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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인물순종(純宗) 대한제국의 2대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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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20 조회4,43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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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종황제 : 순종의 육군대장 복식차림으로 미루어 1907년 이후 촬영한 것으로 짐작 (궁중박물관) 

연구원 김주우

 

  상제께서 수박에 소주를 넣어서 우물에 담갔다가 가져오게 하셨도다. 그 수박을 앞에 놓고 가라사대 “내가 이 수박을 먹으면 곧 죽으리라. 죽은 후에는 묶지도 말고 널 속에 그대로 넣어두는 것이 옳으니라” 하셨도다. 상제께서 약방 대청에 앉아 형렬에게 꿀물 한 그릇을 청하여 마시고 형렬에게 기대어 가는 소리로 태을주를 읽고 누우시니라. 이날 몹시 무더워 형렬과 종도들이 모두 뒤 대밭가에 나가 있었도다. 응종이 상제께서 계신 방이 너무 조용하기에 이상한 마음이 들어 방을 들여다보니 상제께서 조용히 누워 계시는데 가까이 가서 자기의 뺨을 상제의 용안에 대어보니 이미 싸늘히 화천(化天)하신지라. 응종이 놀라서 급히 화천하심을 소리치니 나갔던 종도들이 황급히 달려와서 “상제의 돌아가심이 어찌 이렇게 허무하리오” 하며 탄식하니라. 갑자기 뭉게구름이 사방을 덮더니 뇌성벽력이 일고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화천하신 지붕으로부터 서기가 구천(九天)에 통하는도다. 때는 단기 四千二百四十二년 이조 순종 융희 三년 기유 六월 二十四일 신축 사시이고 서기로는 一九○九년 八월 九일이었도다. (행록 5장 35절) 

 

조선의 왕세자에 책봉 

  고종(高宗)은 정비와 후궁 소생을 합쳐 모두 9남 4녀의 자녀를 두었다. 이들 중에 3남 1녀만이 어른으로 살아남았다. 조선 왕실의 족보인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에 따르면 정비인 명성황후(明成皇后)는 4남 1녀를 두었는데, 순종(純宗)을 제외하고는 모두 어린 나이에 사망하였다. 순종은 1874년 2월 창덕궁의 관물헌(觀物軒)에서 고종과 명성황후(明成皇后, 閔妃)의 세 번째 자식으로 태어났다. 이름은 척(坧), 자는 군방(君邦), 호는 정헌(正軒)으로 2세 때 조선의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고종은 종실(宗室)의 안정과 국본(國本)의 화평을 위해 순종을 일찌감치 세자로 책봉하고 보양관(輔養官)01에 이돈우, 송근수, 김병덕를 임명하고, 민영목과 임헌회를 유선(諭善)02으로 지명해 철저한 왕도 교육을 시켰다. 모두가 당대 학문의 최고봉으로 유림(儒林)의 거두들이었다. 학문에 출중한 신하들을 제압하고 국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용상(龍床)의 임금부터 경세치도(經世治道)를 통달해야 했기 때문이다. 9세인 1882년 세자는 문묘(文廟)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고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어머니 명성황후 또한 유일한 혈육인 세자에 거는 기대가 많았다. 세자의 훈육에 열중하여 매번 강론한 내용을 질문하며 확인했다고 한다. 이런 일상 속에서도 명상황후의 세손에 대한 열망은 더욱 컸다. 순종은 1882년에 당시 11세인 민태호(閔台鎬)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하여 가례를 올렸다. 그 비가 곧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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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과 순종 (1888년경): 대한제국 선포 전 고종과 왕세자인 순종 사진으로 모두 익선관에 곤룡포 차림, 1888년 한국을 여행하고 사진을 수집해간 샤를르바라(Louis Charles Varat(1842~1893년))의 책(1892)에 실려 있다. (궁중박물관)

 

불우한 유년의 왕세자

  순종은 태어나면서 단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불우한 성장기를 보냈다. 어려서 천연두를 앓았고, 옆구리 담증으로 고생하는 등 잔병치레가 많았다. 순종의 건강과 마찬가지로 주변의 정치상황도 매우 좋지 않았다. 당시 조선의 조정은 대내외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대내적으로는 10년간 섭정을 하던 할아버지 대원군의 실각과 함께 외척세력인 안동김씨(安東金氏)·풍양조씨(豊壤趙氏)·여흥민씨(驪興閔氏) 사이에 조정의 실권 장악을 위한 권력 암투가 난무하였다. 또 나라의 문호개방을 둘러싼 개화파와 수구파의 첨예한 대립으로 무력정변(임오군란·갑신정변)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소용돌이 속에서 조선의 이권 선점을 위한 청·일본·러시아가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더욱 견딜 수 없는 건 할아버지(대원군)와 어머니(명성황후)가 원수로 변해 국가운명을 사이에 두고 싸우는 일진일퇴의 공방이었다. 순종은 할아버지가 개입된 임오군란(1882)으로 살아있는 어머니의 국장(國葬)이 선포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당시 어머니가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함에 따라 할아버지가 청나라로 연행되어 3년간 연금됐다 귀국하는 난리도 겪었다. 이때부터 조선은 외국 군대에 짓밟히는 수모를 겪기 시작했다. 1885년 3월 4일에 청일(淸日) 양국은 자국군의 철수를 합의하면서 ‘장차 조선에 파병할 경우 상대국에 미리 알린다.’는 골자로 한 천진조약(天津條約)을 맺었다. 

  이미 조선은 오랜 외척의 집권으로 국가재정이 파탄되고, 탐관오리의 수탈로 백성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급기야 민심이 동요하여 1894년의 3월 동학혁명으로 이어졌다. 보국안민(輔國安民)과 폐정개혁(弊政改革)을 기치로 내건 농민들의 기세가 전국적으로 확산하자 조선 정부는 청에 원병을 요청한다. 이에 일본 역시 천진조약을 근거로 군대를 동원하였다. 마침내 이 땅에서 청일전쟁(1894년)과 러일전쟁(1904년)이 발발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정복을 위한 내정간섭을 강화했다. 

  1895년 8월 20일에 친러관계를 주도하던 어머니(명성황후)가 일본인의 자객에 의해 무참히 시해됐다.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의 지시에 따라 일본군과 경찰, 정체불명의 민간인들에 의해 합동으로 자행된 것으로 시신마저 소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천인공노할 사건을 목격한 순종 부부는 큰 충격으로 실어증을 앓았다. 순종은 심야 공포증으로 홀로 소피(所避)를 못 봤고, 순명효황후는 밤낮없이 흉몽에 시달리고 식은땀을 흘리며 까닭 없이 웃었다. 그녀는 이때의 충격으로 마음의 큰 병을 얻어 33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어머니의 기대와 달리 순종과 순명효황후 사이에는 슬하에 자녀를 두지 못했다. 순종은 첫 번째 비가 죽자 1906년 해평 윤씨(1894-1966)를 황태자비로 맞았다.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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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실가족사진 (1922년): 오른쪽부터 이진, 영친왕, 순종, 순정효황후, 영친왕비, 덕혜옹주 순이다. 영친왕 내외가 귀국했을 때 창덕궁 실내에서 촬영한 것으로 추정. (궁중박물관) 

 

대한제국의 제2대 황제즉위와 강등

  1897년 고종은 아관파천(俄館播遷,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을 끝내고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한 직후에 황제로 즉위한다. 국호(國號)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연호(年號)를 부국자강의 뜻을 담아 ‘광무(光武)’라 하였다. 그해 10월 서울 소공동에 원구단(圓丘壇)이 완공되어 황제 즉위식을 했는데, 이때 순종은 황태자가 되었다. 하지만 대한제국 선포는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조치일 뿐이고, 국운은 더욱 기울어 이미 일본에 완전히 장악당한 상태였다.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고종황제에게 군사적 압력을 가해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한다. 강제와 협박에 의한 을사늑약으로 일본은 한양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초대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취임했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외교뿐 아니라 내정(內政)의 권한마저 상실하게 된다. 조약 체결 직후 고종은 곧 이 조약이 무효임을 대외에 선언했다. 

  1907년 4월 20일 고종 황제는 만국평화회의가 열릴 예정인 네덜란드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했다. 특사를 통해 일본의 침략상을 고발해 국제여론을 환기하고 대한제국의 독립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려 했다. 이미 내통한 미국·영국 등 서구열강들과 일본의 방해로 문전 축출을 당하자 격분한 이준(李儁) 열사가 현장에서 자결했다. 일본은 이를 기회로 식민지화 정책에 최대 걸림돌인 고종황제를 제위에서 축출하고자 했다. 이해 7월 20일 일본은 헤이그 특사 파견의 책임을 물어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황태자인 순종을 등극시킨다. 대한제국의 2대 황제인 순종의 나이가 34세였다. 이날 양위식(讓位式)에는 고종도 황태자도 모두 참석하지 않았다. 

  건강한 부왕이 태상황제로 물러나고 졸지에 황제가 된 순종은 고립무원 속의 용상이었다. 3년의 황제재위 기간 동안 하루하루가 망국(亡國)의 수순 밟기였다. 그가 황제로 오른 이후 일본은 식민지화 정책을 빠르게 추진한다. 각부의 수장을 일본인으로 임명해 국정 전반을 일본 통감이 총괄하는 차관정치를 확립시켰다. 공포에 질린 순종은 매국 대신들과 일제 차관이 시키는 대로 윤허만 내렸다. 이들은 연호도 광무에서 융희(隆熙)로 교체하였다. 

  1907년 한일신조약(韓日新條約)을 맺어 국정운영권을 탈취한 일본은 황실 군대마저 해산시켰다. 대한제국의 병권(兵權)이 완전히 상실되었다. 또한, 융희 2년(1908)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를 임의로 설립하여 무자비한 수탈을 자행하였다. 융희 3년(1909) 기유각서를 강제로 작성해 사법권을 강탈하고 대한제국의 군부·법부를 해체했다. 같은 해 일본은 조선과 만주 문제로 러시아와 협상을 위해 이등박문(伊藤博文, 이토 히로부미)을 파견한다. 그는 을사늑약의 주역이자 한국 통감을 지냈던 인물로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安重根) 의사에게 총살되었다. 이를 핑계로 일본은 한반도 무력 강점을 신속히 실행에 옮기게 된다. 

  마침내 1910년 8월 29일 왕실과 대신들을 회유해 ‘조선인의 원(願)에 의해 조선을 합병한다.’는 명분으로 한일합병조약(韓日合拼條約)을 강제로 성립시켰다. 이른바 경술국치일로 1392년에 개국한 조선왕조가 519년 만에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일본은 합병 후에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고종 태황제를 이태왕(李太王)으로, 순종황제를 창덕궁 이왕(李王)이라고 칭하였다. 호칭은 폐하(陛下)에서 전하(殿下)로 격하되었다. 나라를 빼앗기고 창덕궁에 머무르게 되었으니 유폐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순종황제는 일본 천황과 동등한 대우가 아닌 일본의 왕족과 동급으로 대우 받게 되었다. 이렇게 대한제국은 주권이 상실되었고, 백성과 한반도는 이후 한세대가 넘도록 암흑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역사에서 잊혀진 일본방문 

  망국의 슬픈 역사와 함께 순종의 비운은 모두의 기억에서 잊혔다. 순종 황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잊고 있는 두 개의 큰 사건이 있다. 하나는 1907년에 있었던 일본 요시히토(嘉仁) 태자04의 조선방문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1917년에 있었던 순종의 일본 방문사건이었다.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에게는 일본의 강압으로 마음에도 없는 일본 방문이 추진된다. 자신들이 점령한 나라에 태자가 오는 건 막기 어렵지만 점령당한 국가의 왕이 점령국에 간다는 것은 굴욕적인 일이다. 천황을 배알하고 충성을 맹세케 하자는 일본의 목적이 뻔히 보이기 때문이었다. 고종과 순종은 일본방문만은 거부하기 위해 완강히 저항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의 지령을 받은 친일파들의 정치공작과 위협으로 결국 일본방문을 허락한다. 이 과정에 나라를 잃은 왕의 초라한 모습과 권력에 빌붙어 자신의 안위만을 위하는 간신배들의 모습들이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그중에서도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의 백부 윤덕영(尹德榮)이 가장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1917년 6월에 순종은 여행이라는 명목하에 허약한 몸을 이끌고 대한해협을 건너는 눈물의 여정을 떠난다. 8일 아침에 창덕궁을 출발하여 경성역에서 부산으로 갔다. 부산에서 일본전함 히젠(肥前)을 타고 시모노세키(下關)에 도착했다. 6월 14일 도쿄(東京)에서 일본 천황을 만나고 26일에 일본을 떠났다. 27일 부산에 도착하고 기차로 창덕궁에 환궁하였다. 

  강압에 따른 방문이지만 순종은 일본방문 중에 의연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비록 화려한 환영식과 일본 천왕, 왕족들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지만, 그 자체가 기막힌 비극이다. 이와 같은 일본방문은 식민권력의 우위를 선전하려는 의도에서 시행되었다. 그것은 황실뿐만 아니라 일본 민족에 대한 조선 민족의 종속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어쨌든 이 일은 엄연한 사실이고 현실이었다. 때는 국권침탈 후 7년이 지난 시점이었고, 3·1 운동이 일어나기 2년 전의 일이다. 

  폐위된 순종은 창덕궁에 거처하며 망국의 한을 달랬다. 1926년 봄이 시작되는 4월 25일 아침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은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에서 승하하였다. 부친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겪은 지 불과 7년 뒤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향년 53세였다. 순종의 장례 일에는 서울에서 6·10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순종의 장지인 유릉(裕陵)은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위치한다. 유릉은 순종과 2명의 황후(순명황후, 순정황후)가 함께 있는 조선 유일의 삼위 합장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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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덕궁 앞에서 곡을 하는 학생들 (1926년): 6월 10일 장례식을 마친 융희황제 순종의 인산행렬이 창덕궁 돈화문을 나서 단성사 앞을 지나자 일제히 만세를 부르고 격문을 살포하여 사람들이 이에 동조하였다. (궁중박물관) 

 

참고문헌

곤도 시르스케,  『대한제국 황실비사』, 이언숙 역, 신명호 감수·해설, 서울: 이마고, 2008. 

김점수,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과 잊혀진 여행』, 성남: 유니더스정보개발원, 2011.

박영규, 『조선왕실계보』, 서울: 웅진 지식하우스, 2008.

이규원, 『조선왕릉실록』, 서울: 글로세움, 2012.

이성무, 『조선왕조사』, 서울: 수막새, 2011.

지두환, 『순종황제와 친인척』, 서울: 역사문화, 2009.

이민원, 『한국의 황제』, 서울: 대원사, 2002.

 

<대순회보> 1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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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조선시대 세자(世子) 혹은 세손(世孫)의 교육을 담당한 관직. 세자보양관은 대개 3인으로 2품 이상의 고관이 임명되었으며, 그 직책의 중요성 때문에 천거문제를 둘러싸고 당파간의 분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02 세손강서원(世孫講書院)의 벼슬. 좌유선과 우유선을 각각 1명씩 두었는데, 정삼품에서 종이품 사이의 인물을 중용하였다.

03 해평 윤씨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는 윤택영(1866-1935)의 딸로 12세에 황태자비가 되었다. 순종과 사이에 자식은 없다. 

04 본명은 요시히토. 일본 다이쇼 천황(大正天皇, 1879-1926)이다. 1912년부터 1926년까지 재위하였고, 1921년부터 1926년까지는 병으로 정사를 수행할 수 없어서 그의 아들인 히로히토(裕仁) 황태자가 대리청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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