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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인물주자(朱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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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18 조회4,70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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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말 어진화가 채용신의 주자 초상 이미지출처 / 한국미술정보센터 

 연구원 전성기

 

  또 어느 날 상제께서 말씀하시길 “선도(仙道)와 불도(佛道)와 유도(儒道)와 서도(西道)는 세계 각 족속의 문화의 바탕이 되었나니 이제 최 수운(崔水雲)을 선도(仙道)의 종장(宗長)으로, 진묵(震黙)을 불교(佛敎)의 종장(宗長)으로, 주 회암(朱晦庵)을 유교(儒敎)의 종장(宗長)으로, 이마두(利瑪竇)를 서도(西道)의 종장(宗長)으로 각각 세우노라”고 하셨도다. (교운 1장 65절)

 

  위 구절은 상제님께서 혼란에 빠진 세계 창생을 구하고 영원한 상생의 후천선경을 건설하시는 과정에서 종장을 새롭게 정하는 공사를 행하셨음을 알려준다. 이는 상제님께서 해원상생의 대순진리에 기반하여 세계 각 종교와 문화를 이끌어 가기 위한 신명 공사의 일환이라 생각된다. 이를 통하여 인사의 상도를 세움으로써 인륜도덕을 바로 세우시려는 상제님의 뜻은 유교적 토대를 전제하므로 유교의 종장으로서 세워진 주희(朱熹)의 삶을 살펴보는 것은 사뭇 그 의미가 깊다 할 것이다.   

 

생애와 학문

  주희(朱熹, 1130-1200)는 남송 시대 복건성(福建省) 출신으로 자(字)는 원회(元晦)와 중회(仲晦), 호(號)는 회암(晦庵)·백록동주(白鹿洞主)·운곡노인(雲谷老人) 등이다. 그는 고종(高宗) 건염 4년에 태어나 영종(寧宗) 경원 6년까지 생존했다. 그는 사후(死後)에 문관으로서 최고의 영예인 ‘문(文)’이라는 시호를 받아 주문공(朱文公)이라 불리기도 하였지만, 학식과 인품을 기리는 뜻에서 주자(朱子)라고 칭하게 되었다. 성리학을 집대성하여 유학의 부흥을 이루었으며 동양철학사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던 학자이다.

  주자가 살던 시대는 만주의 금(金)나라에 의해 송나라가 양쯔강 이남으로 쫓겨 내려와 지속적으로 금의 압박에 시달리던 정국(政局)이었다. 당시 남송의 조정에서는 금에 대한 화친(和親)과 주전(主戰)을 둘러싼 대립이 계속되었는데 주자의 아버지인 주송(朱松)은 금과의 굴욕적인 화친에 반대하다가 결국 화친론에 밀려 복건성(福建省)의 요주(饒州) 지사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주송은 지방관에 취임할 의사가 없어서 태주(台州) 숭도관(崇道觀)의 관리직을 얻어 건안에 칩거하면서 학문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이때 주자가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대한 탁월한 열정과 성인을 향한 꿈을 지닌 영특한 소년이었다. 4살 때 아버지가 “보아라 저것이 하늘이란다.”라고 하자, 주자는 “하늘 위에는 무엇이 있습니까?”라고 되물어 아버지를 놀라게 했고, 5세에 『천자문』을 읽었고, 8세에는 『효경(孝經)』을 배워 한 번 보고 그 책 위에 “이처럼 하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다.”라고 썼다고 전해진다. 또 언젠가 친구들과 노는데 주자만이 단정히 앉아 손가락으로 모래 위에 무언가를 그렸는데 그것은 바로 팔괘(八卦)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10여 살 때 『맹자』를 읽고 “성인은 나와 동류이다.”01라는 말씀에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며 자신도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 후 주자는 아버지로부터 3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북송의 정자학(程子學), 이른바 도학(道學)을 전수받았고 사상, 문학, 시, 역사 등에 관한 지식도 섭렵하였다. 소년 시절 공부는 『논어(論語)』·『맹자(孟子)』·『대학(大學)』·『중용(中庸)』을 중심으로 하였다. 14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의 일가는 복건성 북부 숭안현(崇安縣)으로 거취를 옮겼다.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유언대로 주자는 정학(程學: 정호·정이의 학문)을 익힌 세 스승02을 모시고 학문을 도야하였다. 이들은 유학뿐만 아니라 불교와 도교를 비롯하여 다른 학문에도 개방적이어서 주자는 자연스럽게 유학은 물론 선(禪)과 노장(老莊), 문학, 초사(楚辭), 병법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17~18세 때에는 『중용』·『대학』을 읽었는데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반드시 10번을 읽었다고 한다.

  주자는 본래 벼슬을 원하지는 않았으나 모친의 봉양과 경제적 자립을 위해서 과거를 치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18세에 지방 예비시험인 해시(解試)를 통과하고, 다음해에 치른 본시험에서는 330명 중 278번째로 합격하여 출사(出仕)의 자격을 얻는다. 그의 과거성적이 저조했던 이유는 그의 학문이  문장의 암기나 색채에 연연하는 과거 시험과 같이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도덕적 완성을 목표로 한 것03이었기 때문이다. 또 대금 화친파(和親派)들이 권력을 잡은 상황에서 강경론을 펼친 그의 답안이 높이 평가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5년 후, 주자는 천주(泉州) 동안현 주부(主簿)에 부임하러 가던 중 정이(程頤)의 삼대 제자인 이동(李洞, 1093~1163, 연평선생)을 방문하고 이후 몇 차례의 만남을 통해 북송 이학(理學)과 심법(心法)에 관한 정수를 전수받게 된다. 이를 계기로 주자는 선학(禪學)을 버리고 유학의 본령(本領)인 도학(道學)에 전념하는 학문적 전환점을 얻게 되었다. 동안현 주부(主簿)로 부임한 주자는 관료로서 자신의 임무 수행에도 매우 성실했다. 세금징수를 할 때는 현(縣)의 곳곳에 미리 고시(告示)하여 체납하는 일이 없도록 했고 상인이나 재력가들이 농민들의 토지를 매수하여 경작권마저 뺏는 횡포를 철저히 막았다. 그리고 덕있는 선비를 초빙하여 훌륭한 선생을 확보하고 우수한 주민을 학생으로 삼아 직접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道)를 가르쳤다. 또한 경사각(經史閣)이라는 도서관을 세워 학자들이 열람할 수 있도록 했으며 예(禮)로써 풍속을 교정하고 법률을 제정하여 사회의 혼란을 방지하는 등 부임한 현의 경제적 생활의 안정과 문화, 교육의 진흥에 주력하였다.

  동안현에서 4년간의 임기를 마친 주자는 28세에 사록관04을 청하여 임명되었고 이후 고향에서 약 20년간 독서와 저술, 제자 교육에 힘썼다. 그의 주된 저서는 대부분 이 시기에 씌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은거 중에도 경세(經世)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니 때때로 황제에게 봉사(封事)05를 올려 성군이 되어 덕업을 세우길 충언했으며, 인재등용과 사회기강 확립 및 민생 안정과 북방 정책 등을 제시하곤 하였다. 34세에 남헌(南軒) 장식(張栻, 1133~1180)을 만났다. 이후 그를 실제로 대면한 것은 두 차례에 불과했지만 약 20년간이나 서신(書信)으로 학문적 교류를 이어갔다. 이를 통해 주자는 연평의 정적(靜的)인 함양(涵養)공부를 바탕으로 동적(動的)인 찰식(察識: 살펴서 깨달음) 공부를 가미시켜 성품을 기르는 수양공부06를 완성하게 된다. 40대에는 식견이 넓었던 친구 여조겸(呂祖謙)과 함께 『근사록(近思錄)』07을 간행하였다. 

  저술을 완성한 후 주자는 여조겸의 주선으로 신주(信州)08 아호사(鵝湖寺)에서 같은 도학자로서 학문적으로 대립하던 육구연(陸九淵, 1139~1192)09 형제와 만나 3일간 학문하는 방법에 대해 토론을 한다.10 육씨 형제는 먼저 사람의 마음에 리(理)가 있으므로 인간의 본심(本心)을 밝힌 후 경서(經書)를 읽고 사물의 이치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대로 주자는 옛 성현의 언행이 기록된 경서를 폭넓게 읽고 난 후 그것을 집약함으로써 이치에 통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 후로도 주자는 육구연과 한 차례 더 논쟁11을 벌였는데 이런 이질적인 사상과의 대결을 헤쳐 나가며 자신의 사상적 구조를 한결 선명하게 정립해 나갔다.

  49세 때는 남강군 지사로 부임하여 2년간 재직하면서 학교제도의 정비와 향토 선각자들의 유적 발굴과 그들에 대한 표창 그리고 피폐한 지역의 감세(減稅)를 요청하고 장강(長江)의 제방을 수축했으며 심한 가뭄 때는 대책 마련에 분주하였다. 또한 백성의 교화를 위해 북송의 제현(諸賢)들과 향촌 인사들의 사당을 세웠으며, 백록동 서원을 재건하여 학생들을 가르치게 하며 인재육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처럼 그의 학문은 이론에만 머물지 않고 항상 현실을 향해 열려 있었다. 

  53세에는 기아에 허덕이던 절동(折東) 지역에 파견되어 가뭄과 수해에 따른 기근대책을 마련하고자 동분서주했다. 그의 노력으로 백성들의 식량사정은 조금 나아졌으나, 여전히 식량이 부족하고 역병이 유행하여 죽어가는 사람들을 모두 구제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그는 기근에 대비하는 사창제도의 실시를 조정에 건의하였고 관내를 순시하며 불법으로 조세(租稅)를 징수하거나 공금을 횡령한 자들을 탄핵했다. 이들 중에는 중앙의 권세가를 친인척으로 둔 자도 있어, 조정에서 주자와 그의 학문에 대해 비판이 거세지게 하였다.

  주자는 장주에 부임해서는 예교(禮敎)를 백성에게 가르치고 잘못된 풍속을 고쳤다. 여러 가지 개혁 중에서 경계법(經界法)이라는 토지개혁이 특히 중요하였다. 관료와 결탁한 부호들의 토지겸병과 점유전(占有田)의 은닉은 빈농의 생활압박과 재정악화로 송대 사회의 큰 폐단이었기 때문이다. 귀향하여서는 『역학계몽(易學啓蒙)』·『효경간오(孝經刊誤)』·『시집전(詩集傳)』 등을 저술했고 무이산 계곡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학문 연구와 교육에 온 힘을 기울이니 그의 제자들이 천하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64세에 중앙 관직에 진출하게 된 주자는 영종(寧宗)의 측근이 되어 황제부터 유학에 매진할 것과 인사·행정·국방 등에 관한 정책을 올렸으며, 주야(晝夜)로 영종에게 학문을 강의했다. 주자가 영종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권신(權臣)들이 그를 45일 만에 파면시켰다.

  그 후 정쟁(政爭)의 소용돌이 속에서 주자의 도학은 위학(僞學)12으로 몰려서 그를 비롯한 성리학자들이 요직에서 쫓겨나고 그들의 책도 모두 금기시 되었다. 이는 그의 생애 최악의 수난이었던 ‘위학(僞學)의 금(禁)’으로 알려진 가혹한 탄압의 시작이었다. 이런 역경 속에서도 주자는 강학과 저술 활동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러나 지인들이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제자들 또한 그의 곁을 떠나고 배신하는 일까지 생겼다. 게다가 40대 후반부터 시작된 각종 병증이 깊어져서 그의 만년은 몹시도 불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주자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자신의 고초가 아니라 평생에 걸쳐 제자들과 함께 쌓아온 도학의 맥이 끊기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고난을 딛고 『예서(禮書)』를 편찬하고 『한문고이(韓文考異)』13를 완성했으며, 69세에는 『초사집주(楚辭集註)』14를 완성했다. 또한 죽음이 임박한 병상에서도 『대학』  「성의장(誠意章)」과 『초사』 한 단락을 고쳤으며 문인(門人)들에 대한 교훈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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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이산 무이정사 / wikipedia.org

 

  1200년 3월 주자는 71세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지인들과 제자들은 위학의 엄금(嚴禁)을 무릅쓰고 전국 각지에서 모여 제단(祭壇)을 쌓고 곡례(哭禮)를 하며 그의 죽음에 비통함을 금치 못했다. 그의 사후 2년이 지나서 위학의 금이 해제되었고 8년 후에는 학자로서 최고의 위상인 ‘문(文)’이란 칭호가 내려졌다. 품관이나 관직도 추증되어 신국공(信國公), 휘국공(徽國公) 등에도 추봉되었다. 

  주자는 평생토록 벼슬하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여러 차례 황제의 부름에도 자주 사양하면서 학문과 저술, 강학에 몰두하였던 철학자이면서 위대한 교육자이었다. 그의 교육이력은 일생 중 50년에 이르며, 현학(顯學)과 주학(州學) 또는 창주정사, 무이정사, 고정서원에서 이루어졌고 백록동서원과 악록서원 등을 수축하여 행해지기도 하였다. 그 고족(高足)15은 68명이며 문답한 학자가 71명이며, 약 180명의 학자를 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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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록동서원 / wikipedia.org 

 

  주자의 교육은 오륜을 정본(定本)으로 삼았다.16 그 교육법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 있었다. 첫째, 군자의 교육은 단지 배움을 전수하는 법이며, 알리지 않고도 얻게 하는 오묘하고 훌륭함이 있었다. 주자의 교학(敎學) 방법은 그의 오랜 경험과 학문의 결정체이자 성취물이었다. 둘째, 스스로 깨달아 나가는 것(自得)을 존중했다. 일마다 스스로 이해하고 스스로 실천하여 스스로 함양하고 스스로 책을 읽고 스스로 이치를 찾아 나갔다.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힘써 실천하여 스승과 제자가 공동으로 토론에 임하게 했다. 셋째, 재능에 따라서 교육하였다.17 성현의 교육법에 따라 그 사람의 재능에 따른 적성교육으로 인격을 성취하게 하여 사람을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18

  독서법에도 그만의 장점이 있었다. 독서의 목적은 성현의 생각을 살펴서 자연의 이치에서 사람의 도리를 깨닫고 실천하여 터득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독서의 방법은 순서에 따라 점진적으로 나아가서 숙독하면 정밀하게 사고하여 이치를 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예를 들어 “먼저 『논어』·『맹자』를 읽고 나서 여러 경서를 섭렵한 뒤 역사서를 본다. 그 순서를 뒤바꿀 수 없다.”고 가르쳤다.19 또한 책을 볼 때 자신의 선입견을 배제하고 그 책의 뜻을 잘 파악해야 한다20고 훈교하였다. 

  그 후 그의 학문은 ‘주자학(朱子學)’21으로 일컬어지며 원·명·청대에 걸친 기나긴 세월동안 관학(官學)으로 자리 잡았을 뿐만 아니라, 조선과 일본 등에도 전해져 학문과 정치, 문화 등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상제님께서는 상도가 바로 잡힌 후천문명을 건설하시고자 유교에서 상극적 폐습을 걷어내고 그 정수만을 쓰셨다고 볼 수 있다. 유교의 정수에는 오륜이라는 인사의 상도가 꼽힐 수 있는데 이는 수칙 3번에서 ‘삼강오륜은 … 차제 도덕의 근원’이라는 구절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 주자는 오륜을 교육의 근본으로 삼아 유학의 정수를 살려냈고 유학의 부흥을 통하여 해원상생의 기초가되는 인간의 올바른 도덕성 함양을 역설했기 때문에 상제님의 종장 공사에 쓰임을 받은 것이라고 헤아려 본다. 

 

참고문헌    

진정애, 『주자의 생애』 《상생의 길》 제2호, 2004

교무부, 종교산책 : 「성리학의 집대성자 - 주자(朱子)의 생애와 사상」  [上], 《대순회보》 제72호, 2007.

미우라 쿠니오, 『인간 주자』, 김영식ㆍ이승연 옮김, 서울: 창작과 비평사, 1996.

유명종, 『주자 인간과 사상』, 부산: 동아대학교 석당전통문화연구원, 2000.

이광률, 『주자철학연구』, 대구: 중문출판사, 1995.

<대순회보> 1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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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聖人與我同類者. (『孟子集注』 「告子」 上). 

02 호적계(胡籍溪), 유백수(劉白水), 유병산(劉屛山).

03 위기지학(爲己之學). 남이 알아주는 명성을 쫓는 위인지학(爲人之學)과 대조적인 학문자세.

04 임지(任地)에 부임하지 않고 봉급을 받는 직책.

05 임금에게 시정(時政)의 득실(得失)과 백성의 폐막(弊瘼)에 대해서 의견서를 올리던 일. 상소(上疏).

06 경(敬)을 위주로 사물의 이치를 궁리하는 수양공부(居敬窮理).

07 북송(北宋)의 사자(四子: 주렴계, 장횡거, 정명도, 정이천)의 저술이나 어록에서 발췌한 문장을 항목별로 정리한 주자학의 입문서로서 초학자를 위해 학문의 큰 강령과 일상생활에 절실한 내용들로 구성됨.

08 지금의 강서성(江西省) 상요시(上饒市).

09 호는 상산옹(象山翁).

10 유명한 아호논쟁. 육씨 형제는 주자의 방법이 너무 지리(支離: 흩어져서 갈피를 잡을 수 없음)하다고 비판했고, 주자는 육씨 형제의 생각이 너무 간략하여 실질적인 내용이 없다고 반박해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11 무극태극 논쟁.

12 이단(異端)의 학문.

13 한유(韓愈)의 시문(時文)에 대한 주석서(註釋書).

14 『초사집주(楚辭集註)』는 ‘초사(楚辭)’에 대한 주석을 모은 책이며 ‘초사’는 본래 중국 남방의 초나라 문학을 뜻하지만 보통 굴원(屈原) 및 그의 계승자인 송옥, 경차 등의 작품을 일컫는다. 

15 학식과 품행이 뛰어난 제자.

16 “성인(聖人)이 교육할 때 정본(定本)이 있었다. 순임금은 설(楔)로 하여금 사도(司徒)로 삼고 인륜을 가르쳤는데,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이니, … 모두가 정본이다.”(『朱子語類』 8).

17 聖人之道, 精粗雖無二致, 但其施敎, 則必因其材而篤焉.(『論語集註』 「雍也」 21) . 

18 聖賢施敎, 各因其材, 小以成小, 大以成大, 無棄人也.(『孟子集註』 「盡心」 上).

19 先讀 論 孟, 次及諸經, 然後看史, 其序不可也.(『朱熹集』 35, 「呂伯答」). 

20 以書觀書, 以物觀物, 不可先立己見.(『朱子語類』 11).

21 주자성리학(朱子性理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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