 저술한 「율곡신도비명」 등에 큰 차이 없이 수록되어 있다. 이재호, 「선조수정실록 기사의 의점에 대한 변석」, 『대동문화연구』 19 (1985), pp.197-199. 

12 조선시대에 국가의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고 문운(文運)을 진작시키기 위해서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한 제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3 도덕과 사물을 널리 들어 통했고, 백성의 안위를 살펴 정사의 근본을 세웠다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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