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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 신명춘분(春分) 절후를 관장하는 울지경덕(尉遲敬德)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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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2.08 조회4,22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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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경덕(尉遲敬德, 585~658)의 이름은 공(恭)으로 자(字)가 경덕인데 자로 더 잘 알려졌으며 삭주(朔州) 선양(善陽, 현재 山西省 朔縣) 사람이다.

 

수(隋)나라 대업[大業, 양제(煬帝)의 연호로 605~616] 말년 고구려 원정의 거듭된 실패와 실정(失政)으로 중국 전역은 반란에 휩싸였다. 이때 그는 군대에 들어가 각처의 도적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워 조산대부(朝散大夫)01가 되었다.

 

이 당시의 정세를 보면 중국 전역이 반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접어들고 있는 시점이었고 울지경덕의 고향인 선양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617년(대업 13) 마읍(馬邑, 현재 山西省 朔縣) 교위(校尉) 유무주(劉武周, ?~622)02는 어지러운 정세에 편승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무리를 모으니 그 세력이 만 명이나 되었다. 유무주는 울지경덕을 부장군(副將軍)으로 삼고 강력한 군사력을 갖고 있던 돌궐에 사신을 보내 신하가 될 것을 맹세하였다. 돌궐은 유무주가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여 그를 도왔다. 유무주는 이러한 돌궐의 무력을 바탕으로 지금의 산서성 북부일대를 자신의 세력권으로 만들어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고 송금강(宋金剛, ?~620)03과 울지경덕에게 명령을 내려 남침(南侵)을 감행했다. 이때가 619년(武德 2)이다.

 

당(唐) 고조(高祖) 이연(李淵)은 반란을 일으키기 전 태원(太原) 유수(留守)였다. 유무주가 반란을 일으키고 세력 확장을 꽤한 지역은 태원 유수의 관할 구역으로 이 지역은 북으로는 돌궐에 맞닿아 있고 남으로는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에 연결되는 군사적 요충지이다. 이미 장안(長安)과 낙양(洛陽) 이외의 지역이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간 상황에서 유무주의 반란은 이연으로 하여금 거병(擧兵)의 명분을 제공한 것이기도 했다. 이연으로선 수나라 중앙 정부의 명령이 실질적인 효력을 상실하고 그나마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상황에서 유수의 권한으로 유무주의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소집하여, 소집된 이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확보함으로써 당 창업의 첫 걸음을 내딛게 된 것이다.

 

이연은 유무주의 거병과 남침에 맞서 여러 번 군사를 보내어 토벌에 나섰으나 그때마다 실패하였다. 이연은 영안왕(永安王) 이효기(李孝基)에게 다시금 이들의 토벌을 명했다. 그러나 당군(唐軍)은 울지경덕의 기습에 격파당하고 이효기를 비롯하여 당검[唐儉, 입동(立冬) 절후를 관장], 독고회은(獨孤懷恩) 등 많은 사람들이 포로가 되었다.

 

620년(무덕 3) 이연은 마침내 이세민에게 유무주의 토벌을 명하여 이세민이 백벽(栢壁)04에 주둔하였다. 이세민은 당 창업의 걸림돌이 되는 세력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는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세민은 이 과정에서 만난 많은 인재들을 포섭하여 자신의 사람으로 만드는 안목과 포용력을 갖고 있었다. 이 당시 유무주의 부하 장수였던 울지경덕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이세민은 개휴(介休)에서 송금강을 패퇴시켜 그는 돌궐로 달아나고 울지경덕이 남은 무리를 이끌고 개휴를 지키게 된다. 이세민은 울지경덕과 같은 용장(勇將)을 자신의 휘하에 두고자 했다. 그는 임성왕(任城王) 이도종(李道宗)과 우문사급(宇文士及)을 보내어 투항을 권유하였다. 울지경덕이 심상(尋相)과 더불어 항복하니 이세민이 크게 기뻐하며 잔치를 열어 이들을 환영하고 울지경덕을 우일부통군(右一府統軍)으로 삼았다.

 

 

당태종을 도와 당 창업에 공을 세움

 

이세민은 울지경덕을 우일부통군으로 삼아 왕세충(王世充, ?~622)05 토벌에 활용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들이 항복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심상이 반란을 일으키니 이세민을 따르던 많은 장수들은 울지경덕도 반드시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 하여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이제 갓 투항(投降)한 장수를 의심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며 같이 투항한 동료 장수가 반란을 일으켰다면 그 혐의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세민에게 행대좌복야(行臺左僕射) 굴돌통[屈突通, 망종(芒種) 절후를 관장]과 상서(尙書) 은개산[殷開山, 하지(夏至) 절후를 관장]이 말했다.

 

“경덕은 날래고 용맹스러운 자입니다. 이미 두 번이나 묶이게 되었으니 어찌 원한이 없겠습니까. 그를 살려 두신다면 반드시 후회하실 것입니다. 즉시 죽여야 합니다.”

 

이세민이 말했다.

 

“과인은 달리 생각하오. 만약 경덕이 반란을 도모하고자 했다면 어찌 심상(尋相)보다 늦게 하겠소.”

 

이세민은 울지경덕을 석방하도록 하고 침실 안으로 불러 금(金)을 하사하면서 말하였다.

 

“대장부가 의기투합(意氣投合)하는데 작은 의심쯤은 흉중에 두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소. 나는 타인의 참소로 어진 이를 해치지 않겠소. 그대가 반드시 떠나고자 한다면 노자(路資)가 필요할 것인즉 이것을 쓰시오. 한때나마 같은 일을 했던 사람의 정리(情理)로 주는 것이오.”

 

만인의 의심을 사고 있는 위험한 인물을 자신의 침실로 불러 들여 절대적 신뢰를 표시하고 그 사람에게 재물을 하사한다는 것은 보통의 판단력과 포용력으로는 어려운 일이다. 울지경덕의 입장이었다면 어떠했을까? 이미 투옥(投獄)되면서 생사의 기로에 서 있었던 사람이 이와 같은 대접을 받는다면 그의 감격이 어떠했을지 짐작되는 일이다. 이 일을 계기로 울지경덕은 이세민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하게 되었다.

 

이날 이세민은 몇몇 측근들을 대동하고 전장을 직접 시찰하던 중이었다. 총사령관의 이러한 행동은 상당한 위험을 감수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세민은 전선을 직접 시찰하여 상대방의 대비 태세를 확인하고 이에 따른 전략을 수립하기 위해 이런 위험쯤은 괘의치 않았다. 이러한 이세민을 왕세충이 발견하고 수만의 병사를 거느리고 나오면서 이세민은 위기의 순간을 맞게 된다. 왕세충은 단웅신(單雄信)에게 명하여 이세민을 쫓도록 하였다. 이를 본 울지경덕이 말에 올라 단웅신에게 달려들면서 창을 휘둘러 베니 그가 말에서 떨어졌다. 이세민을 쫓던 왕세충의 군사들은 순식간에 단웅신이 쓰러지자 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울지경덕이 이 틈을 이용하여 왕세충 군의 포위를 뚫고 이세민과 함께 본진으로 돌아 왔다. 본진에 돌아온 울지경덕이 병력을 이끌고 나가 싸워 크게 이기고 왕세충의 장수 진지략(陳智略)을 사로잡고 6,000의 적병(敵兵)과 창(槍)을 포획(捕獲)하였다.

 

이세민이 신하들을 돌아보며 울지경덕에게 말했다.

 

“이 사람들은 그대가 틀림없이 배반하리라 생각했는데 나만이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나의 이러한 생각에 보답함이 어찌 이렇게 빠른가.”

 

이세민은 울지경덕에게 금은(金銀) 한 상자를 주고 이후 더욱 신뢰하였다.

 

이 싸움으로 큰 타격을 입은 왕세충은 성을 굳게 지키면서 나오려고 하지 않았고 그 동안 긴장 관계에 있던 두건덕(竇建德, 573~621)06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두건덕으로서도 당(唐)의 세력이 너무 강력하게 되는 것은 자신에게 이로울 것이 없었으므로 왕세충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병력을 동원하게 되었다.

 

이때 두건덕은 판저(板渚)에 주둔하였다. 이세민은 이세적[李世勣, 소설(小雪) 절후를 관장] 등에게 명하여 매복(埋伏)하도록 하고 자신은 활을 갖고 경덕은 창을 들게 하여 두건덕을 공격하였다. 울지경덕이 큰소리로 두건덕에게 도전(挑戰)하니 그가 출병(出兵)하였다. 이세민의 군대는 두건덕의 군대를 유인하면서 차츰 퇴각하였는데 두건덕의 군대가 추격하기 시작했다. 두건덕의 군대는 당군 수십 명을 살상하면서 더욱 추격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나 두건덕의 군대는 이세민의 복병에 걸려 크게 패하고 더 이상의 싸움을 회피하였다.

 

이세민은 왕세충과 두건덕 양쪽의 적을 한꺼번에 맞서고 있었는데 두건덕의 진영에는 왕세충의 조카 왕완(王琬)이 사자로 파견되었다. 그는 수(隋) 양제(煬帝)의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군중을 출입하면서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고 있었다. 이를 본 이세민이 말하기를 “저자가 타고 있는 말은 진짜 양마(良馬)이다. 누가 저 자를 잡아올 것인가?”라고 하였다. 말은 무장(武將)에겐 필수적인 것으로 역대 중국의 제왕(帝王)들 중에는 말에 관심을 기울인 인물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이세민은 유달리 말을 좋아했다.

 

울지경덕이 고증생(高甑生), 양건방(梁建方)과 더불어 같이 가기를 청하여 이세민의 허락을 얻었다. 세 사람이 말을 달려 왕완을 사로잡고 그가 타던 말과 함께 돌아왔는데 전광석화 같은 이들의 활약에 적은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이세민은 왕세충과 두건덕을 연달아 격파하였다. 울지경덕은 두건덕의 잔당들이 유흑달(劉黑, ?~623)07을 중심으로 다시 뭉치자 이들을 토벌하는 데에도 공을 세우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이세민이 유흑달 군의 기습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세민의 군대가 후방을 기습당하여 이세민이 이세적으로 하여금 후방을 막게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사방에서 적들이 쏟아졌다. 울지경덕이 일단의 병사들을 이끌고 적진에 뛰어들었고 적의 포위망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덕분에 이세민은 탈출할 수 있었다. 또 서원랑(徐圓朗, ?~623)08 토벌에도 공을 세워 진왕부(秦王府)의 좌이호군(左二護軍)에 제수되었다. 이렇게 울지경덕은 당 창업의 걸림돌이 된 세력들을 제거하는 중요 전투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움으로써 명성을 얻었고 항복한 장수가 아닌 진왕부의 당당한 일원이 될 수 있었다.

 

 

변치 않는 충성으로 당태종의 즉위에 공을 세움

 

당의 위협이 되던 세력들이 제거되고 중국이 재통일 되자 고조(高祖) 다음의 황제 자리를 놓고 본격적인 권력 투쟁이 전개되었다. 태자 건성이 있었지만 당의 성립과 주요 적들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이세민이 보여준 절대적인 공로가 태자 건성(建成)이 황제가 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이세민은 혼란에 빠진 중국을 통일하여 당(唐) 창업의 가장 큰 공로자였고 이 과정에서 그의 수하에는 숱한 문관, 무관들이 모여들어 이미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태자도 가만히 있진 않았다. 그는 제왕(齊王) 원길(元吉)과 함께 세력을 모으고 이세민의 측근들을 끊임없이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고 그렇게 되지 않는 이들은 이세민과 떨어뜨려 놓으려고 하였다. 울지경덕도 그 중 한사람이었다. 태자가 울지경덕에게 글을 보내고 또한 금 그릇을 가득 실은 수레를 주면서 불러들이려 하였다.

 

 

울지경덕이 다음과 같은 말로 사양했다.

 

“저는 미천한 곳 출신입니다. 수나라가 망하고 천하가 혼란하였을 때 의탁할 곳이 없었던 경덕은 오래도록 반역의 땅에 있었습니다. 이는 용서받지 못할 죄입니다. 실로 진왕(秦王, 이세민)의 은혜로 이 생명을 보존하였습니다. 그 은혜는 이 몸을 바쳐서라도 보답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태자 전하께 저는 공이 없고 따라서 내려주신 재물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만약 전하께서 내려주신 재물을 받는다면 이는 두 마음을 품은 것이고 눈앞의 이익을 위해 충심(忠心)을 버린 것이 됩니다. 전하께서는 눈앞의 이익을 위해 충심을 버리는 사람을 어디에 쓰시겠습니까.” 태자는 울지경덕의 거절에 분노했다.

 

울지경덕은 이 일을 이세민에게도 보고했다. 이세민은 울지경덕의 안위(安危)가 걱정이었다. “공의 마음이 산악(山岳)과 같으니 금(金) 한 말을 쌓아놓은들 움직이게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대의 언행(言行)이 스스로 안전한 계책이 되지 못할 것이 두렵소.”

 

정치적으로 대립 관계에 있는 쪽이 자기편으로 끌어들이지 못하는 상대방의 중요인물을 그냥 둘리는 없는 것이다. 과연 제왕이 자객을 파견하여 울지경덕을 암살하려 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예상된 것이었는데 울지경덕은 오히려 집의 모든 문을 열어 놓았다. 울지경덕의 대범한 태도에 놀란 자객들은 감히 그에게 접근할 수 없었다.

 

울지경덕은 태자와 제왕의 입장에선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수도 쉽게 죽일 수도 없는 인물이었다. 이들은 고조에게 울지경덕을 참소하여 그를 감옥에 가둬 놓은 다음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세민이 굳게 울지경덕을 변호하여 석방될 수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01 산관[散官, 관명(官名)만 있고 직무가 없는 명예직]의 하나로 수대(隋代)에 비롯되어 문무(文武) 관리 가운데 덕망(德望)이 있는 사람에게 주는 벼슬.

02 하간(河間) 경성[景城, 현재 하북성(河北省) 헌현(獻縣)] 사람으로 마읍(馬邑)으로 옮겨 살았다. 날래고 사나우며 말 타고 활 쏘기를 잘했다. 수나라의 고구려 원정에 참가하여 공을 세워 교위가 되었다. 이후 마읍에 돌아와 응양부교위(鷹揚府校尉)로 있던 617년(대업 13) 같은 군(郡)의 장만세(張萬歲) 등과 모의하여 태수 왕인공(王仁恭)을 죽이고 세력을 규합하여 스스로 태수라 칭했다. 그는 세력 확장을 위해 돌궐(突厥)에 사신을 보내 신하가 될 것을 자청하여 이들의 무력을 기반으로 안문(雁門), 누번(樓煩), 정양(定襄) 등의 군(郡)을 점령하였다. 이를 계기로 돌궐로부터 정양가한(定楊可汗)에 임명되었고 황제를 자칭(自稱)했다. 619년(武德 2) 당군(唐軍)에 연승(連勝)하여 태원(太原), 진주(晉州), 회주(澮州) 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지만 다음해 이세민에게 패하여 돌궐로 도망갔는데 다시 마읍으로 돌아오려고 하다가 실패하여 피살(被殺)되었다.

03 상곡[上谷, 현재 하북성(河北省) 역현(易縣)]사람. 수나라 말에 반란을 일으켰다. 그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위도아(魏刀兒, ?~618)가 두건덕(竇建德)을 공격하다가 위기에 빠지자 위도아를 구원하러 나섰다가 패하여 남은 무리를 이끌고 유무주(劉武周)의 부하가 되었다. 유무주는 송금강을 신임하여 군사의 일을 맡기고 송왕(宋王)이라 칭했다. 또한 서남도대행대(西南道大行臺)에 임명하여 당의 기반이 된 산서성(山西省) 일대에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들은 619년(무덕 2) 병주(幷州), 회주(澮州)에서 당군(唐軍)에 연승하였다. 그러나 다음해 이세민에게 패하여 유무주와 함께 돌궐에 투항하였다. 이후 돌궐에서 다시 상곡으로 돌아오려고 하였으나 계획이 누설되어 잡혀 죽었다.

04 현재 산서성(山西省) 신강현(新絳縣) 남서쪽에 위치한 성으로 군사적 요충지.

05 경사(經史)에 밝고 병법에 정통하였으며 수(隋) 양제(煬帝)의 신임을 얻어 강도통수(江都通守)가 되었다. 수나라 말기에 일어난 농민 반란으로 동도(東都)인 낙양(洛陽)이 위험해지자 양제의 명으로 낙양을 구원하였다. 618년 양제가 죽자 낙양에서 월왕(越王) 양통(楊)을 황제로 추대하였다. 이후 강력한 반군이었던 이밀(李密)을 패퇴시키고 다음해인 619년 양통을 폐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정(鄭)’이라 했다. 621년 이세민이 이끈 당군에 패하여 투항하였으며 장안으로 압송된 후 원한을 품은 사람들에게 피살되었다.

06 수(隋)나라 말기에 일어난 농민 반란의 우두머리들 중의 하나로 양자강(揚子江) 이북 지역을 근거지로 삼았다. 무리를 모아 618년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하(夏)’라 하고 스스로 ‘하왕(夏王)’임을 선포했다. 621년 당(唐)이 이세민을 보내 낙양(洛陽)의 왕세충(王世充)을 공격하였는데, 왕세충이 두건덕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세충을 구원하기 위해 병사를 움직였으나 호뢰관(虎牢關)에서 당군(唐軍)에게 패하고 장안에서 참수되었다.

07 두건덕과 같은 청하(淸河) 장남[장南, 현재 산동성(山東省) 무성(武城)] 사람이다. 수나라 말기에 학효덕(郝孝德)을 따라 와강군(瓦崗軍)에 들어간다. 618년 왕세충과의 싸움에서 와강군이 패하자 왕세충의 포로가 되어 군마총관(軍馬總管)에 임명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무리를 이끌고 두건덕에게 가서 한동군공(漢東郡公)에 봉해졌다. 621년 두건덕이 당군에 패하자 두건덕을 따르던 무리들을 수습하여 반년 만에 두건덕이 옛 영역을 회복했다. 다음해인 622년 한동왕(漢東王)을 칭했으나 이세민에 패해 돌궐로 달아났다가 623년 태자 건성이 이끄는 당군에 패해 잡혀죽었다.

08 연주[州, 현재 산동(山東) 연주(州)] 사람. 수나라 말기에 연주에 근거를 두고 서(西)로는 랑야(琅邪), 북(北)으로는 동평(東平)까지 자신의 세력권으로 두었다. 이밀(李密)과 두건덕(竇建德)을 따랐는데 619년(무덕 2) 당에 투항(投降)하여 연주총관(州總管)에 임명 되고 노군공(魯郡公)에 봉해졌다. 621년 유흑달(劉黑)이 두건덕의 잔당을 수습하여 다시금 군사를 일으키자 이에 호응하여 당에 반기를 들고 노왕(魯王)이라 자칭하며 유흑달의 대행대원수(大行臺元首)가 되었는데 이들의 세력이 한때 강력하여 연(兗), 운(鄆), 진(陳), 기(杞), 이(伊), 낙(洛), 조(曹), 대(戴) 8주(州)에서 두건덕의 잔당들이 관리를 죽이고 반란에 합세하여 산동성 일대를 장악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의 강력한 토벌로 이들은 괴멸되었고 서원랑 또한 사람들에게 잡혀 죽임을 당했다.

 

 

<대순회보 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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