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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수 신명벽(壁) 별을 관장하는 왕패(王覇) 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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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2.08 조회4,58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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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수(壁宿)

 

벽수(壁宿)는 28수 가운데 열네 번째 별자리이다. 그리고 두우여허위실벽(斗牛女虛危室壁) 북방(北方) 현무(玄武) 칠수(七宿) 가운데서 마지막 별자리다. 이 별자리의 주된 별[主星]은 2개로 상징 동물은 유(貐)이다. 유는 몸 색깔이 붉은 소의 형상에 사람의 얼굴을 한 전설상의 신수(神獸)이다. 벽수의 속성(屬性)은 물[水]로 별자리의 이름[壁]은 이 별자리가 실수(室宿)의 바깥에 있으면서 그 형태가 실수의 담장과 같은 데에서 비롯되었다. 벽수를 의인화하여 북방벽수유성군(北方壁水貐星君)이라 하는데 얼굴은 붉은 색이고 검은 갑옷을 입고 양 손에는 도끼를 들고 있다고 한다.01

 

후한의 창업공신 왕패

 

왕패(王覇, ?-59)는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BCE 2-CE 58)를 도와 후한(後漢)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창업공신이다. 왕패의 자(字)는 원백(元伯)으로 영천군(潁川郡) 영양현(潁陽縣, 河南 許昌 西) 사람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법률을 관장하는 지위에 있었다.

현대와 달리 고대는 가업(家業)을 그대로 이어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관료의 임용에 과거(科擧)가 도입된 시기는 587년 수(隋)나라 문제(文帝)때로 한나라 시기보다 한참 뒤의 일이다. 왕패의 조부(祖父)는 조옥승(詔獄丞)이었다. 조옥은 황제의 명으로 고위직 관리를 잡아 가두고 조사하던 곳으로 조옥승은 조옥에서 실무를 담당한 관료를 의미한다. 왕패의 부친은 군(郡)의 결조연(決曹掾)이었다. 결조는 지방 관아의 부서로 옥사(獄事)를 주관하던 곳으로 결조연은 그 결조에서 옥사에 관한 일을 돕던 관리였다.

 

이렇게 집안이 대대로 법률을 관장한 까닭에 왕패 또한 어린 나이에 옥리(獄吏)02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의 문란과 불의를 개탄했고 옥리의 직이 즐겁지 않았다. 왕패의 부친은 자신의 아들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장안(長安)으로 유학을 보냈다. 이 시기는 전한(前漢)-신(新)-후한으로 이어지는 왕조의 교체기였다. 그런데 선양(禪讓)이라는 궁정쿠데타를 통해 전한을 타도한 왕망(王莽)의 신(新, 8-23)나라는 오래가지 못했다. 정국의 혼란은 왕망의 급진적이고 복고적인 개혁정책이 참담하게 실패하면서 촉발되었다.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한나라의 후예들인 남양(南陽)의 유씨(劉氏)들이 부흥의 기치를 들고 이에 가세했다. 23년 반란 세력들 가운데 일단의 세력들이 남양 유씨들과 결합하여 경시제(更始帝) 유현(劉玄, ?-25)을 옹립하였다. 이때 후한의 창업자 유수는 그의 형인 유연(劉縯)과 함께 봉기군에 합류하였다.

 

유수의 군대가 영양을 지나게 되었을 때 왕패는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유수를 만나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군께서는 의로운 군사를 일으키셨습니다. 저는 그 정도의 역량이 되지 못합니다. 장군의 위덕을 흠모하여 여기 왔으니 원컨대 행오(行伍, 군대)에 끼워 주십시오.”

 

유수가 대답했다.

 

“꿈에서 조차 현사(賢士)를 생각했거늘 함께 공업(功業)을 이루는 일에 다른 무엇이 있으리오?”

 

왕패는 유수를 따라 곤양대전(昆陽大戰)에도 참가하게 된다. 곤양대전은 중국 전쟁사에서 소수의 군대가 대군을 물리친 것으로 유명한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유수는 불과 수천 기로 왕망의 42만 대군을 물리친다. 왕망 패망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며 이로 인해 유수는 일약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하게 되었다. 대전이 끝난 뒤에 왕패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사예교위(司隸校尉)03가 된 유수가 영양을 지날 때 왕패는 아버지에게 고하여 그를 따라가자고 했다. 아들의 요청에 그의 부친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나는 늙어 군대의 일을 맡을 수가 없다. 너는 가서 열심히 하거라.”

 

이에 왕패는 유수를 따라 낙양(洛陽)까지 갔다. 이때 경시제는 유수에게 하북(河北)의 각 현을 돌면서 이들을 접수하도록 명령했다. 유수는 대사마에 임명되었고, 그는 왕패를 공조영사(功曹令史)04로 삼아 하북으로 건너갔다. 애초에 왕패와 같이 유수를 따르던 사람들이 수십 명이었으나 이들은 하나 둘씩 떠나기 시작하더니 결국에는 모두 떠나버렸다. 유수가 다음과 같은 말로 왕패를 격려하였다.

 

“영천에서 나를 따라온 자들은 모두 가버리고 이제 그대 혼자만 남았구려. 힘내시오, 질풍이 분 이후라야 굳센 풀을 알 수 있는 법이라오.”

 

이 시기에 한단(邯鄲)에서는 왕랑(王郞)이 세력을 급속하게 확장하고 있었다. 왕랑은 그 자신이 전한의 11대 황제인 성제(成帝, 재위 BCE 32-7)의 아들 유자여(劉子輿)라고 선전했다. 왕랑의 이런 선전은 한나라의 부흥을 바라는 당시의 민심을 적절하게 이용한 것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모으기에 충분했다. 왕랑은 순식간에 세력을 모아 천자의 이름으로 주변 제군(諸郡)에 자신의 명령을 따를 것을 요구했는데 많은 군현이 여기에 순응하였다. 하북에서 순조롭게 자신의 세력을 확대하여 가고 있던 유수로서는 왕랑이라는 뜻밖의 복병을 만난 셈이었다.

 

왕랑이 봉기했을 때 유수는 계(薊, 북경시 大興縣)에 있었다. 그런데 왕랑은 유수의 목에 10만 호(戶)의 현상금을 걸었다. 이런 상황에도 유수는 왕패에게 시장으로 나가 군사를 소집하게 하고 확충된 병력으로 왕랑을 공격하고자 했다. 왕패가 시장에 나가 병력을 모집했지만, 시장에 모인 사람들은 크게 비웃고 손가락질하며 야유하였다. 왕패는 참담한 심정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하북의 당시 민심은 왕랑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간파한 유수는 곧바로 남쪽 하곡양(下曲陽, 하북성 진양현)으로 말을 달렸다. 왕랑의 병사들이 뒤를 따르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유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었다.

 

유수군이 호타하(虖沱河)에 이르렀을 때 척후병이 보고하기를 강이 풀려 얼음이 떠다니는데다 배가 없어 건널 수 없다고 했다. 왕랑군에 쫓기던 유수로서는 난처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유수는 왕패에게 다시 가서 살펴보라고 명령했다. 왕패가 가서 보니 척후병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사실대로 보고하자니 진영의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 할것 같고 앞으로 나가자니 강이 막고 있었다. 그는 거짓으로 보고했다.

 

“얼음이 견고해서 건널 수 있겠습니다.”

 

이 말에 유수군의 모든 사람들이 기뻐했다. 이에 유수가 웃으면서 말했다.

 

“척후병이 헛소리를 했구만.”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일이 발생했다. 유수군이 강가에 이르자 이상하게도 얼음들이 서로 붙어 있었던 것이다. 유수는 왕패에게 도강(渡江)을 감독하도록 했는데 몇 기(騎)를 남겨놓고 얼음이 풀렸다. 유수가 왕패에게 말했다.

 

“우리 군대를 편안히 건너게 하여 죽음을 면하게 한 것은 경의 힘이었소.”

 

왕패로서는 자신의 공이라고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이는 공의 지극한 덕과 신기하고 영묘한 하늘의 도움으로 가능했던 것입니다. 무왕(武王)을 도왔다는 백어(白魚)05의 얘기도 이보다 더 신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유수가 휘하 장졸들에게 말했다.

 

“왕패의 기지로 우리 군이 무사히 강을 건넌 것은 하늘이 내린 상서로움이라 할 수 있을 것이오.”

유수는 왕패를 군정(軍正)06으로 삼고 관내후(關內侯)라는 직위를 주어 그 공을 치하했다. 왕패가 군정에 임명된 것은 그의 집안이 대대로 법률을 집행하는 지위에 있었고, 그 자신의 첫 번째 관직이 옥리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유수군의 도강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는 힘든 일이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역사에 기록된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가 그러하다. 그런데 만약 유수가 이때 강을 건너지 못했다면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다. 후한 건국의 과정에서 이때 유수군이 도강하여 왕랑의 추격을 따돌린 것은 참으로 천우신조(天佑神助)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유수군은 신도(信都, 하북성 冀縣)에 이르러 군대를 재정비할 수 있었다. 이는 신도태수 임광(任光)과 화융(和戎)태수 비융(邳肜)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하북의 모든 군현들이 왕랑의 선전에 현혹되어 그의 세력으로 빠르게 편입되어 갔지만 이들만은 예외였기 때문이다. 이들을 기반으로 다시 세력을 확장하게 된 유수는 마침내 왕랑의 근거지인 한단을 함락시켰다. 왕패는 왕랑을 추격하여 그의 목을 베고 그의 새수(璽綬)07를 빼앗았다. 왕패는 그 공으로 다시 왕향후(王鄕侯)에 봉해졌다.

 

후한 건국과 왕패의 지략

 

유수를 따라 하북을 평정할 때 왕패는 장궁(臧宮), 부준(傅俊)과 같은 병영을 썼다. 이들 가운데 왕패는 유독 사졸(士卒)들을 잘 보살폈다. 그는 죽은 병사들에게 직접 염(殮)을 하는가 하면 부상병들을 돌보기도 했다. 전사자의 장례나 부상자들을 돌보는 일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그런 일이 아니다. 남들은 꺼려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지만 왕패는 전력을 다해 병사들을 돌보았다.

하북을 평정하여 기반을 확립한 유수가 25년 호현[鄗縣, 하북성 백향현(栢鄕縣]에서 신하들의 추대로 제위에 올라 한의 부흥을 선언하니 그가 후한의 초대 황제인 광무제(光武帝)이다. 광무제 즉위 이후에 왕패는 편장군(偏將軍)에 임명되었다. 광무제는 왕패가 군대의 일에 밝고 또한 사졸들을 잘 보살핀다는 것을 알고 그를 편장군으로 삼은 것이다. 아울러 장궁과 부준의 병사들도 거느릴 수 있게 했는데 이때 장궁과 부준의 직책은 기도위(騎都尉)였다.

 

26(건무 2)년 왕패는 다시 부파후(富波侯)에 봉해졌다. 28(건무 4)년 가을에 광무제는 초[譙, 안휘성 박현(亳縣)]로 순시를 떠났는데 왕패와 포로(捕虜)장군 마무(馬武)를 시켜 수혜[垂惠, 안휘성 몽성현(蒙城縣)]에서 주건(周建, ?-28)08을 토벌토록 하였다. 소무(蘇武, ?-29)09가 이 소식을 듣고 오교(五校)의 사졸 4천여 명을 거느리고 그를 구원했다. 소무는 우선 날랜 기병들을 보내어 마무의 군량을 약탈하였다.

 

이에 마무는 즉각 대응에 나섰다. 그런데 주건이 성안의 군대를 발동하여 마무는 양쪽의 군대에게 협공을 받게 되었다. 주건과 소무에게 협공을 당했지만 마무군은 왕패의 구원을 믿고 필사적으로 싸우지는 않았다. 마무군은 소무와 주건에게 패하여 도주할 수밖에 없었는데, 마무는 왕패의 병영을 지나면서 큰소리로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왕패는 마무군을 구원하지 않았다. 왕패가 크게 소리쳤다.

“적병이 너무 많아 나가서 싸워봤자 양쪽이 패할 것이니 모쪼록 잘 싸우시오.”

 

왕패는 병영을 닫고 수비를 철저히 하라고 지시했다. 이때 왕패의 휘하 장수들은 모두 나가 싸우자고 했다. 이들의 주장은 당연한 것이었다. 아군(我軍)이 공격받고 있는데 수수방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왕패는 부하들을 먼저 설득해야 했다.

 

“소무의 병사들이 날쌔고 또 그 수효가 많아 우리 병사들이 속으로 두려워하고 있다. 포로장군(마무)과 내가 서로 의지하고 있지만 양군(兩軍)이 하나가 아니므로 지금 나가서 싸우는 것은 패배의 길이다. 병영을 닫고 굳게 지켜 우리가 서로 구원하지 않는 것을 보여주게 되면 도적들은 반드시 기세가 올라 가벼이 진격할 것이다. 또 포로장군은 구원이 없음을 알고 스스로 배전의 노력으로 싸우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소무의 병사들이 지치게 될 것이며, 그 틈을 타 치게 되면 승리는 우리 것이 된다.”

 

전투가 발생한 지 꽤 되었을 때 왕패의 진영에서 노윤(路潤) 등 수십 명이 머리카락을 잘라 자신들의 결의를 보이면서 싸우기를 청했다. 왕패는 이들의 마음을 읽고 출정을 허락했다. 왕패는 병영의 뒤를 터 날랜 기병을 내보내 적들의 배후(背後)를 공격했다. 왕패군의 공격으로 상황이 역전되었다. 협공을 예상하지 못한 소무와 주건이 왕패군의 공격을 받게 되자 이들의 진영은 혼란에 빠졌고 이내 도주했다. 이에 마무와 왕패는 더 이상 추격하지 않고 각기 자기의 진영으로 귀환했다.

 

다음날 소무와 주건은 군대를 정비하고 다시 싸움을 걸어왔지만 왕패는 대응하지 않았다. 왕패는 휘하 장졸들을 실컷 먹이고는 이들을 놀게 하면서 음악까지 연주케 했다. 이날 비까지 내렸지만 적들의 도발은 계속되었다. 적의 화살이 왕패 앞의 술동이에 꽂혔으나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왕패의 휘하 장수들은 공격할 것을 건의했다.

 

“소무의 군대가 전날의 싸움에서 이미 패했으니 지금 쉽게 쳐부술 수 있습니다.”

 

왕패의 생각은 달랐다.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그렇지 않다. 소무군은 먼 곳에서 왔기 때문에 양식이 부족하다. 그래서 자주 공격하여 한 번에 이길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제 병영을 닫고 병사들을 쉬게 하는 것은 이른바 싸우지 않고도 적을 굴복시킨다는 것으로 병법(兵法)에서 최선의 방책으로 치는 것이다.”

 

소무와 주건은 자신들의 도발에도 왕패의 응전이 없자 군대를 끌고 병영으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그날 밤 주건의 조카 주송(周誦)이 반란을 일으켜 성문을 닫고 항거하자 소무와 주건은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도주한 이후 주송은 왕패에게 투항하였다. 왕패의 예상대로 싸우지 않고 전쟁에서 이긴 것이다.

 

이듬해인 29(건무 5)년 봄에 광무제는 태중대부(太中大夫)를 보내 왕패를 토로(討虜)장군에 임명했다. 30(건무 6)년 왕패는 신안(新安)에서 둔전(屯田)을 개설했다. 32(건무 8)년에는 함곡관(函谷關)에도 둔전을 개설했다. 둔전은 변경이나 군사 요지에 설치해 군량을 충당한 토지를 이르는 말로 한나라에서 처음 설치되었다. 군대의 운용에서 군량미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당시는 중국 전역이 혼란하여 군량을 모으는 일이나, 운반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또한 군량을 운반하는 도중에 적들에게 탈취되면 오히려 적을 이롭게 할 수도 있었다. 둔전을 개설하여 현지에서 군량을 조달하게 되면 군량 운반의 수고도 덜 수 있고,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진다고 해도 군량이 문제가 되어서 전쟁 수행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 이점이 있었다. 왕패는 이를 기반으로 형양(滎陽), 중모(中牟)의 도적들을 공격하여 모두 평정시켰다.

 

33(건무 9)년에 왕패는 오한(吳漢), 횡야(橫野)대장군 왕상(王常), 건의(建義)대장군 주우(朱祐), 파간(破姦)장군 후진(侯進)의 병사 5만여 명과 함께 고류(高柳, 산서성 陽高縣)를 공격했다. 고류는 노방(盧芳)10 휘하의 장수 가람(賈覽), 민감(閔堪)이 수비하고 있던 지역이었다. 그런데 고류가 위기에 처하자 노방이 흉노에 구원을 요청하여 흉노의 기병이 출동했고, 비까지 내려 전세가 불리했다. 오한이 낙양으로 회군하면서 주우는 상산(常山), 왕상은 탁군(涿郡), 후진은 어양(漁陽)에 주둔하도록 명령했다. 광무제는 왕패를 상곡[上谷, 하북성 회래현(懷來縣)]태수에 임명하고 둔병(屯兵)은 전과 같이 거느릴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왕패가 흉노(匈奴)를 공격하기 위한 작전을 펼칠 때 군(郡)의 경계로 구애받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34(건무 10)년에 왕패는 오한 등 네 장군이 거느리는 병사 6만여 명과 함께 다시 고류를 공격했다. 이때 광무제는 조서를 내려 왕패와 어양태수 진흔(陳訢)으로 하여금 선봉에 서도록 했다. 흉노는 다시금 좌남(左南)장군에게 수천 명의 기병을 주어 가람을 구원하게 했다. 왕패는 흉노군과 평성(平城) 아래에서 연달아 싸웠다. 이 전투에서 왕패군은 흉노군을 격파하고 그 여세를 몰아 변경까지 추격하여 수백의 목을 베었다. 왕패와 여러 장수들은 안문(鴈門)으로 돌아와 표기(驃騎)대장군 두무(杜茂)과 함께 노방 휘하의 윤유(尹由)를 곽(崞)과 번치(繁畤)에서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37(건무 13)년에 광무제는 왕패의 식읍(食邑)을 늘려주고 다시 향후(向侯)에 봉했다. 이때 노방이 흉노, 오환(烏桓)과 연합하여 변방을 노략질하니 이 지역이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이에 광무제는 조서를 내려 왕패에게 형(刑)이 풀린 죄수 6천여 명을 주고 두무와 함께 비호도(飛狐道)를 수리하도록 명령했다. 왕패는 돌을 쌓고 흙으로 덮어서 곳곳에 정장(亭障)11을 만들었는데 대(代)에서 평성(平城)까지 이르는 3백여 리에 이르는 대공사였다. 왕패는 흉노, 오환과 크고 작은 수백의 전투를 거치면서 변방의 일에 많은 식견을 쌓을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왕패는 여러 차례 상서하여 흉노와 화친을 맺는 것이 마땅할 것이라 주장했다. 또 변방으로 물자를 수송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의견을 개진했는데, 그의 의견은 온수(溫水)를 이용하여 배로 물자를 실어 나르는 것이 육상으로 운송하는 것보다는 수고를 덜 수 있다는 것이었다. 왕패의 건의는 모두 받아들여져서 시행되었다. 왕패는 상곡태수로 20여 년을 지냈는데 그 사이에 남선우(南單于), 오환이 한나라에 항복하여 북쪽 변방은 안정되었다.

 

54(건무 30)년 왕패는 회릉후(淮陵侯)에 봉해졌다. 59[영평(永平) 2]년 왕패는 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는데 그 몇 개월 뒤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 왕부(王符)가 뒤를 이었다.

 

 

 

01 萬民英(明) 原著, 『圖解 星學大成 第一部: 星曜神煞』, 北京; 華齡出版社, 2009, p.427.

02 감옥(監獄)에 딸려 죄수를 감시하고, 형옥(刑獄)을 심리(審理)하는 벼슬아치.

03 후한 대에 수도의 모든 관원과 수도 부근의 7개 군을 포함하는 사예주의 관원들을 감독해 불법행위를 감찰하는 벼슬.

04 공조는 한대(漢代) 서사(書史)를 관장하는 군(郡)의 속리(屬吏). 영사는 하급관리.

05 『사기(史記)』, 「주본기(周本紀)」를 보면 무왕(武王)이 즉위하고 강태공의 보좌로 은(殷)나라를 칠 때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무왕이 강을 건너 중류에 이르렀는데 흰 물고기가 (왕의 배 안으로) 튀어 올랐다. 무왕은 몸을 숙여 물고기를 들어 제를 올렸다.” 이 일에서 백어약입(白魚躍入)이란 말이 생겼고, 이는 상서로운 징조를 뜻한다.

06 군정은 군중(軍中)에서 법을 집행하는 관직으로 권한이 컸다.

07 옥새(玉璽)와 그 인끈. 새(璽)는 진한(秦漢) 이후에 천자의 도장을 의미하는 것이며, 인끈은 관직을 나타내는 인(印) 따위와 혁대(革帶) 사이를 이어서 고정시키는 끈을 가리키는 말로 천자를 상징한다.

08 패[沛, 현재 안휘성(安徽省) 수계(濉溪) 서북(西北)]사람. 천자를 자칭했던 유영(劉永, ?-27)이 병사를 일으킨 후 장수로 발탁되어 그를 도와 제음(濟陰), 산양(山陽)의 28개 성을 함락시켰다. 26(건무 2)년 합연(蓋延)이 유영을 토벌하자 소무(蘇茂)와 함께 그를 구원했으나 패주했다. 27년 오한(吳漢)에게 다시 패했다. 유영이 토벌된 이후에 그의 아들 유우(劉紆)를 양왕(梁王)에 옹립했다. 28년 마무(馬武)와 왕패(王覇)가 그의 근거지인 수혜(垂惠)를 포위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09 진류[陳留, 현재 하남성(河南省) 개봉(開封) 동남(東南)]사람. 경시제의 토난(討難)장군이었다가 주유(朱鮪)와 함께 낙양(洛陽)을 수비했다. 이후 광무제에게 항복하여 합연(蓋延)과 함께 천자를 자칭했던 유영(劉永, ?-27)을 공격하였으나 장수들과의 사이가 나빴다. 그는 광락(廣樂)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키고 유영에게 칭신(稱臣)하여 그에 의해 대사마, 회양왕(淮陽王)에 임명되었다. 27(건무 3)년 한나라에 패하여 호릉(湖陵), 수혜(垂惠)로 도망갔다가 유영이 토벌된 이후에 주건(周建)과 함께 그의 아들 유우(劉紆)를 양왕(梁王)에 옹립했다. 마무(馬武)와 왕패(王覇)에 연이어 패하여 두헌(竇憲)에게 투항했다가, 29(건무 5)년 광무제가 파견한 장보(張步)에 의해 처단되었다.

10 자(字)는 군기(君期). 안정(安定) 삼수[三水, 현재 감숙성(甘肅省) 고원(固原) 北; 북쪽] 사람. 왕망의 신나라 말년에 전한 무제의 증손자 유문백(劉文伯)을 사칭하여, 삼수 속국(屬國)에 사는 강족(羌族), 호족(胡族)과 함께 군사를 일으켰다. 경시제가 장안에 이르자 그를 기도위(騎都尉)에 임명해 안정 서쪽을 진무(鎭撫)토록 했다. 경시제가 패망하니 삼수지역의 호걸들이 그를 상장군(上將軍) 겸 서평왕(西平王)으로 세우고 사신을 보내 서강(西羌), 흉노(匈奴)와 화친하게 했다. 이때, 그는 자신을 전한 무제의 증손자라고 사칭했으므로, 흉노는 그를 한나라 황제에 임명했다. 이후, 도읍을 구원(九原)에 정하고 흉노와 함께 북쪽 변방을 자주 침략하여 광무제가 여러 번 군대를 파견했으나 정벌하지 못했다. 36(건무 12)년 그의 부장(部將) 수욱(隨昱)이 모반을 일으키자 흉노로 달아났다가, 40(건무 16)년 고류(高柳)에 들어와 살면서 한나라에 항복하기를 청해 광무제가 대왕(代王)에 봉했는데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자를 데리고 흉노로 달아났다. 10년 뒤 흉노 땅에서 병사(病死)했다.

11 변경의 요새에 설치된 것으로 통행인의 출입을 검사하는 관문이다.

 

<대순회보 1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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