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눌과 성철의 돈오점수·돈오돈수 논쟁 :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간화결의론』·『선문정로』를 중심으로 > 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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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고전읽기지눌과 성철의 돈오점수·돈오돈수 논쟁 :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간화결의론』·『선문정로』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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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6.13 조회5,44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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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 김태수

    

1.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에 나타난 지눌의 선수행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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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호에서는 『권수정혜결사문』·『수심결』 등 지눌 초기저작들에 나타난 돈오점수관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번 호에서는 지눌의 만년 저작인『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와 그의 사후 출간된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등에 나타난 선수행관을 살펴본 후, 지눌의 돈오점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돈오돈수관을 주창한 성철(性徹, 1912~1993)의 비판을『선문정로(禪門正路)』를 중심으로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우선, 지눌의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은 그의 저술 가운데 선(禪)의 깨달음과 수행에 관한 가장 포괄적인 저서로서 지눌 전체 사상을 통괄하는 역작이다. 이는 선교일치론을 세운 규봉종밀(圭峰宗密, 780-841)의 『법집별행록절요』01에 대한 지눌의 주석서다. 이 저작은 17세기 전반에 정비된 강원의 승려 교육과정인 이력과정(履歷科程)02에서 교학을 방편으로 선을 결합한 사집과(四集科)의 주요 과목이기도 했다. 한국 불교가 선을 표방하면서도 화엄을 정점으로 한 교학과 간화선 수행방식을 병립시킨 선교겸수 전통을 확립시킨 데에는 여기서 제시된 지눌의 수행론이 사실상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 저작에서 지눌은 규봉종밀의 사상과 연관된 하택신회(荷澤神會, 684~758) 및 북종·우두종·홍주종·임제종의 중국 4대 선에 대해 소개하면서03,하택신회의 공적하고 신령스러운 지혜[空寂靈知]에 기반한 마음 이론 및 종밀의 수행론을 발전시킨다. 또 다른 한편으로 종밀과 달리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을 통한 화엄적 돈오의 길을 제시하면서, 그에게 세 번째 깨달음을 주었던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의 영향 아래 종밀이 접하지 못했던 경절문 화두 참구의 길을 제시한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본래 마음인 공적영지심(空寂靈知心)에 대한 지해(知解, 깨달아서 앎)를 먼저 갖추고 나서 수행하는 돈오점수의 길과 이에 대비하여 돈오돈수의 기반이 되는 경절문을 함께 제시하면서, 경절문이 돈오문의 자성정혜를 능가하는 경지인 무심합도문(無心合道門)이라는 점을 천명한다.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에서 제시했던 ‘정혜쌍수(定慧雙修)’ 및 원돈신해문에 그치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무심’의 경지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 간화경절문은 크게 볼 때, 돈오점수의 과정을 거친 이후 마무리 단계의 수행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지해를 떨쳐버리기 위해 화두를 참구하는 방식과 돈오점수 과정 없이 직접 화두로 뛰어들도록 하는 수승한 근기의 수행자를 위한 처방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무심을 바로 깨달아 어디를 가나 걸림이 없는 사람은 장애 없는 해탈지가 나타나기 때문에”, 수행자가 번뇌를 떠나는 문인 이 무심합도에 이르기 위해 경절문을 통해 들어가게 하려는 취지는 동일하다.

  그런데 이 무심합도는 선정과 지혜의 구속을 받지 않는 경지로서 다음과 같은 두 단계의 경절문 수행법으로 제시된다. “말세에 수도하는 사람은 우선 진실한 지해로 제 마음의 진실과 허망과 생사의 밑과 끝을 환히 가리어 결정하고 난 후, 세밀하고 상세히 참구하여 몸을 빼어낼 곳을 찾게 되면, 이른바 책상 네 다리가 땅에 꼭 붙어 흔들어도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아서 삶과 죽음에 나오거나, 들어가거나 큰 자유를 얻을 것이다.”

    

 

2. 『간화결의론』에 나타난 지눌의 선 수행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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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지눌 만년의 선 수행과 깨달음에 대한 관점을 한층 자세히 살펴 볼 수 있는 저작은 『간화결의론』이다. 이는 그의 사후 직제자 혜심(慧心, 1178~1234)에 의해 출간되었는데, 여기서 지눌은 수행자의 단계를 삼현문(三玄門)으로 설명하면서 이에 따른 간화선 수행체계를 (1)원돈문/(2)참의(參意: 뜻 새김)/(3)참구(參句: 말 새김)의 단계로 제시한다.

  지눌의 설명에 따르면 선 수행의 세 단계 가운데 첫 단계인 초현문은 체중현(體中玄)04이고, 두 번째는 구중현(句中玄)05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로 생사와 지해(知解)의 장애인 쇄락(洒落)한 지견(知見)06을 벗어나지 못할 때 필요한 것이 세 번째 단계인 현중현(玄中玄)07으로 구중현의 쇄락한 지식과 견문을 부수는 공능으로 강조된다. 즉, 여기서 ‘삼현을 시설한 것은 병을 치유하기 위한 것’이다. 그럼 각각의 수행단계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1)수행체계 상의 첫 단계는 ‘자신이 부처’ 임을 깨닫는 원돈신해이다. 이를 거쳐, (2)둘째 단계인 참의(參意)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수행에 필요한 화두와 관련한 제반 정보를 습득하고 이해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방식의 화두 참구(參究, 참선하여 진리를 찾음)는 수행과정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고 규범적으로 적용하는 원돈문의 방식과 큰 차이가 없다. 지눌이 원돈문과 참의의 공능을 분명히 인정하는 이 점은 후에 성철에 의해 비판된다.

  (3)세번째 단계인 참구 또한 성철은 사구(死句)로서 비판한다. 이와 달리, 지눌은 ‘활구(活句)가 사구를 기초로 사구를 버리듯, 참구(參句)는 원돈문의 지혜를 기초로 해서 참의를 거친 후 이를 벗어던지는’ 구도로 설명한다. 화두를 드는 두 번째 단계인 참구는 뜻을 새기는 데 그치지 않고 ‘온몸으로 일심을 증득하며 반야지혜를 발휘하여 넓고 크게 유통시키는 것’으로 그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처럼 지눌은 돈교(頓敎)나 원교(圓敎)와 구별되는 간화의 위상을 인정했다. 대혜선사를 인용하면서 현수국사 법장(法藏, 643~712)과 같이 화엄 돈교의 꽉 막힌 도리에 막히지 않고, 학인으로 하여금 화두를 참구케 하여 열 가지 선병(禪病)에 걸림 없이 곧바로 깨치게 해야 함을 역설한 것이다.

  하지만 이후 성철의 입장과는 달리 지눌은 ‘원돈문의 언교가 비록 사구이기는 하지만 결코 무용지물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초심자들은 활구를 참구할 수 없고, 사구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지 원돈신해의 여실한 언교가 황하의 모래알처럼 많지만 이를 사구라고 하는 이유는, 사람을 지적인 이해에만 몰두하도록 하는 장애가 생겨나게 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아울러 초심자들은 아직 경절문의 활구를 참구할 수 없으므로 근기에 맞는 원만한 말들을 보여 주어 믿고 이해해서 물러서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방편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으로 지눌의 선수행관을 개관해 보았다. 살펴보았듯이 그의 선수행관이 자신의 첫 번째, 두 번째 깨달음에 근거한 성적등지문과 원돈신해문을 두 축으로 했다고 해서 세 번째 깨달음인 간화경절문을 무시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최고 근기를 지닌 수행자들을 위해서는 자성정혜(自性定慧) 및 나아가 간화경절문을 제시했다. 이로써 최상의 근기를 지니지 못한 일반 수행자들을 위해 성적등지문과 원돈신해문에 입각한 돈오점수론을 근기에 맞게 제시한 삼원(三元)수행 체계를 완성시킨 것이다.

  이렇듯 지눌이 진리적 이해에 입각한 해오(解悟)08·견성(見性)을 돈오로 보는 돈오점수를 강조했다고 해서 돈오돈수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현실적 고려에서 규봉종밀의 입장을 택하여, ‘돈오돈수 역시 과거 생까지 미루어 보면 먼저 깨닫고 후에 닦는 근기(先悟後修)’라고 하여 돈오돈수를 돈오점수의 틀 안에 포함시키는 구조를 제시한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성철은 그의 『선문정로』서문에서, ‘견성이란 오직 궁극적 깨달음, 즉 증오에 도달할 때에만 쓸 수 있는 말’이라고 구분하면서, 해오ㆍ견성을 돈오로 보는 지눌을 비판하고 나서면서 돈점논쟁09이 시작된다. 그럼 이제 성철의 지눌 수행론에 대한 문제제기와 그 비판의 적실성을 살펴보기로 하자. 

    

 

3.『선문정로』에서 나타난 성철의 지눌 수행론10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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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문정로』에서 성철은 “선문에서의 견성이란 진여자성을 깨친 구경각(究竟覺)11을 말하며 이 견성을 돈오라고 하므로, 돈오는 곧 성불이어야 하는데 보조 지눌은 초보적 깨달음인 해오를 견성이라고 주장했다.”고 비판하면서 돈점논쟁을 촉발시킨다. 그 비판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교가(敎家)에서는 신해행증(信解行證)의 원칙에 따라 해오(解悟)에서 새로 시작하여 3현(賢)과 10성(聖)의 여러 지위를 차례로 닦아 올라 궁극적으로 증오(證悟), 즉 묘각(妙覺)에 들어가지만, 선문의 깨달음인 견성은 한순간에 대각원통(大覺圓通)을 완전히 깨치는 구경각(究竟覺)이다. 이처럼 견성이란 궁극적인 깨달음인 증오에 이를 때만 쓸 수 있는 말이므로 부분적 이해에 기반한 해오가 아니라 삼현십성(三賢十聖)을 초월하여 무여열반의 무심지(無心智)인 증오에 곧바로 들어감을 철칙으로 하니, 이는 선문에서 외치는 ‘한번 뛰어 곧바로 여래의 지위에 들어감[一超直入如來]’이다.”

  2. “근기가 날카롭고 지혜가 으뜸가는 이는 삼현십성을 한 생각에 뛰어넘어 완전히 깨친다. 따라서 ‘견성 방법은 불조(佛祖) 공안을 참구함이 지름길이며, 경론을 익히고 외우는 것만큼 수도에 장애가 되는 것은 없다.” 그런데 지눌은 “경전과 조사들의 말씀을 공부하는 것을 역설했으므로 지해(알음알이)이며, 정법에 대한 최대의 장애를 조장한 지해종도(知解宗徒, 수행은 하지 않고 지식과 견해만을 중시하는 무리)이다. 깨달은 후 깨끗한 마음을 원래대로 지켜나가는 보임[悟後保任]은 닦음으로써 요청되지 않고 무애자재한 해탈일 뿐이다.”

  3. “선문의 바른 수도법은 돈오돈수, 즉 단박에 깨닫고 수행을 마치는 것이다. 그런데 지눌은 먼저 해오로서 깨닫고 그 다음에 점차적으로 닦는 돈오점수론을 제시하여 삿된 지식과 나쁜 견해를 주장했다. “돈수라야 돈오요, 돈오면 돈수라야 한다. … 돈오 이후에 여전히 점수가 필요하다면, 이는 돈오가 아니다.”

  4. “한국 선종사에서의 참선은 마조·황벽·임제·대혜로 이어지는 돈오돈수적 공안선이다. 그런데 대부분은 신회·종밀·지눌로 이어지는 돈오점수적 화엄선을 따르므로, 겉은 임제이지만 속은 종밀인 셈이다. 겉으론 화두를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은 돈오점수’ 사상이므로 이단잡설의 혼란에 빠져 있다.”

 

    

4. 성철의 문제제기 적실성에 대한 비판적 검토

 

  성철의 문제제기는 해방 이래 비구-대처간의 갈등 속에서 타성에 젖은 수행에 경종을 울리고 청정한 수행정신을 고무시키기 위해 정통성을 확립하려 했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타개하고자 했던 맥락 속에서 그 비판의 의의를 이해해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가 여래 이래의 지관(止觀) 수행 전통의 맥락을 이은 정혜쌍수에 기반한 돈오점수론을 비판한 성철의 근거는 그다지 적실해 보이지 않는다.

  요약적으로 볼 때, 성철은 보조 지눌에 대해 ‘해오에 의지해서는 증오에 이를 수 없다.’ 는 논지로 비판을 전개했다. 하지만 지눌은 성철이 비판하듯이 해오와 돈오를 혼동하여 돈오점수의 돈오를 증오로 주장한 것이 아니다.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에서는 “돈오점수라고 하니 이는 해오에 해당된다.”고 하였고, 『원돈성불론』에서도 “깨달음이란 먼저 닦은 후에 깨닫는 것이 아니므로 그것은 해오이다.” 하고 하였다. 오히려 해오와 돈오를 구분하면서 증오에 이르기 위해서 부단한 예비수행을 전제로 하는 성철의 입장은 ‘먼저 해오를 이룬 후, 끊임없는 수행을 통해 구경각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해석하는 지눌의 의미 맥락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혹은 해오를 비판하는 성철의 돈오돈수를 시간적 인과적 개념이 아니라 궁극적 깨달음을 재차 강조하려는 논리적 맥락에서 볼 경우, 양자의 수행론은 유사한 지향점을 갖는다. 

  이렇듯, 지눌이 해오를 증오로 혼동한 적이 없었고 해오와 증오의 단계를 구분해서 보지도 않았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성철의 비판 근거가 적확하다고 볼 수는 없다. 더구나 지눌이 ‘지견(知見)의 병통을 털어 버리기 위해 용맹 정진해야 한다.’ 고 강조한 점을 상기해 본다면 지해의 성격을 지닌 깨침이라고 해서 ‘해오가 증오가 아니다.’라는 논지 아래 돈오점수론을 이단으로까지 규정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생각이다. 돈오돈수론을 지지하는 입장인 박성배 교수는 돈오돈수에 대해 문제점을 제기하는 법성·법정 스님 및 김호성 교수 등의 비판에 대해 반론하면서 ‘보조 스님이 번뇌 앞에 무력한 해오라고 불리는 깨달음과 번뇌를 극복한 증오라는 깨침의 구별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수증론에 경지론을 포함시켰다고 주장하지만 지눌은 어느 저작에서도 해오와 증오를 구별해서 경지론을 전개하지 않았다. 즉, 지눌은 근기에 따른 수행법의 단계를 제시하기는 했지만, 성철과 같이 깨달음[解悟]과 깨침[證悟]12의 단계를 설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지눌은 해오를 단순한 지식이 아니고 부처님의 탄생으로 강조했다. 단지 인간이 본래 구족한 본래성을 자각하는 해오가 근기에 따라 지해(알음알이)로 될 수 있기 때문에 수행단계 및 근기에 따라 경절문을 제시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선문정로』에서 지눌에 대한 성철의 비판을 보면 이러한 오해는 한층 명확해진다. 이병욱 등이 지적하듯 “보조가 만년에 돈오점수를 부정하고 간화선[頓修]로 나아갔다.” 고 하거나 “돈오점수만 잘 수행하면 여실하게 간변하고 본말을 잘 요해하며, 그것으로 성현이 될 수 있다.” 고 하면서 간화선을 간과했다는 성철의 비판은 『간화결의론』을 잘못 읽거나 다른 관점에서 지나치게 단순화한 결과로 보인다.

  지눌이 간화선을 간과했다는 이러한 주장은 한국 선종사의 주류가 돈오돈수/증오점수를 주창한 공안참선 위주의 임제선 일색이었다는 주장과 맞물려 있다. 그런데 한국 간화선의 법맥은 성철의 임제선 유일주의 해석과는 달리, 신라의 구산선문(九山禪門) 이래 화엄선·염불선·우두선·하택선 등이 다양하게 존재하다가 고려말 원나라 몽산덕이(蒙山德異, 1231~1308)의 ‘무(無) 자(字) 화두’ 위주의 간화선만을 절대화하는 흐름이 나타나면서 급기야 성철의 ‘간화선 및 증오 지상주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오히려 간화선을 처음 소개한 지눌 이후, 그의 후계자인 혜심은 대혜종고의 간화선법을 알리는 『구자무불성간화론(狗子無佛性看話論)』을 저술함으로써 화두 참구법을 발전시키면서 간화선을 계승·발전시켜 나갔는데, 이 당시에도 간화선은 유일한 수행문이 아니었다. 혜심은 화두를 위한 공안집인 『선문염송(禪門拈頌)』을 편집했고, 그가 총괄하던 수선사에서 대혜종고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이 간행됨으로써 간화선법이 지눌의 계통에서 이어져 내려왔지만 여전히 근기에 따른 균형 있는 수행문 체계를 유지해 나갔던 것이다. 나아가 지눌이 지향했던 방향에서 많이 달라진 조선 불교에서 이해한 삼문, 곧 간화문·원돈문·염불문에서도 “원돈신해문에 의해 여실지견(如實知見)을 세운 후, 간화선에 의해 지해의 병을 제거하여 활로를 제시하자”나 “교를 버리고 선으로 나아가자”[사교입선(捨敎入禪)]라는 방식이 선수행의 기본과정으로 제시될 때에도 지눌의 저술은 승려들의 교육을 위한 기본 지침서로 포용되었다.13 

  따라서 ‘지눌이 말년에 간화선으로 충분하게 전회하지 못했다는 성철의 비판은 적실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지눌 수행론의 다양성은 석가여래의 정신과 마찬가지로 중생들의 병 치유에 관심을 둔 것이기에 충분하게 전회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근기에 따른 다양한 수행법을 포괄한 점에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지눌의 의도는 화두 이외의 이론에 의한 깨달음 또한 포괄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뿐만 아니라 하택신회나 규봉종밀의 선사상까지도 포괄하는 회통적 입장이었지 ‘벽이단(闢異端)’을 주창하는 종파주의를 추구한 것이 아니었다. 이 점은 종파를 초월해 다양한 이론과 수행을 겸용했던 진표·원효·의상을 이은 한국불교의 주된 흐름으로서 고려말 몽산덕이의 영향 이전의 간화선 사상에 또한 적용되는 정신이라고 본다.  

  다만, 지눌이 당시의 타성에 젖은 당시 사회의 수행 경시 풍토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돈오점수론의 기치를 높이 들었듯이, 성철 또한 해방 이후 타성에 젖은 선 수행 풍토에 일침을 가하기 위해 돈오돈수론을 제시한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 지향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성철이 강조한 간화선 수행의 최고단계는 ‘동정일여(動靜一如: 활동하거나 가만히 있거나 한결같음)’와 ‘몽중일여(夢中一如: 꿈속에서도 한결같음)’를 넘어 ‘숙면일여(熟眠一如)’ 즉 “잠이 아주 꼭 들어서 꿈이 없을 때에도 한결같이 화두를 놓지 않는” 단계에 이르러야 ‘깨쳤다’ 고 보았다는 점에서 지눌의 수행정신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진표·원효·의상·지눌 등 한국불교의 근간을 이루었던 고승들은 한결같이 뼈를 깍는 엄격한 수행과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려는 구제관에 입각한 회통적 입장에서 올바른 깨달음과 실천을 위한 수행론을 제시했다. 이렇듯, 고승들이 제시했던 돈오점수, 돈오돈수 등 그 수행법의 방식은 상이해 보이지만, 중생들에게 효과적인 수행과 깨달음의 길을 제시하려 했던 그 정신과 노력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귀감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대순회보> 161호

참고문헌  

I. 원전

『한국불교전서 4』.『普照全書』. 서울: 동국대학교 출판부, 1984,

보조사상연구원 편.『보조전서』. 서울: 보조사상 연구원, 1989.

보조사상연구원 편.『보조사상』. 순천: 佛日出版社; 1999.

II. 단행본

1. 심재룡. 『지눌연구』. 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4.

2. 심재룡 외 편역. 『고려시대의 불교사상』. 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11.

3. 퇴옹 성철, 『선문정로(禪門正路)』. 해인총림, 1981.

4. 퇴옹 성철, 『선문정로(禪門正路)평석』.

5. Buswell RE. Chinul : The korean approach to zen.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3.  

III. 논문

1. 강건기. 『지눌의 돈오점수 사상』. 『인문논총』. 1985;15(-):41-69.

2. 길희성.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와 지눌 선사상의 구도.” 『보조사상』 2002;17(-):399-419.

3. 김방룡. “간화선과 화엄, 회통인가 단절인가 - 보조 지눌과 퇴옹 성철의 관점을 중심으로.”『불교학연구』. 2005;11(-):31-58.

4. 김진. “한국불교의 돈점논쟁.” 『哲學硏究」. 2001;54(1):93-129.

5. 김호성. “돈오점수의 새로운 해석-돈오를 중심으로.”

6. 박성배. “성철스님의 돈오점수설 비판에 대하여.”

7. 박태원. “돈점 논쟁의 쟁점과 과제.” 『불교학연구』. 2012;32(-):437-83.

8. 변희욱. “무현(無見) 심재룡(沈在龍) 교수 추모 특집호 : 특집 ; 대혜(大慧)와 지눌(知訥)-지눌의 대혜 계승과 이탈, 그리고 복귀-.”『哲學論究』. 2004;32(-):27-45.

9. 최연식. “기획: 지눌과 퇴계, 동아시아의 지식 소통 ; 지눌(知訥) 선사상(禪思想)의 사상사적(思想史的) 검토.”『동방학지』. 2008;144(-):145-67.


<각주>

01 ‘법집(法集)’은 ‘가르침(法)을 모아놓은 선집’이라는 뜻이고, ‘별행(別行)’은 ‘별도로 출간함’ 의 뜻을 ‘절요(節要)’는 ‘요약’을, ‘병입사기(幷入私記)’는 ‘함께 포함시킨 사적인 기술’을 의미한다.

02 이 과정은 사집과(四集科), 사교과(四敎科), 대교과(大敎科)의 세 가지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03 “홍주종은 돈오문에는 가깝지만 정확히 들어맞지 않고, 점수문에는 완전히 어긋난다. 우두종을 돈오문은 반쯤 알았지만, 점수문에는 어긋남이 없다. 북종에서는 다만 점수를 말하고 돈오문은 없으므로 닦음이 진정한 것이 아니다. 이에 비해 하택종에서는 먼저 돈오하고 그에 의지해서 닦아 나간다. …그러므로 말세에 마음을 닦는 이들은 먼저 하택이 가르친 말의 가르침으로, 자기 마음의 성(性)ㆍ상(相)ㆍ체(體)ㆍ용(用)에서 판단하고 택하여 공적에도 수연에도 걸리지 않은 진정한 이해를 얻은 후에 홍주ㆍ우두의 두 종지를 살펴보면 꼭 들어맞을 것이다.” 한편, 종밀의 사상은 ‘교를 통해서 마음을 깨달으려는’ 이들에게 휼륭한 관행의 귀감이 된다고 본다. 선 수행자들이 우선 선에 대한 확실한 지적 이해를 지니는 것을 중요시 한 것이다.

04 유심(唯心)과 유식(唯識)의 도리에 의거하여 들어가는 첫 현문(玄門)으로 원교(圓敎)의 사사무애(事事無碍)에 해당한다.

05 자기 자신의 본래성의 쇄락한 지견에 의거하여 초현문의 불법지견을 부수는 것이다. 이 오묘한 문에도 경절문인 ‘뜰 앞의 잣나무,’‘마 세근’ 등의 화두가 있다.

06 쇄락한 지견이란 ‘흔적 없이 평등하고 항상한 상쾌하고 깨끗한 言句’로써 하여금 지식적으로 ‘알고 보는 것’, 혹은 지식과 견문을 뜻한다.

07 침묵, 방망이로 때리기, 소리 지르기 등의 작용을 세워 구중현의 쇄락한 지견을 부수는 것이다.

08 요해각오(了解覺悟), 곧 ‘도리를 깨달아 아는 것’으로서 지눌은 해오를 곧 돈오로 보는 데 비해, 성철은 ‘진리를 증득하여 깨달음’을 뜻하는 증오를 완전한 깨침인 돈오로서 ‘지혜적 깨달음’인 해오와 구분한다.

09 돈점논쟁은 지눌의 돈오점수에 이의를 제기한 성철(性徹, 1912~1993)이 오랫동안 지지되어 왔던 지눌의 종합적 접근 방식을 이단이라고 규정하면서 시작되었다. 돈오점수가 아닌 돈오돈수(頓悟頓修)가 선종 수행의 관행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에 관해 심재룡 교수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성철의 그 같은 주장은 역설적으로 지눌이 한국 불교 전통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는 말로 평가를 대신한다. [심재룡,『지눌연구』(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4)]

10 깨달음과 수행에 관한 이론

11 불과(佛果)를 완전(完全)히 얻은 마지막 깨달음을 뜻한다.

12 깨달음을 ‘지식이나 지혜를 통해 얻는 해오’로 깨침을 ‘완전한 깨달음’으로서의 증오로 단계적으로 설정한 것은 성철의 구분이다.

13 최연식 교수에 따르면 성철은 원간섭기에 수용된 몽산덕이의 사상적 영향으로 대혜종고에서 비롯된 무(無) 자 화두에 의한 간화선만을 절대화하여, 이 수행법과 본분 종사에 의한 인가만을 정통으로 인정했고, 이에 나옹을 이어 중국에 다녀오기만 했을 뿐인 태고 보우를 본분종사로서 한국선의 종조로 인정한다. 최 교수는 한국의 선이해의 폭이 좁아진 이유로 고려말이래로 몽산덕이의 저술을 제외한 다른 간화선 관련 서적, 즉 고봉원묘(高峰原妙: 1238~1295)와 중봉명본(中峯明本, 1238~1295)의 저술이나 중국ㆍ일본에서 가장 중요한 선종 서적으로 인정되던 『무문관(無門關)』등도 유통되지 않았던 점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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