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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 신명소설(小雪) 절후를 관장하는 이세적(李世勣)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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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10.01 조회4,34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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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교무부 

  

통일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이세적   

  이밀이 사라지고 난 뒤 당에 가장 큰 위협은 두건덕(竇建德, 573~621)01이었다.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두건덕이 여양을 공격했는데 이세적이 수비하고 있던 여양은 두건덕의 강력한 공격에 함락되고 이세적의 아버지 이개도 인질이 되었다. 두건덕이 여양을 여전히 이세적에게 다스리도록 하였지만 입장은 바뀌어 있었다. 이세적은 두건덕에게 잡힌 지 3년 만에 도망하여 장안(長安)으로 들어왔다. 

  장안으로 돌아온 이세적은 훗날 당태종이 되는 이세민을 좇아 동도(東都) 낙양(洛陽) 공략전에 나서게 되었다. 이세적은 이세민과 함께 두건덕을 평정하고 왕세충을 포로로 잡는 대승리를 거두고 개선했다. 당 왕조 성립의 가장 강력한 걸림돌이었던 적수를 제거한 이 전쟁의 승리로 이세민은 상장군(上將軍)이 되고 이세적은 하장군(下將軍)이 되었다. 이들은 둘 다 황금갑옷을 입고 개선하여 종묘(宗廟)에 승리를 고했다. 이세적의 아버지 이개 또한 입조(入朝)하여 본래의 관직을 회복했다. 이후 이세적은 이세민을 좇아 유흑달, ?~623)02과 서원랑(徐圓朗, ?~623)03을 격파하고 좌감문대장군(左監門大將軍)에 임명되었다.

  서원랑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고조가 이세적을 하남지역 대총관으로 임명하여 그들을 평정케 했다. 이후, 당에 귀순했던 보공석 ?~624)04이 수양(壽陽)05을 근거로 다시금 반란을 일으키자 고조는 조군왕(趙郡王) 효공[孝恭, 소한(小寒) 절후를 관장]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진압군을 파견했다. 이때 고조는 이세적을 같이 파견했다. 효공은 수군(水軍)을 이끌고 전진하고 이세적은 보병 만 명을 거느리고 회수(淮水)를 건너 수양을 공격하니 보공석의 부하 장수 풍혜량(馮惠亮), 진정통(陳正通)이 차례로 무너지고 난은 평정되었다. 이렇게 보공석의 난이 평정됨으로써 강남(江南)이 회복되었다.

  626년 당태종이 즉위하고 이세적은 병주도독(幷州都督)에 임명되었고 900호를 식읍으로 하사 받았다. 629[정관(貞觀) 3]년 당태종은 이정[李靖, 청명(淸明) 절후를 관장]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돌궐 원정군을 조직했는데 이때 이세적은 통막도(通漠道) 행군총관에 임명되었다. 이세적의 군대는 운중(雲中) 지역을 벗어나 돌궐과 싸워 이들을 패주시켰다. 이후 이세적은 군을 이끌고 이정의 군대와 만나 돌궐 원정의 전략을 논의했다. 

  이세적이 이정에게 말했다. 

  “지금 힐리 당시 돌궐의 임금)가 비록 패배했다고는 하지만 인구가 많습니다. 힐리가 만일 사막을 건너 도망가면 자신들의 족속을 보전하게 될 뿐 아니라 사로잡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사신이 파견되어 저들의 방비가 허술해졌을 터이니 바로 진격하면 싸우지 않고도 힐리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정은 이세적과 같은 생각이었다. 돌궐이 방비를 갖추기 전 몰아붙여서 순식간에 승부를 내자는 두 장군의 뜻이 일치하였고 이들은 곧 실행에 옮겼다. 이정이 군대를 이끌고 밤중에 출발하니 이세적이 뒤를 이었다.

  이정의 공격을 받은 힐리가한이 사막으로 도망가고자 하였으나 이세적의 군대가 미리 사막입구에 주둔해 있었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힐리가한은 부락 5만을 거느리고 이세적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당태종이 이세적에게 광록대부(光祿大夫)를 배수하고 병주대도독부(幷州大都督府) 장사(長史)에 임명했다. 이후 16년 동안 이세적이 병주를 다스렸는데 위엄있고 엄숙하다는 칭송을 들었다.

  당태종이 이세적을 칭찬하여 말했다. 

  “수양제는 인재를 선발해 그로 하여금 변방을 지키도록 하지 않고 중원 땅을 수고롭게 하여 장성(長城)을 쌓아 외적을 방비했다. 지금 짐은 이세적을 등용해 그로 하여금 병주를 지키도록 하였는데 돌궐이 감히 남침하지 못하니 능력 있는 관리가 장성보다 훨씬 낫도다!”

  641(정관 15)년 당태종이 이세적을 불러들여 병부상서로 삼았다. 그런데 이세적이 당태종의 명을 받고 궁궐에 도착하기도 전에 설연타(薛延陀)06의 진주(眞珠) 가한이 동돌궐을 공격하였다. 그는 당태종이 봉선(封禪)을 위해 태산(泰山)에 행차한다는 것을 듣고 당나라의 관리와 군사들이 황제의 봉선을 위해 동쪽으로 이동하면 변경의 방비가 허술해질 것으로 판단했다. 진주가한이 자신의 아들 대도설(大度設)에게 기병(騎兵) 8만을 주어 동돌궐을 공격했다.

  설연타의 동돌궐 공격에 대한 당태종의 조치는 신속했다. 당태종은 이세적을 삭방도(朔方道) 행군총관(行軍總管)으로 삼고 설연타를 공격했다. 이세적이 날랜 기병 6천 명을 거느리고 가서 대도설을 청산(靑山)에서 격파하고 명왕(名王) 한 명을 처단하고 포로 5만을 사로잡았다. 이세적은 이 전쟁의 공으로 아들 중 한명이 현공(縣公)으로 봉해졌다.

  643(정관 17)년 당의 3대 황제 고종이 될 진왕(晉王) 이치가 황태자가 되자 장손무기[長孫無忌, 동지(冬至) 절후를 관장]를 태자태사(太子太師)로 삼고 방현령[房玄齡, 우수(雨水) 절후를 관장]을 태부(太傅)로, 이세적에게는 첨사(詹事)를 배수하고 좌위솔(左衛率)을 겸직하게 하였으며 소우[蕭瑀, 곡우(穀雨) 절후를 관장]와 나란히 동중서문하삼품(同中書門下三品)에 임명되었다. 

  당태종이 이세적에게 말했다. “우리 아이가 동궁(東宮)으로 즉위하는데 그대가 오랫동안 장사(長史)로 일했기 때문에 궁궐 일을 맡기는 것이니 관직이 강등됐다고 의심하지 말라.”

  이세적은 당태종에게 충성을 다 바쳤고 당태종은 그에게 큰일을 맡길 만하다고 생각했다. 일찍이 이세적이 급작스런 병에 걸렸는데 의원이 말하기를 “수염을 태운 재로 치료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하자 당태종이 스스로 자기 수염을 잘라 약에 쓰도록 했다. 이세적이 병이 낫자 입궐하여 당태종에게 울면서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이세적이 수없이 머리를 조아려 피가 흘렀는데 당태종이 말했다. 

  “나는 사직을 위하여 한 일이니 무에 감사할 것이 있나?”

  그런 후에 이세적을 궁궐에 머물도록 하고 연회를 여는데 당태종이 조용히 말했다.

  “짐이 여러 신하들 가운데 어린 고아(孤兒)를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았는데 공을 능가할 사람이 없다. 공은 옛날에 이밀(李密)을 저버리지 않았으니 어찌 짐을 저버리리오?”

  당태종이 고아(孤兒)라고 칭한 사람은 태자이다. 당태종 자신이 죽고 나면 다음의 황제가 되는 태자는 고아나 다름없으니 그를 잘 보필해 달라고 이세적에게 부탁한 것이다. 당태종의 말에 이세적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흘려 충성을 맹세했다. 이윽고 이세적이 대취(大醉)하자 당태종이 친히 옷을 벗어 이세적을 덮어 주었다. 자신의 사후 다음의 황제의 일까지 부탁할 정도로 당태종은 이세적을 신뢰했다.

  당태종이 병이 들자 태자에게 말했다.

  “너는 이세적에게 은혜를 베푼 적이 없다. 이제 내가 세적을 내칠테니 내가 죽은 후에 곧 그를 불러들여 복야(僕射)로 임명하거라. 그러면 세적은 필시 목숨을 바쳐 너를 섬길 것이다.”

  그리고는 이세적을 첩주도독(疊州都督)에 임명했다. 이세적은 조서를 받자 집에 가지도 않고 떠났다.

  649(정관 23)년 당태종이 53세의 나이로 죽고 태자가 즉위하니 그가 고종이다. 고종은 이세적을 불러들여 낙주자사(洛州刺史)와 낙양궁(洛陽宮) 유수(留守)로 삼고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동중서문하로 진급시키고 조정의 기밀에 참여케 한 뒤 마침내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임명했다. 

<다음 호에 계속>  

 <대순회보> 1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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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수(隋)나라 말기에 일어난 농민 반란의 우두머리들 중의 하나로 양자강(揚子江) 이북 지역을 근거지로 삼았다. 무리를 모아 618년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하(夏)’라 하고 스스로 ‘하왕(夏王)’임을 선포했다. 621년 당(唐)이 이세민을 보내 낙양(洛陽)의 왕세충(王世充)을 공격하였는데, 왕세충이 두건덕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세충을 구원하기 위해 병사를 움직였으나 호뢰관(虎牢關)에서 당군(唐軍)에게 패하고 장안에서 참수되었다. 

02 두건덕과 같은 청하(淸河) 장남 현재 산동성(山東省) 무성(武城)] 사람이다. 수나라 말기에 학효덕을 따라 와강군(瓦崗軍)에 들어갔다. 618년 왕세충과의 싸움에서 와강군이 패하자 왕세충의 포로가 되어 군마총관(軍馬總管)에 임명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무리를 이끌고 두건덕에게 가서 한동군공(漢東郡公)에 봉해졌다. 621년 두건덕이 당군에 패하자 두건덕을 따르던 무리들을 수습하여 반년 만에 두건덕의 옛 영역을 회복했다. 다음해인 622년 한동왕(漢東王)을 칭했으나 이세민에 패해 돌궐로 달아났다가 623년 태자 건성이 이끄는 당군에 패해 잡혀죽었다. 

03 연주 현재 산동(山東) 연주 사람. 수나라 말기에 연주에 근거를 두고 서(西)로는 랑야(琅邪), 북(北)으로는 동평(東平)까지 자신의 세력권으로 두었다. 이밀(李密)과 두건덕(竇建德)을 따랐는데 619년(무덕 2) 당에 투항(投降)하여 연주총관에 임명되고 노군공(魯郡公)에 봉해졌다. 621년 유흑달이 두건덕의 잔당을 수습하여 다시금 군사를 일으키자 이에 호응하여 당에 반기를 들고 노왕(魯王)이라 자칭하며 유흑달의 대행대원수(大行臺元首)가 되었는데 이들의 세력이 한때 강력하여 진(陳), 기(杞), 이(伊), 낙(洛), 조(曹), 대(戴) 8주(州)에서 두건덕의 잔당들이 관리를 죽이고 반란에 합세하여 산동성 일대를 장악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의 강력한 토벌로 이들은 괴멸되었고 서원랑 또한 사람들에게 잡혀 죽임을 당했다. 

04 수나라 말에 일어난 여러 군도(群盜)들 중 하나이다. 당에 투항하여 서국공(舒國公)에 봉해졌다. 그러나 무덕 6년(623년)에 반란을 일으켜 국호를 ‘송(宋)’이라 하고 칭제(稱帝)하였으나 이듬 해(624년)에 진압되어 참수되었다. 

05 안휘성(安徽省) 수현(壽縣) 지역의 현(縣). 수춘(壽春). 

06 6~7세기 몽골 북부에서 활동하던 터키 계통의 유목 민족. 627년 이후 부족장 이남(彛男)의 활약으로 동돌궐을 와해시키고 몽골 고원을 지배하였으나 이남이 죽은 뒤 쇠퇴하여 646년 당(唐)에 멸망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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