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수 신명삼(參) 별을 관장하는 합연(蓋延) 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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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5.10 조회5,689회 댓글0건본문
삼수(參宿)
삼수는 28수 가운데 스물 한 번째 별자리이다. 그리고 규루위모필자삼(奎婁胃昴畢觜參) 서방(西方) 백호(白虎) 칠수(七宿) 가운데서 일곱 번째로 마지막 별자리다. 이 별자리의 주된 별[主星]은 7개로 상징 동물은 원숭이[猿]이다. 삼수의 속성(屬性)은 물[水]이며 서방 백호의 앞가슴으로 중요한 부위이다. 삼수에서 삼(參)은 곧 삼(三)이다. 즉, 세 별이 배치가 한 줄로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여서 삼(參)이라 한 것이다.
삼수를 의인화하여 서방삼수원성군(西方參水猿星君)이라 하는데 머리에는 금으로 만든 투구를 쓰고, 얼굴은 원숭이와 닮았으며, 손에는 강차(鋼叉)를 들고 있는데 요마(妖魔)를 굴복시키는 무기라고 한다.01
후한의 창업공신 합연
합연(蓋延, ?-39)은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BCE 2-CE 58)를 도와 후한(後漢)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창업공신이다. 그의 자(字)는 거경(巨卿)으로 어양군(漁陽郡) 요양현(要陽縣, 현재 하북성 灤平 西北) 사람이다. 합연은 키가 8척(尺)02이나 되었으며 3백 근(斤)이나 되는 활에 거뜬히 활시위에 먹여 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변방의 풍속은 용감하고 힘을 숭상했다. 이 지역에서는 어지간한 힘으로는 이름을 얻을 수 없었는데 합연은 출중한 힘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또한, 그는 군(郡)과 주(州)에서 아전과 종사(從事)를 두루 역임했는데 어디서든지 맡은 일을 잘했다. 팽총(彭寵,?-29)03이 어양 태수가 되자 일 잘하고 출중한 힘을 가진 합연을 불러 영위(營尉)로 임명하고 호군(護軍)의 일을 맡겼다.
이때 유수는 경시제(更始帝)04 명령으로 하북을 평정해 가던 중이었다. 순조롭게 세력을 확대해 가던 유수에게 왕랑이라는 장애물이 등장했다. 왕랑은 자신이 성제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는데, 하북의 많은 군현들이 그의 선전에 넘어가 왕랑을 천자로 받들면서 순식간에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다.05 어양태수 팽총은 어느 편에 서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이때 합연과 오한(吳漢)의 설득이 주효하여 팽총이 유수를 따르기로 하면서 어양은 유수의 세력권으로 재편되었다. 합연이 광아(廣阿)에 이르자 유수는 그를 편장군(偏將軍)으로 삼고 건공후(建功侯)라는 호(號)를 내려주었다. 이후 합연은 유수를 따라 하북 평정에 공을 세웠다.
하북을 평정하여 기반을 확립한 유수가 25년 호현(鄗縣, 하북성 栢鄕縣)에서 신하들의 추대로 제위에 올라 한의 부흥을 선언하니 그가 후한의 초대 황제인 광무제이다. 광무제가 즉위한 후 합연을 호아(虎牙)장군으로 삼았다.
26(건무 2)년에 광무제는 합연을 안평후(安平侯)에 봉했다. 광무제의 명령으로 합연은 오창(敖倉), 산조(酸棗), 봉구(封丘)를 공격하여 모두 함락시켰다. 그해 여름에 부마도위(駙馬都尉) 마무(馬武), 기도위(騎都尉) 유융(劉隆), 호군도위(護軍都尉) 마성(馬成), 편장군 왕패(王霸)를 이끌고 남쪽의 유영(劉永, ?-27)06 정벌에 나섰다. 합연은 우선 유영의 장수 허덕(許德)이 점거하고 있던 양읍(襄邑)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다시 마향(麻鄕)으로 진군했으며 드디어 수양(睢陽, 하남성 商丘市)에서 유영을 포위하였다. 수양을 포위한 몇 달 후에 합연은 들에 있던 농작물을 모두 거두어들이고 사다리를 놓아 밤을 틈타 성안으로 잠입했다. 합연의 야습에 놀란 유영이 동문(東門)을 통해 빠져나가자 그를 추격하여 설(薛)을 함락시키고 유영이 임명한 노군(魯郡) 태수 양구수(梁丘壽)를 처단했다. 사태가 이렇게 진전되자 팽성(彭城), 부양(扶陽), 서추(杼秋), 소(蕭) 등의 현이 항복했다. 또한 합연은 유영 휘하의 패군(沛郡)태수 진수(陳脩)를 격파하고 그를 베었다.
합연군의 야습과 추격전으로 큰 피해를 본 유영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유영 휘하의 소무(蘇茂), 교강(佼彊)07, 주건(周建, ?-28)08이 이끄는 3만 병력이 유영을 구원하기 위해 움직인 것이다. 합연은 패(沛, 강소성 패현)의 서쪽에서 이들과 교전하여 크게 이겼다. 패배한 유영의 군대는 혼란에 빠져 달아나다가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반이 넘을 정도로 전력이 손실되었다. 자신을 구원하러 오던 군대가 합연에게 패하자 유영은 성을 버리고 호릉(湖陵, 산동성 魚台縣)으로 도주하고 소무는 광낙(廣樂)으로 도망갔다. 합연은 마침내 패(沛), 초(楚, 안휘성 壽縣), 임회(臨淮, 하남성 淮陽縣)를 평정하고 고조묘(高祖廟)를 정비했다. 고조묘는 한 고조 유방의 사당을 의미한다. 한 고조는 사수(泗水) 정장(亭長) 출신으로 사수는 패현(沛縣)에 속해 있었다. 유방이 황제로 즉위하기 전까지 패공으로 불리었던 것은 이런 이유였고, 그의 고향에 그를 기리는 사당도 있었던 것이다. 합연은 사당을 관리할 색부(嗇夫), 축재(祝宰, 祝文을 읽는 사람), 악인(樂人) 등을 두었다. 한나라의 부흥을 기치로 내 건 광무제의 휘하 장수가 고조묘를 관리할 사람을 둔 것은 당연하면서도 중요한 일이었다.
27(건무 3)년 수양에서 다시 반란이 일어났는데 이들은 유영을 다시 맞아들였다. 합연이 휘하장수들을 이끌고 백여 일 포위하고 있다가 수양 주변 들의 농작물을 거두어 들였다. 식량이 떨어진 유영이 도망가자 합연이 이들을 추격하여 이들이 버리고 간 군수품을 노획했다. 세력을 상실한 유영이 합연군의 추격을 받게 되자 부장(副將)인 경오(慶吾)가 유영을 죽이고 투항했고, 이어서 유영의 동생 유방(劉防)이 성을 버리고 항복했다.
28(건무 4)년 봄에 합연은 유영의 잔당들을 소탕했다. 합연은 기(蘄)에서 소무, 주건을 격파시키고 진격하여 유성(留城) 아래에서 동헌(董憲)과 싸워 이겼다. 또 평적(平狄)장군 방맹(龐萌, ?-30)09을 거느리고 서방(西防, 산동성 單縣)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다시 주건과 소무를 추격하여 팽성(彭城, 강소성 徐州市)에서 패퇴시켰다. 합연군에게 패배를 당한 소무와 주건이 동헌에게로 달아났다. 이때 동헌의 장수 분휴(賁休)는 난릉성(蘭陵城)을 바친 뒤 투항했다. 동헌이 이 소식을 듣고 본거지인 담(郯, 산동성 郯城縣)에서 나와 분휴의 난릉성을 포위하려고 떠났다. 합연과 방맹은 초(楚)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광무제에게 난릉성으로 가서 분휴를 구원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때 하달된 광무제의 칙서는 다음과 같았는데 이들의 생각과는 반대였다.
“곧바로 쳐들어가 담을 치면 난릉성에 대한 포위는 저절로 풀릴 것이다.”
광무제의 지시를 보면 그는 전장에 있던 합연이나 방맹보다 사태를 더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동헌이 자신의 본진인 담에서 난릉을 공격하려면 주력군을 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합연군이 본진이 빠진 담을 공격하면 공격도 용이하지만, 난릉성을 공격하고 있던 동헌군으로서는 담을 지키기 위해 회군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합연은 이때 중대한 실수를 범하게 된다. 그는 분휴가 있는 난릉성이 더 급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광무제의 지시를 어기고 난릉성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동헌이 합연군과의 접전 끝에 거짓으로 패한 척하자 합연이 포위망을 뚫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동헌이 대병(大兵)을 풀어 다시 성을 포위하자 합연이 두려워하며 급히 성을 빠져나와 도주하면서 그제서야 담을 공격했다. 광무제가 조서를 내려 합연을 질책했는데 다음과 같다.
“일이 없을 적에 우선 담으로 가게 한 것은 바로 이런 뜻하지 않은 변고가 있을까 해서였다. 이제 그대들은 이미 쫓기는 몸이 되었고 적들의 계락 또한 서 있을 터인데 포위망은 어떻게 뚫을 것인가”
합연이 담에 이르렀으나 이미 대비를 하고 있는 적을 싸워 이길 수는 없었다. 동헌은 이때 마침내 난릉성을 함락시키고 분휴를 죽였다. 합연이 팽성, 담, 비(邳) 사이를 오가며 동헌의 장수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공격하곤 했는데 접전이 어떤 날은 여러 차례 있어 자못 수확이 좋았다.
그러나 광무제는 합연이 적을 가벼이 여기고 적지로 깊숙이 들어갔다고 여기고 여러 차례 조서를 내려 이를 꾸짖었다. 이때 방맹이 갑자기 반란을 일으켜 초군(楚郡) 태수를 죽이고 합연을 습격하여 패배시켰다. 아군으로부터 불의의 공격을 받은 합연군은 사수(泗水)를 건너서야 간신히 추격권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합연군이 여러 번 패했고 방맹마저 반란을 일으켜 합연의 힘으로 평정이 힘들어졌다고 생각한 광무제가 친정(親征)에 나섰다. 광무제는 합연을 임성(任城, 산동성 濟寧縣)으로 부르고 대사마 오한(吳漢), 한충(漢忠)장군 왕상(王常), 전장군(前將軍) 왕양(王梁), 포로(捕虜)장군 마무(馬武), 토로(討虜)장군 왕패와 함께 동헌 정벌에 나서게 되었다. 먼저 반란을 일으킨 방맹을 도향(桃鄕, 산동성 濟寧縣)에서 토벌하고 또 동헌을 창려(昌慮, 산동성 藤縣의 동남쪽)에서 정벌하여 모두 평정하였다. 30(건무 6)년 봄에 광무제는 합연으로 하여금 장안(長安)에 둔병(屯兵)케 하였다.
33(건무 9)년에 외효(隗囂, ?-33)10가 죽자 합연은 서쪽으로 나아가 가천(街泉), 약양(略陽), 청수(淸水)의 적을 쳐부수고 모두 평정했다.
35(건무 11)년에 합연은 중랑장(中郎將) 내흡(來歙)과 함께 하지(河池)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고 병이 있어 병사를 이끌고 되돌아 왔다. 광무제는 합연을 좌풍익(左馮翊)에 임명했으며 장군의 직위는 그대로 두었다. 37(건무 13)년 광무제는 합연의 식읍을 늘려주어 그의 식읍이 만호(萬戶)에 달했는데 이듬해인 38(건무 15)년 관직에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 합부(蓋扶)가 뒤를 이었다.
01 萬民英(明) 原著, 『圖解 星學大成 第一部: 星曜神煞』, 北京; 華齡出版社, 2009, p.441.
02 현재 한 자[尺]라고 하면 대략 30cm를 의미하지만 시대마다 달랐다. 이 시기 길이를 잴 때에 순제척(舜帝尺)을 썼는데 이때 한 자는 약 23.5cm로 8척(尺)이면 대략 188cm에 해당한다.
03 남양(南陽) 완(宛, 현재 河南省 南陽) 사람. 왕망 말기에 대사공(大司空) 왕읍(王邑)을 좇아 한군(漢軍)에 저항했다. 경시(更始)가 즉위하여 그를 편장군(偏將軍)에 임명하고 어양(漁陽)태수의 일을 보게 했다. 뒤에 광무제(光武帝)에게 귀부(歸附)하여 건충후(建忠侯)에 봉해졌고, 대장군(大將軍)이라는 칭호가 내려졌다. 광무제를 좇아 왕랑(王郞)과 동마군(銅馬軍) 평정에 종군하여 자신의 공에 대한 자부가 컸었다. 그런데 휘하 장수였던 오한(吳漢)과 왕양(王梁)보다 자신의 처우가 못하다는 불만을 품고 26(건무2)년에 반란을 일으켜 우북평(右北平), 상곡(上谷), 계(薊, 현재 北京 西南) 등을 차지하고 스스로 연왕(燕王)에 올랐으나 피살되었다.
04 자(字)는 성공(聖公). 왕망 말년에 법을 어겨 평림(平林)으로 망명하였다가 22년 평림을 기반으로 한 반란이 일어나자 평림군(平林軍)에 투항했고 23년 호(號)를 경시장군(更始將軍)이라 했다. 이때 평림군의 추대로 황제가 되었는데 유수의 형인 유연(劉縯)의 위세와 명망을 시기하여 그를 죽였다. 한나라의 부흥을 바라는 민심을 업고 왕망을 몰아내고 장안을 차지하였으나 잘못된 정치로 반란이 빈발했다. 왕망 말기에 일어났던 반란세력이 가장 세력이 컸던 적미(赤眉)가 장안을 함락시킨 이후 처음에는 장사왕(長沙王)에 봉해졌으나 후에 사록(謝祿)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05 왕랑의 봉기와 관련한 사항은 다음을 참조. 「벽(壁) 별을 관장하는 왕패(王霸) 신명」, 《대순회보》173호, 65-68쪽.
06 22년 경시제(更始帝)에 귀순하여 양왕(梁王)에 봉해졌으나 경시제의 정치가 혼란하자 동헌(董憲), 장보(張步) 와 연합하여 성을 공략하고 자신만의 영역을 확대하여 천자를 자칭했다. 26(건무 2)년 광무제가 합연(蓋延)을 파견하여 정벌에 나섰는데 다음해인 27(건무 3)년 부장 경오(慶吾)에게 피살되었다.
07 산양[山陽, 현재 산동성(山東省) 금향(金鄕) 서북(西北)] 사람. 왕망의 신나라 말년에 서방(西防)에서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23(경시 1)년 양왕(梁王) 유영(劉永)에 의해 횡행장군(橫行將軍)에 임명되었다. 26(건무 2)년 합연(蓋延)에게 패배하여 호릉(湖陵)으로 도망갔다가 29(건무 5)년 동헌(董憲)에 귀의했는데 오한(吳漢)에게 패하여 한군(漢軍)에 항복했다.
08 패(沛, 현재 安徽省 濉溪 西北)사람. 천자를 자칭했던 유영(劉永, ?-27)이 병사를 일으킨 후 장수로 발탁되어 그를 도와 제음(濟陰), 산양(山陽)의 28개 성을 함락시켰다. 26(건무 2)년 합연(蓋延)이 유영을 토벌하자 소무(蘇茂)와 함께 그를 구원했으나 패주했다. 27년 오한(吳漢)에게 다시 패했다. 유영이 토벌된 이후에 그의 아들 유우(劉紆)를 양왕(梁王)에 옹립했다. 28년 마무(馬武)와 왕패(王覇)가 그의 근거지인 수혜(垂惠)를 포위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09 산양(山陽, 현재 산동성 金鄕 西北) 사람. 처음에는 하강병(下江兵)과 함께 거사하여 유현(劉玄)이 경시제가 되자 기주목(冀州牧)에 임명되었다. 상서령(尙書令) 사궁(謝躬)과 함께 왕랑(王郎)을 격파하였다가 사궁이 패망하자 유수에게 항복했다. 유수가 황제에 즉위하여 시중(侍中)에 임명되고 평적(平狄)장군에 봉해져서 합연(蓋延)과 함께 동헌(董憲)을 공격했다. 29(건무5)년 반란을 일으켜 동헌, 유우(劉紆), 교강(佼彊) 등과 합세하니 광무제가 친정(親征)에 나섰다. 다음해인 30년 오한에 의해 토벌되고 참수되었다.
10 천수(天水) 성기(成紀, 현재 甘肅省 秦安) 사람. 왕망 시기에 국사(國師)였던 유흠(劉歆)의 속관(屬官)이었다가 향리로 돌아왔다. 유현(劉玄)이 칭제(稱帝)하자 한(漢)에 호응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10만의 병력을 모아 옹주목(雍州牧) 진경(陳慶)을 처단하고 안정(安定), 돈황(敦煌), 장액(張掖), 주천(酒泉), 무위(武威) 등을 점령하였다. 23년 경시제에 투항하여 어사대부(御史大夫), 우장군(右將軍)에 이르렀다. 적미(赤眉)가 강성하여 장안이 위태롭게 되자 24년 장앙(張卬) 등과 모의하여 경시제를 협박하여 그의 본래 근거지인 남양(南陽)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일이 누설되어 천수로 도망쳤다. 천수에 돌아와 다시 무리를 모으고 자칭 서주(西州, 감숙성의 동부 지역) 상장군이라 했다. 30(건무6)년 광무제가 경감(耿弇) 등을 파견하여 공손술(公孫述)을 정벌할 때 길을 막고 한나라 병사들을 저지하면서 공손술에게는 칭신(稱臣)의 사자를 파견하였다. 32(건무8)년 공손술이 그를 삭녕왕(朔寧王)에 봉했으나 그의 부하들이 대거 광무제에 투항하여 세력이 축소되자 분사(憤死)했다.
<대순회보 1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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