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절 신명입추(立秋) 절후를 관장하는 장량(張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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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6.18 조회6,310회 댓글0건본문
논밭에서 몸을 일으켜 당 창업 공신이 된 장량
장량(張亮, ?~646)은 정주(鄭州) 영양[榮陽, 현재 하남성(河南省) 영양] 사람이다. 당태종 이세민을 도와 천하 평정과 정관지치(貞觀之治)에 기여한 많은 인물들 중에서는 드물게 농부 출신이다.
장량이 비록 농부였으나 그의 뜻은 크고 기개가 있었다. 또한 겉으로는 온화하고 후덕하였으나 자신의 생각을 잘 나타내지 않았고 어떤 일을 처리하든 정(情) 때문에 구애되는 일이 없었다.
수나라 말기에 일어난 반란이 전국적으로 퍼져 갈 때 장량은 유력한 반란 세력의 하나였던 이밀의 부하가 된다. 이밀(李密, 582~618)01이 영(榮), 변(汴) 땅을 공략할 때에 그를 따랐으나 특별히 두드러진 인물은 아니었다.
여기서 잠시 이밀에 대해 살펴보자. 613년[대업(大業) 9] 수양제의 2차 고구려 원정 당시 예부상서이면서 원정군의 모든 물자 운송에 있어서 총책임을 맡고 있던 양현감(楊玄感)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밀은 이 반란의 모주(謀主)02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한 수양제의 전격적인 회군으로 양현감의 반란은 3개월 만에 끝나고 이밀은 주요 수배자가 되었다. 양현감의 반란이 실패로 끝났지만 전국적인 반란의 도화선이 되어 중국 전역은 반란의 소굴로 변했다. 이후 수나라의 중앙 정부는 전국적인 통치권을 회복하지 못했다. 이밀은 여러 반란의 무리들을 전전하였으나 그를 받아들이는 세력이 없었다. 그러던 중 616년 적양(翟襄)이 와강(瓦崗, 하남성 활현)에서 봉기하고 이밀도 여기에 합류하였다. 다음해 이밀은 적양의 추대를 받아 이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당시 이밀의 부하들 중에는 모반을 계획하고 있던 무리가 있었는데 장량이 이들을 고발하였다. 이 일로 장량은 이밀의 신임을 얻어 표기장군(驃騎將軍)에 임명되고 이세적[李世勣, 소설(小雪) 절후를 관장]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이세적이 여양(黎陽)에서 돌아올 때에 장량이 그를 도우니 다시금 정주자사(鄭州刺史)에 발탁되었다. 때마침 수양제가 수도를 떠난 상황에서 남아 있는 수나라 중앙군을 이끌고 있던 왕세충(王世充, ?~622)03이 정(鄭) 지역을 침공했다. 왕세충이 이끈 수나라 군은 강력하여 장량의 군대는 공성산(共城山)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왕세충의 반격을 받은 뒤 이밀의 세력은 점차 축소되었다. 한때 큰 세력을 형성했던 이밀은 우문화급(宇文化及), 왕세충에게 연이어 패배한 끝에 당(唐)에 귀순했다. 이때 장량도 이밀을 따라 당에 귀순하게 된다.
당시 진왕부(秦王府)에서 이세민을 보좌하고 있던 방현령[房玄齡, 우수(雨水) 절후를 관장]이 장량을 추천했다. 방현령은 장량이 침착할 뿐만 아니라 결단력과 지략을 갖추었다고 판단하고 이를 이세민에게 보고했다. 방현령을 신임하고 있던 이세민은 장량을 진왕부의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임명하였다.
수나라 말기에 일어난 이른바 천하대란을 수습하면서 당은 점점 국가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외부의 적들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내부의 본격적인 권력투쟁이 전개되었다. 고조 이연 다음의 황제 자리를 놓고 첫째 이건성과 둘째 이세민 사이에 피할 수 없는 권력쟁투가 기다리고 있었다. 태자 이건성이 첫째이기는 하였지만 당의 창업과정에서 이세민의 공로를 따를 자는 없었다. 태원(太原) 거병(擧兵)부터 당 창업의 방해가 되는 거대한 적들을 처단하는 데 이세민이 빠진 적이 없었다. 이세민의 활약이 없었다면 이연의 군대는 천하대란의 와중에 있던 많은 반란의 무리들 중 하나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이건성과 이세민은 서로를 견제하면서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해가고 있었다. 이세민은 장량에게 명하여 1,000명의 병사를 통솔하여 낙양(洛陽)으로 가서 은밀히 산동(山東)의 호걸들을 결집할 것을 지시했다. 이 과정에서 소요되는 금전은 장량의 마음대로 쓰도록 허락했다. 이는 만약의 사태를 당했을 때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고 이건성과 이원길이 먼저 낙양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막는 효과도 있었다. 장량에게 이와 같은 임무가 주어진 것은 이세민이 장량을 그만큼 신임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이세민 측의 이러한 움직임은 이내 이건성에게 포착되었다. 제왕(齊王) 이원길이 고조 이연에게 장량이 불궤(不軌)04를 도모하고 있다고 고발하였다. 고조의 명으로 관리들은 조사에 착수했으나 명확한 물증이 없었다. 관리들의 문초가 시작되었지만 장량은 입을 다물고 끝까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이렇게 명확한 물증이 없었던 상황에서 장량은 석방되었다.
626년[무덕(武德) 9] 현무문(玄武門)의 정변(政變)을 통해 이세민은 이건성과 이원길을 처단하고 이들의 세력을 소탕했다. 정변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이세민은 고조의 명에 의해 황태자로 책봉되고 군국(軍國)의 사무를 관장하였다. 다음해인 627년 이세민은 고조의 양위를 받아 황제에 즉위한다. 이가 곧 당의 2대 황제인 태종이다. 태종은 자신의 즉위에 공을 세운 여러 공신들에게 논공행상을 행하였다. 이때 장량을 우위장군(右衛將軍)에 임명하고 장평군공(長平郡公)에 봉(封)했다. 이후 장량은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진급하고 우국공(國公)으로 봉해졌는데 식읍(食邑)이 익주(益州) 500호(戶)였다.
장량은 빈주(州), 하주(夏州), 부주(州) 3개 주의 도독(都督)과 상주(相州) 장사(長史)를 역임하고 봉국(封國)이 다시 운국(國)으로 옮겨졌다. 당태종은 외직(外職)에 있던 장량을 다시 불러들여 공부상서(工部尙書)로 임명했다.
장량이 정사에 참여하여 일을 처리할 때마다 신중히 하여 그 현명함을 드러냈고 강자를 누르고 약자를 구휼하여 가는 곳마다 업적을 쌓았다. 장량은 태자첨사(太子詹事)에 임명되었다가 낙주도독(洛州都督)이 되어 외직으로 나갔는데 후군집[侯君集, 처서(處暑) 절후를 관장]이 처형된 후 그의 후임으로 형부상서(刑部尙書)에 임명되었다.
이때에 무주(茂州)의 어떤 시골 마을에 장중문(張仲文)이라는 아이가 스스로를 천자라고 칭한 사건이 발생했다. 군주제 아래에서 이러한 언행은 반역이며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신하들은 당태종에게 장중문의 죄는 죽음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청(奏請)했다.
형부상서를 겸하고 있던 위정(韋挺)은 이러한 대다수 관리들의 의견에 반대했다.
“아이가 요사스러운 말을 했으나 그것이 죽을 죄는 아닙니다.”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진노한 당태종이 말했다.
“너는 아랫사람에게 복을 짓고자 짐에게 모욕을 주는구나.”
당태종의 입에서 이미 ‘너’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상황은 심각했다. 위정으로선 황제의 이와 같은 분노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당황한 위정이 더 이상 자신의 주장을 펴지 못하고 도망치듯이 퇴궐하자 장량이 위정을 위하여 직간(直諫)했다. 장량도 아이의 헛소리 정도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는 일로 사람을 죽인다는 것에 반대하였던 것이다.
화가 풀리지 않았던 당태종이 장량에게 말했다.
“공은 굳세고 바르다는 이름을 얻고자 하는가?”
당태종의 신랄한 비판에도 장량은 물러서지 않았다. 당태종의 장점은 일시적인 분노를 누르고 신하들의 비판을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태종이 장량의 주장을 받아들이며 말했다.
“비록 짐을 굽혀서라도 그대의 청을 들어주겠소.”
이리하여 그 아이는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644년[정관(貞觀) 18] 당태종은 고구려 원정군을 구성하고 다음해 원정에 나서게 되었다. 수나라가 멸망한 가장 큰 요인 중의 하나였던 고구려 원정을 당태종이 실행하고자 한 것이다. 여러 신하들과 마찬가지로 장량 또한 당태종의 고구려 원정에 반대했다. 천하를 통일했다는 이세민으로서는 고구려마저 복속시켜 자신의 위상을 과시하고자 했다. 그러나 승패를 떠나 큰 부담이 되는 원정이었다. 이기면 당연한 것이요, 지면 또 다시 수나라의 전철을 밟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장량이 여러 차례 반대의 간언(諫言)을 올렸으나 당태종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이에 장량은 스스로 원정에 따라 나서겠다고 자청했고 당태종이 그를 평양도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總管)에 임명하여 수군(水軍)을 지휘하도록 했다. 장량은 수군을 이끌고 비사성(卑沙城)을 함락시키고 건안성(建安城)까지 이르렀다.
안시성(安市城) 이전까지 당군은 승승장구했다. 천하대란의 시기에 여러 경쟁자들을 물리쳐 당을 세운 창업군주나 다름없는 당태종 이세민과 그 휘하의 쟁쟁한 장군, 참모진들이 참여한 이 원정에서 당군의 승리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고구려의 국경 수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개모성(盖牟城), 요동성(遼東城)이 연이어 함락되었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당군은 안시성에 막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군대를 돌려야만 했다. 그 어느 전쟁에서도 이와 같은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적이 없는 당태종에게 안시성 패전은 뼈아픈 것이었다.
석연치 않은 모반(謀反) 혐의로 최후를 맞은 장량
당의 군대는 645년[정관 19] 9월에 회군했는데 수도인 장안으로 돌아온 것은 다음해 3월이었다. 당태종이 수도인 장안에 입성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섬인(陝人) 상덕현(常德玄)이 장량이 모반을 꾀했다고 고발했다. 장량은 이 고발이 있고 얼마 되지 않아서 모반의 죄로 처형되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신당서(新唐書)』와 『구당서(舊唐書)』의 기록이 같지 않다.
먼저, 『신당서』 「장량전(張亮傳)」을 통해 보면 모반으로 고발된 시점을 전후로 한 대략의 사정은 다음과 같다.
장량이 본처를 버리고 새로이 이씨라는 여성을 얻었다. 그런데 이씨는 무격(巫覡)과 교통하고 발언권을 행사함으로써 장량의 위신을 실추시켰다고 한다. 또한 장량은 도참서(圖讖書)에 있는 ‘궁장지주(弓長之主)’가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라 여겨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궁장지주란 궁장이 주인이 된다는 것으로 궁장을 합하면 장량의 성인 장(張)이 된다. 게다가 장량의 자는 모습이 마치 와룡(臥龍)과 같으니 반드시 귀하게 되고 그의 첩의 관상이 제왕(帝王)의 여자가 될 상이라고 아첨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장량이 이들의 말을 제지하지 않고 기뻐했다는 것이다. 이 일이 사실이라면 이는 군주제 하에서는 용납되기 힘든 일이었다. 결정적으로 장량에게 양자(養子) 500명이 있는데 이것이 모반의 분명한 증거라는 것이다. 이는 500명의 사병(私兵)이 유사시에 궁정 쿠데타를 일으킬 수도 있다고 의심받을 수 있었다. 당태종도 정변으로 정권을 장악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고발 내용은 간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장량은 자신의 혐의에 대해 부인했다. 자신을 고발한 사람들을 비난하고 공신으로서 당태종의 관대한 처분을 요청했다.
“이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여 무고를 행하고 있습니다. 소신은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폐하의 관대한 처분을 바랄 뿐입니다.”
그러나 당태종은 양자 500명을 거론하며 반역의 혐의가 분명하다고 단정지었다. 이미 장량의 모반혐의를 혐의가 아니라 범죄 사실로 판단한 당태종이 관리들에게 장량의 일을 의논하라고 하였다. 이미 황제의 의중이 확인된 상황에서 모든 관리들은 장량의 죄는 죽어 마땅하다고 진언했다. 당태종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이미 확인된 상황에서 장량의 모반 혐의를 전체 관료들의 의논에 붙인 것은 절차상의 문제일 뿐 의미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장량의 최후는 결정되었다.
당태종이 장손무기[長孫無忌, 동지(冬至) 절후를 관장]와 방현령을 장량에게 보내어 이별을 통보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법(法)은 천하에 공평해야 하는 것으로 공에게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일이 여기에까지 이른 것은 공이 스스로를 경계하지 못한 까닭이니 이를 어찌할 것인가. 공은 잘 가시오.”
장량은 장안의 서시(西市)에서 참형(斬刑)에 처해지고 그의 가산(家産)은 적몰(籍沒)되었다. 『신당서』의 기록은 여기까지이다.
그런데, 『구당서』 「장량전」에 보면 『신당서』와는 다른 기록이 보인다. 장량이 모반 혐의로 고발되기 전의 여러 가지 사정은 『신당서』와 다르지 않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당태종의 명에 따라 장량의 모반 혐의를 놓고 관리들에게 의논에 붙였을 때이다.
모든 관리들이 장량의 모반 혐의를 인정하고 그의 처벌에 찬성하였는데 장작소장(將作少匠)05 이도유(李道裕)만이 이에 반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반의 형세가 분명치 않으니 장량은 분명 무죄(無罪)입니다.”
그러나 이미 당태종의 진노를 누를 수는 없었다. 장량은 처형되고 그의 가산은 적몰되었다.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난 뒤에 형부시랑(刑部侍郞)의 자리가 비었는데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당태종이 관리들에게 합당한 인물을 천거할 것을 지시했다. 황제의 명에 따라 신하들이 여러 인물을 천거했지만 당태종의 마음에 드는 인물이 없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인사(人事)는 만사(萬事)’로 당태종의 정관지치는 합당한 인사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당태종은 인사에 신중을 기한 군주이다. 하지만 형부시랑의 자리를 더 이상 비워둘 수 없는 일이었다. 당태종이 마침내 결단을 내리며 말했다.
“짐이 한 사람을 얻었노라. 지난 날 이도유가 장량의 일을 의논에 붙였을 때 ‘모반의 형세가 분명치 않습니다.’ 하였는데 이 말은 합당한 것이었다. 그때 그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이 후회된다.”
하고 이도유를 형부시랑에 임명했다.
형부시랑은 지금으로 치면 법무부 차관에 해당하는 지위로 법을 집행하는 중요 직책이다. 『구당서』의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당태종은 장량을 처형한 것에 대해 후회한 것이 분명하다.
앞서 서술한 것처럼 군주제 하에서 장량의 처신에도 문제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태종 스스로 공신들에게 그 목숨만은 보전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나아가 당사자들의 반대로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공신뿐만 아니라 그 자손들에게도 혜택이 미치게끔 세습자사(世襲刺史)의 조칙(詔勅)을 내린 적도 있었고, 공신들의 잘못에 관한한 누구보다도 관대하게 처결한 당태종이 장량에게는 너무 가혹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왜 장량에게는 당태종이 보여준 관용이 하나도 적용되지 않았을까.
장량의 최후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고위직에 오르고 권세를 가지게 되면 누구라도 여기에 아첨하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아첨하는 사람들 속에 있으면 그 자신이 과도한 욕심을 부리고 있다는 것과 자신의 처지를 망각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런 까닭에 높은 지위에 오를수록 자신과 주변을 제대로 정비하지 못하면 자신도 불행이요, 그 자신과 관계된 사람들과 나라에도 좋은 일이 될 수 없다. 이는 동서고금의 역사가 증명하는 바이다.
장량을 현혹시킨 ‘궁장지주(弓長之主)’라는 말을 보니, 한때 이 땅에 횡행했던 ‘십팔자위왕(十八子爲王)’과 조광조(趙光祖)를 죽음으로 몰고 간 ‘주초위왕(走肖爲王)’이 떠오른다. 역사를 보면 스스로를 하늘이 점지한 바로 그 사람이라는 착각으로 세상을 현혹시키고 자신과 그 주변의 사람들 모두를 망친 사례는 너무나도 많다. 이런 일들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을 볼 때 대만(臺灣)의 역사가 백양(栢楊)의 말처럼 역사의 교훈이란 “인간은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 아닐까.
<대순회보> 10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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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이밀은 아버지 이관(李寬)의 포산공(蒲山公) 지위를 세습하여 수양제(隋煬帝)의 친위부대도독에 임명되었다. 613년 수양제의 2차 고구려 원정 중에 발생한 예부상서(禮部尙書) 양현감(楊玄感)의 반란에서 큰 역할을 했으나 반란이 실패로 돌아가고 도망자의 신분이 되었다. 양현감의 반란이후 중국은 대혼란기에 접어들었다. 617년 여러 군도(群盜)들 중의 하나였던 적양(翟襄)의 추천으로 그들의 주군이 되어 자신을 위공(魏公)이라 칭했으나 618년 왕세충에 패하여 당에 귀순하였다. 그러나 이후 당에 반기를 들었다가 당의 복병에 의해 죽었다.
02 일을 주장하여 꾀하는 사람.
03 경사(經史)에 밝고 병법에 정통하였으며 수(隋) 양제(煬帝)의 신임을 얻어 강도통수(江都通守)가 되었다. 수나라 말기에 일어난 농민 반란으로 동도(東都)인 낙양(洛陽)이 위험해지자 양제의 명으로 낙양을 구원하였다. 618년 양제가 죽자 낙양에서 월왕(越王) 양통(楊)을 황제로 추대하였다. 이후 강력한 반군이었던 이밀(李密)을 패퇴시키고 다음해인 619년 양통을 폐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정(鄭)’이라 했다. 621년 이세민이 이끈 당군에 패하여 투항하였으며 장안으로 압송된 후 원한을 품은 사람들에게 피살되었다.
04 법을 지키지 아니함 또는 모반(謀反)을 꾀함.
05 궁실(宮室)의 건축과 수리를 담당한 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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