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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인물주문왕(周文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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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17 조회6,01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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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위원 박병만 

 

  그리고 이어 말씀하시기를 “문왕은 유리(羑里)에서 三百八十四효를 지었고 태공(太公)은 위수(渭水)에서 三千六百개의 낚시를 버렸는데 문왕의 도술은 먼저 나타나고 태공의 도술은 이때에 나오나니라” 하시고 “천지 무일월 공각(天地無日月空殼) 일월 무지인 허영(日月無知人虛影)”이라 하셨도다.(예시 21절) 

 

  주문왕의 시조 ‘후직(后稷)’은 이름이 ‘기(棄)’이다. 그의 어머니는 유태씨(有邰氏)01의 딸 강원(姜原)이고 강원은 제곡(帝嚳)의 정비(正妃)였다. 기는 어려서부터 삼과 콩을 잘 심었는데, 장성하자 농사에 뛰어난 재질을 보였다. 토지의 특성을 살펴서 곡식을 심어야 할 곳에 농사를 지으니 백성이 모두 이것을 본받았다고 한다. 요(堯)임금이 이러한 소문을 듣고 농사를 담당하는 벼슬인 농사(農師)에 임명하여 그를 태(邰)에 봉하고 후직이라 칭했으며 희(姬)씨 성을 하사하였다. 후직의 후손들은 상(商)나라 시기까지 섬서성 서쪽의 제후로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후대에 고공단보(古公亶父)가 있었는데, 그가 후직의 사업을 다시 익히고 덕을 쌓아 의(義)를 행하니 온 나라 백성이 모두 그를 받들었다 한다. 북방의 융적(戎狄)이 그를 공격하여 재물을 요구하자 그들에게 재물을 내주었고, 그들이 다시 공격하여 땅과 백성을 요구하자 백성을 거느리고 자신의 땅을 떠나 기산(岐山)02 아래 정착했다. 그는 인자하고 덕이 출중하여 이웃 나라 백성이 모두 그를 칭송했고 많은 사람이 그에게 귀순했다고 한다. 그는 후대에 태왕(太王)으로 추존되었는데, 후직(后稷)의 12대손이다. 고공단보의 시기에 이르면 상나라는 통치력이 쇠약해지기 시작했고 주나라는 날로 강대해졌다. 이 고공단보에게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가 태백(泰伯)이고 둘째가 중옹(仲雍)이고 막내가 계력(季歷)이었다. 

  계력에게는 어진 부인 태임(太任)이 있었는데 이즈음 아들을 낳으니 그가 창(昌)이었다. 창에게는 어려서부터 성스러운 덕이 엿보였다. 고공단보는 손자인 창의 인물됨을 간파하고 그에게 제후의 자리를 계승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계력의 형이 둘이 있으니 난감할 노릇이었다. 아버지의 이러한 의중을 파악한 태백과 중옹은 현재 강소성 소주 지역인 형만(荊蠻)으로 도망가서 살았다. 그리하여 후계는 계력에게 이어졌고 계력의 아들인 창(昌)이 나중에 제후가 되니 그가 바로 문왕(文王)이 되는 서백(西伯)이다. 태백은 형만으로 도망간 후, 스스로 군주의 자리에 올라 구오(句吳)라 칭하였고, 형만 사람들은 그를 앙모하여 따르는 자가 1천여 호가 되었다. 그들은 그를 오태백(吳太伯)으로 옹립했다. 태백이 죽은 후 중옹이 군주가 되니 그가 오중옹(吳仲雍)이다. 이들이 후에 월왕 구천(句踐)에 의해 멸망하게 되는 오나라의 시조가 된 것이다.03

  서백은 후직의 사업을 따르고 고공단보와 계력의 법도를 본받아 인정(仁政)을 행하고 늙은이를 공경하며 어린이를 사랑했다. 그가 어진 사람을 예로써 대하고 재능 있는 인재를 우대하니 많은 현사(賢士)와 재사(才士)가 그에게 모여들었다. 굉요(閎夭)와 산의생(散宜生)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며 그들 중에는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夷齊)를 한하노라.”로 시작하는 성삼문(成三問) 시의 등장인물인 ‘이제’ 곧,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도 있었는데, 그들은 고죽국(孤竹國)에서 서백이 노인을 우대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따랐다. 

  한편, 상나라의 주왕(紂王)은 총명하고 말재간이 뛰어났으며 일 처리가 신속하고 맨손으로 맹수와 싸울 정도로 힘이 강했다. 그렇지만 교만하였고 술과 음악, 여색을 지나치게 좋아하였다. 특히 달기(妲己)를 총애하여 그녀의 말이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세금을 무겁게 부과하였고, 특히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를 열매처럼 나무에 매달아 놓고 그 안에서 남녀가 벌거벗고 밤이 새도록 술을 마시며 놀았다고 한다[주지육림(酒池肉林)]. 이러한 행동 때문에 백성들의 원망이 높아갔고 점차 배신하는 제후들이 나타나자 주는 형벌을 강화해 포격(炮格)04이라는 형벌을 만들어냈다. 천자를 보좌하여 병권을 관장하던 삼공(三公) 중의 한 사람인 구후(九侯)가 자신의 딸을 주에게 바쳤는데, 그녀가 음탕한 짓을 싫어하자 노하여 그녀를 죽였고 구후도 역시 죽여서 포를 떠서 소금에 절였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듣고 서백이 혼자 탄식했다. 제후 중의 한 사람인 숭후호(崇侯虎)가 이 사실을 주왕에게 고자질하며 “서백이 덕을 쌓으므로 제후들이 모두 그에게 기울어지니, 장차 왕에게 불리할 것입니다.”라고 모함하였다. 이 일로 주왕은 서백을 유리에 가두었다. 상제님 말씀으로는 이때 문왕이 384효를 지었다는 것이다.05 서백의 신하인 굉요(閎夭) 등이 미녀와 진귀한 보물, 준마 등을 구하여 주왕의 총애를 받던 비중(費仲)을 통해 주왕에게 바치자 그는 곧 서백을 사면하여 주었다. 서백은 출옥하자 낙수(洛水: 지금의 섬서성 동주에 있음) 서쪽의 땅을 바치며 포격형을 없애주기를 청원하였고, 주왕이 이를 윤허하였다. 그리고 서백에게 궁시(弓矢)와 부월(斧鉞)을 하사하여 주변 제후국들을 정벌할 수 있는 권한을 주고서 서방 제후들의 우두머리로 삼았다. 

  서백이 자신의 나라로 돌아와 인정을 행하니 많은 제후가 주왕을 등지고 그를 추종하게 되었다. 서백의 세력이 점점 강성해지자 주왕의 세력은 점차 줄어들었으며 그가 남몰래 선행을 하니 제후들이 그에게 와서 공정한 판결을 청했다. 이때 우(虞)와 예(芮) 지역의 사람들에게 송사(訟事)가 있었는데 이것을 해결하지 못하자 서백을 찾았다. 그들이 주나라 영토에 들어서자 농부들은 서로 밭의 경계를 양보하고, 서로 연장자에게 양보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이것을 보고 그들은 서백을 만나기도 전에 부끄러워하며 서로 양보하고 그냥 돌아갔다고 한다. 제후들이 이 소문을 듣고 “서백은 아마도 천명을 받은 군주인가보다.”라고 말했다. 

  이듬해 서백은 견융(犬戎) 부족을, 그다음 해에 밀수(密須) 부족을 차례로 정벌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려(黎)라는 제후국을 정벌했다. 상의 조이(祖伊)라는 신하가 이러한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주왕에게 고하였으나, 그는 “내게 천명이 있는데, 그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고 한다. 다음 해에 서백은 다시 우(邘)를, 그다음 해에는 숭후호를 정벌하고 풍읍(豊邑: 지금의 섬서성 호현 동쪽에 있음)에 도읍을 정하고 기산 아래에서 이곳으로 천도했다. 그리고 다음해에 서백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시호를 문왕(文王)이라고 했다. 서백은 생전에 조부인 고공단보를 추존하여 태왕이라 했고, 계력을 높이어 왕계(王季)라고 했으니, 이것은 주나라의 왕업이 태왕으로부터 일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는 상 왕조의 영향을 벗어나 스스로 법령을 세우고 은나라의 달력인 은력(殷曆)을 대신하여 주력(周曆)을 채용했다.

  서백은 주왕과는 동시대의 인물로서 50년간 재위에 머물렀으며 말년에 강태공(姜太公)을 위수(渭水)에서 만나 그를 국사(國師)로 임명하였다. 뛰어난 지략을 갖춘 강태공의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 주(周)는 천하의 2/3를 차지할 수 있었고, 이것은 장차 무왕이 상을 무너뜨리는데 큰 토대가 되었다. 문왕의 뒤를 이어 태자 발(發)이 즉위하였으니 그가 무왕(武王)이다. 그는 강태공을 사(師: 군사 참모)로 삼고 아우인 주공(周公)을 보(輔: 천자를 보좌하여 관원들의 오류를 바로잡는 관직)로 삼아 문왕의 위업을 더욱 확대해 나갔다. 문왕이 붕어한 지 9년 후에 무왕이 동쪽 지방을 정벌하여 맹진(盟津: 지금의 하남성 낙양시 동북쪽 황하 연변에 있음)에 이르자, 주왕을 버리고 무왕에게 모여든 제후가 800명이 되었다고 한다. 모든 제후가 무왕에게 “주를 정벌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으나 무왕은 따르지 않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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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왕은 갈수록 포악해져 갔다. 미자(微子: 상나라 말의 현인)가 몇 번이나 간언했으나 주왕이 듣지 않자 그는 상나라를 떠났다. 그리고 서형(庶兄)인 비간(比干: 숙부라는 설도 있음)도 역시 계속 간언하였지만, 결국 주왕의 진노를 사서 “성인의 심장에는 구멍이 일곱 개나 있다고 들었다.”라고 하며 비간의 심장을 꺼내보았다고 한다. 기자(箕子)는 미친 척하여 남의 노비가 되었다. 폭정이 이 지경에 이르자 무왕이 제후들을 거느리고 군사를 일으켜 마침내 주왕을 정벌하였다. 최후의 일전을 목야(牧野: 지금의 하남성 치현 남서부 지역)에서 벌였으나 주왕은 패하고 불 속으로 뛰어들어 자살하였고, 달기도 붙잡혀 처형되었다. 

  무왕은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호경(鎬京: 지금의 산서성 서안 부근)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는 상을 정복한 지 2년 만에 병사하였고 성왕(成王)이 즉위하였다. 성왕이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주공이 섭정하였고 주공은 주나라의 예악문물을 비롯한 제도를 정비하고 나라의 질서를 안정시켰다. 그러나 그 이후로 점차 왕도가 무너지면서 신하가 왕을 시해하는 등 나라의 기강이 무너져갔다. 무왕으로부터 13대인 평왕(平王)이 동쪽의 낙읍(洛邑: 지금의 하남성 낙양)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는데, 이 사건을 기점으로 이전을 서주(西周, 기원전 1122~771), 이후를 동주(東周, 기원전 770~256)라 부른다. 

  이 동주시기를 흔히 춘추시대라고 부르는데, 이미 주왕조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제후들이 패도를 행하면서 점차 약육강식의 무력이 자행되는 시기가 된다. 그리고 27대인 원왕(元王) 이후의 시기를 전국시대라고 하는데, 이 시기는 주나라가 유명무실한 나라로 전락한 시기이며 결국 기원전 249년에 진시황의 아버지 장양왕(莊襄王)에 의해 멸망되었다. 이로써 태왕 고공단보로부터 왕업이 시작되어 문왕과 무왕에 의해 상을 멸망시키고 중국 천하를 통치했던 주나라는 900여 년을 존속하다 마침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문왕에 대한 기록은 정사(正史)로서는 『서경』과 『사기』에 등장하고, 『시경』과 『논어』·『맹자』 등의 유가경전에 그에 대한 언급이 보인다. 『서경』에서는 「상서(尙書)」 ‘서백감려(西伯戡黎)’ 편에 조금 언급되어 있고, 주나라의 역사서에 해당하는 「주서(周書)」의 ‘태서(泰誓)’ 편에는 무왕이 주왕을 정벌하는 데 있어 주왕의 폭정과 부도덕성을 고발하여 정벌의 정당성을 밝히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종종 아버지 문왕에 대해 언급하기는 하지만 문왕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들은 나타나 있지 않다. 따라서 문왕의 행적을 살필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다. 그리고 사마천(司馬遷)의 『사기』에 문왕의 행적을 알 수 있는 내용이 나오는데, 「은본기(殷本紀)」06 끝 부분과 「주본기(周本紀)」 서두이다. 앞에서 문왕과 관련하여 서술한 내용은 주로 『사기』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시경』「대아(大雅)」 ‘영대(靈臺)’편에 “문왕이 처음 영대를 만들려 할 때, 헤아리고 도모하니 뭇 백성이 자발적으로 돕는지라. 며칠이 지나지 않아 완성되네. 문왕은 서두르지 말라고 하여도 백성이 문왕의 덕을 사모하여 자식처럼 모여드누나. …”라는 내용이 등장한다. 영대가 어떤 용도의 건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시는 문왕의 덕을 칭송하고 있다. 또한, 이 시는 『맹자』「양혜왕」 편에도 인용되었으며, 『맹자』 전체에서 문왕을 20여 회 등장시켜 인정을 베풀어 왕도정치를 실현한 이상적인 군주로 추앙하고 있다. 그는 위대한 덕의 소유자였으며 또한 “백 년 가까이 장수를 누린 후에 승하하였다.”07라고 기록하고 있다.

  『논어』에서 공자는 문왕의 시호가 ‘문(文)’이 된 것에 대해 주나라 문화의 담지자로서 상징성을 부여하고 있다.08 이[斯] 문(文) 곧, 사문(斯文)이 문왕으로부터 시작되어 무왕을 거쳐 주공에 이르러 주나라의 예악문물과 제도가 완성되었다고 공자는 생각했다. 그래서 공자는 꿈에서도 주공을 그리워했으며, 이 문을 통해 춘추시대의 난맥을 바로잡고자 하는 염원이 있었다. 그 시원(始原)에 문왕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공자의 사유는 유가의 전통적인 사유로 굳어져 오늘날까지도 동아시아에서 문왕은 유학의 인문주의(人文主義)를 개창한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각주5)에 대한 설명]

 『사기』 「주본기(周本紀)」에는 “서백은 약 50년간 재위했는데 유리에 갇혔을 때, 그 속에서 『역』의 8괘를 늘리어 64괘를 만들었다.”는 기사가 있다. 복희씨는 비록 8괘를 그렸지만, 이것을 『역』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역이 흥기한 것은 문왕과 주나라 연간인 셈이다. 후한(後漢)의 정현(鄭玄)은 『역위통괘험(易緯通卦驗)』을 인용하여 복희가 8괘를 긋고, 효사(爻辭)는 문왕이, 십익(十翼)은 공자가 지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당(唐)의 공영달(孔穎達)은 『역정의(易正義)』에서 “후한의 마융, 육적 등은 괘사(卦辭)가 문왕, 효사는 주공이 지은 것이며, 이외의 것은 또한 정현과 동일하다고 말한다.”09라고 하였다. 이외에도 역과 괘사, 효사의 저작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정현의 주장과 공영달이 소개한 내용에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공통으로 문왕에 의해 64괘가 완성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래서 주나라에서 만들어졌다 하여 『주역』이라고 부른다. 괘사는 괘의 상(象)을 해석한 말로 일명 단사(彖辭)라고도 부르는데, 이 괘사가 없으면 그 괘의 의미를 알 수가 없다. 8괘가 상하로 서로 조합하여 64괘가 이루어지는데, 상하로 효가 3개씩 자리하여 괘마다 6개의 효가 있게 된다. 각 괘의 효마다 그 효가 점하고 있는 환경(위치)과 시간적인 개념의 제시 및 사안의 변화에 대해 설명한 것이 효사이다.10 그리고 64괘는 64괘×6효하여 모두 384개의 효로 이룩되어 있다. 그래서 상제님께서 ‘문왕은 유리에서 384효를 지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대순회보> 1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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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부족 이름. 태는 그들의 근거지이다. 지금의 섬서성 무공현 서남쪽에 있다. 전설에 의하면 염제의 후손이므로 성은 강이다.[사마천, 『사기본기』, 정범진 외 역 (서울: 까치, 1999), p.69]

02 지금의 섬서성 기산현과 봉상현 일대에 있다.

03 김용옥, 『논어한글역주 3』 (서울: 통나무, 2009), p.22 참고.

04 일명 포락형(炮烙刑)으로 기름을 칠한 긴 나무 아래에 불을 피워놓고 죄인에게 기둥 위를 걷게 하여 떨어지면 불에 타 죽게 하는 형벌.

05 이 글의 맨 뒤쪽을 참고하시기 바람.

06 사마천은 탕왕(湯王)이 세운 상나라를 ‘은’이라고 『사기』에서 기록하였다. 상나라는 시조가 설(契)이며 13대인 탕이 하(夏)의 걸왕(桀王)을 정벌하고 중원을 차지하였다. 도읍을 8번 옮겼다고 하는데 마지막으로 반경왕(盤庚王)이 은(殷)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에 주나라에서는 상나라를 은이라 불렀다. 후대에도 은이라 불렀는데, 요즘 들어 학계에서는 상 또는 은상(殷商)으로 부른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상’이란 국호를 사용하였다.

07 且以文王之德, 百年而後崩, 猶未洽於天下.(『맹자』 「공손추 상」1)

08 공자가 광(匡) 땅에서 포위되어 상당한 위험에 빠진 적이 있었는데, 이때 “문왕께서 이미 돌아가셨으니 문(文)이 여기 나에게 있지 아니 한가? 하늘이 장차 이 문을 없애려 하셨다면 뒤에 죽는 사람(나 자신)이 이 문에 참여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늘이 이 문을 없애려 하지 않으시니, 광 땅 사람들이 나를 어찌하겠는가?”라고 말했다.(『논어』 「자한」).

09 혼다 시게유키, 『중국경학사』, 서경요 역 (서울: 문사철, 2011), p.131 참고.

10 성백효 역주, 『周易傳義 上』 (서울: 전통문화연구회, 2013), p.8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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