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불보살곽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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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5.03 조회5,699회 댓글0건본문
곽재우(1552∼1617)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람이다. 본관은 현풍(玄風)이며, 자는 계수(季綏)요, 호는 망우당(忘憂堂)이다. 경상남도 의령 출신으로 황해도 관찰사 월(越)의 아들이다. 1585년 34세의 나이로 별시(別試)의 정시(庭試)에 2등으로 뽑혔으나, 지은 글이 그 당시 왕인 선조의 뜻에 거슬려서 발표한 지 수일 만에 전방(全榜)을 파하고 무효가 되었다. 그 뒤, 과거에 나갈 뜻을 포기하고 남강과 낙동강의 합류 지점인 기강(岐江)가에 강사(江舍)를 짓고 평생을 은거할 결심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머문 지 3년 만인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관군이 크게 패하자 의령에서 함안 사람인 두암공 조방(趙邦)등과 같이 의병을 일으켰다. 그때 붉은 옷을 입고 선두에서 많은 왜적을 무찔렀으므로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고 불리웠다
그 공으로 1592년 7월에 유곡찰방을 시작으로 바로 형조정랑에 제수 되었고, 10월에는 절충장군에 승진하여 이듬해 12월 성주목사에 임명되었다. 성주목사에 임명된 지 2년 후인 1595년에 진주목사로 전근되었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현풍으로 귀향하였다. 1597년 강화회담이 결렬되어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경상좌도방어사로 임명되어 창녕의 화왕산성을 수비하였고, 경상우도조방장이 되어 영창대군을 신구(伸救)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낙향하였다. 여러 차례에 걸쳐 경상도 병마절도사, 수군통제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는데, 그 후 부총관, 한성부좌윤을 거쳐 함경도 관찰사를 지내다가 당쟁 관계로 나라의 형편이 날로 어지러워질 뿐만 아니라, 통제사 이순신 장군이 죄 없이 잡혀 올라오고, 또 절친한 사이인 광주 의병장 김덕령 장군이 이몽학의 난에 휘말려서 죽은 일을 통탄하여 벼슬을 사퇴하고 창암에 망우정(忘憂亭)을 짓고 은둔생활로 여생을 보냈다. 곽재우는 문학적 소양도 뛰어났으니, 그 필체는 웅건 활달했고, 시문에도 능했다. 죽은 뒤에 그의 사우(祠宇)에 「예연서원(禮淵書院)」이라는 사액이 내려졌고, 1709년(숙종 35)에는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로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망우당집》이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이상의 기록은 선조실록, 광해군일기, 징비록, 난중잡록 등에 나타난 것으로 곽재우의 명리(名利)를 초월한 소탈한 성품과 진명보국(盡命報國)하고자 한 충의의 정신을 느낄 수가 있다. 그러나 곽재우는 세간에 널리 알려진 충의지사(忠義之士)의 모습 이외에도 신선의 도를 닦은 이인(異人)으로서의 흔적도 여러 기록에서 보이고 있다.
관동의 한 승려에게서 나온 것을 택당 이식(李植)이 정리한 것으로 알려진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은 《청학집(靑鶴集)》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전래된 신선술의 유래와 도인들의 계보에 대하여 자세하게 밝힌 책으로 유명하다. 《청학집(靑鶴集)》에서는 신선술의 근원을 환인, 환웅, 그리고 단군에 두고 문박씨가 단군의 도를 세상에 전하였다고 하는데 비해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은 여동빈의 스승인 종리권이 당나라에 유학 온 최승우, 김가기, 자혜(의상대사를 지칭)에게 신선술을 전한 것이 해동선도(海東仙道)의 기원이라고 적고 있다. 그 중 자혜에게 전한 선법(仙法)이 권청과 설현 등을 통해 김시습으로 이어졌고, 김시습은 이를 홍유손, 정희량, 윤군평 등에게 전하였으며, 이 맥이 면면히 흘러 정북창, 박지화, 곽치허, 한무외 등으로 이어졌다고 해동선도의 계보를 밝히고 있다. 그런데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에서는 위에서 기술한 것처럼 그 사승관계(師承關係)가 알려진 도인들의 이름 이외에도 스승을 알 수 없지만 신선술을 닦은 여러 이인(異人)들을 열거하고 있으니, 바로 남추, 장세미, 강귀천, 김덕량, 이지함, 곽재우가 바로 그들이다.
곽재우가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의병장이라는 것 이외에 신선술을 연마한 도인이라는 사실은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뿐 아니라, 효종 때의 유명한 학자인 홍만종이 저술한 《해동이적》에도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곽재우의 자는 계수요, 현풍 사람으로 감사 월(越)의 아들이다. 어려서 남명 조식을 좇아 공부하더니, 남명이 외손녀사위로 삼았다. 공이 과거공부는 하지 않고 나이 40이 넘도록 벼슬도 없이 궁하게 지내며 삿갓 쓰고 짚신을 끌며 낚시질로 세월을 보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왜군을 물리치는데 늘 홍의(紅衣)를 입었으므로 왜적들이 이를 홍의천강장군(紅衣天降將軍)이라 불렀다. 후에 왜병을 물리친 공으로 함경감사의 배명을 받았으나 부임치 않았다. 내직(內職)으로 있으면서 오직 솔잎만 먹고 살았다. 일찍이 비파산에 들어가 솔잎을 먹고 벽곡(壁穀)하더니 그 후에 취산 창암에 들어와 연화(烟火:음식을 익혀서 먹는 것)를 완전히 끊었다. 그의 시에, 「벗들은 내가 연화를 끊음을 안타까이 여기어 낙강가에 초옥을 함께 지었네 배 주리지 않게 다만 솔잎만 먹고 옥천(玉泉)의 물 마시니 목마르지 않네 고요를 지키어 거문고 타니 마음 담담하고 문닫고 조식(調息)하니 뜻이 깊구나 한 백년 지나서 도통한 후면은 날보고 웃던 이들 날 신선이라 이르니」 라 하였다.
《명신록》에 이르기를 선산 사람 박승지 수홍(守弘)이 출세하기 전에 일찍이 공을 찾아오니, 공이 묻기를 「어디로 가려는가」하니 「과거를 보고 오겠습니다.」하였다. 공이 「이런 때에 과거는 하여 무엇에 쓰노」하며 이내 술을 내와 너댓 잔을 같이 마셨다. 한참 있다가 하는 말이 「술이 취해 괴롭다」하며 그릇을 하나 가져오라 하였다. 그릇을 귀에 대고 귀를 기울이니 마셨던 술이 모두 귓구멍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밖에 이수광의《지붕유설》에서는 곽재우가 방술(方術)을 배워 산에 들어가 벽곡을 하니 이는 천지의 기운을 먹는「연기법(嚥氣法)」을 터득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렇듯 곽재우는 평화시에는 명리를 초월하여 소탈하게 자신의 성명(性命)을 닦았으며, 난세에는 이웃과 국가를 위해 멸사봉공(滅私奉公)하는 군자로서의 모범을 보인 인물로 오늘의 도를 공부하는 우리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대순회보 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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