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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인물숭정황제(崇禎皇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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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17 조회6,56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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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 신상미

 

  갑오년 三월에 도주께서 안 상익(安商翊) 외 네 명을 대동하고 청천에 가셔서 황극신(皇極神)이 봉안되어 있는 만동묘 유지(遺址)를 두루 살펴보고 돌아오셨는데 돌아서실 때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밤중에 폭풍과 뇌성벽력이 크게 일어 산악이 무너지는 듯하니라. 다음날에 숭정 황제 어필(崇禎皇帝御筆)의 비례부동(非禮不動)이 새겨 있는 첨성대 아래쪽 암벽의 좌편에 닫혀 있던 석문(石門)이 두 쪽으로 갈라져 내리고 그 안의 옥조빙호(玉藻氷壺)의 네 자와 만력어필(萬曆御筆)의 네 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전하였느니라. (교운 2장 50절)

 

  명나라 제16대 황제인 의종(毅宗, 1611~1644)은 제13대 황제인 신종(神宗, 1563~1620)과 함께 1703년(숙종 29) 청주(淸州) 화양동(華陽洞)에 있는 만동묘(萬東廟)에 모셔졌다. 어떻게 이곳에 명나라 황제인 신종과 의종을 모시게 되었을까? 명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황제(崇禎皇帝) 의종에 대해 살펴보면서 그 이유를 알아보고자 한다.  

 

생애와 가계 

  숭정황제의 이름은 주유검(朱由檢), 연호는 숭정(崇禎)이며, 시호는 순천수도경검관문양무체인치효장렬민황제(順天受道敬儉寬文襄武體仁致孝莊烈愍皇帝), 묘호가 의종(毅宗)이다. 그는 1611년 2월 6일 14대 황제인 태창제(泰昌帝, 1582~1620)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숭정황제(崇禎皇帝)의 부친인 태창제는 만력제(萬曆帝)인 신종의 장남이므로 신종은 곧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의 조부가 된다. 

  숭정황제가 즉위하기 전인 명나라 후기에는 조정이 부패해 변경이 소란하고 국내가 불안정했다. 특히, 신종 재위 시에 조정을 돌보지 않고 상주문을 비롯한 공문들을 산같이 쌓아 놓고 심의하는 법이 없었기에 더욱 정치가 혼란해졌다.01 설상가상으로 1618년에는 청(淸)나라를 창건한 노이합적(努爾哈赤, 1559~1626)이 만주족에 대한 명 왕조의 모욕과 기만행위를 ‘일곱 가지 큰 원한’으로 요약하고 이를 구실로 명에 대한 침략을 시작하여 국내가 더욱 불안해졌다.

  숭정황제의 형인 천계제(天啓帝, 1605~1627)가 15세에 명나라의 15대 황제가 되었을 때도 노는 것만 좋아하면서 정무를 돌보지 않았기에 정치가 더욱 혼란해짐은 물론 당쟁(黨爭)이 치열하였다. 천계제는 자신이 직접 만든 목공 기물들로 방안이 가득 찰 정도로 목공예에만 심취한 채 정사를 태감 위충현(魏忠賢, 1568~1627)에게 전담시켰다. 전권(全權)을 쥐게 된 위충현은 온갖 악행을 자행하면서 정직한 대신들을 대규모로 주살하였고 중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환관 모임인 ‘엄당(閹黨)’을 형성하였다.02 

  천계제가 사망하고 후사가 없었기에 숭정황제가 17세에 16대 황제가 되었다. 숭정황제의 사주(四柱)는 뱀이 변하여 용이 된 격으로03 천계제의 세 아들이 요절하지 않았다면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비록 황제가 될 운명이 약했으나 숭정황제는 포부가 대단했으며 매우 총명하고 상당한 결단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러한 그가 즉위 후 제일 먼저 행한 것은 위충현과 ‘엄당’을 제거하여 조정을 바로잡는 것이었다. 위충현이 죽자 그에게 아첨하며 몸을 보전하던 신하들은 모두 주살되거나 군대로 충원되었으며, 그에게 배척되었던 원숭환(袁崇煥, 1584~1630)은 다시 기용(起用)되었다.04 

  원숭환은 후금(後金)의 침략에 맞서 요동(遼東) 방어에 공을 세운 충성스런 장군이었다. 매사 신중했던 그는 소인배의 중상모략에 빠지지 않기 위해 황제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자 청원서를 제출하며 노력했다. 처음엔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결국 청나라 2대 황제인 태종(太宗, 1592~1643)의 이간책에 의해 매국노라는 죄명으로 능지처참당하였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원숭환과는 달리 끝까지 계획한 바를 추진하며 나라에 도움을 준 인물이 있었다. 그는 서광계(徐光啓, 1562~1633)로 천주교에 입교하여 이마두(利瑪竇, 1552~1610)에게 천문·역산(曆算)·지리·수학·수리(水利)·무기 등의 서양과학을 배운 인물이다. 서광계 또한 보수 세력의 의심과 비난을 비롯한 방해를 받았으나 치밀한 계획으로 피할 수 있었다. 서광계는 많은 학자와 함께 숭정4(1631)년부터 4년간에 걸쳐 총 135권의 서양 천문학에 관한 『숭정역서(崇禎曆書)』를 편찬했다. 그리고 이마두와 유클리드(Euclid, 기원전 330~기원전 275 추정) 기하학을 공역(共譯)한 『기하원본(幾何原本)』 6권과 중국 농서(農書)의 집대성인 『농정전서(農政全書)』 60권을 작성하였다. 특히 숭정황제와 서광계가 서양 화약무기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청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원숭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요동의 정병들은 사기가 크게 꺾였고, 이때부터 명나라는 국력이 날로 쇠약해지고 변경 방어 역시 약해져 망국의 조짐이 갈수록 뚜렷해졌다. 

  숭정황제는 선조(先祖)들이 주색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아 나라가 위태해졌음을 알고 있었기에 주색을 멀리하고 국정을 바로 세우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숭정황제에게는 망국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되면 대신들의 의견을 듣지 않았고05 의심 또한 많았다. 17년의 재위 동안 17명의 상서(尙書)06를 처형하거나 유배시키고, 7명의 총독(總督)07과 11명의 순무(巡撫)08를 처형함에 따라 점차 정치가 불안정해졌다.

  청의 요동 압박, 청군의 화북 침공과 파괴·약탈로 말미암아 점점 경제도 어려워졌다. 거기다 자연재해까지 일어나 심각한 생존위기에 몰렸는데도 관리들이 이전대로 세금을 징수하고 수탈하자 참다못한 백성들은 결국 반란을 일으켰다.09 숭정7(1634)년, 조정에서는 봉기군을 토벌하기 위해 산서(山西), 섬서(陝西), 하남(河南), 호광(湖廣), 사천(四川)에다 총독부를 설치하여 그들을 진압하였다.

  정부의 대대적인 토벌로 반군 지도자들이 투항·전사·처형을 당하자 반란세력은 점차 위축되었다. 그러다 숭정12~13(1639~1640)년 화북지방을 휩쓴 대재앙(가뭄, 메뚜기떼)과 극심한 기근을 계기로 반란세력은 다시 힘을 얻게 되었다. 반란세력 중에서 호북의 산중 오지에 은거해 있던 이자성(李自成, 1606~1645)은 관군의 포위망을 뚫고 하남에 진출하여 두각을 보였다. 그러자 사천의 장헌충 세력을 제외한 나머지 반군세력은 점차 이자성 군으로 결집하였으며, 숭정14(1641)년에는 주요 도시를 공격할 정도로 세력이 커졌다.10 이자성이 이끄는 농민군은 승리를 거듭하며 황하를 넘어 산서로 진군해 태원(太原)을 함락하고 북경을 향해 진군했다. 

  북경성 안은 일대 혼란이 일었고 숭정황제는 긴급히 대신들을 모아 대책을 상의하고 일련의 조치를 마련했으나 이미 때늦은 일이었다. 이자성은 숭정17(1644)년 3월 19일에 북경을 함락했다. 수도와 황궁을 지키는 관군은 물론 환관까지도 죄다 도망가 버린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태에서 숭정황제는 황후·공주·비빈들을 자결시키거나 죽이고 자신도 자금성 뒤의 매산(煤山: 경산공원) 홰나무에 목을 매고 자결했다.11 이로써 277년 동안 지속한 명 왕조는 최후를 맞았다. 그의 시신은 창평(昌平)에 있는 전귀비(田貴妃)의 묘(墓)에 합장되었다. 이후에 청의 3대 황제 순치제(順治帝, 1638~1661)가 순치16(1659)년에 황실의 관례에 따라 숭정제가 묻혀 있는 곳을 ‘숭정제의 능’으로 삼아 사릉(思陵)이라 하고 ‘장렬민황제의 능(荘烈愍皇帝之陵)’이라는 비를 세웠다.

  숭정황제는 자결하기 전에 매산에 올라 옷섶에 조서(詔書)를 썼다. 조서 내용은 『명사(明史)』 24권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짐이 부덕하여 하늘이 나를 이렇게 벌하는구나. 신하들이 나를 실수하게 하여 반란군이 수도에 이르렀으니 조상들을 뵐 면목이 없다. 황관(皇冠)을 제거하여 머리카락으로 나의 얼굴을 가리고 반역자들이 나의 시체를 베게 하여도 좋다. 단지 백성들이 죽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12

  조서 내용을 보면 숭정황제는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도리어 망국의 책임을 대신들에게 떠넘겼다. 이에 대해 조선의 17대 왕인 효종(孝宗, 1649~1659)은 『효종대왕 행장(行狀)』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명나라 숭정황제가 망할 적에 조정의 신하 가운데에는 따라 죽은 사람이 하나도 없고, 오직 환관 한 명만 따라 죽었으니, 진실로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명나라 법제를 살펴보건대 사람에게 무기를 들고 시위하게 하고는, 신하들이 아뢰는 것이 마음에 맞지 않으면 즉각 응징하였고, 또 동창(東廠)과 서창(西廠)을 설치하여 환관들에게 주관하게 하였으니, 명나라가 망한 것은 모두 이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나라가 망했으니 너무 늦은 것이다.”13 이처럼 효종은 망국의 책임을 숭정황제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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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정황제가 목을 매고 자결한 경산 홰나무

 

숭정황제를 만동묘에 모시게 된 사연

  망국의 책임을 신하에게 돌리며 조상을 뵐 면목이 없어 자결한 숭정황제가 만동묘에 모셔지게 된 사연은 『조선왕조실록』에 잘 기록되어 있다. 민진후(閔鎭厚, 1659~1720)가 조선의 19대 왕인 숙종(肅宗, 1661~1720)에게 말하기를 “…신의 중부(仲父)인 고(故) 상신(相臣) 민정중(閔鼎重)이 연경(燕京)에 사신(使臣)으로 갔을 적에 숭정황제의 어필로 된 ‘비례부동(非禮不動)’이라는 네 글자를 얻어 가지고 돌아와서 송시열에게 보였더니, 송시열이 화양동의 절벽을 다듬어 이를 새겼습니다. 이어 작은 암자(菴子)를 지었는데, 고 상신 김수항(金壽恒)이 장편(長篇)의 부(賦)를 지어 그 일을 서술하였습니다. 송시열이 몰(歿)할 적에 권상하에게 글로 써서 보이기를, ‘내가 묘우를 세워 두 황제를 제사 지내려 하였으나, 일을 이루지 못한 채 뜻만 지니고 죽으니, 그대는 모름지기 김(金)·민(閔) 양가(兩家)의 자손들과 상의하여 이를 이룩하기 바란다.’ 하였는데, 그 글 가운데 ‘모옥(茅屋)을 지어 소왕(昭王)을 제사 지냈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습니다. 권상하가 그 유의(遺意)를 받들어 근방의 뜻을 같이하는 선비들과 함께 화양동에 오가옥(五架屋)을 짓고 두 황제를 제사 지냈는데, 위판(位版)은 더욱 감히 사용하지 못하고, 지방(紙榜)으로 제사 지내고 나서는 불태웠습니다….”14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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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첨성대 아래 암벽에 새겨진 비례부동

 

  이처럼 만동묘는 숭정황제의 ‘비례부동(非禮不動)’이라는 어필을 받은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뜻에 따라 그의 수제자인 권상하(權尙夏, 1641~1721)가 1703년에 설립한 것이다. 그런데 숭정황제의 어필을 받았다고 하여 이것을 첨성대15 아래에 새기고 신종인 만력제와 함께 만동묘에 제사를 모신 이유가 무엇일까? 이는 만동묘의 어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만동묘(萬東廟)의 만동은 만절필동(萬折必東)의 준말로 “만절필동(萬折必東), 조종우해(朝宗于海)”에서 따온 말이다. 이는 중국의 강물이 모두 동쪽을 향하면서 바다로 흘러들어 간다는 뜻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즉, 중국의 문화문명이 조선에 영향을 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16  

  사실 명과 조선의 관계는 임진왜란(1592~1598) 이전부터 이미 군부(君父)·신자(臣子) 관계로 이념화되어 있었다. 더욱이 조선의 왕과 양반들은 임진왜란 때 도움을 받은 것을 계기로 명을 재조지은(再造至恩)17을 베푼 부모의 나라로 선양해 왔다.18 즉, 명 황제는 충성의 대상임과 동시에 효도의 대상이 되었으며, 명·조선 관계가 상황에 구애받지 않는 천륜에 기초한 절대관계로 설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병자호란(1637) 때 만주족인 태종 앞에서 고두례(叩頭禮)19를 올리며 항복의식을 거행하여 명과의 관계를 끊겠다고 맹세한 사건으로 인해 유교의 양대 가치인 충(忠)과 효(孝)를 동시에 범한 결과가 되었다.20 

  한편 숙종의 대보단(大報壇)21 설치(1704)와 영조(英祖, 1694~1776)의 대보단 확대(1749)는 이런 자기모순을 상쇄하고, 환경의 변화와 관계없이 조선의 존명의리(尊明義理)가 여전함을 대내적으로 가시화하고 스스로 의식화하려는 조치였다. 이에 조선은 청을 부모의 원수로 부각함으로써 그것을 통해 내부 통치력을 오히려 더 강화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그 결과 명은 망했지만 조선인들의 마음속에 명은 여전히 건재하였고, 위상 또한 오히려 더 강해졌다.22 

  따라서 대보단과 만동묘에 명황을 제사 지낸 이유는 존명의리(尊明義理)와 숭명보은(崇明報恩) 때문이었다. 두 곳은 명황을 제사 지내며 송시열의 유지를 계승하였고 그의 문인들이 건립을 추진하였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인다. 그러나 대보단은 정부 차원에서 추진된 것으로 노론 집권층의 정치기반구축과 관련된 상징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한편, 만동묘는 권상하 등 송시열과 그 문인들이 사인(私人)의 입장에서 건립하여 화양서원(華陽書院)과 더불어 실질적으로 조선후기 사회에 영향을 끼치며 노론의 구심적 임무를 수행하였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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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보단이 있던 자리에 신축된 왕실 사당 신선원전(新璿原殿)(출처: 이향우, 『궁월로 떠나는 힐링여행-창덕궁』中 )

 

숭정황제의 어필과 황극신이 봉안된 만동묘 

 

  숭정황제의 어필 ‘비례부동(非禮不動)’은 예(禮)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와 유사하게 『중용』 20장의 13절에 “재명성복(齊明盛服) 비례부동(非禮不動) 소이수신야(所以修身也)”라는 말이 있다. 이는 재계하고 명결히 하여 성대하게 복식을 갖추어서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않는 것이 이른바 수신이라는 의미다. 즉, 자기를 극복하고 예에 돌아가기 위해 실천하는 것으로 내부와 외부를 같이 수양해서 움직일 때나 고요할 때나 사욕을 극복하면서 예를 실천하려는 데 수신하는 근본 뜻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 숭정황제는 전 황제들과는 달리 주색을 멀리하고 어떻게든 나라를 다시 일으키려 노력했던 인물이다. 단지 신하를 믿지 않고 너무 자기 고집대로 정치하려 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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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2004년에 복원된 만동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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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례부동 왼편에는 원래 신종의 어필인 ‘옥조빙호(玉藻氷壺)’가 있었다. 옥조빙호에서 ‘옥(玉)’은 면류관의 앞뒤에 늘어뜨린 옥 장식이며, ‘조(藻)’는 색실을 꼬아서 옥을 꿰는 데 쓰는 끈이다. 옥으로 조를 장식한 옥조는 곧 임금을 비유한 말이다. 빙호는 본래 얼음을 담는 옥 항아리인데, 여기서는 마음이 차고 맑음을 비유한 것이다. 따라서 옥조빙호는 임금의 마음이 깨끗하고 맑아야 한다는 의미다.24 이 신종의 어필은 윤양래(尹陽來, 1673~1751)가 모본(模本)을 구해 온 것을 권상하가 새긴 것이다. 『이재난고(頤齋亂藁)』25에도 권상하가 새긴 것이라 기록되어 있다.26 옥조빙호는 원래 별도의 직육면체의 돌에 글씨를 새겨 홈을 파서 끼워놓은 것이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흔적만 남아 있다. 『전경』 교운 2장 50절27 내용을 보면 1954년 도주님께서 만동묘에 오셨을 때는 ‘옥조빙호’라는 글자가 현장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학계에서는 우인규(禹仁圭, 1986~1967)의 ‘옥조빙호’ 탁본이 유일하다고 한다.28

  숭정황제의 어필은 만동묘의 설립과 함께 황극신이 조선으로 옮겨 올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상제님께서는 혼란한 세상을 바르게 하려면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광서제(淸國光緖帝, 1871~1908)에게 응기된 황극신(皇極神)을 옮겨와야 한다며 공사를 보셨다. 상제님께서 황극신이 이 땅에 오게 될 인연은 송시열이 만동묘를 세움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셨으니 그때가 1703년이며, 황극신이 옮겨진 때는 광서제가 붕어한 날로 1908년 11월 14일이다.29 

  숭정황제가 언제 ‘비례부동’이란 글을 썼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어필로써 그가 선조 때부터 이어 온 혼란한 정치를 제대로 펼쳐보려 노력한 황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비록 혼란을 극복하지 못하고 불운한 마지막 황제가 되고 말았지만 그가 쓴 어필을 계기로 만동묘가 설립되었고, 황극신이 우리나라에 옮겨 오게 되었으니 그와의 인연이 깊다 하겠다.  

 

참고 문헌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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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회보> 1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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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렁청진, 『병가 인간학』, 김태성 옮김 (경기: 21세기북스, 2008), pp.238-239 참조.

03 朝鮮王朝實錄, 肅宗 23年, 1月 10日.

04 렁청진, 앞의 책, p.248.

05 샹관핑, 『중국사 열전 황제』, 차효진 옮김 (서울: 달과 소, 2011), pp.451-452.

06 진시황(秦始皇) 때에 설치하여 천자(天子)와 조신(朝臣) 간에 왕래하는 문서에 관한 일을 맡았던 벼슬.

07 명ㆍ청 시대 지방의 행정과 군사, 경제를 담당하던 벼슬.

08 명ㆍ청 시대 지방을 순시하며 군정(軍政)과 민정(民政)을 감찰하던 대신으로서 ‘무대(撫臺)’라고도 부른다.

09 오금성 외 20명, 『명청시대 사회경제사』(서울: 이산, 2007), pp.450-451.

10 오금성 외 20명, 앞의 책, pp.450-454.

11 오금성 외 20명, 앞의 책, pp.454-455; 멍펑싱, 『중국을 말한다』14, 김순림 옮김 (서울: 신원문화사, 2008), p.51; 후민ㆍ마쉐창, 『중국을 말한다』13, 이원길 옮김 (서울: 신원문화사, 2008), pp.294-295. 

12 샹관핑, 앞의 책, p.452.

13 도현신, 『왕가의 전인적 공부법』(서울: 미다스북스, 2011), p.348.

14 朝鮮王朝實錄, 肅宗 30年, 1月 10日.

15 화양구곡(華陽九曲)은 우암 송시열이 중국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흠모하며 이름 지었다는 아홉 곳의 절경이 이어지는 곳이다. 그 중에서 5곡인 첨성대(瞻星臺)는 평평한 큰 바위가 첩첩이 겹치어 있고 그 위에서 별을 관측할 수 있다하여 첨성대라 한다. 

16 이상주,「일제 강점기 옥조빙호ㆍ만동묘비 탁본에 관한 고찰」, 『괴향문화』20 (2012), 102 참조.

17 거의 멸망하게 된 것을 구원하여 도와준 은혜라는 뜻이다.

18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서울: 역사비평사, 2001), pp.67-88.

19 절의 마지막 끝에 무수히 예경(禮敬)하고 싶은 간절한 심정을 표하는 예법이다. 머리를 땅에 한 번 더 두드린다고 해서 고두(叩頭), 또는 고두배(叩頭拜)라 하고, 유원반배(惟願半拜)라고도 한다. 고두례는 큰절의 마지막에 절을 마치고 일어서기 전에 한다.

20 계승범, 「조선 속의 명나라」, 『명청사연구』35 (2011), p.156.

21 조선시대에 명(明)나라 태조(太祖)ㆍ신종(神宗)ㆍ의종(毅宗)을 제사지낸 사당.

22 병자호란 당시 조선 조정이 남한산성에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숭정황제가 조선을 구하기 위해 병력을 출동시킨 사실이 조선에 갓 입수된 『명사(明史)』를 통해 알려져 숭정황제의 배향에는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신종에 대한 은혜의 보답이라고 하는 부분에서는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실제 명군이 참전하여 큰 도움이 되었지만 명나라가 조선에 출병한 까닭은 왜군의 침략으로 조선을 통해 자기 나라에 해를 입는 것을 막고자 한 것에 불과하다. 명에게 요동이 ‘이(齒)’라면 조선은 ‘입술(脣)’이었던 것이다.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린 법이니 명이 조선에 참전하게 된 배경에는 바로 순망치한(脣亡齒寒)론이 이용되었다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때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라는 명분으로 대보단과 만동묘가 설립되었다. [계승범, 「조선후기 대보단 친행 현황과 그 정치ㆍ문화적 함의」, 『역사와 현실』75 (2010), pp.168-170; 계승범, 『명청사연구』35, p.164; 한명기, 「임진왜란과 명나라 군대」, 『역사비평』54 (2001), pp.377-379]

23 전용우, 「華陽書院과 萬東廟에 대한 一 硏究」, 『역사와 담론』18 (1990), pp.144-147 참조.

24 이상주,「일제 강점기 옥조빙호ㆍ만동묘비 탁본에 관한 고찰」, 『괴향문화』20 (2012), 102 참조.

25 이재(李縡, 1680년~1746)라는 인물이 10세부터 시작하여 63세 일기로 죽기 전까지 보고, 듣고, 배우고, 생각한 문학ㆍ산학ㆍ예학ㆍ도학ㆍ지리ㆍ역상ㆍ언어학ㆍ예술ㆍ정치ㆍ경제ㆍ사회ㆍ농업ㆍ공업ㆍ상업 등의 여러 방면에 걸친 인류 생활에 이용되는 실사를 총망라하여 일기 또는 기사체로 쓴 것으로, 6천장 57책으로 되어 있다.

26 이종묵, 『조선의 문화공간』(서울: 휴머니스트, 2006), p.327.

27 갑오년 三월에 도주께서 안 상익(安商翊) 외 네 명을 대동하고 청천에 가셔서 황극신(皇極神)이 봉안되어 있는 만동묘 유지(遺址)를 두루 살펴보고 돌아오셨는데 돌아서실 때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밤중에 폭풍과 뇌성벽력이 크게 일어 산악이 무너지는 듯하니라. 다음날에 숭정 황제 어필(崇禎皇帝御筆)의 비례부동(非禮不動)이 새겨 있는 첨성대 아래쪽 암벽의 좌편에 닫혀 있던 석문(石門)이 두 쪽으로 갈라져 내리고 그 안의 옥조빙호(玉藻氷壺)의 네 자와 만력어필(萬曆御筆)의 네 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전하였느니라.

28 이상주, 「일제 강점기 옥조빙호ㆍ만동묘비 탁본에 관한 고찰」, 『괴향문화』20 (2012), 101 참조.

29 상제께서 어느 날 고부 와룡리에 이르사 종도들에게 “이제 혼란한 세상을 바루려면 황극신(皇極神)을 옮겨와야 한다”고 말씀하셨도다. “황극신은 청국 광서제(淸國光緖帝)에게 응기하여 있다” 하시며 “황극신이 이 땅으로 옮겨 오게 될 인연은 송 우암(宋尤庵)이 만동묘(萬東廟)를 세움으로부터 시작되었느니라” 하시고 밤마다 시천주(侍天呪)를 종도들에게 염송케 하사 친히 음조를 부르시며 “이 소리가 운상(運喪)하는 소리와 같도다” 하시고 “운상하는 소리를 어로(御路)라 하나니 어로는 곧 군왕의 길이로다. 이제 황극신이 옮겨져 왔느니라”고 하셨도다. 이때에 광서제가 붕어하였도다. (공사 3장 2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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