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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인물한고조 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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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18 조회4,68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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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위원 백경언

 

  하루는 종도들이 상제의 말씀을 좇아 역대의 만고 명장을 생각하면서 쓰고 있는데 경석이 상제께 “창업군주도 명장이라 하오리까?” 고 여쭈니 상제께서 “그러하니라” 말씀하시니라. 경석이 황제(黃帝)로부터 탕(湯)ㆍ무(武)ㆍ태공(太公)ㆍ한고조(漢高祖) 등을 차례로 열기하고… (공사 1장 3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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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고조 유방 / wikipedia.org

 

  한고조 유방(劉邦, 기원전 246 ~ 기원전 195)은 패현(覇縣) 풍읍(豊邑) 중양리(中陽里) 사람으로 기원전 206년, 현대 중화(中華) 문화의 토대가 되는 한(漢)나라를 건국하였다. 그의 이름은 『사기』 고조본기(高祖本紀)에 성(姓)은 유씨(劉氏)고 자(字)는 계(季)라고 표기되어있다. 그러나 계가 형제의 순서를 나타내는 백(伯)·중(仲)·숙(叔)·계(季)의 하나로 막내를 지칭하는 용어인 것을 고려하면 그의 이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방(邦)이라는 이름은 본기(本紀)는 물론 『사기』 전체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방은 후한(後漢) 시대 순열(荀悅, 148 ~ 209)의 한기(漢紀)에 비로소 나오는 이름이다.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 1923~1996)01는 『項羽と劉邦』에서 ‘방’은 ‘형님’이라는 뜻의 방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유방이라는 이름도 ‘유 형님’이라는 호칭에 지나지 않는 셈이 된다. 이름이 없다는 결론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가 문득 천신(天神)을 만나 교합하는 꿈을 꾸고 그를 잉태하였다 한다. 유방은 콧마루가 오뚝하고 이마가 용의 이마처럼 튀어나왔으며 잘 생긴 수염이 아름다워 소위 ‘용안(龍顔)’이라 불리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왼쪽 넓적다리에는 72개의 까만 점이 있었는데 이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천성적으로 성격이 활달하고 명랑할 뿐 아니라 자신을 따르는 자에게 베풀기를 좋아했던 그는 일반 생산 직업에는 종사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의협심이 강하고 용맹스러운 자라는 임협(任俠)의 무리로 천민이나 백정을 가리지 않고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19세에 소하(蕭何,  ? ~ 기원전 193)의 덕으로 관리 임용시험에 응시하여 사수(泗水)의 정장(亭長) 직무 견습으로 채용되어 봉급을 받는 신분이 되자 하루가 멀다고 술집을 공공연히 들락거렸는데 유방이 술값을 낸 것은 이 시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패현의 정장에 취임해서는 통행세 비슷하게 받은 물품들을 자신의 것으로 취하지 않고 남이 원하기 전에 조건 없이 주어 인기가 높았다. 주모들도 그를 좋아했는데 유방이 주막에 와서 술을 마시는 날이면 서로 술값을 내겠다는 사람이 많아지고 술은 평상시보다 몇 배씩이나 팔렸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로 인해 “베푸는 것을 좋아하고 관인대도(寬仁大度)02하다.” 는 평판이 패현을 넘어 사수군(泗水郡) 일대로 퍼졌다. 

  패현에서의 정장 생활은 유방의 세계를 단숨에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패현 지방은 원래 위·초·제 등 세 나라의 접경지였다가 진(秦)에게 연달아 패하여 일종의 권력 공백이 있는 곳이었다. 이곳의 현령 또한 진(秦)이 임의로 앉혀놓은 인물에 불과하여 사실상의 권력은 지방의 호걸이나 난민들이 공유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호걸들의 인기를 얻고 주변의 정보를 장악하며 지역의 치안 유지를 담당하는 정장은 자신의 무력행사에 공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 사실상 지역의 실권자가 되는 자리였다. 이런 이유로 유방은 현의 관청에 나와 현령(縣令)이든 현승(縣丞)이든 안중에 없이 행동하였다. 『사기』「고조본기」에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현아 내의 관료들을 허물없이 희롱했다.” 

 

  관아의 관리 중 그에게 짓궂은 놀림을 당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는 남의 호감을 얻고 무리를 이끄는 특이한 자질이 있어 관료가 되자 순식간에 관록을 몸에 달고 두목 행세를 하고 다녔다. 이에 대해 풍패의 호걸들이 그와 안면이 있음을 영광으로 여겨 자랑하고 다닐 뿐 아니라 나이 많은 관료들까지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였다. 차차 그는 지역사회에서 옹치, 왕릉, 소하, 조참, 조무상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만만치 않은 인물이 되어갔다.

  유방이 23세 되던 시황제 32년(기원전 215)에 만리장성 축성이 개시되자 화북(華北)의 민중과 죄수가 동원되었다. 35년(기원전 212)에는 아방궁과 여산(驪山)의 수릉(壽陵) 조영이 개시되어 화중(華中)에서도 동원되었다. 『사기』에는 그 수가 70만 명에 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라 유민이 격증하고 사회불안이 급격하게 확대되었다. 유방도 정장의 신분으로 죄수들을 이끌고 여산으로 압송하게 되었는데 도중에 많은 죄수가 도주하였다. 『사기』에 유방은 죄수들이 여산에 도착하기 전에 모두 달아나 버리리라 예측하고 풍읍 서쪽 늪지대에 이르러 연회를 열고 인부들을 풀어준 뒤 자신도 도망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도중에 길을 가로막고 있던 거대한 흰 뱀을 베었는데 그 어미가 나타나 “내 아들은 백제의 아들인데 방금 적제의 아들이 죽였다.” 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유방은 지금 하남성(河南省)의 영성(永城)과 안휘성(安徽省) 탕산(碭山) 사이인 망(芒)·탕(碭)의 소택지에 숨어 지냈다. 그런데 부인 여치(呂雉)는 사람들과 함께 남편이 있는 곳을 금방 찾아냈다. 이를 이상히 여긴 유방이 어떻게 찾았느냐고 묻자 여치는 “당신이 숨은 곳 위에는 언제나 운기(雲氣)가 감돌고 있어 그 구름만 따라가면 당신을 찾아낼 수 있다.”고 대답했다. 유방은 자신이 결코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 인식하게 되었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갈수록 점점 더 그를 경외(敬畏)하기 시작했다. 이때가 『사기』에 시황제가 “동남 방향에 천자의 기가 떠오른다.”며 이를 누르기 위해 동쪽으로 유람을 계속했다는 시기다. 유방은 시황제가 없애려는 천자의 기운이 자신이라 의식하고 마지막 순수(巡狩)가 시작되던 시황제 37년 10월에도 소택지에 몸을 꼭꼭 숨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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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고조 유방 입상/ 중국 

 

  기원전 209년 진시황이 죽고 호해(胡亥)가 등극한 가을, 진승(陳勝)의 무리가 기현(蘄縣)에서 봉기하여 국호를 장초(張楚)라 하니 초(楚) 지방에 민족적 공감의 폭풍을 불러일으켰다. 각 군현의 여러 지방에서는 관리를 죽이고 이에 호응하였다. 패현의 현령도 두려운 나머지 진승에게 호응하려 하자 성안의 어른들이 젊은 자제들과 힘을 합해 현령을 죽이고 유방을 패현의 현령으로 추대하였다. 유방은 관아에서 초지방 사람들의 수호신인 치우(蚩尤)에게 제사를 올려 민심을 결속하였다. 치우는 초지방의 민중에게 두터운 신앙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208년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 초(楚)의 대장군(大將軍)으로 진(秦)에 맞섰던 명장(名將) 항연(項燕)의 아들 항량(項梁)이 스스로 회계 군수에 올라 병사들을 모으고 항우(項羽)를 부장(部將)으로 삼아 군세가 삽시간에 6~7만에 이르자 유방은 여기에 합세하였다.

  그해 6월 항량에 의해 추대된 초회왕이 항우(項羽)와 여신(呂臣) 양대 군단의 지휘권을 장악하고 조(趙)를 구원하기 위해 송의(宋義)를 상장군으로 항우를 차장으로 범증을 말장에 각각 임명하여 북으로 진격하게 하고 유방에게는 서쪽의 관중(關中)을 향하여 진군하도록 하였다. 유방군은 탕(碭)을 출발점으로 하여 거야(鉅野)의 못 서쪽에 있는 성양(城陽)까지 북상했다. 성양에서 조나라의 한단을 포위하고 있는 장함군의 남방 방위선을 돌파하고 다시 창읍(昌邑)에서 팽월(彭越)을 만나 힘을 합쳐 진군을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못했다. 유방은 창읍을 그대로 두고 서쪽으로 계속 진군하였다. 이 도중에 고양에서 역이기(酈食其)와 그의 동생 역상(酈商)을 부하로 추가하게 되었는데 역이기는 참모겸 외교관으로, 역상은 장군으로 활약하여 공을 세웠다. 서쪽으로 진격하는 도중에 진의 장군 양웅(楊熊)과 백마(白馬)에서 교전하고 다시 곡우(曲遇)에서 맞붙어 진군을 대파하였다.  

  유방은 남쪽을 공격하여 영양(潁陽)을 도륙한 뒤 장량(張良)의 협조를 받아 한(韓)의 환원(轘轅)을 점령하였다. 승세를 몰아 남양군(南陽郡)을 점령하자 여의(呂齮)는 완성(宛城)으로 달아나 그곳을 지켰다. 대치가 여러 날 계속되는 속에서 남양 군수의 심복이었던 진회(陳恢)가 유방을 만나 남양 군수에게 투항을 권하고 그를 후(侯)에 봉하여 남양에 계속 머물게 한다면 다른 성(城)들도 다투어 투항할 것이라 조언했다. 유방이 이에 흔쾌하게 동의하고 완성의 군수를 은후(殷侯)에 봉하고 진회에게 일천 호를 하사했다. 이후 대군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진격하자 성마다 투항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조고는 호해를 시해한 뒤 유방에게 사람을 보내 관중을 분할하여 각자 왕이 될 것을 제안하였다. 이를 기만책으로 여긴 유방은 역이기와 육가를 보내 유인책을 써서 진의 장군들을 설득하는 한편 기회를 틈타 무관(武關)을 기습하여 진군을 대파했다. 또 남전 북쪽에서도 대승을 거두고 승세를 몰아 진군을 완전히 격파했다. 기원전 206년 유방은 여러 제후보다 앞서 지금의 서안시 동남쪽 패상에 이르렀다. 진왕 자영(子嬰)이 황제의 옥새와 부절(符節)을 받들고 지도(軹道)에서 유방에게 항복하였다. 뭇 장수들이 진왕을 죽여야 한다고 한 소리를 냈으나 유방은 항복한 자에게 살육을 자행하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다고 반대했다. 함양에 입성한 그는 번쾌와 장량의 건의를 받아들여 궁전의 각종 보물과 재화가 들어 있는 창고를 봉인한 후 패상으로 물러나 주둔하였다. 

  유방은 인근 각 현의 부로(父老)들과 명망 높은 인사들을 불러 모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로들이 진왕조의 가혹한 형벌과 엄한 법에 시달려 온 지 오래되었습니다. 조정을 비판하는 자는 멸족을 당하고 여럿이 모여 의논만 해도 참수를 당하였습니다. …저는 오늘 어른들께 법령 세 가지만 약조하겠습니다. 사람을 죽일 경우는 사형에 처하고 사람을 다치게 할 경우나 물건을 훔칠 경우에는 법에 따라 죄를 다스리겠습니다. 이외에 진왕조의 법은 모두 폐지하니 관리들과 백성들은 안심하고 여느 때와 같이 생업에 종사하십시오. 제가 여기에 온 것은 그대들의 폐해를 없애주려는 것이지 결코 그대들을 침탈하려 함이 아닙니다. 바라건대, 모두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말하고 각 현의 읍과 도시 및 지방에 진 왕조의 관리를 보내어 이를 널리 알렸다. 그러자 관중의 백성이 기뻐하여 다투어 양(羊)을 잡아 병사들을 위로해 주려 하였다. 유방은 백성들이 따로 비용이 들것을 염려하여 이를 사양했다. 그러자 백성들은 뛸 듯이 기뻐하면서 유방이 진왕(秦王)이 되지 못할까만을 걱정하였다. 

  그해 11월 중순 항우는 제후의 군대를 거느리고 드높은 기세로 함곡관에 입성하려다가 유방이 이미  관중을 평정하고 관문을 굳게 닫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크게 분노했다. 이때 유방의 좌사마 조무상마저 항우에게 사람을 보내 “유방이 관중에서 왕 노릇 할 뜻으로 자영을 재상으로 삼고 금은보화를 모두 차지하려 한다.” 고 이간했다. 그로 인해 유방은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 이때 장량에게 빚을 지고 있던 항백(項伯)이 몰래 유방을 만났다. 항백은 유방에게 항복을 권했다. 이를 받아들인 유방은 이튿날 아침 장량·번쾌·하후영·근강·기신 등 100여 기만을 대동하고 항우군이 주둔하고 있는 홍문정(鴻門亭)으로 가서 항우를 만나 직접 사과하였다. 

 

  신은 장군과 힘을 합쳐 진나라를 공격했습니다. 장군은 하북에서 싸우고 신은 하남에서 싸웠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신이 먼저 무관을 돌파하여 진나라를 항복시켰는데, 여기에서 다시 장군을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소인배의 중상모략에 의해 장군과 신 사이에 오해가 생겼습니다.

 

  항우는 말했다. “이것은 당신의 좌사마 조무상이 나에게 말했기 때문이오.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내가 이런 오해를 했겠소!” 항우는 모든 것을 조무상의 중상모략 때문에 벌어진 일로 치부하고 유방을 위하여 연회를 열어주었다. 유방은 한번 무릎을 꿇음으로써 위기에서 벗어나 후일 천하를 차지하는 기회를 만들었다. 유방은 군영에 돌아오자마자 즉시 조무상을 처형하였다. 기원전 206년, 항우가 진을 멸망시키고 유방을 한왕으로 분봉(分封)했다. 4월에 이르러 유방이 봉지(封地)로 행했다. 이때의 모습을  『사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한왕이 봉국(封國)으로 가는데 항우가 병졸 3만을 주어 따르도록 했다. 초와 제후 가운데 흠모하여 따르는 자 수만 명이 두현(杜縣)의 남쪽에서 식중(蝕中)으로 들어갔다. 식(蝕)은 한중으로 들어가는 산골짜기 길 이름이다. 한왕은 군대를 통과시키고 난 후 잔교(棧橋)를 불태웠다. 외부의 기습을 방비하는 것은 물론, 동쪽으로 진군할 뜻이 없음을 초왕에게 표시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 한신(韓信)이라는 인재를 얻어 불과 넉 달 만에 초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동진(東進)하였다. 초·한전(楚·漢戰) 5년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순식간에 관중 일대를 정복하자 수많은 제후들이 투항하였다. 다음 해 정월에는 섬현(陝縣)에 도착하여 부로(父老)들을 위로하고 3월에는 초회왕 의제의 피살을 항우 토벌의 명분으로 삼았다. 그러나 한왕은 싸움이라는 싸움에서는 모두 다 항우에게 패했다. 다만 천신만고 끝에 뛰어난 부하들의 노력이 있어 차차 항우를 압박해 나갈 수 있었다.  

  기원전 203년 8월, 팽월의 기습과 한신의 공격으로 당황한 항우가 화친을 제의했다, 황하와 회수(淮水)를 연결하는 운하를 경계로 서쪽은 한(漢)이 동쪽은 초(楚)가 차지하자는 제안이었다. 일단 화의가 성립됐으나 한왕은 장량의 계책을 받아들여 항우를 추격하였다. 한(漢) 5년(기원전 202) 12월 한왕과 제후의 연합군이 해하(垓下)에서 초군을 공격하였다. 밤에 한군의 진영에서 초나라 노랫소리가 들려오자 초군이 뿔뿔이 흩어지니 한왕은 기장(騎將) 관영(灌嬰)을 내보내 패주하는 군사를 동성(東城)까지 추격하여 팔만의 병사를 참수하고 초 땅을 완전히 점령하였다. 항우는 노공(魯公)의 예의에 따라 곡성(谷城)에 장사지내 주었다. 유방이 바야흐로 초를 섬멸하고 명실 공히 천하의 패자가 된 것이다.

  천하를 평정한 기원전 202년 정월에 제후·장군·재상 등은 일체(一體)가 되어 유방을 황제로 추대했다. 이에 한왕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황제라는 명호는 어진 덕을 갖춘 자만이 앉는 자리로 알고 있다. 지금 나의 덕은 황제가 되기에 부족하다. 유명무실한 행위는 내가 좋아하는 바가 아니다. 황제의 자리는 사양하고자 한다.   

 

  그러나 신하들은 대왕이 공을 세운 자들에게 토지를 하사하고 왕후로 봉했는데 황제의 명호를 접수하지 않는다면 백성이 봉후(封侯)를 신뢰하지 않아 민심이 동요할 것이라며 건의를 받아들일 것을 간언하였다. 한왕이 재삼 사양하다가 하는 수 없이 이를 수락하였다. 이로써 유방은 기원전 209년 진나라 이세 황제 원년으로부터 시작된 천하통일을 종식시키며 황제에 등극했다.  낮은 신분으로 일어난 유방이 마침내 마상(馬上)에서 천하를 얻은 것이다.

기원전 195년(한 12년) 회남왕(淮南王) 경포(黥布)가 반란을 일으켰다. 한고조는 황제가 된 후에도 스스로 장수가 되어 반란을 진압하러 나섰는데 회추(會甀)에서 경포의 군대를 격파했다. 경포가 달아나자 장수를 파견하여 추적케 하고 자신은 귀경 중에 고향 패현에 들렀다. 이곳에서 부로 형제와 친구, 친척들을 모시고 십여 일을 마음껏 마시며 지난 일을 화제로 삼아 담소했다. 취흥이 한창 무르익자 고조는 축을 켜며 자신이 지은 노래를 읊었다.

 

 

  큰바람이 일어 구름이 흩날리듯             大風起兮雲飛揚

  천하에 위세를 떨치고 금의환향 하였네      威加海內兮歸故鄕

  어떻게 용사를 얻어 천하를 지킬꼬            安得猛士兮守四方

 

  고조는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가 떠나려 하자 패현 사람들은 현이 텅 비도록 물건을 들고 마을 서쪽까지 따라와 그에게 바쳤다. 얼마 후, 재차 경포를 정벌하러 나섰다가 돌아오는 길에 화살에 맞아 병세가 위중해졌다. 병세를 살피던 의원이 “폐하의 병은 나을 수 있습니다.”고 하자 고조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는 일개 평민의 신분으로 세 척의 보검을 들고 천하를 얻었으니 이 어찌 천명이 아니겠느냐? 사람이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은 모두 하늘에 달려 있는 법이거늘, 설사 편작이 온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한고조는 치료를 받지 않고 의원에게 황금 오십 근을 하사하고 돌려 보냈다. 한고조 유방은 기원전 195년 4월 갑진일 장락궁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신하들이 제왕의 호를 고쳐 고황제(高皇帝)라 했다. 군과 제후국의 제후들에게는 각자 고조의 사당을 세워서 매년 때맞춰 제사 지내게 했다. 훗날 석륵(石勒, 274 ~ 333)03은 자신을 한고조에 비교하는 신하의 말에 웃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말도 안 되는 아첨일랑 집어치워라. 짐이 만약 한나라 고조를 만났더라면 기꺼이 그의 신하가 되어 그의 지휘를 받으며 한신이나 팽월과 같은 장군들과 실력을 겨루었을 것이다.”04 자부심이 강했던 인재들조차 한고조를 평한 말은 이와 대동소이하다. 영웅호걸을 매료시키고 심복(心腹)시켰던 그의 성품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글을 마치면서 창업군주 한고조 유방의 업적을 가능하게 했던 면을 정리해 보면 애민(愛民)과 소통(疏通), 나아가 자신은 ‘적제(赤帝)의 아들이다.’라는 내면의 자각(自覺)이지 않을까 한다. 그는 진나라의 수도를 취한 뒤 백성의 편의를 위하여 약식(略式)으로 3법만을 공포했다. 왕궁을 지을 목재로는 백성들의 집을 수리하게 하였다. 천민으로 태어나 백성들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알고 그들과 한 덩어리가 되어 여민동락(與民同樂)한 입장이다. 그리고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히 인정하면서 어떠한 경우라도 수하(手下)의 말을 경청(敬聽)하고 따랐다. 이러한 소통으로 그는 천하의 인재들을 불러 모았다. 그러나 그에게 작용한 가장 큰 힘은 내면으로부터 솟구쳐 오르는 자신에 대한 확신이 아닐까 한다. 진시황이 동쪽에 천자(天子)의 기운이 있다며 순시를 계속할 때 자신을 바로 그 존재라고 여겨 소택지에 몸을 숨겼던 유방이다. 하늘의 뜻이 자신에게 있다는 이러한 자각은 수많은 고난을 극복하고 천하를 평정할 때까지 크게 작용했으리라고 본다.

 

【참고문헌】

『전경』,

사마천, 『사기본기』, 김원중 역, (서울, 민음사, 2011)

사마천, 『사기본기』, 박일봉 역, (서울, 육문사, 2012)

사타케 아스히코, 『유방』, 권인용 역, (서울, 이산, 2007)

『二十五史 2』, 上海書店, (상해, 상해서적출판사, 1986)

<대순회보> 1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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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본명은 후쿠다 데이이치로 『후쿠로노시로』,『료마가 간다』를 위시해 역사소설로 명성을 떨쳤다.

02 마음이 너그럽고 어질며 도량이 크다는 말로 장량이나 한신 같은 인재가 유방을 평할 때 ‘하늘이 내려주셨다’고 평한 기질이다. 이 자질을 『사기』나 『한서』에서는 ‘관인대도(寬仁大度)’라 하였다.

03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시대 후조(後趙)의 창건자 

04 『二十五史 2』,  『晉書』,「石勒載記 下」上海古籍出版社, p.322. 勒笑曰人豈不自知卿言亦以太過朕若逢高皇當北面而事之與韓彭競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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