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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 신명대설(大雪) 절후를 관장하는 진숙보(秦叔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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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10.01 조회39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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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교무부 

 

당 창업에 큰 공을 세운 진숙보 

  진경(秦瓊, ?~638)은 자(字)가 숙보(叔寶)인데 이름보다 자로 더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제주(齊州) 역성[歷城, 산동성(山東省) 제남(齊南)] 사람으로 처음에 수장(隋將) 내호아(來護兒)의 군부(軍府)에 있었다. 진숙보가 모친상을 당함에 내호아가 관리를 보내 문상(問喪)하였다. 이를 이상히 여긴 관리가 물었다.
  “일개 병사의 죽음이나 상사(喪事)에 장군께서 이제껏 조문(弔問)하신 적이 없으셨는데 이제 유독 진숙보에게만 문상하시니 어인 까닭입니까?”
  내호아가 답했다.
  “이 사람은 재치가 있고 용감하며 절개가 곧으니 어찌 비천한 자리에 오래 머물겠는가?”
  곧이어 통수(通守) 장수타(張須陀)를 좇아 노명월(盧明月)을 에서 공략하는데 적의 병사는 십여 만이요, 수타가 이끈 병사는 만 명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노명월은 목책(木柵) 70여 개를 설치하여 수군의 공격에 대비하니 양군의 대치는 길어졌다. 이윽고 수군(隋軍)의 식량이 떨어지니 장수타는 병사를 이끌고 후퇴하려 했다.
  장수타가 말했다.
  “우리들이 후퇴하는 것을 적들이 보면 반드시 추격해 올 것이다. 적의 본진이 비어 있을 때 우리 정예부대를 뽑아 적군의 진영을 습격하여 점거하면 큰 승리를 얻을 수 있다. 이는 실로 위험한 일인데 누가 나서겠는가?”
  장수타가 물었지만 병사들 중에 대답하는 자가 없었는데 오직 진숙보와 나사신(羅士信)만이 나섰다. 장수타는 이들에게 날랜 병사 천 명을 주어 갈대숲 사이에 매복하게 하고 자신은 진영을 버리고 후퇴했다. 그러자 노명월이 전 군사를 동원해 추격해 왔다. 진숙보가 말을 몰고 적의 진영 앞으로 가니 목책(木柵)의 문은 닫혀 있고 사람은 없었다. 진숙보와 나사신이 목책에 올라가 적의 깃발을 뽑고, 목책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을 제압한 뒤 진영이 어지러워진 틈을 타 30여 곳의 목책에 불을 질렀다. 노명월의 본진은 불길에 휩싸여 화염이 하늘 높이 솟구쳐 오르니 노명월이 이를 보고 급히 돌아오려 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장수타가 후퇴하는 노명월을 반격하여 대파했다. 이 일로 진숙보의 무용(武勇)은 널리 알려졌다.
  진숙보는 장수타를 좇아 이밀(李密)01과 형양(滎陽)에서 싸웠다. 그런데 장수타가 이밀과의 싸움에서 죽자 남은 병사를 거느리고 배인기(裴仁基)에게 의탁했다가 인기가 이밀에게 항복하자 같이 투항했다. 이밀은 진숙보를 얻게 되어 크게 기뻐하며 그를 표기장군(驃騎將軍)으로 삼고 후대했다.
  617[대업(大業) 13]년 수양제를 수행하던 우문화급(宇文化及, ?~619)02이 양제를 시해하고 병사를 이끌고 북상하면서 여양을 공격하였다. 이밀이 우문화급과 여양에서 격전을 벌였는데 이때 화살을 맞고 말에서 떨어져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이밀이 혼절하자 좌우에 있던 사람들은 달아나 흩어졌고 적병들은 이밀에게 달려들었다. 진숙보가 홀로 그들을 막고 호위하여 이밀은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이후 진숙보가 다시 군사를 수습하여 그들과 더불어 힘껏 싸우자 우문화급이 마침내 물러났다.
  619[무덕(武德) 2]년 왕세충과의 전쟁에서 크게 패한 이밀이 당 조정에 귀순하자 진숙보는 왕세충에게 투항했다. 왕세충은 진숙보를 높이 평가하여 으로 삼았다. 이때 정지절[程知節, 추분(秋分) 절후를 관장]도 진숙보와 같이 왕세충에게 투항했는데 이들은 왕세충의 후대를 받았지만 그의 위인됨을 싫어했다. 
  정지절이 진숙보에게 말했다.
  “왕세충은 그릇과 도량이 얕고 좁으며 망령된 말을 많이 하고 저주하거나 맹세하는 것을 좋아하니 이는 늙은 무당일 뿐입니다. 어찌 난세를 평정할 주군(主君)이겠습니까?”
  왕세충이 당의 군사와 구곡(九曲)에서 싸우는데 진숙보와 정지절이 모두 군사를 거느리고 진(陣)에 있었다. 정지절과 진숙보는 왕세충을 찾아가 말에서 내려 인사하고 말했다.
  “우리들이 공의 특별한 예우를 받았지만 저희가 몸을 의탁할 곳이 아닙니다. 청컨대 여기서 작별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진숙보와 정지절이 말에 올라 좌우 수십 명의 기병과 함께 당에 투항하니 왕세충이 이들을 감히 추격하지 못했다. 
  이렇게 해서 진숙보와 정지절이 당에 투항하자 고조(高祖) 이연(李淵)은 이들로 하여금 진왕부(秦王府)에 소속시켜 이세민을 섬기도록 하였다. 이세민은 평소에 이들의 명성을 들었으므로 그들을 후하게 예우했다. 진숙보는 이세민을 좇아 장춘궁(長春宮)을 평정하여 마군총관(馬軍總管)에 임명되었다. 이후 진숙보는 울지경덕[尉遲敬德, 춘분(春分) 절후를 관장]을 격파하는 데 큰 공을 세워 고조가 상으로 황금병을 하사하고 공로를 치하하며 말했다.
  “그대는 처자도 돌보지 아니하고 짐에게 와주었고 또한 공로도 세웠으니 만약 짐의 살코기가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마땅히 베어서 그대에게 줄 것이거늘, 하물며 짐의 자녀나 구슬, 비단 등이랴.”
  얼마 후에 진숙보는 진왕부의 우삼통군(右三統軍)이 되어 송금강(宋金剛, ?~620)03을 개휴(介休)에서 몰아내어 상주국(上柱國)에 임명되었다. 또 이세민을 좇아 왕세충(王世充, ?~622),04 두건덕[(竇建德, 573~621)05  ?~623]06 세 도적을 토벌하는데 그 자신이 매번 선봉에 서니 감히 굳세게 대항하는 적들이 없었다. 금과 비단으로 하사받은 것이 그때까지 수 천 수 만에 이르렀고 나아가 익국공(翼國公)으로 승진했다. 매번 적군 중에 뛰어난 장사나 날랜 병사가 진영을 오락가락하며 힘을 과시할 때마다 이세민은 진숙보로 하여금 그들을 잡아오라고 명했다. 진숙보는 말을 달리고 창을 세워 수많은 적군 사이를 종횡무진하며 그들을 공격하였고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없었으므로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626(武德 9)년 6월 4일 이세민이 태자(太子) 이건성과 제왕(齊王) 이원길을 현무문(玄武門)의 정변(政變)을 통해 타도하였다. 6월에 황태자가 된 이세민이 8월 고조 이연의 양위(讓位)로 황제에 오르니 그가 당의 2대 황제인 태종이다. 이세민이 태자가 되자 진숙보는 좌무위대장군(左右武衛大將軍)에 임명되었는데 실제 식읍(食邑)이 칠백 호(戶)에 달했다.
  훗날 진숙보가 병이 들어 차츰 병세가 악화되었는데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전쟁터에서 자라나서 200여 차례의 전투를 겪으면서 여러 번 중상을 입어 피 흘리고 쓰러졌으니 어찌 병이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638[정관(貞觀) 12]년 진숙보가 죽으니 당 조정은 그를 서주도독(徐州都督)에 추증(追贈)하고 소릉(昭陵)에 안장했다. 당태종의 특명으로 돌로 사람과 말을 조각하여 그의 묘 앞에 세워 진숙보의 전공(戰功)을 기리도록 했다. 이듬해인 정관 13년 진숙보는 호국공(胡國公)으로 다시 봉해졌다.
  4년 후인 643(정관 17)년에 당태종이 조서를 내려 사도(司徒) 조국공(趙國公) 장손무기[長孫無忌, 동지(冬至) 절후를 관장], 사공(司空) 하간왕(河間王) 효공[孝恭, 소한(小寒) 절후를 관장], 사공 내국공(萊國公) 두여회[杜如晦, 대한(大寒) 절후를 관장], 사공 태자태사(太子太師) 정국공(鄭國公) 위징[魏徵, 입춘(立春) 절후를 관장], 사공 양국공(梁國公) 방현령[房玄齡, 우수(雨水) 절후를 관장],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태자태부(太子太傅) 신국공(申國公) 고사렴[高士廉, 경칩(驚蟄) 절후를 관장], 개부의동삼사  울지경덕[尉遲敬德, 춘분(春分) 절후를 관장], 특진(特進)07 위국공(衛國公) 이정[李靖, 청명(淸明) 절후를 관장], 특진 송국공(宋國公) 소우[蕭瑀, 곡우(穀雨) 절후를 관장],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포국공(褒國公) 단지현[段志玄, 입하(立夏) 절후를 관장], 보국대장군 기국공(夔國公) 유홍기[劉弘基, 소만(小滿) 절후를 관장],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장국공(蔣國公) 굴돌통[屈突通, 망종(芒種) 절후를 관장], 섬동도행대우복야(陝東道行臺右僕射)  은개산[殷開山, 하지(夏至) 절후를 관장],  시소[柴紹, 소서(小暑) 절후를 관장],  장손순덕[長孫順德, 대서(大暑) 절후를 관장], 낙주도독(洛州都督)  장량[張亮, 입추(立秋) 절후를 관장], 이부상서(吏部尙書) 진국공(陳國公) 후군집[侯君集, 처서(處暑) 절후를 관장],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장공근[張公謹, 백로(白露) 절후를 관장], 좌령군대장군(左領軍大將軍) 노국공(盧國公) 정지절[程知節, 추분(秋分) 절후를 관장], 예부상서(禮部尙書) 영흥군공(永興郡公) 우세남[虞世南, 한로(寒露) 절후를 관장], 호부상서(戶部尙書)  유정회[劉政會, 상강(霜降) 절후를 관장],  당검[唐儉, 입동(立冬) 절후를 관장], 병부상서(兵部尙書) 영국공(英國公) 이세적[李世勣, 소설(小雪) 절후를 관장], 그리고 진숙보의 초상화를 그려서 능연각(凌煙閣)에 걸어두게 하였다.
  655[영휘(永徽) 6]년에 당고종이 사신을 보내어 능연각에 그려진 명신들의 초상화 중에 일곱 인물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그들은 위징, 고사렴, 소우, 단지현, 유홍기, 우세남, 진숙보로 이들은 시종 이름을 날린 자들이었다. <완결>  

 

 <대순회보> 1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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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이밀(李密, 582~618). 아버지 이관(李寬)의 포산공(蒲山公) 지위를 세습하여 수 양제의 친위부 대도독에 임명되었다. 613년 양현감의 반란을 도왔고 617년 적양(翟襄)의 추천으로 그들의 주군이 되어 자신을 위공(魏公)이라 칭했으나 618년 왕세충에 패하여 당에 귀순하였다. 그러나 이후 당에 반기를 들었다가 당의 복병에 의해 죽었다.  

02 수양제의 집권에 공을 세운 우문술(宇文述)의 맏아들. 여러 번 법을 어겨 장안 사람들이 경박공자(輕薄公子)라 칭했다. 수양제가 태자 시절에 호위무관이었고 즉위하자 더욱 관직이 올랐다. 금령(禁令)을 어기고 돌궐(突厥)과 교역하다가 수양제의 노여움을 사 죽을 뻔하였으나 아버지 우문술의 공으로 겨우 죽음을 면하고 노비의 신분이 되었다. 우문술이 죽고 우문술의 공로를 생각한 수양제에 의해 다시 대장군이 되어 수양제를 따랐다. 617년[대업(大業) 13] 수양제를 수행하던 중 반란을 일으켜 수양제를 죽이고 진왕(秦王) 양호(楊浩)를 세웠다가 얼마 뒤 양호를 죽이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허(許)라 했다. 이밀(李密)에게 패하고 위주(魏州)를 공격하다가 실패하여 요성(聊城)으로 달아났다가 두건덕에게 패배하여 사로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03 상곡[上谷, 현재 하북성(河北省) 역현(易縣)]사람. 수나라 말에 반란을 일으켰다. 그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위도아(魏刀兒, ?~618)가 두건덕(竇建德)을 공격하다가 위기에 빠지자 위도아를 구원하러 나섰다가 패하여 남은 무리를 이끌고 유무주(劉武周)의 부하가 되었다. 유무주는 송금강을 신임하여 군사의 일을 맡기고 송왕(宋王)이라 칭했다. 또한 서남도대행대(西南道大行臺)에 임명하여 당의 기반이 된 산서성(山西省) 일대에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들은 619년(무덕 2) 병주(幷州), 회주(澮州)에서 당군(唐軍)에 연승하였다. 그러나 다음해 이세민에게 패하여 유무주와 함께 돌궐에 투항하였다. 이후 돌궐에서 다시 상곡으로 돌아오려고 하였으나 계획이 누설되어 잡혀 죽었다. 

04 경사(經史)에 밝고 병법에 정통하였으며 수(隋) 양제(煬帝)의 신임을 얻어 강도통수(江都通守)가 되었다. 수나라 말기에 일어난 농민 반란으로 동도(東都)인 낙양(洛陽)이 위험해지자 양제의 명으로 낙양을 구원하였다. 618년 양제가 죽자 낙양에서 월왕(越王) 을 황제로 추대하였다. 이후 강력한 반군이었던 이밀(李密)을 패퇴시키고 다음해인 619년 양통을 폐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정(鄭)’이라 했다. 621년 이세민이 이끈 당군에 패하여 투항하였으며 장안으로 압송된 후 원한을 품은 사람들에게 피살되었다.  

05 수(隋)나라 말기에 일어난 농민 반란의 우두머리들 중의 하나로 양자강(揚子江) 이북 지역을 근거지로 삼았다. 무리를 모아 618년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하(夏)’라 하고 스스로 ‘하왕(夏王)’임을 선포했다. 621년 당(唐)이 이세민을 보내 낙양(洛陽)의 왕세충(王世充)을 공격하였는데, 왕세충이 두건덕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세충을 구원하기 위해 병사를 움직였으나 호뢰관(虎牢關)에서 당군(唐軍)에게 패하고 장안에서 참수되었다.   

06 두건덕과 같은 청하(淸河)  현재 산동성(山東省) 무성(武城)] 사람이다.  수나라 말기에 학효덕을 따라 와강군(瓦崗軍)에 들어갔다. 618년 왕세충과의 싸움에서 와강군이 패하자 왕세충의 포로가 되어 군마총관(軍馬總管)에 임명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무리를 이끌고 두건덕에게 가서 한동군공(漢東郡公)에 봉해졌다. 621년 두건덕이 당군에 패하자 두건덕을 따르던 무리들을 수습하여 반 년만에 두건덕의 옛 영역을 회복했다. 다음해인 622년 한동왕(漢東王)을 칭했으나 이세민에 패해 돌궐로 달아났다가 623년 태자 건성이 이끄는 당군에 패해 잡혀죽었다.  

07 벼슬이름. 한대(漢代)에 처음 두어 열후(列侯) 중에서 특수한 지위에 있는 자에게 임명하였으며 관계(官階)는삼공(三公)의 아래. 수당(隋唐) 이후 산관(散官)이 되었고 청대(淸代)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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