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 속 인물이순신(李舜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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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17 조회5,976회 댓글0건본문
상제께 김형렬이 “고대의 명인은 지나가는 말로 사람을 가르치고 정확하게 일러주는 일이 없다고 하나이다.”고 여쭈니 상제께서 실례를 들어 말하라고 하시므로 그는“율곡(栗谷)이 이순신(李舜臣)에게는 두률 천독(杜律千讀)을 이르고 이항복(李恒福)에게는 슬프지 않는 울음에 고춧가루를 싼 수건이 좋으리라고 일러주었을 뿐이고 임란에 쓰일 일을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고 아뢰니라. 그의 말을 듣고 상제께서 “그러하리라. 그런 영재가 있으면 나도 가르치리라.”고 말씀하셨도다.(행록 1장 32절)
이순신은 본관이 덕수이고, 자는 여해(汝諧)며 시호는 충무(忠武)다. 조선 인종 1년(1545) 3월 8일 서울 건천동(乾川洞: 현 중구 인현동)에서 아버지 이정(李貞)과, 어머니 초계 변씨(草溪卞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친구들과 나무를 깎아 활과 칼을 만들어 전쟁놀이를 즐겼으며 으레 대장을 맡곤 하였다. 이때 그는 여러 친구를 거느리면서 엄격한 규율을 세웠고, 진을 형성하여 지휘하였다. 이렇게 순신은 유년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며 무인으로서의 자질을 보였다.
그러나 그의 집안은 형편이 좋지 못하였다. 그의 할아버지인 이백록이 사림과 친분을 맺다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죽고 아버지 또한 별다른 관직에 나아가지 않아 살림에 여유가 없었다. 이순신은 무과시험을 준비하고 싶었으나, 무과시험을 준비하는 데에는 문과보다 돈이 더 들었던지라, 집안 형편상 글공부를 하였다. 그러다 당시 보성 군수를 지냈던 방진의 딸과의 혼인을 계기로 1년 뒤에 방향을 바꾸어 본격적으로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28세 때 무과시험을 보았으나 달리던 말이 거꾸러지는 바람에 골절상을 입어 시험에 떨어졌다. 3년에 한 번 보는 무과 시험에 32세가 되어서야 급제할 수 있었다. 1576년 무과에 합격한 이순신은 그해 12월에 함경도동구비보(董仇非堡: 지금 함경도 삼수)의 권관(權管: 종9품)으로 발령을 받았고 1586년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를 거쳐 조산보 만호(造山堡萬戶)가 되었다. 조산보 만호시절에 호인(胡人)의 침입을 막지 못하여 백의종군하게 되었으나 여진족전투에서 세운 공으로 백의종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 후 함경도에서 아산으로 돌아가 전라도 관찰사 이광(李洸, 1541~1607)의 조방장(助防將)으로 있다가 1589년 정읍 현감으로 승차하였다. 그 후 1591년(선조 24)에는 류성룡의 추천으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승진하였는데 이는 종6품에서 정3품으로 6단계 이상 건너뛴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이순신이 수군절도사가 되던 1591년 일본에 통신사로 갔던 황윤길과 김성일이 돌아와 각기 다른 주장을 펼쳤다. 서인인 황윤길은 일본이 곧 침략할 것이라 하였고, 동인인 김성일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조정에서는 동인이 집권하고 있던 터라 결국 김성일의 주장이 받아들여졌고, 이로 인해 전쟁을 대비한 아무런 준비도 이뤄지지 않았다. 또한, 통신사가 귀국할 때 따라 온 왜의 승려들의 안내를 맡았던 오억령은 그들에게서 일본이 조선의 길을 빌려 명을 정복할 준비를 하고 있음을 듣고서 조정에 보고했다. 그러나 오히려 조정에서는 그를 파직하고 만다. 이러한 시기에 전라좌수사가 된 이순신은 날마다 무기를 보수하고 쇠사슬을 만들어 포구 앞 바닷목을 가로막았으며, 거북선과 무기를 만들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순신은 옥포에서 왜군과 첫 해전을 벌여 30여 척을 격파하는 승리를 거두었고, 이후에도 사천포해전, 당포해전 등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1592년 7월 8일에는 한산도에서 큰 해전이 벌어졌다. 상대군은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1554∼1626) 장군이 이끄는 일본 정예부대였다. 이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왜군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해 학익진(학이 날개를 펼친 듯한 진법)을 펼쳐 집중포화로 적선 74척 중 59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는 임진왜란의 3대 대첩의 하나인 한산도대첩으로 조선 수군이 해상의 주도권을 쥐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왜군의 입장에서, 한산도 해전의 패배는 임진왜란 발발 후 파죽지세로 20일 만에 도성(都城)까지 점령한 기세에 큰 타격을 받았다. 또한, 해전에서의 패배로 본국에서의 보급로가 끊어져 식량공급이 원활치 않았던 왜군은 결국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조선군은 전황을 역전시킬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 그림4 부산해전 / 연전연승 / 충남 아산 현충사내 이순신 일대기 기록화
한산도대첩 이후 이순신은 정2품인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 그리고 연이은 해전에서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1563~1631) 등이 이끄는 일본 수군을 격파하고, 1593년 다시 부산과 웅천에 있던 왜적을 격파하여 조선 개국 후 최초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다.
1597년 이순신의 계속된 승리로 전황이 불리해져 일본 본토에 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1562~ 1611)는 조선 조정에 이중간첩인 요시라를 이용해 가토가 어느 날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조선수군이 그를 사로 잡을 좋은 기회라고 알려준다. 가토는 조선의 왕자 둘을 인질로 잡았던 맹장이었으므로 조정에서는 서둘러 이순신에게 출전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 정보가 왜군의 간계임을 파악한 이순신은 패배가 불을 보듯 뻔한 상황에서 출전할 수가 없었다. 출전하지 않은 그는 임금의 명을 따르지 않고 적장을 놓아주었다는 모함을 받아 파직되었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이순신은 모진 고문을 받아 사경에 이르렀지만, 다행히도 뜻있는 신하들의 간언(諫言)과 빗발치는 상소로 선조는 그에게 백의종군할 것을 명한다. 명을 받은 그는 고문으로 고통이 채 가시지도 않은 몸을 이끌고 백의종군 길에 오른다. 고생 끝에 도착한 이순신은 권율의 수하에서 일반군사로서 백의종군하며 전장을 살폈고, 돌아가는 정세를 파악하였다.
그러나 들려오는 소식은 거듭되는 패전과 계속되는 장수들의 죽음에 대한 것밖에 없었다. 칠천량해전에 출전한 원균은 일본에 크게 패해 전사하였고, 조선 수군은 궤멸(潰滅)되고 말았다. 이에 선조는 다시 이순신을 복직시켜 수군통제사에 임명하였다. 통제사로 부임하여 돌아온 전장에는 전선 12척과 얼마 남지 않은 군사뿐이었다. 이 상황을 잘 알고 있던 선조는 조선 수군을 폐하고 이순신을 육군 지휘관으로 임명한다는 유서(諭書)를 내렸다. 이에 이순신은 “저에게는 전함이 12척이나 남아 있습니다.… 비록 소장이 미천하나 아직은 죽지 않았습니다.”라고 장계를 올리고 결사항전의 의지를 불태웠다.
그런 뒤 이순신은 힘을 내어 발 빠르게 전쟁을 준비하였고, 고문으로 몸이 성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적이 침입할 때는 섣불리 싸우지 않고 왜적을 피해 서쪽으로 또 서쪽으로 이동하였다. 그는 이동하면서도 불리한 상황에서 왜군과 전쟁하기 좋은 요충지를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가 찾은 곳이 바로 울돌목이라 불리는 명량해협이었다. 물이 쏟아질 듯 빠른 조류가 흐르는 이곳을 택한 이순신은 적선 133척을 맞이하여 12척의 배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던 싸움에서 뛰어난 전술을 사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 해전이 바로 그 유명한 명량대첩으로 이순신의 백의종군 이후 갖은 고생과 노력이 깃들어져 만들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 그림8 노량해전 통제사 제임명 / 충남 아산 현충사내 이순신 일대기 기록화
조선 수군이 명량해전의 대승 이후 고금도에 주둔하고 있을 때 명군이 고금도에 도착했으며 선봉장은 진린이었다. 그는 오만방자하게도 조선의 군정권과 작전권을 행사하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순신은 오만한 진린을 극진히 맞이하였고 또한, 전공을 그에게 돌려 돈독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조·명 연합군의 결속을 다졌다. 그러던 중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어 왜군이 철수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순신은 진린에게 왜군의 재침을 미연에 방지하고, 우리 백성을 죽이고 나라를 피폐하게 만든 그들을 응징하고자 출전할 것을 주장하였다. 진린은 출전을 반대했지만, 이순신이 단독으로 출전을 강행하자 할 수 없이 그도 전투에 참가한다.
조·명연합군은 왜군을 한 놈도 살려보내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싸웠지만, 왜군도 살아서 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맹렬히 싸웠다. 그러나 이순신의 전략에 의해 그들의 전세는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결국 왜군의 전선 500여 척 중에서 200척이 불탔으며 100여 척은 포획되었다. 이렇게 임진왜란 최후의 해전인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이순신은 왜군이 쏜 불의의 총탄을 맞고 쓰러지면서도 “전투가 급하다. 나의 죽음을 말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생을 마감하였다.
이처럼 이순신은 자신에게 닥쳤던 많은 수난을 이겨내고 23전 23승이라는 빛나는 전과를 이루어냈다. 이순신의 자신보다 나라와 백성을 더 위했던 강인한 정신력은 도인들의 수도생활에도 많은 귀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대순회보> 1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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