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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 신명소설(小雪) 절후를 관장하는 이세적(李世勣)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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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10.01 조회5,87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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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교무부

   

고조, 태종, 고종 3대를 보좌한 이세적    

  650[영휘(永徽) 원년(元年)]년 고종은 이세적이 복야직을 그만두기로 청하자 허락했다. 그러나 여전히 개부의동삼사의 자격으로 정사(政事)에 참여케 했다. 653(영휘 4)년에 고종은 이세적을 사공(司空)으로 진급시켰다.

  당태종이 643(정관 17)년에 이미 능연각(凌煙閣)에 24 공신도(功臣圖)를 그리면서 이세적의 초상화를 그려 놓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고종이 다시 그의 형상을 그리도록 명령을 내리고 직접 서문(序文)을 썼다. 또 조서를 내려 이세적으로 하여금 궁궐을 출입할 때 작은 말을 타고 동쪽 누대와 서쪽 누대를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고 이세적이 퇴궐할 때에는 하급관리들로 하여금 한 사람씩 나와서 배웅하게 했다.

  655(영휘 6)년 고종이 뒷날 측천무후(則天武后)가 되는 무소의(武昭儀)01를 황후로 세우고 싶어했는데 대신들의 반대가 두려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의부(李義府)와 허경종(許敬宗)은 왕황후를 폐하자고 주청(奏請)했다. 고종이 이세적과 장손무기, 우지녕(于志寧), 등 중신들을 불러 황후를 폐하는 일을 의논하려 하였는데 이세적이 병을 핑계로 입궐치 않았다. 이세적을 제외한 중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고종이 말했다. 

  “왕황후에게 자식이 없으니 죄 중에 후사(後嗣)가 없는 것보다 큰 것이 없다. 장차 황후를 폐하려 한다.”

  저수량이 현재의 왕황후를 폐하고 무소의를 황후로 책봉하는 데 반대했다. 고종의 소집에 응한 다른 신하들도 발언을 하지는 않았지만 뜻은 저수량과 같았다. 당태종이 죽기 전 고종에게 “장손무기와 저수량만 있으면 너는 천하를 걱정하지 마라” 한 그 고명(顧命) 대신이 반대의 선봉에 서 있었던 것이다.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신하들의 반대는 이어졌다.

  얼마 뒤 고종은 이세적의 의견을 듣고자 몰래 그를 불러 말했다. 

  “짐이 무소의를 황후로 세우고자 하였는데 고명대신들이 모두 불가(不可)하다 하니 그만 두어야 하는가.”

  고종이 이세적에게 한 말은 자신의 뜻을 철회해야 하느냐고 물은 것이 아니었다. 고종이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자 했으나 아버지 당태종이 신임한 고명대신들의 반대였다. 무소의를 황후의 자리에 앉히기 위해서는 반대하는 신하들 정도의 중량감 있는 대신의 찬성이 필요했던 것이다. 고종은 이미 당태종의 배려로 이세적으로부터 절대적 충성을 확보한 상황이었다. 고종으로선 이세적이 가장 필요한 순간에 자신의 편이 되어 줄 수 있느냐고 물은 것이다. 고종의 뜻을 간파한 이세적이 대답했다. 

  “이는 폐하의 집안 일입니다. 집안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볼 필요는 없습니다.”

  고종이 마침내 왕씨 황후를 폐하고 무소의를 황후로 맞았다. 이세적은 사공으로 황후 책봉식의 실질적인 일을 담당하게 되었다. 

  669[총장(總章) 2]년에 이세적이 죽으니 그의 나이 76세였다. 이세적의 죽음을 전해 듣고 고종이 말했다. 

  “이세적은 윗사람을 받듦이 충성스러웠고 부모를 섬김이 효성스러웠으며 삼조(三朝: 고조, 태종, 고종)를 거치는 동안 과오를 범한 적이 없었다. 성품은 청렴하고 신중했고 집안 살림에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이제 이세적이 세상을 떠남에 분명 집안에 남은 재산이 없을 것이다. 유사(有司)는 그의 장례비용을 넉넉히 마련해 돕도록 하라.” 

  라고 하고는 눈물을 떨구었다. 

  고종은 이세적의 죽음에 최대한의 애도를 표했다. 광순문(光順門)에서 이세적의 죽음을 애도하여 큰 소리로 곡(哭)하고 7일 동안 정사를 보지 않았다. 이세적에게 태위(太衛)와 양주대도독(揚州大都督)을 추증(追贈)하고 시호(諡號)를 정무(貞武)라 했다. 또한 궁궐의 그릇을 내어 주어 이세적의 장사(葬事)에 쓰도록 했고 소릉(昭陵)에 장사지냈다. 

  이세적의 장례일에 고종은 태자와 함께 옛 미앙궁(未央宮)의 고성(故城)에 행차하여 누각에 올라 전송했는데 이세적의 상여를 보며 통곡했다. 백관(百官)들에게 조서를 내려 성(城)의 서북(西北)까지 가서 송별하게 했으며 위청(衛靑), 곽거병의 고사(故事)에 준하여 음산(陰山), 철산(鐵山), 오덕건산의 모형을 만들어 돌궐과 설연타를 정벌한 이세적의 공적을 기리도록 했다. 684[광택(光宅) 1]년 고종이 죽고 중종(中宗)이 즉위하자 조서를 내려 이세적을 고종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했다. 

  처음에 이세적이 여양창을 탈취하였을 때에 이세적에게 와서 식객 노릇을 한 이들이 많았다. 그들 중에는 고계보(高季輔)와 두정륜(杜正倫)도 있었다. 또 호뢰(虎牢)를 평정할 때에 대주(戴胄)를 얻었는데 모두 명신(名臣)이 되니 세상 사람들이 이세적이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여겼다.

  당군이 낙양을 평정하고 선웅신(單雄信)을 포로로 잡았는데 그는 이세적의 옛 친구였다. 이세적은 선웅신의 재주와 무력(武力)을 고조에게 알리고 말했다.

  “죽음을 면하게 해주시면 반드시 보은할 것입니다. 청컨대 관직을 주고 속죄케 하여 주십시오.” 

  이세적의 간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이세적이 울부짖어 통곡하면서 넓적다리를 베어 선웅신에게 먹이며 말하길 “삶과 죽음은 영원한 이별이다. 이제 나의 이 살은 너와 함께 흙으로 돌아간다.”라고 하고는 선웅신의 아들을 거두어 양자로 삼았다. 

  이세적은 우애가 깊었다. 이세적의 누이가 일찍 병이 들었는데 그가 복야가 되어 있었지만 친히 누이를 위하여 죽을 끓이다가 그만 자기 수염을 태우고 말았다. 누이가 이를 보고 그만두라고 하면서 말했다. 

  “노복과 비첩(婢妾)들이 있는데 어찌하여 스스로 고생하는 것이 이와 같소.” 

  하자 답하기를 “부릴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누님은 병이 많고 저도 또한 늙었으니 비록 죽을 끓여 드리고자 한들 몇 번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이세적은 지략이 뛰어났고 임기응변에 능해 그때그때 상황에 꼭 맞았다. 다른 사람의 장점을 들으면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그 공을 반드시 아랫사람들에게 돌려 금이나 비단을 얻으면 다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세적이 일에 임하여 장수를 선발할 때에는 용모가 뛰어나고 순후하며 복스럽게 잘 생긴 이들을 골라서 보냈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면 “박명(薄明)한 사람은 더불어 공명을 이루기에 부족하다”라고 했다. 이세적이 죽으니 그를 따르던 병사들이 모두 울었다.

  이세적의 병이 계속된 이래로 황제와 황태자가 약을 하사하면 먹었지만 가족들이 의원을 부르려 하면 허락지 않았다. 여러 아들들이 굳이 약을 올리면 매번 말했다.

  “나는 산동(山東)의 농사꾼으로 삼공(三公)의 지위에 올랐고 또 나이도 팔십에 이르렀으니 이는 천명이 아니겠느냐? 생사는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니 어찌 의원에게 가 살기를 구하리오?” 

  이세적의 동생 이필(李弼)은 처음엔 진주(晉州) 자사로 있었다. 그런데 이세적이 병이 들자 고종이 이필을 불러 그를 사위경(司衛卿)으로 삼아 형을 보살피도록 했다. 이세적이 이필에게 문득 말하길 “내가 조금 차도가 있는 듯하니 술자리를 마련해 즐기자꾸나.”라고 하고는 자손들을 모아 아래에 늘어서게 했다. 이윽고 풍악을 울리면서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를 마치고 이세적이 이필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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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스스로 헤아려 보니 죽을 날이 멀지 않은 것 같구나. 내가 유언을 하고자 하는데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을까 염려되니 지금 이것으로 이별하고자 한다. 내가 보아하니 방현령, 두여회[杜如晦, 대한(大寒) 절후를 관장], 고계보는 모두 애써 그들의 가문을 일으켜 세워 그 후손들에게 물려주었다. 그런데 모두 불초한 자손들에 의해 무너졌다. 나의 자손들을 이제 너에게 맡기니, 너는 신중히 살펴서 언행을 삼가지 않거나 나쁜 무리와 사귀는 자가 있으면 곧 매질하여 죽이고 두루 알리거라. 그리하여 후인들로 하여금 내가 방현령이나 두여회를 비웃듯이 나를 비웃지 못하도록 하라. 내가 죽으면 베[布]로 포장한 덮개 없는 수레에 관을 싣고 평상복을 입혀 염하고 그 위에 관복을 덮거라. 내가 죽어서도 지각이 있다면 조회복(朝會服)을 입고 선제(先帝) 폐하를 알현하기를 바라노라. 부장품으로는 오직 대여섯 마리의 모조 말을 만들어 아래에 휘장을 두르고 검은 머리에 흰 비단 치마를 입은 인형 열 개를 중간에 세우도록 하고 다른 것은 하지 말라. 첩들은 남아서 자식을 양육하고자 하는 이는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고 나머지는 다 내보내거라. 장례가 끝나면 너는 내 집에 이사 와서, 어리고 약한 이들을 잘 보살피도록 하라. 만일 내 말을 어긴다면 이는 내 시신을 도륙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말하지 않았고 이필이 그 말을 따랐다.    

 <대순회보> 1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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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 무측천(武則天) 또는 무후(武后)라고도 한다. 이름은 조(照). 무사확의 딸. 14세에 궁(宮)에 들어와 태종의 후궁이 되었으나 황제가 죽자 비구니가 되었다. 고종이 즉위하고 그녀를 불러 소의[昭儀, 구빈(九嬪) 중 첫 번째]로 삼았는데 고종의 총애를 얻어 아들을 낳고 655년 황후가 되었다. 660년 국정(國政)에 참여하게 되었고 675년부터는 고종을 대신하여 정사를 전담하였다. 683년 고종이 죽자 자신의 아들 중종(中宗)과 예종(睿宗)을 차례로 즉위시키고 당나라의 황족을 무력으로 탄압하였다. 690년 국호(國號)를 주(周)로 고치고 자칭 성신황제(聖神皇帝)로 중국사상 유일한 여제(女帝)가 되어 15년간 전국을 지배하였다. 705년 병을 얻어 얼마 되지 않아 죽었는데 이때 장간지(張柬之) 등이 정변을 일으켜 중종이 복위되고 당 왕조가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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