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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수 신명규(奎) 별을 관장하는 주우(朱祐) 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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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2.21 조회4,28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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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수(奎宿)

규수(奎宿)는 28수 가운데 열다섯 번째 별자리이다. 그리고 규루위모필자삼(奎婁胃昴畢觜參) 서방(西方) 백호(白虎) 칠수(七宿) 가운데서 첫 번째 별자리다. 이 별자리의 주된 별[主星]은 16개로 상징 동물은 늑대[狼]이다. 규수의 속성(屬性)은 나무[木]로 서방 백호의 발, 천상의 창고(倉庫), 돼지를 상징한다. 규수를 의인화하여 서방규목랑성군(西方奎木狼星君)이라 하는데 얼굴은 늑대와 비슷하고 문장(文章)을 관장한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검은 갑옷을 입고 있으며 손에 시아봉(狼牙棒)01을 쥐고 있다고 한다.02

 

 

후한의 창업공신 주우

주우(朱祐, ?-48)03는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BCE 2-CE 58)를 도와 후한(後漢)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창업공신이다. 그의 자(字)는 중선(仲先)으로 남양군(南陽郡) 완현(宛縣) 사람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외가인 복양(復陽) 유씨(劉氏) 집안에서 자랐다. 이때 용릉(舂陵)을 왕래하면서 유수와 그 형인 유연(劉縯)과 친분을 쌓았다.

 

여기서 잠시 당시의 정세에 대해 살펴보자. 이 시기는 중국사 가운데서도 두드러지는 난세였다. 전한(前漢)-신(新)-후한으로 이어지는 왕조 교체의 과정에서 중국 전역은 ‘천하대란’이라고 할 정도의 혼란에 빠졌다. 이러한 혼란은 선양(禪讓)이라는 궁정 쿠데타를 통해 전한을 타도하고 신(新, 8-23)을 건국한 왕망(王莽)에 의해 비롯되었다. 왕망의 급진적이고 복고적인 개혁정책은 참담하게 실패했다. 그런데 정책의 실패를 예측하지 못한 왕망의 무능으로 각지의 반란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한나라의 후예들인 남양(南陽)의 유씨(劉氏)들도 한나라 부흥의 기치를 들고 이에 가세했다. 23년 일단의 세력들이 남양 유씨들과 결합하여 경시제(更始帝) 유현(劉玄, ?-25)을 옹립하였다. 이때 유수 형제는 봉기군에 합류하였다.

 

경시제에 의해 유연이 대사도(大司徒)에 임명되자, 주우를 호군(護軍)04으로 삼았다. 이후 유수가 대사마가 되어 하북(河北)을 토벌할 때도 주우를 호군으로 삼았다. 이후 주우는 유수를 수행하여 군중(軍中)에서 함께 기숙하였다.

 

주우가 잔치 자리에서 유수의 시중을 들면서 조용히 말하였다.

“장안의 정세가 어지럽고 공께서는 천자가 될 관상을 지니셨으니 이는 천명(天命)입니다.”

유수가 말했다.

“자간(刺姦)05을 불러서 호군을 잡아 가두어라.”

 

이에 주우는 감히 그런 말을 다시 할 수 없었다. 이는 당시의 정국 상황에서 볼 때 매우 위험한 발언이었다. 유수는 당시 경시제의 명으로 하북으로 온 것이었다. 이미 경시제가 있는데 ‘천자가 될 상’이란 것은 그 자체로 반란을 의미한다. 게다가 이미 유수 형제를 경원하여 유연을 처단한 경시제였다. 경시제의 귀에 이러한 말이 들어간다면 유수 또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주우의 사람됨이 너무나도 솔직했었던 그의 본심에서 나온 말이었으나 쉽게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주우는 유수를 따라 하북(河北)을 정벌할 때 항상 힘껏 싸우고 분투하여 편장군(偏將軍)에 임명되고 안양후(安陽侯)로 봉해졌다.

 

하북을 평정하여 기반을 확립한 유수가 25년 호현(鄗縣, 하북성 栢鄕縣)에서 신하들의 추대로 제위에 올라 한의 부흥을 선언하니 그가 후한의 초대 황제인 광무제(光武帝)이다. 광무제 즉위 이후에 주우는 건의(建義)대장군에 임명되었다. 26(建武 2)년에 주우는 다시 도양후(堵陽侯)로 봉해졌다.

 

그해 겨울 주우는 여러 장군들과 함께 육양(淯陽: 하남성 남양시의 북쪽)에서 등봉(鄧奉)을 공격하였다. 이때 주우가 공격한 등봉 또한 광무제의 공신이었다. 그가 반란을 일으키게 된 것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다. 등봉이 광무제를 알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오한의 군대가 자신의 고향을 노략질하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고향이 노략질 당하고 있는데 그것이 도적이나 적군이 아닌 아군에 의한 것이라면 당사자의 분노가 어떠했을지는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분개한 등봉이 군사를 동원하여 오한의 군대를 격파하고 육양을 점거하였다. 노략질에 열중한 오한군은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후 등봉은 주변의 여러 세력들과 규합하여 광무제에 대항했다. 이 반란은 진압이 쉽지 않았다. 주우군이 패하여 주우가 등봉에게 사로잡혔고, 그 다음 해인 27(건무3) 광무제가 친정에 나선 이후에야 등봉의 반란은 진압되었다.

 

등봉에게 포로로 잡혔던 주우는 광무제 앞에서 윗도리를 벗어 사죄했다. 광무제는 주우를 복위시키고 후한 상을 내려 그를 위로하였다. 광무제는 주우를 파견하여 신야(新野), 수(隋)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그는 그곳을 모두 평정하였다. 그때 연잠(延岑, ?-36)06이 양(穰)에서 패하여 마침내 진풍(秦豊)의 장수 장성(張成)과 합세하였는데 주우는 정로(征虜)장군 제준(祭遵)과 동양(東陽)에서 그들을 공격하여 대파하였다. 주우는 적과 대진하여 장성을 격파하니 연잠은 진풍에게로 도주했다. 주우는 이들이 버리고 간 인수(印綬)07 97개를 획득하였다. 나아가 황우(黃郵)를 공격하여 그를 항복시키니 광무제는 황금 30근(斤)을 하사하였다.

 

28(건무 4)년 주우는 파간(破姦)장군 후진(侯進), 보위(輔威)장군 경식(耿植)과 함께 정남(征南)대장군 잠팽을 대신하여 진풍을 여구(黎丘: 호북성 宜城縣)에서 포위하여 그의 장수 장강(張康)을 채양(蔡陽)에서 목을 베었다. 광무제가 몸소 여구에 와서 어사중승(御史中丞) 이유(李由)를 보내어 진풍에게 항복하라고 했다. 진풍은 광무제의 사신에게 욕지거리로 대응하면서 항복하지 않았다. 광무제는 주우에게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주우가 힘을 다하여 그를 공격하였다.

 

그 다음 해 여름 한나라의 계속된 포위로 성안이 곤궁해지자 마침내 진풍이 그의 처와 어미, 자식 아홉 명을 이끌고 윗도리를 벗고 항복하였다. 주우가 진풍을 함거(轞車)08에 태워 낙양으로 보내니, 광무제가 그의 목을 베었다.

 

대사마 오한은 주우가 광무제의 명령을 어기고 항복을 받았으니 이것은 장수된 소임을 다하지 않은 것이라고 탄핵(彈劾)하였다. 오한의 탄핵에도 불구하고 광무제는 주우에게 죄를 묻지 않았다. 주우가 돌아와 기도위(騎都尉) 장궁(臧宮)과 합세하여 연잠의 남은 잔당(殘黨)이 점거한 음(陰), 찬(酇), 축양(筑陽) 3개 현을 공격하여 모두 평정하였다.

 

주우는 사람됨이 질박하고 솔직하였고 유학을 숭상하였다. 병사들을 거느리고 싸움을 할 때 대부분 항복을 받았고 성읍을 안정시키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지 적의 목을 공으로 여기지 않았다. 또한 사졸들이 백성들을 노략질하지 못하도록 금하였는데 이 때문에 그를 원망하는 병사들이 많았다.

 

위와 같은 주우의 행동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폭력과 유혈이 만연한 시대에 그에게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던 것이다. 그가 추구한 것은 ‘안정’이었지 폭력과 유혈의 확산이 아니었다. 주우는 적의 목을 공으로 여기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는 당시의 상황과는 다른 것이었다. 전투 과정에서 장졸(將卒)들의 전과는 적을 얼마나 살상했는가로 나타난다. 적의 목은 그 증거였다. 그리고 성과에 급급한 장수라면 꼭 적의 목이 아니라도 좋았다. 전투와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도 관계가 없었던 것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적의 목이라고 강변할 때 아니라고 할 근거도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휘하 장졸들로 제한적일 수밖에 없지만 주우의 생각은 무분별한 폭력과 살인을 예방하는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앞서 언급된 등봉의 반란도 아군인 오한군의 노략질이 원인이 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고대에는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일단의 지역을 장악한 이후 그 지역을 노략질 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폭력과 살인은 필연적이었지만 용인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노략질은 생사를 건 전투에서 살아남은 승자의 권리로 여겨지기도 했다. 따라서 주우의 행위에 반감을 품은 병사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33(건무 9)년 주우는 남행당(南行唐)에 주둔하면서 흉노(匈奴)를 막았다. 37(건무 13)년 주우는 자신의 공이 적다면서 식읍(食邑)09으로 남양(南陽)의 500호(戶)면 족하다 상주했다. 광무제는 주우의 식읍을 오히려 늘려주고 격후(鬲侯)로 봉해 주었는데 그의 식읍은 7,300호에 이르렀다.

 

39(건무 15)년 주우는 광무제를 알현하고 대장군의 인수를 바쳤다. 이후 주우는 봉조청(奉朝請)10으로 조정에 일이 있을 때 참석할 수 있었다. 주우가 상주하길, 옛날 신하에게 봉읍을 내릴 때는 왕이란 칭호를 주지 않았으니 여러 왕들을 공(公)으로 고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광무제는 주우의 말대로 시행하였다. 또 삼공(三公)에게는 대(大)라는 글자를 삭제하여 옛 제도를 본받도록 건의하였다. 주우의 건의는 그 후 마침내 시행되었다.

 

후한 건국 이후 이 시기가 되면 반란이 종식되고 평화가 도래한 시점이었다. 주우는 자신의 임무는 끝났다고 생각하고 대장군의 인수를 스스로 반납하고 은퇴한 것이었다. 이후 광무제에게 올린 그의 건의는 황제권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주우는 은퇴한 공신으로 유학에 열중하며 공부도 하고 강의도 한 것 같다. 다음은 은퇴한 주우와 광무제 사이에 전개된 일화(逸話)의 한 장면이다. 이때 광무제가 그의 집에 행차하면 주우는 언제라도 먼저 강사(講舍)로 올랐다. 광무제는 몸소 그의 집에 방문하여 웃으면서 말하였다.

 

“주인께서는 나를 내버려두고 강의할 수 있겠는가?”

 

광무제는 주우와 어려서 만났고 장안에서 장사를 같이한 일도 있었다. 이와 같은 옛 정을 생각하여 광무제는 주우에게 여러 번 후한 상을 내려 주었다. 주우는 48(건무 24)년에 세상을 떠났다.

 

 

 

01 주로 중국 전국시대에 사용된 타격 무기의 일종으로 늑대의 송곳니에 비유되는 가시 모양의 돌기가 자루 윗 부분에 설치된 막대 모양의 무기.

02 萬民英(明) 原著, 『圖解 星學大成 第一部: 星曜神煞』, (北京; 華齡出版社, 2009), p.429.

03 주우의 본명은 주호(朱祜)이다. 그의 이름이 주우(朱祐)가 된 것은 후한의 6대 황제인 안제(安帝)의 이름이 유호(劉祜)였기 때문이다. 군주의 이름인 호(祜)를 쓰지 않기 위해 시(示) 옆의 글자인 고(古)의 획을 틀어서 우(右)로 바꾼 것이다. 『동관기(東觀記)』에는 주우를 주복(朱福)이라 칭하기도 했다. 주우와 같이 군주와 이름이 같을 때 글자를 바꾸어 쓰는 것을 피휘(避諱)라 한다. 한자문화권에서는 그 대상이 군주가 아니라 해도 사람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이 예에 어긋난다고 여겼다. 따라서 일상생활에서 본명 대신 자(字)나 호(號)와 같은 별도의 이름을 부르는 경우가 많았고 본명이 쓰이는 일은 드물었다. 임금, 성인(聖人), 선조(先祖) 또는 원한이 있는 사람의 이름이 문장에 들어갈 경우에 한자 획의 일부를 생략하거나, 뜻이 통하는 다른 글자로 대치하거나, 글자가 들어 갈 곳을 비워두는 방식 가운데 하나를 택하여 피휘했다. 또한 군주의 이름에 쉬운 글자가 들어 있으면 나라 전체가 불편할 뿐만 아니라 외교상의 문제도 발생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군주와 그 일족의 이름은 잘 쓰지 않는 글자를 선택하고 한 글자로 작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04 진(秦)나라가 호군도위(護軍都尉)를 둔 것에서 비롯된다. 한나라는 진나라의 제도를 계승하였으므로 호군(護軍)이라 했고 『동관기』에 의하면 대장군이 출정할 때, 호군 1인을 두었다고 한다. 장수들 사이의 관계를 조절하기 위해 임시로 둔 벼슬로, 위진(魏晋) 이후에는 군직(軍職)의 인사 및 중앙 군대를 관장하기도 하였다.

05 글자대로는 간사한 관리를 감독하여 살피는 것으로 이러한 직책을 맡은 벼슬 이름을 뜻한다. 『한서(漢書)』 「왕망전(王莽傳)」에 따르면 왕망이 좌우자간(左右刺姦)을 두었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06 남양(南陽, 현재 하남성 남양) 사람. 한중(漢中)을 기반으로 반란을 일으켜 주변 현을 공략하면서 세력을 확장했다. 진풍(秦豊)과 연합하였다가 진풍이 패하자 공손술(公孫述)에 투항하여 대사마(大司馬)에 임명되고 여녕왕(汝寧王)에 봉해졌다. 36(建武 12)년, 오한(吳漢)이 촉(蜀)을 평정할 때 이에 맞서 싸웠으나 연패하였다. 공손술이 죽자 항복했고 처형되었다.

07 관직에 임명될 때 수여되는 도장과 끈. 벼슬아치가 그 자리에 임명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증표이다.

08 죄인을 실어 나르던 수레.

09 국가에서 왕족, 공신(功臣), 봉작(封爵)한 이에게 수여하는 것으로 해당 호(戶)에 대해 조세(租稅)뿐만 아니라 요역(徭役)의 징발권도 주어졌다. 해당 지역민에 적지 않은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었고 상속도 가능했다.

10 조정에서 의식을 행할 때에 만들어지는 임시관직.

<대순회보 1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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