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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 신명춘분(春分) 절후를 관장하는 울지경덕(尉遲敬德)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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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2.08 조회4,27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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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무문 정변에서 큰 공을 세움

 

이후 태자와 이세민의 갈등은 더욱 증폭되었다. 이러한 때에 돌궐이 변경을 침입하고 태자의 천거로 제왕이 토벌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이들은 군을 환송하는 장소에서 이세민을 제거하기로 계획하였는데 이 일이 이세민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다. 사태가 이쯤에 이르자 울지경덕은 장손무기[長孫無忌, 동지(冬至) 절후를 관장]와 같이 이세민의 결단을 촉구하였다.

 

“대왕께서 신속히 결정을 내리시지 않으면 사직(社稷)이 위험합니다.”

 

이세민이 말했다.

 

“나도 그대들과 뜻이 같다. 하지만 그들은 나의 형제들이다. 그들이 먼저 도발(挑發)하고 난 다음 대의(大義)를 세워 그들을 토벌하는 것이 어떠한가?”

 

울지경덕이 대답했다.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런데 여기 진왕부에 모인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대왕을 받들고자 합니다. 이는 하늘이 주신 기회입니다.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허물을 남길 뿐입니다. 대왕께서 저의 청을 들어주시지 않는 것은 멸망의 길입니다. 저희는 가만히 않아서 살육을 당할 수는 없습니다.”

 

장손무기가 말했다.

 

“대왕께서 경덕의 말을 좇지 않으시면 경덕 또한 대왕의 사람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패망하게 될 것입니다.”

 

울지경덕과 장손무기의 재촉에도 이세민은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이세민으로선 어떻게 하든 골육상쟁(骨肉相爭)을 통해 집권(執權)했다는 정치적 부담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세민이 장손무기에게 말했다.

 

“과인의 생각을 다 버릴 수는 없으니 공이 다시 계획을 짜 보시오.”

 

울지경덕이 말했다.

 

“일을 처리하는데 의심이 있는 것은 지혜라 할 수 없고 어려움을 당했는데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은 용기가 없는 탓입니다. 대왕께서는 어떤 계획을 세우셨습니까. 용맹스런 병사 800이 완전무장하고 모두 궁에 들어와 있는데 또 무엇을 마다하십니까?”

 

후에 후군집[侯君集, 처서(處暑) 절후를 관장]과 진왕부의 사람들이 함께 간청하자 그제서야 이세민이 태자와 제왕을 치기로 결정했다.

 

이때 방현령[房玄齡, 우수(雨水) 절후를 관장]과 두여회[杜如晦, 대한(大寒) 절후를 관장]는 태자가 고조에게 참소하여 진왕부(秦王府)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이세민이 장손무기에게 명하여 이들을 불렀는데 그들은 오지 않고 대답하기를 “칙명(勅命)으로 다시는 대왕을 섬기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제 사사로이 대왕을 알현한다면 그 죄를 피할 수 없습니다.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고 하였다.

 

아무리 고조의 명령으로 출입이 금지되었다고 하지만 이미 모든 계획을 정하고 일을 실행하려는 마당에 진왕부의 핵심 참모인 방현령과 두여회가 자신의 부름을 거부한 것에 대해 이세민은 분노하였다.

 

“현령과 여회가 나를 등진 것인가?”

 

이세민이 자신이 차고 있던 칼을 풀어 울지경덕에게 주면서 말했다.

 

“공이 가서 현령과 여회가 올 마음이 없다고 판단이 되면 이 칼로 그들의 머리를 참(斬)하여 가져오라.”

 

일이 결정되기 전에 그렇게 주저하던 이세민이 결단을 내리고 나서는 모든 일에 거칠 것이 없었다. 울지경덕은 장손무기와 함께 방현령과 두여회에게 이런 사정을 전하며 말했다.

 

“대왕께서 이미 저들을 토벌하기로 하였으니 마땅히 대왕의 부름에 응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네 사람이 무리를 지어 가면 다른 사람의 이목(耳目)을 끌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방현령과 두여회는 도사(道士) 차림으로 장손무기를 따르고 울지경덕은 다른 길로 진왕부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세민은 이들과 함께 태자와 제왕을 제거할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추진하였다.

 

먼저 이세민이 고조에게 태자와 제왕의 비행과 음모를 고발하여 고조로 하여금 그들을 소환토록 하는 것이 첫번째였다. 다음으로 황제의 소환으로 그들이 현무문(玄武門)을 통과하기를 기다려 문을 닫고 대기하던 병력으로 이들을 처단하는 것이다. 현무문은 황제를 배알하는 이들이 통과하는 문으로 이 문의 책임자는 원래 태자 건성의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태자로서도 방심할 수밖에 없는 장소였다. 그러나 이때는 이세민 측에 매수되어 진왕부의 관속들에게 협력하고 있었고 태자는 이 사실을 몰랐다.

 

626년(무덕 9) 6월 3일. 이세민은 고조에게 태자와 제왕이 자신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음을 고발했다. 고조는 깜짝 놀라 다음날 이들과 함께 이세민의 소환을 명하였다.

 

 

다음날인 6월 4일. 태자와 제왕이 호위병을 이끌고 현무문까지 와서 호위병을 문 밖에 대기하도록 하고 자신들만 현무문을 통과하였다. 이들은 현무문을 통과하고 나서 한참이 지나서야 사태가 심각한 것을 파악했다. 그러나 그 순간 태자는 죽임을 당했고 달아나는 제왕을 울지경덕이 70여 기(騎)를 이끌고 추격하였다. 이때 이세민의 말이 놀라 그가 낙마(落馬)하여 수풀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를 본 제왕이 이세민에게 달려들어 활을 빼앗고 그를 죽이려 하였다. 울지경덕이 이를 보고 크게 소리를 지르자 제왕이 달아나기 시작하였으나 울지경덕이 쏜 화살을 피하지 못하였다.

 

현무문 밖에 있던 태자와 제왕의 부하들이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현무문 돌파를 시도한 것은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동궁과 제왕부의 병사들은 합세하여 현무문과 진왕부로 쳐들어갔다. 현무문 수비병과 진왕부의 관속들이 이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또한 진왕부도 대다수의 인원이 현무문에 배치되고 소수의 인원들만 있었기 때문에 위기의 순간을 맞고 있었다. 이렇게 사태의 향방을 예측할 수 없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이때 울지경덕이 태자와 제왕의 목을 내 걸자 이들의 부하 장졸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흩어졌다.

 

이때 고조는 해지(海池)에 배를 띄워 놓고 있었는데 이세민이 울지경덕을 보내 호위하도록 했다. 이세민의 명을 받은 울지경덕이 갑옷도 벗지 못하고 고조를 알현하니 고조가 크게 놀라면서 물었다.

 

“오늘의 난(亂)은 누가 일으킨 것이냐? 경은 어찌하여 왔느냐?”

 

울지경덕이 대답했다.

 

“태자와 제왕이 난을 일으켜 진왕께서 거병하시어 그들을 처단하시고 폐하께서 불안해하실 것을 두려워하여 신을 보내시면서 호위하라 하셨습니다.”

 

그제야 고조는 안정을 되찾았다. 대세는 이미 기울었으나 태자와 제왕을 따르던 동궁부(東宮府)와 제왕부(齊王府)의 군사들은 대궐의 남쪽과 북문에서 대궐을 지키는 수비군들과 싸움을 벌여 소란스러웠다. 울지경덕이 고조에게 청하여 칙명으로 모든 군은 진왕(秦王, 이세민)의 명령에 따를 것을 명하니 안팎이 비로소 안정되었다. 고조가 울지경덕의 노고를 칭찬하여 이르길 “경이 있어 나라가 안정되었으니 경은 사직(社稷)에 큰 공을 세웠다.”고 하면서 많은 재물을 하사했다.

 

고조는 이세민을 태자로 삼고 나라의 대사를 태자가 처리하도록 했다. 이세민이 태자가 되면서 울지경덕은 동궁부의 좌위솔(左衛率)에 임명되었다. 태자와 제왕을 따르던 이들은 모두 100여 가(家)나 되었는데 이들 모두를 처단하고 이에 연좌된 이들의 가산(家産)까지 몰수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울지경덕은 이에 강력히 반대했다. “악(惡)을 행한 두 사람은 이미 처단되었습니다. 이들의 잔당(殘黨)을 다시 궁지로 모는 것은 정국(政局)을 안정시키는 방법이 될 수 없습니다.” 이리하여 태자와 제왕을 따르던 이들은 모두 용서를 받았다. 이로써 ‘현무문의 정변(政變)’은 일단락되었다. 이제 이 일에 참여한 사람들의 논공행상(論功行賞)이 남아 있었다. 울지경덕은 장손무기와 함께 그 공이 제일(第一)로 평가 받아 각각 비단 만 필을 받았고 제왕부의 금폐(金幣)와 그릇들도 하사받았다.

 

 

당 태종의 조서로 자신의 허물을 고침

 

627년[정관(貞觀) 원년(元年)] 이세민이 즉위하니 그가 당의 2대 황제인 태종(太宗)이다. 이때 울지경덕은 우무후대장군(右武候大將軍)이 되었으며 오국공(吳國公)에 봉(封)하여지고 장손무기, 방현령, 두여회와 같이 식읍(食邑) 1,300호가 주어졌다.

 

당 태종이 즉위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서 돌궐의 침입이 있었다.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여 중국의 정세에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돌궐은 새로운 황제의 실력을 얕보고 있었다. 이러한 돌궐의 침입을 울지경덕은 경주도(涇州道) 행군총관(行軍總管)이 되어 맞섰다. 돌궐이 경양(涇陽)에 이르자 울지경덕은 경기(輕騎)를 동원하여 응전하였고 돌궐의 이름난 장수를 죽여 이들의 침입을 격퇴하였다. 이렇게 당 태종의 즉위와 정권 초기의 안정에도 울지경덕은 큰 공을 세우게 되었다.

 

울지경덕은 재물이 생기면 반드시 자신의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어 인망을 얻었다. 그러나 울지경덕이 자신의 부하들에게는 인망을 얻었지만 자신의 상사들과의 관계는 원활하지 못했다. 성격이 강직(剛直)하고 말과 행동이 거칠었으며 자신이 세운 공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이 문제였다. 울지경덕은 장손무기, 방현령, 두여회를 보면 이들의 장단(長短)과 시정(施政)의 득실을 논하고 반드시 힐난하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당연히 정치를 책임진 이들과 사이가 좋을 수 없었다. 울지경덕이 629년(정관 3) 외직(外職)인 양주도독(襄州都督)으로 임명되었다가 634년(정관 8) 다시 동주자사(同州刺史)로 옮겨진 것도 이와 같은 이유가 있었던 까닭이다.

 

울지경덕이 자신이 세운 공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으로 말미암아 큰 물의를 일으킨 사건이 있었다. 일찍이 태종이 참석한 경선궁(慶善宮)의 연회에서 발생한 황실 종친 구타사건이 그것이다. 울지경덕은 경선궁 연회의 좌석 배치가 불만이었다. 단지 종친이라는 이유로 별 공도 없는 사람이 자신보다 높은 자리에 앉는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화가 잔뜩 난 울지경덕이 말했다.

 

“너는 무슨 공이 있어 내 윗자리에 앉아 있는가?”

 

울지경덕이 이렇게 말한 사람은 황실의 종친인 임성왕(任城王) 이도종(李道宗)이다. 이도종은 분노에 찬 울지경덕의 말을 듣고 어떻게든 좋은 말로 달래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미 공개 석상에서 황실의 종친을 향해 ‘너’라고 할 정도로 화가 난 울지경덕에게 이도종이 어떤 말을 하였던지 별 의미가 없었다. 발끈한 울지경덕이 이도종을 주먹으로 구타하였는데 하마터면 그가 애꾸가 될 뻔하였다. 아무리 당 태종의 즉위에 큰 공을 세운 공신이라고 해도 황실의 종친을 구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도 태종이 참관한 자리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울지경덕의 언동은 그 어떤 변명의 여지도 없었다. 태종은 불쾌함을 감추지 않았고 연회는 중단되었다. 그리고 울지경덕을 꾸짖는 준엄한 조서(詔書)가 내려졌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짐이 한(漢)나라의 역사를 보면서 일찍이 한 고조(高祖)의 공신들 가운데 자신의 몸을 온전히 보존한 사례가 적어 이를 괴이하게 여겼다. 짐은 제위에 올라 공신(功臣)들을 온전하게 하고 그 자손들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리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오늘 경의 행위를 보니 한신(韓信)과 팽월(彭越)이 왜 도륙(屠戮) 당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는 한 고조의 잘못이 아니었다. 나라의 대사(大事)는 오직 상(賞)과 벌(罰)이 있을 뿐이다. 임금의 은혜를 빙자한 행위는 다시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힘써 스스로 수양하여 후회가 미치지 않도록 하라.

 

한신, 팽월과 같이 되지 않도록 하라는 당 태종의 이 추상같은 조서를 받고 울지경덕은 머리를 조아려 사죄했다.

 

후에 악국(鄂國)에 봉(封)해졌고 부주(州), 하주(夏州) 도독을 거쳤다. 나이가 들어 은퇴했지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의 직(職)을 받아서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조정에 나가 임금을 뵐 수 있었다.

 

태종이 고구려를 치려하니 울지경덕이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폐하께서는 요동(遼東)으로 태자께서 정주(定州)로 행차하시면 두 수도[장안(長安)과 낙양(洛陽)]가 텅 비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수(隋) 양제 시절의 양현감(楊玄感)의 반란과 같은 일이 또 있을까 두렵습니다. 소국(小國)을 정벌하는 일에 만승(萬乘)의 군대가 동원될 필요는 없습니다. 청컨대 장군들에게 위임하시어 때를 보아 멸하게 하십시오.

 

태종의 고구려 정벌에 관한 결심은 확고하여 그 누구의 반대도 소용없었다. 태종이 울지경덕에게 태상경(太常卿)의 직분으로 좌일마군총관(左一馬軍總管)으로 고구려 원정에 참전하도록 했다. 당 태종의 고구려 원정은 실패했고 군대가 돌아오자 울지경덕은 다시 원직으로 복귀했다.

 

658년[현경(顯慶) 3] 고종(高宗)이 울지경덕의 공을 높이 평가하여 돌아가신 그의 부친을 추증(追贈)하여 유주도독(幽州都督)의 벼슬을 내렸다. 그리고 이해에 울지경덕이 세상을 떠나니 그의 나이 74세였다. 고종이 신하를 보내고 수도에 있는 모든 5품 이상의 관리들에게 문상(問喪)케 했으며 3일 간 조회(朝會)를 폐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哀悼)했다. 사도(司徒)와 병주(幷州) 도독(都督)을 증직(贈職)하고 시호(諡號)를 충무(忠武)라 하였고, 반검(班劍)01과 우보(羽)02 고취(鼓吹)를 하사하면서 장례에 쓰도록 하고 소릉(昭陵)에 배장(陪葬)했다.

 

울지경덕은 만년(晩年)에 빈객(賓客)을 마다하고 정자와 연못을 정비하고 그곳에서 음악을 연주하며 스스로 조신하였다. 또 운모(雲母)가루를 먹으며 방사술(方士術)로 수명을 연장하였다.

 

울지경덕은 창(槍)의 명인으로 다음과 같은 일화들이 전한다. 그가 전쟁터에서 싸울 때 상대방의 창을 피하는데 뛰어났기 때문에 단신으로 말을 타고 적진으로 들어가는 일이 많았다. 적들이 창으로 그를 찔러도 다치지 않았으며 오히려 적의 창을 빼앗아 다시 적을 찌를 정도로 그의 창 솜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제왕 원길도 싸움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는 울지경덕에게 칼날 없는 칼로 겨루기를 청하였다. 그런데 울지경덕이 그 자신의 칼날 만을 제거하고서 겨루기를 다시 청하였는데 이 대결에서 제왕이 이기지 못했다.

 

이세민이 울지경덕에게 물었다.

 

“창을 빼앗는 것과 피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어려운가?”

 

울지경덕이 “빼앗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고 대답하였다. 이세민이 제왕과 한번 시합해 보라 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제왕이 세 번이나 창을 빼앗기자 그가 크게 부끄러워하며 마침내 승복(承服)하였다.

 

 

01 진대(晉代) 조회(朝會)에서 찼던 무늬가 새겨진 목검. 한대(漢代) 진검을 차던 것을 바꾼 것으로 호랑이가죽으로 장식했다고도 한다. 뒤에 의장용으로 쓰여 무사가 차거나 천자가 공신에게 하사하였다.

02 장례 때 사용하는 의장儀仗)의 일종 새털을 깃대 꼭대기에 모아 일산(日傘)과 같이 만든 물건

 

<대순회보 9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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