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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인물최제우(崔濟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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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18 조회3,87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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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위원 김태윤

 

  최제우(崔濟愚, 1824~1864)는 갑신(1824)년 10월 28일 경상북도 월성군 현곡면 가정리(현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성묵(性黙), 호(號)는 수운(水雲)이다. 부친은 최옥(崔鋈, 1762~1840)이고 호는 근암(近菴)이며 어머니는 근암의 세 번째 부인인 곡산(谷山) 한씨(韓氏)이다. 수운의 부인은 그가 13세 때 결혼한 울산 박씨이다.

  1840년 수운이 17세 때 부친 사후(死後) 어려운 와중에 뜻하지 않은 화재까지 겹쳐 집과 재산을 모두 날려 버리게 된다. 이후 마을에서 훈장노릇을 해보기도 했으나 생계를 유지하기도 어려워 장삿길로 나서게 되었다. 1844년(21세)부터 10년간에 걸쳐 주로 무명 등의 생활용품을 취급하면서 당시 서민들과 직접 만나 현실의 구체적 모습을 보았다. 이렇게 수운은 행상을 하며 전국팔도를 떠돌았고 한편으로 세상의 풍속을 살폈다.

  당시 조선은 지배층의 부정, 신분제와 삼정(三政)의 문란 등으로 혼란과 무질서 상태에 놓여 있었다. 민중들은 윤리와 가치규범이 붕괴되는 것을 겪으면서 절망의 시대를 살고 있었다. 게다가 갖가지 전염병과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외세 위협은 사회 불안과 공포를 초래했다. 이런 상황에서 수운은 아편전쟁으로 인해 중국이 서양 기독교 세력인 영국의 무력에 굴복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기독교의 허구성과 서양문명이 병들었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그는 유교 사회에서 중요한 질서의 바탕이 되는 강상(綱常)이 하나의 명분일 뿐 실제로는 전혀 지켜지지 않고 있는 현실을 발견했다. 전국을 주유(周遊)하면서 이러한 실상을 몸소 겪어 본 수운은 유도(儒道)의 생명이 다해 요순(堯舜)과 공맹(孔孟)이 다시 와도 회복될 수 없다고 스스로 느꼈다.

  팔도를 돌면서 얻게 된 이와 같은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그는 당시 사회 혼란의 근본적인 요인은 공경하고 두려워할 ‘구체적인 믿음의 대상’ 없이, 각기 자신의 이익만 따라 살아가는 마음[各自爲心]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 

  수운은 장삿길에 나선지 10년 만인 1853년(30세)부터 각자위심에 대한 해답을 얻어 보려고 하였다. 도학이 높은 이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해보기도 하였으나 적절한 해답을 얻을 수 없었다. 그들 역시 공맹이나 불도(佛道)의 이상을 논하는 정도였다. 1854년(31세) 봄에 이르러 수운은 자기 스스로 해답을 얻기로 결심하고 10년간 다니던 장삿길을 그만두고 경주 용담에 들어앉아 제세대도(濟世大道)를 얻기 위한 구도(求道)를 시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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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담정

 

   이러한 그의 구도행위는 오히려 마을사람의 의심을 받게 되었고 이상한 도를 구한다는 말이 들려왔다. 점차 수운에 대한 비난과 질시가 심해지게 되자 용담을 떠나 부인의 고향인 울산(蔚山)의 유곡동(幽谷洞) 여시바윗골에 초가 3칸을 짓고 이사하였다. 늦가을부터 다시 시작한 수운의 사색은 어느덧 반년이 지났으나 역시 아무런 징조가 보이지 않았다.

  이듬해 을묘(1855, 32세)년 3월에 금강산 유점사에서 한 스님이 찾아와 뜻을 알 수 없는 책 한 권을 내보였다. 이 책의 내용은 유도불도에 관한 것이었으나 문리(文理)에 들어맞지 않아 풀기가 어려웠다. 그는 깊이 탐구한 끝에 기도(祈禱)에 관한 가르침이 들어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수운은 이 책의 기도에 관한 가르침을 받아들여 수행방법을 바꾸기로 하였다. 그에게 이런 ‘을묘천서(乙卯天書)’의 체험은 구도에 새로운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이전까지 성리학에서 말하는 리(理) 개념의 ‘천(天)’을 인격적으로 섬겨야 할 대상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공부방법도 독서를 통한 사색(思索)과 궁리(窮理)의 공부 방법에서 기도의 방법으로 바꾼 것이다.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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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리 마을

 

  1856년 봄에 양산 천성산(千聖山, 811.5m)에 있는 내원암(內院庵)에서 49일간 입산기도를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기한을 이틀 남겨놓은 47일째 되던 날, 자신도 모르게 마음에 뭉클한 기운이 돌며, 고향에 계신 숙부가 돌아가셨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미 마음으로 숙부의 돌아가심을 알게 되었으니 더 이상 수련에 임할 수가 없었다.02 그 후 다시 2차 천성산  동굴에서 기도를 시작했지만 역시 별다른 성과를 얻을 수 없었다. 

  기미(1859)년 10월 초 짐을 싸 짊어지고 가족들과 같이 울산을 떠나 70리나 떨어진 구미산 용담으로 돌아왔다. 수운은 며칠이 지난 10월 중순 어느 날 제선(濟宣)이라는 이름을 제우(濟愚)로 고치며 다시 구도에 대한 결의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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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원사 

 

  그러던 중 37세 되던 경신(1860)년 4월 5일, 깨달음을 얻게 된다. 조카 맹윤(孟胤)의 생일잔치에 참석하고 난 뒤 심신에 이상을 느끼게 되었다. 곧 집으로 돌아와 대청에 오르자 갑자기 몸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소리가 공중에서 들리며 상제님의 계시를 받게 된다. 10년 방랑을 끝내고 구도의 뜻을 세운 뒤, 몇 차례의 실패를 겪으면서도 끝없는 정성을 기울인 지 6년 만의 일이었다. 이후 수운은 상제님과의 만남을 통한 득도에 머물지 않고 약 1년 동안 수차례 상제님과 문답을 통한 가르침을 받게 된다.03 그는 이러한 가르침을 통해 또 다시 수련에 정진하였다.04 이후 그는 신념체계를 다듬어 수행절차를 정하면서 자신이 깨달은 도를 동학(東學)이라 천명했다.  

  수운은 신유(1861)년 6월부터 용담으로 찾아오는 이들을 포덕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제일 먼저 동학에 입도(入道)시키고자 한 사람은 그의 부인 박씨였다. 수운에게 시집 온 이후 숱하게 고생만 한 터라 입도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하루에도 수십 번씩 절하며 입도를 권하는 수운의 지극한 정성에 부인도 동학에 몸담게 된다. 이렇듯 먼저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전한 후, 집에서 부리던 하녀 중 한 사람을 수양딸로, 또 한 사람은 며느리로 삼는 것으로 자신의 신념을 몸소 실천했다.05

  그렇지만 포덕을 시작한 지 한 달도 못되어 수운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운의 참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반대자는 수운이 살던 현곡면 일대의 가까운 일가친척들이었다. 더욱이 8월에 이르자 성리학을 숭상하는 유생들은 수운의 도가 하느님을 모시는 서학(西學)과 같다고 몰기 시작하였다. 당시 천주학(天主學: 서학)은 국가로부터 엄청난 박해를 받고 있었으므로 서학으로 덮어씌우는 것은 곧 죽음으로 끌고가겠다는 의도였다. 

  포덕을 시작한 지 불과 3개월이 지난 9월에 이르자 유생들의 음해는 더욱 기승을 부려, 비난의 소리가 거세지더니 드디어 10월에는 경주관아가 직접 나서서 수운에게 활동을 중지하라고 명령하였다. 수운은 찾아오는 사람들을 상대로 포덕활동을 하였으므로 관의 명령대로 포덕활동을 중지하려면 곧 용담을 떠나야만 했다. 

  수운은 남원의 선국사(善國寺)에 딸려 있던 은적암(隱寂庵)으로 피신했다. 포덕을 시작한 지 불과 5개월여 만에 관의 지목을 피해 왔지만, 피신 중에 오히려 자신의 도가 서학으로 지목되는 것을 반성하고 사상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했다. 그는 신유(1861)년 11월부터 다음 해인 3월까지 그곳에 머물면서 동학의 중요한 경전들을 지었고, 또 교단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 위한 구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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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적암터 

 

  임술(1862)년 3월 수운은 남원 은적암에서 경주로 다시 돌아왔다. 스승인 수운이 돌아오자, 그간 흩어졌던 신도들이 다시 모여들게 되고 경주 일대는 다시 동학의 열기가 달아올라 자연히 관으로부터 지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06 결국 9월 수운은 이술(異術)로 사람들을 속인다는 혐의로 경주진영(慶州鎭營)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몰려와 최제우의 가르침이 민속(民俗)을 해치지 않는다고 증언하면서 석방해줄 것을 청원하자 경주진영은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는 인물이라 생각하고 무죄로 석방했다. 사람들은 관이 동학의 정당성을 인정한 것으로 생각해 포교에 더욱 열을 올렸다. 신도가 늘어나자 그해 12월 각지에 접(接)을 두고 접주(接主)로 하여금 관내의 신도를 관할하게 하여 동학의 조직을 체계적으로 관리했다. 

  이렇게 동학 세력이 확산되자 영남 유생들은 수운에 대한 비난과 공격을 가했는데 경주 유림들의 공격이 더욱 심했다. 한편 동학교도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던 경상도와 충청도 접경인 상주지방에서는 계해(1863)년 9월에 이 지역 유생들이 조직적으로 동학배척운동에 나섰다. 조정에서는 동학에 대한 유림들의 반발이 심각해지자 동학을 금압(禁壓)하기로 방침을 세우고 수운과 동학의 주요 간부들을 ‘혹세무민(惑世誣民)’이라는 죄목으로 체포하도록 지시했다.07

  이렇듯 관의 지목으로 용담 일대에 위기감이 넘치던 어느 날, 수운은 문득 제자들을 불러놓고, “내가 전에 꿈을 꾸었는데 태양의 살기(殺氣)가 왼쪽 넓적다리에 닿자 불로 변하여 밤새도록 타며, 사람 인(人)자를 그렸다. 깨어서 넓적다리를 보니, 한 점 붉은 흔적이 있어 사흘을 남아 있었다. 이것은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다. 분명히 머지않아 화가 미칠 것이다.”08라고 말하였다. 이미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천명(天命)과 신교(神敎)가 다할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조정에서 파견한 선전관(宣傳官) 정운구(鄭雲龜)와 그 일행은 12월 10일 새벽에 용담 일대를 습격해 수운과 제자 23명을 체포해서 서울로 압송했다.09 수운이 도를 세상에 편 지 불과 3년도 안 돼서 겪게 된 사건이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철종의 승하로 과천에서 회송되어 다시 대구의 감영(監營)에 이른 것은 1864년 1월 6일이었다. 대구로 압송된 수운은 당시 관찰사인 서헌순으로부터 문초를 받게 된다. 관변기록(官邊記錄)에 의하면, 1월 21일부터 2월 하순까지 거의 한 달간에 걸쳐 22차례의 문초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한 달 가까이 문초가 진행된 끝에 2월 29일 상부에 그 결과가 보고되었고 결국 갑자(1864)년 3월 10일 수운은 대구장대에서 참형을 당하게 된다.10 그의 참형 이유는 서학을 이름만 바꾸어서 유포하여 어리석은 백성을 현혹시켰다는 것인데 무엇보다 황건적이나 백련교도들의 난처럼 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11 상제님으로부터 천명과 신교를 받은 지 채 4년이 못 되어 당시 조선시대 뿌리깊이 박혀 있었던 유교의 벽에 부딪쳐 제세대도의 참뜻을 밝히지 못하고 오히려 좌도난정(左道政)이라는 죄명으로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의 나이 41세 때의 일이었다.

  동학(東學)은 수운이 상제님을 통해 깨달은 종교라 할 수 있다. 수운은 당시 드러난 사회 전반적 모순이 바로 선천(先天)의 마지막 모습이며, 곧 거대차원의 변화와 함께 후천(後天)이 열린다[開闢]고 주장했다.12 또한 사람들이 천리와 천명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이익[各自爲心]만을 생각하는 이유가 기존의 유도와 불도의 생명이 다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가 당시의 모든 문제에 대한 근본원인이 하늘에 대한 외경(畏敬)이 없이 각자가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마음에 있다고 본 것은 우주의 상극 구조가 아닌 인간의 마음에 관심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이 천명(天命)을 받들 수 있는 마음으로 회복하기 위해 그가 제시한 해답이 바로 상제님을 모신다는 ‘시천주(侍天主)’다.

  수운은 이렇게 시천주를 통해 상제님의 기운을 모신 사람을 ‘지상신선(地上神仙)’이라고 불렀다. 유교는 윤리도덕을 완성한 군자가 되기 위해 유교 경전이나 주석서를 수없이 읽어 그 뜻을 이해하고 실천해야만 했다. 도교는 불로불사 출세간(出世間)의 신선이 되기 위해 다양한 양생법을 익혀야 하지만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없고 은밀하게 전수될 뿐이었다.   이에 반해 수운은 실제 삶에서 구현하기 힘든 유학의 군자와 도교의 신선과는 그 성격이 다른 지상신선을 제시하며 누구라도 시천주를 하면 지상신선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시천주를 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바뀌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상제님에 대한 정성스러움[誠], 공경함[敬]과 믿음[信]이 있어야만 그 기운을 모실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선천에서 후천이 열릴지 알지 못했다. 단지 자신의 도가 펼쳐질 때가 바로 선천 오만 년이 지나고 후천 오만 년이 시작되는 바로 그때라고 이야기할 뿐이었다.13 그가 말하는 후천개벽은 태초의 우주를 다시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도덕을 회복함으로써 열리는 새로운 의식을 통해 새로운 사회, 새로운 역사를 창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그는 동학을 세상에 펴고자 했던 이유를 새로운 시운(時運)을 맞이해 인간이 성운(盛運)을 열어야 한다는 것으로 밝혔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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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운묘소(가정리 소재)

 

  수운은 세상 사람들이 후천개벽이 온다는 사실을 믿지 않자 답답함과 한스러움을 토로하게 된다.15 그가 걱정하는 구체적인 이유는 세상 사람들이 “도와 덕을 따르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 사람들이 도와 덕을 따르지 않는다면, 시운이 아무리 다가와도 결코 후천 세상이 열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16 수운은 성운을 맞이해 올바르게 열어가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상제님을 모시는 마음이 되어 다 같이 가야 한다고 말했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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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운유허비 (가정리 소재)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지상신선의 경지를 이루는 때가 곧 후천개벽의 세계라고 말했다. 수운이 지향하던 낙원은 현실을 초월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닌 우리가 사는 바로 이곳이다. 수운이 제시하는 지상천국은 실제적인 이 땅에 펼쳐지는 현실임과 동시에 인간 스스로의 완성을 통해 이루어가는 세계인 것이다. 바로 상제님의 도와 덕을 체득함으로써 도덕적 인격적 완성을 이룬 지상신선이 머무는 곳이다. 

  따라서 수운이 가고자 했던 세계는 인간 정신의 개벽으로 말미암아 도덕을 회복한 지상신선이 머무는 곳이지 실제로 선천 상극의 모순이 개벽으로 바뀐 세계개벽은 아니다. 결국 그가 주장한 후천개벽은 대순사상의 후천 개념과는 달리 인간의 자발적인 정신개벽에만 그쳐 세계개벽이 결여된 지상신선의 세계라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典經』

『동경대전』

『용담유사』

『水雲行錄』

『議政府啓言』

김용휘, 『최제우의 시천주에 나타난 천관』, 한국사상사학회, 2003.

김태윤, 「수운의 삶과 사상」, 《대순회보》74, 2007.

윤석산, 『동학교조 수운 최제우』, 모시는 사람들, 2004.

『동학사상과 한국문학』, 한양대학교, 1994.

『윤석산의 동학답사기』, 신서원, 2000.

이돈화, 『천도교창건사』, 경인문화사, 1970.

<대순회보> 1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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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김용휘, 『최제우의 시천주에 나타난 천관』, 한국사상사학회(2003), p.222.

02 윤석산, 『동학교조 수운 최제우』, 모시는 사람들(2004), p.91.

03 이돈화, 『천도교창건사』, 경인문화사(1970), pp.15~16 참조.

04 『東經大全』 「學文」, 吾亦幾至一歲 修而度之

05 윤석산, 위의 책, pp.136~137.

06 같은 책, pp.163~164.

07 같은 책, pp.286~287.

08 『水雲行錄』 先生曰 前日有一夢 太陽殺氣 着於左肵 而變爲火 終夜寫人字 而覺後見肵 則有一点紫㾗 露於三日 是以尙有所憂 而心獨知禍 將至也

09 윤석산, 위의 책, p.290.

10 윤석산, 『윤석산의 동학답사기』, 신서원(2000). pp.101~102.

11 『議政府啓言』 「일성록」 高宗 元年(1864) 甲子 3月 2日 壬寅 참조.

12 수운은 『東經大全』 「布德文」의 첫 부분에서, 선천을 우부우민(愚夫愚民)의 시기, 그리고 새로운 문명을 자각하고 성인(聖人)들이 등장하여 천도가 밝혀지는 오제(五帝) 이후의 문명시대, 나아가 세상의 사람들이 천리와 천명을 따르지 않으므로 도덕이 무너지고 혼란이 초래되는 막지소향(莫知所向: 어디로 가야 할 지 모름)의 시기 등으로 나누고 있다. (윤석산, 『동학교조 수운 최제우』, 모시는 사람들(2004), p.267).

13 윤석산, 『동학사상과 한국문학』, 한양대학교(1994), p.114.

14 윤석산, 『동학교조 수운 최제우』, 모시는 사람들(2004), p.12.

15 『東經大全』 「布德文」 “惜哉 於今世人 未知時運 聞我斯言則 入則心非出則巷議 不順道德 甚可畏也”

16 윤석산, 『동학교조 수운 최제우』, 모시는 사람들(2004), pp.268~269.

17 『潭遺詞』 「勸學歌」, “쇠운이 지극하면 성운이 오지마는 현숙한 모든 군자 동귀일체 하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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