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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고전읽기논어(論語)의 인(仁)과 사람답게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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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신정근 작성일2018.01.09 조회5,55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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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신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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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스스로 사람답게 살기를 바란다. 아울러 주위 사람에게도 “사람답게 살아라!”고 충고한다. 하지만 사람답게 사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닌가 보다. 신문 방송에 연일 사건 사고가 쏟아진다. 부부가 게임중독으로 자식이 배고파 우는데도 돌보지 않아 아이가 숨지는 일이 일어나고 한 가장이 쌍둥이 아이가 잠을 방해한다며 아내와 아이를 때려서 숨지게 한 일도 있었다. 또한 우체국에 함께 근무하던 동료가 채무 관계로 다른 동료를 살해하고서는 장례식에 나타나 태연히 유족을 위로한 일도 있었다. 이 이외에도 사람의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진다. 이러다 보니 우리는 뚜렷하게 내세울 만한 착한 일을 하지 않더라도 주위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사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처럼 느끼게 된다.

 

 

사람답게 살기의 출발점 그리고 어울림

 

사람답게 사는 것은 멀고 어려운 일이 아니라 자신이 맡은 일을 제대로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이것도 하루가 아니라 인생에 걸쳐 매일 성실하게 한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맡은 일에 성실한 것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출발점일 수는 있어도 종착점일 수는 없다. 나의 의무를 다하고 그 다음 해야 할 일은 타인과의 소통과 어울림이기 때문이다.

소통과 어울림의 흐뭇한 실례를 들어보자. 우리나라의 경우 몇 년 전 태안반도에 기름 유출 사건이 일어났을 때 많은 국민들은 자발적으로 정화작업에 참여했다. 그 덕분에 빠른 시간 안에 해안과 섬이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올해 3월 중순에는 일본 동북부 지역을 쓰나미가 휩쓸어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삶의 터전을 잃은 사건이 있었다. 이로 인해 평생 모은 재산을 송두리째 잃거나 사랑하던 사람을 바로 눈앞에서 놓치고 절규하는 사람을 향해 우리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들에게 가졌던 뿌리 깊은 감정을 넘어 오히려 따뜻한 동정심으로 그들의 손을 어루만져 준 것이다. 여기서 바로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자각이 따뜻하게 마음을 녹인다. 그 자각이란 나와 남의 일을 칼같이 나누지 않고 공동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함께 풀어가는 삶이 사람다운 삶의 종착점이라는 사실이다.

 

 

조화를 깨는 개인의 탐욕

 

공자는 인간 간의 소통과 어울림을 깨는 사람답지 못한 사람의 부류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었다. 하나는 주위 사람이야 어찌되건 상관하지 않고 돈벌이를 가장 우선으로 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그저 부모덕에 사회 지도자가 된 자격미달의 인물이 그들이었다.

이 두 부류가 일으키는 문제를 조금 들여다보자. 먼저 돈벌이를 밝히는 부류이다. 공자 시대는 오늘날처럼 국가가 개인의 복지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경제적으로도 힘든 시기였다.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했던 가족과 그 구성원은 그들의 생계를 위해 치열하게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생산력이 낮아 한 사회가 만들어낼 수 있는 재화도 정해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 평소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게 되면, 결국 이미 누군가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가로채는 길밖에 없게 된다. 누가 자신이 가진 것을 아무런 이유 없이 순순히 내놓겠는가? 결국 있는 것을 두고 뺏고 뺏으려는 음모와 갈등이 생겨나게 된다. 탐욕은 때로는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보물을 찾게 만들고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사치품을 만들게 할 수 있다. 이처럼 공자 시대의 탐욕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남의 눈에 피눈물 흐르는 고통을 주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자격미달인 사회 지도자를 보자. 우리 주위에도 지역과 중앙에서 활약하던 정치 지도자들이 각종 이권에 개입해서 뒷돈을 챙기는 일은 이제 뉴스거리도 되지 못할 정도이다. 경제계의 유력인사도 간혹 돈의 힘만을 믿고서 자식들 싸움에 끼어들어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고 매값을 쳐주며 약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때리며 인권을 짓밟기도 한다. 공자시대에도 자신이 잘한 것도 없고 잘하는 것도 없으면서 부모 덕분에 귀족 신분을 물려받은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제후나 천자처럼 자격 없는 지도자가 그 자리에 앉게 되면 그 자리에 있는 내내 사람들에게 세금을 더 내라고 들볶거나 심지어 개인적 기분에 따라 중요 정책을 결정해서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만들었다.

이처럼 제 앞가림도 못하는 사람들이 브레이크가 고장난 차를 모는 것처럼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사회 속으로 들어와 숱한 문젯거리를 만들어냈다. 이들이 일으킨 문제는 개인에게 해당되지 않고 수많은 사람을 절망의 소용돌이로 몰고 갔다. 예컨대 능묘와 별장 등 불필요한 대규모 토목 공사를 일으켜 국가 재정을 파탄내고 빈민 구제나 수리 시설 등 정작 필요한 일을 손대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공자 시대에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절제되지도 준비되지도 않은 사람들로 인해 고통과 불안이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공자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이것이라도 하자!”라는 절박한 생각에서 사람답게 사는 것을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인(仁)과 사람답게 살기

 

우리는 인(仁)을 사전에서 본대로 ‘어질 인’이라고 한다. 또 사전을 보면 어질다는 마음이 너그럽고 착하며 슬기롭고 덕행이 높다고 풀이하고 있다. 오히려 인이란 한 글자보다 더 어려워진 느낌이다. 그냥 인을 사람다울 인으로 생각하자. 사전의 말이 어려울 때는 사전을 그대로 믿을 것이 아니라 더 잘 이해되는 말로 바꾸어서 이해하면 좋겠다.

그러면 공자는 인으로 사람답게 사는 것을 어떻게 풀이하고 있을까? 우리는 공자가 인을 어렵게 설명하지 않을까, 잔뜩 움츠리고 있을 필요가 없다. 그는 인을 이리저리 다양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뜻밖에도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도 많다.

실례를 들어보자. 『논어』의 「안연」이란 편을 보면 공자는 “인이 무엇이냐?”라는 물음을 받고서 단 두 글자로 대답했다. 애인(愛人)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중국어에서 애인을 ‘아이런’이라 읽으면 아내,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많이 쓰인다. 공자의 말에서 애인은 그런 뜻이 아니라 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어찌 보면 새로울 것이 전혀 없지만 사람다움이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가까이는 자기 자신이나 가족 그리고 주위 사람을, 멀게는 고향 사람이나 지구촌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사람답다고 할 수 있을까? 그 무엇보다 인간을 사랑하고 물질보다 인간의 가치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공자도 말만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천했다. 예컨대 공자집의 마구간에 불이 난 적이 있었다. 공자는 집으로 돌아와서 그 소식을 듣고서 사람이 다치지 않았는지 먼저 물었다. 당시나 지금이나 말은 신분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돈으로 치면 꽤나 비싼 재산이었다. 공자는 재산보다도 사람을 먼저 걱정했던 것이다. 공자의 제자 중에 간혹 다른 나라로 사신을 떠나는 경우가 있었다. 이때 공자는 다른 제자를 시켜서 식량을 보내주었다.

이처럼 사랑은 너와 나가 차가운 이해관계 앞에서 한 치의 손해를 보지 않고 한 푼의 이익을 거두기 위해서 날카롭게 쇳소리를 내면서 살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사랑은 사람을 가진 것과 하는 일로 따지지 않고, 모두 같은 사람으로서 좋은 것을 함께 좋아하고 공분해야 할 것을 공분하게 하는 것이다.

결국 사랑은 인간에겐 가장 일상적인 삶인 것이다. 바로 그렇기에 인의로서의 사랑을 한다면 그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이 더 커지고 더 넓어진다면 세계에는 그만큼 평화의 공간이 늘어날 것이다. 공자가 오늘날 한국에 산다면, 그도 대지진의 고통을 당한 일본 사람들을 위로하고 뭔가 도움의 손길을 보탰으리라.

 

 

사람답게 살기와 나답게 살기

 

이제 사람답게 살기가 내가 하기 너무 어려운 숙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사람답게 살기란 자칫 나를 돌보지 않는, 내가 없는 삶이라 오해할 수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나답게 살기와 사람답게 살기가 부딪치는 경우도 있지만 꼭 그렇게 쨍그랑 소리를 내지만은 않는다. 강요나 분위기에 못 이겨서 ‘내’가 나보다 다른 것을 우선적으로 돌보게 한다면 분명 문제가 된다. 하지만 ‘내’가 자유롭게 선택해서 내 삶의 탄탄한 기반 하에 다른 사람을 위해서 뭔가를 할 수 있다면 이 경우 나답게 살기가 사람답게 살기랑 모순되지 않는 것이다.

공자는 일찍이 “도(道)가 있다고 사람이 저절로 큰 사람으로 거듭나지 않는다. 사람이 도를 실천하면서 자신 안에 갇히지 않고 드넓은 세계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도를 사람답게 살기로 바꿔서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는 이제 누군가 사람답게 살아야 될 듯한 묘한 분위기가 아니라 내가 생각하기에 정말 좋아서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가꾸도록 해야겠다. 그렇게 된다면 ‘나’는 먹고 사는 것을 걱정하는 생활인이면서도 그런 이해를 조금 벗어나서 생각하는 지구인이 될 것이다. 생활인과 지구인이 ‘나’안에서 잘 어울리는 것이 바로 공자 시대나 현대에서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이 될 것이다.

 
<대순회보> 118호 

 

필자소개
 서울대학교에서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을 배웠고 대학원에서 동양철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유학·동양학부의 교수로 있다. 한국철학회 등 여러 학회의 편집과 연구 분야의 위원과 위원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사람다움이란 무엇인가』 『공자씨의 유쾌한 논어』 『제자백가의 다양한 철학흐름』 『동중서 중화주의 개막』 『동양철학의 유혹』 『사람다움의 발견』 『논어의 숲, 공자의 그늘』 『중용: 극단의 시대를 넘어 균형의 시대로』 『어느 철학자의 행복한 고생학』 『한비자』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백호통의』 『유학, 우리 삶의 철학』 『세상을 삼킨 천자문』 『공자신화』 『춘추』 『동아시아 미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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