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의 길’로서의 유대교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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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규태 작성일2017.02.20 조회3,040회 댓글0건본문
글 박규태(한양대학교 교수, 철학박사)
▲ 2천년 전 헤롯왕 시절에 재건된 유대교 성전 중 아직도 남아 있는 서쪽벽의 모습
우리는 홀로코스트라든가 유대인의 처세술에 관한 정보에는 비교적 익숙해져 있을지 몰라도,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유대교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우리나라는 현재 이스라엘과 대사급의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이태원 미8군 영내에 유대교 회당이 하나 있고 또 근래 한남동에 국제적 유대인 공동체인 샤바드 한국지부(Chabad Jewish Community of Korea)가 개설된 정도이고 한국인 유대교 신자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유대교란 무엇인가? 유대 공동체의 지도자이자 교사인 랍비(랍비는 성직자가 아니다. 유대교에는 성직계급이 없다.)들은 유대교를 정의하려 한 적이 없다. 따라서 당연히 히브리어에는 유대교에 해당되는 용어가 없다.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유대교(Judaism)’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유대인(Jew)의 종교’를 지칭하는 현대적 개념이다. 그러나 현대 세속사회에서는 모든 유대인이 다 유대교 신자인 것은 아니므로 다른 방식의 정의가 필요하다. 예컨대 신앙과 의례의 복합체계로 유대교를 정의 내린다면, 그것은 한마디로 ‘토라의 길’이라 칭해질 만하다.
유대교에서 토라(Torah)라는 용어는 실로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가령 그것은 ‘야훼 하느님의 계시’를 뜻한다. 나아가 그것은 계명 혹은 율법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율법으로서의 토라는 통상 협의로는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만을 의미하지만, 광의로는 히브리성서(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구약) 전체, 미쉬나, 예루살렘 탈무드, 바빌로니아 탈무드, 미드라쉬 문헌들, 그리고 히브리성서와 탈무드에 대한 방대한 주석들 및 그밖에 유대신비주의 문헌과 윤리적, 철학적 제문헌을 포함한 모든 유대 문헌전승을 지칭하기도 한다. 이 뿐만 아니라 토라는 유대인들에게 ‘지혜’와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여지는가 하면, 중세 유대교 신비주의 전통인 카발리즘에서는 심지어 토라와 야훼 하느님을 동일시하기까지 한다.
이와 같은 다양한 이해와 더불어 토라는 설화적 인물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시대로부터 유대교의 실질적 창시자라 할 수 있는 모세의 시대를 거쳐 2천여 년 동안의 ‘디아스포라’ 유랑시대 동안 전통적인 유대인들에게 삶의 중심적인 권위로 기능해왔다. 오늘날까지도 토라는 유대적 삶의 최고 이상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토라는 유대교 신앙과 관행의 총칭이라 할 수 있겠다.
‘토라의 길’로서의 유대교는 다음과 같은 기본적 특징을 보여준다. 첫째, 유대교는 오직 야훼 하느님만을 창조와 도덕 그리고 정의의 유일한 원천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윤리적 유일신관의 종교라 할 수 있다. 둘째, 유대교는 유대인 특유의 선민사상과 계약사상을 배경으로 집단적 역사의식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유대교의 야훼 하느님은 인간의 역사 특히 이스라엘 공동체의 운명에 인격적으로 직접 개입하고 활동하는 신으로 묘사되고 있다. 셋째, 유대교는 대체로 형이상학적이라기보다는 현세지향적이며 행위를 강조하는 종교라 할 수 있다. 토라의 준수를 제1강령으로 삼아온 유대교는 내세보다는 지상에서의 ‘거룩한 삶’의 구현을 가장 중요한 종교적 목표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 유대교의 형성과정
그렇다면 이와 같은 유대교는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유대 종교사는 시대별로 크게 초기유대교, 헬레니즘시대, 랍비적 유대교, 중세유대교, 현대유대교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때 각 시대구분이 명확히 구획되기도 힘들뿐더러, 유대교의 역사는 초기의 성서시대를 제외하고는 2천여 년에 걸친 유랑의 역사인 까닭에 지리적으로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어 각기 상이한 길을 걸어왔으므로 시대적, 통사적인 구분이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여기서는 먼저 초기 유대교의 성서시대부터 간단히 개략해 보기로 하겠다.
족장시대 : 유대인들은 오늘날까지도 그들의 신앙고백에서 “제 선조는 떠돌며 사는 아랍인이었습니다”(신명기 26:5)라고 말하면서 아브라함이 그들의 조상이며 그들이 믿는 유일신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라고 확인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과연 실재했던 역사적 인물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에 의견이 분분하다. 하여간 여기서는 히브리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족장설화에 의지하여 모세 이전부터 존재했다고 여겨지는 유대교 특유의 계약관념에 주목하면서 그 의의를 살펴보기로 하자.
히브리성서에 의하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족장시대에는 아직 ‘야훼’라는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았다. 족장들은 자기네 부족의 수호신을 ‘엘 샤다이’라고 불렀다. 모세가 처음으로 야훼라는 이름을 소개하기 전에 아브라함 부족은 이 엘 샤다이에게 유일신의 의미를 부여한 듯싶다. 이와 같은 유일신관은 기본적으로 아브라함과 엘 샤다이 사이에 이루어진 계약에 기초하고 있다.
“내가 너와 계약을 맺는다. 너는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리라… 나는 너와 네 후손의 하느님이 되고 너와 대대로 네 뒤를 이을 후손들과 나 사이에 나의 계약을 세워 이를 영원한 계약으로 삼으리라. 네가 몸 붙여 살고 있는 가나안 온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준다.”(창세기 17:4-8)
아브라함 부족과 맺어진 이 계약이야말로 무엇보다 유대교의 근간에 흐르는 선민의식의 근거가 되었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는 이런 선택의 가시적인 표징으로 ‘할례’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족장시대에 할례로 상징되었던 계약관념은 이후 시나이산에서 모세와 야훼 사이에 이루어진 계약으로 발전되면서 다음과 같은 의의를 내포하게 되었다. 첫째, 유대교의 계약관념은 신과의 계약 당사자인 인간이 존귀하다고 하는 사유를 밑에 깔고 있다. 둘째, 그 계약에는 신에 대한 인간측의 절대적인 순종과 충성이 전제되어 있다. 셋째, 계약은 신이 인간의 역사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여 궁극적으로 신의 뜻을 실현시킨다고 하는 특이한 역사의식과 연관지어진다. 즉 야훼가 아브라함 부족을 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여 그들에게 이른바 ‘약속의 땅’ 가나안을 줄 것이며,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자신의 영광을 모든 민족들에게 나타내 보일 거라고 믿어졌던 것이다.
모세시대 : 야곱의 아들인 요셉 설화에 의하면, 야곱 부족은 이집트의 고센 지방으로 이동하여 거기서 오랜 동안 번성한 듯싶다. 그러나 요셉을 모르는 새 파라오의 통치하에서 히브리인들은 이집트인의 노예가 되었고, 날로 불어나는 히브리인들에게 위협을 느낀 파라오는 새로 태어나는 히브리 남아는 모두 죽이라는 포고령을 내렸다고 나온다. 레위 지파의 여자에게서 모세가 태어난 것이 바로 이때였다. 죽음을 피하여 나일강 갈대숲에 버려진 모세는 파라오의 딸에게 발견되어 그녀의 보호 아래 왕궁에서 성장한다. 성인이 된 모세는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게 되면서 같은 동족이 당하는 수모를 보고는 이집트인을 죽인 후 동쪽으로 홍해를 건너 미디안 땅으로 도주한다. 거기서 이드로의 양떼를 치며 지내던 어느 날 그는 호렙산(시나이산) 가시나무 떨기의 불꽃 사이에서 신의 음성을 듣게 된다. 바로 이때 유대교의 역사에서 야훼라는 이름이 비로소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다.
“나는 야훼다.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신으로 나를 드러낸 일은 있지만 야훼라는 이름으로 나를 알린 적은 없었다.”(출애굽기 6:2-3)
모세는 이 야훼의 명령에 따라 마침내 노예로 부림당하던 히브리인들을 이집트로부터 데리고 나오는 데에 성공한다. 이를 출애굽 사건이라고 부른다. 이후 히브리인들은 야훼가 약속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까지 시나이반도 광야에서 유대교 역사상 가장 의미있다고 말해지는 또 하나의 사건을 체험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전체가 야훼가 계약을 맺고 토라 즉 계명(십계명)을 받은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은 전술한 유대교의 계약관념에 있어 중요한 전환을 뜻한다. 즉 아브라함이 엘 샤다이와 맺은 계약은 개인 혹은 가족과의 계약이었던 반면에, 시나이산의 계약은 모세 개인이 아닌 공동체 전체가 계약 당사자로 지명되면서 향후 이스라엘이 계약의 백성으로 말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와 같은 모세 시대로부터 유대교의 시작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출애굽을 전후하여 모세에 의해 계약사상과 선민의식이 정착되었다는 점, 그리고 다분히 다신교적이었던 종교신앙 내용을 수정함으로써 이스라엘에게는 오직 이스라엘의 역사와 삶을 지배하는 유일신만이 존재한다는 기본관념을 더욱 강화시켰다는 점에서 모세의 중요한 의의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은 무엇보다도 유대교의 계약사상과 유일신관이 모세의 율법 즉 토라에 의해 그 토대를 확보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사사시대(기원전 1200~1020년) : 40여 년간 시나이반도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모세가 모압땅에서 죽은 후 여호수아가 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가나안 부족과의 첫 번째 전투에서 승리하여 여리고성을 탈취함으로써 가나안 진입에 성공한다. 이후에 전개된 가나안 정복기간 중에 이스라엘 12지파는 실로에 계약궤를 안치하고 야훼 신앙을 중심으로 연방제 형태의 부족공동체를 구성했다. 이때의 지도자를 히브리성서에서는 ‘사사’라고 부른다. 기드온이나 삼손과 같은 사사들을 중심으로 뭉친 이스라엘은 마침내 가나안 땅을 점령할 수 있었다.
왕국시대(기원전 1020~586년) : 기원전 11세기경 블레셋족(팔레스타인이라는 명칭의 기원이 된 족속 이름. 그러나 현재의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혈연적 관계는 전혀 없다)은 이스라엘에게 가장 큰 군사적 위협대상이었다. 히브리성서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이 무렵 아펙 전투에서 블레셋에게 대패하여 계약궤를 탈취당한 적도 있었다. 그러자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더욱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로 적에 맞서야 한다는 요구가 강하게 일어났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이스라엘도 주변 민족들처럼 왕정을 채택하게 되었으며, 사울왕과 다윗왕에 이어 예루살렘 성전을 완공시킨 솔로몬왕 치세의 전성기를 거친 후 기원전 931년에 왕국은 사마리아를 수도로 하는 북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남유다로 양분된다. 이 중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 앗시리아의 사르곤 2세에 의해, 그리고 남유다는 기원전 586년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했다. 이로써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수많은 유대인들이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 바빌로니아 포로기는 유대교의 역사에서 결코 어두운 암흑기만은 아니었다. 왕국시대로부터 포로기 동안 활동했던 예언자들의 사상이 유대교 정신을 이해하는 데에 거의 절대적인 중요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나단, 엘리야, 엘리사 등의 전기 예언자(그들의 이름으로 된 예언서가 전해지지 않는 경우) 및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 제2이사야 등 후기 예언자(그들의 이름으로 된 예언서가 히브리 성서 안에 포함된 경우)들은 야훼의 대변자로서 신탁을 선포하며 신권과 왕권을 중재했고 고대 계약전승을 전달하고자 애썼다. 나아가 예언자들은 계약에 새롭고 급진적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역사란 야훼 하느님의 도덕법칙에 의해 움직이며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승리와 인류의 구속을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적극적인 사명의식을 주창했다.
한편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은 유대 지역을 이집트 견제를 위한 완충지로 삼기 위해 기원전 538년 유대인 포로들의 본국귀환을 허락했고 마침내 기원전 515년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포로기 당시 유다 땅에 남아있던 유대인들은 가나안 종족들과의 통혼이라든가 가나안 종교의식에 익숙해져 버려 야훼 신앙의 순수성을 상실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을 타개한 예언자가 바로 에즈라였다. 그는 기원전 444년에 종교적 순수성을 잃어버린 유대인들에게 율법서(레위기)를 읽어주며 율법 조항들을 지킬 것을 맹세시킴으로써, 토라의 엄격한 준수를 통해 민족적 동질성의 확립을 가능케 했다. 여기서 나아가 대사제-사제-레위인-율법학자의 서열로 구성된 사제제도의 형성, 후술할 페사크, 샤부오트, 수코트, 로쉬하샤나, 욤키푸르 등 유대 계절축제의 틀 확립, 구전 전승의 문헌화 작업을 통한 히브리성서의 틀 확립 등이 에즈라의 개혁을 계기로 가능했다는 점에서 이 시기를 본격적인 유대교의 시점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
⊙ 유대교의 발전과정
헬레니즘 시대의 유대교 : 기원전 331년 알렉산더 대왕이 팔레스타인을 정복한 이래 유대인은 그리스와 시리아 및 로마에 의해 차례로 지배를 받았다.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권 하에 있었던 이 시기에 유대교에는 사두개파, 에세네파, 바리새파 등의 여러 소종파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 중 주로 귀족적인 사제들로 구성된 사두개파는 성전의례를 중시했으며, 성서해석에 있어서도 철저히 문자적이고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반면 유대교의 제도 보존을 명목으로 로마와 타협하고 당시 국제질서에 편입되는 데에는 가장 앞장설 만큼 개방적이었다. 따라서 유대문화의 헬레니즘화를 적극적으로 권장한 이들도 바로 사두개인들이었다.
이에 비해 에세네파는 헬레니즘 문화나 정치적인 소용돌이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금욕적이고 초세속적인 집단 은둔생활을 강조했다. 이 종파는 대체로 2차 성전파괴 이전의 2세기 동안 존재하다가 70년 이후 쇠퇴했는데, 1947년에 발견된 사해문서에 그 기록이 남아있을 뿐 탈무드 문헌이나 그리스도교의 신약에도 언급되지 않은 종파이다.
이 밖에도 로마 통치기에는 예수를 추종했던 유대=기독교도들, 헤롯의 가문을 지지하여 로마에 대해 호의적이면서도 유대자치정부를 세우고자 했던 헤롯파, 그리고 로마에 대해 적극적인 무장반란을 도모했던 제롯파 등이 있었으나 성전 파괴 이후에는 모두 쇠퇴하고, 그 중 유대=그리스도교도들만이 사도 바울을 중심으로 이방 그리스도교도들과 연결되어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그러자 이제 바리새파라 불리던 종파만이 성전 파괴 이후의 유대교를 이끌어갈 주역으로 남게 되었다. 바리새파는 기원전 2세기경 사두개인들이 당시 유대 최고회의인 산헤드린을 장악한 후 점차 유대 민중들의 삶과 유리된 권력에 밀착하게 되자, 이에 반발하여 이들로부터 분리되어 산헤드린에의 참여를 거부했던 자들 즉 ‘분리주의자’로서 출발했다. 에즈라의 개혁 이후 등장한 ‘토라의 해설자’로서의 율법학자들과 이를 계승한 랍비들이 이 바리새파를 구성하던 주요 계층이었다.
제2차 성전파괴와 히브리 정경 성립 : 자주적인 나라를 되찾고자 했던 유대 민중의 잠재적인 열망은 로마 지방관 빌라도가 상수도 작업을 위한 재원을 성전 기금에서 각출하고자 했을 때 반로마 폭동으로 터져 나왔다. 66년 네로황제 통치 말기에 이르러 이러한 반로마 독립운동은 대규모의 전쟁으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네로는 베스파시안 장군을 파견하여 68년 무자비하게 이를 진압하였고, 곧 이어 로마의 황제가 된 베스파시안이 디도 장군을 보내 70년 철저하게 예루살렘을 초토화시켰다. 이 사건을 유대사에서는 제2차 성전파괴라고 부른다.
예루살렘 성전이 잿더미 위에 무너져 내렸듯이 유대 정신도 그 밑에 함께 묻혀 버렸다면 오늘날 유대교란 그야말로 성서에나 나오는 죽은 종교가 되어 있을 운명이었다. 그러나 바리새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의 지혜로 말미암아 유대교는 지금까지 어떠한 모진 박해에도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로마와의 은밀한 협상을 통해 야브네라는 작은 성읍과 몇몇 제자들을 안전히 보호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 후 야브네 학파는 예루살렘 대신 유대인의 생활과 사상의 중심지가 되었고 경전 편찬의 주역이 되었다. 즉 90년 경 유대교의 기본 경전을 확정한 유대 랍비회의가 열린 곳이 바로 야브네였다.
이때 확정된 히브리성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곧 이전부터 경전으로 채택된 모세 오경, 토라와 예언자들에 관한 전승인 느비임, 새로 추가 확정된 성문서인 케투빔이 그것이다. 제2차 성전파괴 이후의 유대교의 역사는 이런 히브리성서 정경의 확정을 필두로 하여 이전과는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즉 나라를 잃고 세계 각국으로 분산되어 나가기 시작한 유대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영어권에서 ‘시나고그’라 불리는 유대인들의 공동 집회장소인 회당과 그 회당 공동체의 지도자인 랍비를 구심점으로 하여 유대인으로서의 자기정체성을 보존하고자 했던 것이다.
탈무드 : 히브리성서를 확정지은 바리새 랍비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유대 구전전승들을 모아 편찬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역시 야브네 학파에 의해 이루어진 이 작업은 ‘미쉬나’의 편찬으로 그 첫 번째 결실을 보았다. 여기서 미쉬나라는 명칭은 ‘반복함으로써 배울 수 있는 구전전통’을 뜻하는 말이다. 이 미쉬나는 랍비 유다에 의해 편집된 것으로, 지난 세대의 저명한 바리새 랍비들이 제시했던 율법상의 견해와 논쟁을 중심으로 그들의 다양한 주석들을 상세하게 모아놓은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유대 구전율법인 ‘할라카’와 성문율법 및 구전율법에 대한 주석인 ‘미드라쉬’ 등을 망라함으로써 당시(2세기)의 현실에 적합하도록 토라를 재해석하여 약 4천여 개 항목에 달하는 랍비의 율법조항을 집대성한 것이 곧 미쉬나인 것이다.
이 미쉬나가 성서학교의 교과서로 채택되면서 수세기 동안 유대학자들은 미쉬나를 연구하면서 그것에 대한 또 다른 주석들을 축적해갔다. 이 주석들은 미쉬나를 더욱 완전하게 해준다고 여겨져 ‘게마라’라고 불렸다. 4세기 말엽에 집대성된 게마라는 미쉬나에 기록되지 않은 할라카를 비롯하여 율법 이외의 유대 역사, 종교, 도덕에 관한 랍비들의 가르침과 구전전승의 총칭인 ‘하가다’를 모아 놓은 것이다.
당시의 유대학계는 크게 팔레스타인 지역의 야브네 학파와 바빌론 지역의 바빌로니아 학파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성전 파괴 이후 랍비적 유대교의 초석을 놓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던 야브네 학파는 미쉬나 편찬 이후 그 지적인 권위를 바빌로니아 학파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이는 게마라 편찬 이후 유대교 역사에서 새로운 기원을 여는 업적으로 평가될 만한 ‘탈무드’의 편찬을 바빌로니아 학파가 주도했기 때문이다. 탈무드는 오늘날 정통 유대교의 신앙과 실천의 모든 측면에서 백과사전적인 권위를 행사하고 있는데, 이 용어는 연구 또는 학문이란 뜻을 지닌 히브리어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탈무드란 게마라와 미쉬나를 합쳐 부르는 ‘탈무드 토라’를 줄인 말이다. 바빌로니아 학파에 의해 6세기에 완성된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총 36장으로, 8백여 년에 걸친 2천여 명의 유대 현자들의 가르침을 수록하고 있다. 전형적인 탈무드적 논의는 우선 미쉬나를 인용함으로써 시작되며, 랍비들의 다양한 주석 사례를 제시한 다음 그 의미를 천착하고 이어 새로운 물음을 제기함으로써 특수한 상황에 적용시키는 순서로 진행된다.
이상과 같은 유대교의 경전 편찬작업은 본질적으로 이민족의 박해에 대한 유대인들의 창조적인 대응이자 재생산방식이었다. 이를 통해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은 바리새 랍비들을 중심으로 정신적인 결속을 다짐으로써 결과적으로 유대민족의 동질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슬람과 그리스도교 지배하의 유대교 : 중세 이래 유대공동체는 크게 두 부류, 즉 스페인 지방으로 이주해간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세파르딤’과 폴란드 및 그 인접지역으로 이주해간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아쉬케나짐’으로 구분된다. 이 중 세파르딤은 이슬람 지배하에, 그리고 아쉬케나짐은 그리스도교 세력 밑에 있었다. 이슬람의 경우는 기본적으로 유대교를 계시종교로서 그리고 유대교도들을 ‘책의 사람들’로 인정하면서 대체로 국가에 의해 유대인에 대한 법적 보호를 승인하고 있었다. 이처럼 세파르딤 유대인들이 거의 6백여 년 동안 이슬람세계의 관용 안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삶을 누리면서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던 데 비해, 아쉬케나짐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교의 지배하에서 유럽의 암흑시대를 살고 있었다.
예컨대 가톨릭교회는 1215년 라테란 공의회에서 반유대주의를 제도화했다. 즉 유대인이 그리스도교도와 교제하는 것을 규제하기 위해 유대인으로 하여금 특별한 표식을 붙이도록 했다. 그리하여 라틴계 여러 나라에서는 유대인에게 황색별 모양의 배지를 달게 했고, 독일에서는 독특한 모자를 쓰도록 강요했다. 이처럼 대체로 그리스도교 국가의 통치자들은 이슬람 통치자들이 베풀었던 최소한의 법적 관용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으며, 예수를 십자가에 매단 장본인이 바로 유대인이라는 교회의 뿌리 깊은 편견은 일반대중들에게 반유대주의라는 집단적 무의식과 그로부터 표출된 경멸감이나 증오심을 정당화시켜 주었다. 게다가 일부 셈에 빠른 자들은 이러한 대중의 심리를 이용하여 유대인들이 축적한 재물을 탈취하는 데에 혈안이 되어 날뛰었다. 또한 수차에 걸친 십자군 전쟁은 거의 전 유럽에서 유대인의 운명에 무서운 변화를 가져와, 광적인 십자군 부대가 지나갈 때마다 유대 공동체는 쑥밭이 되곤 했다.
설상가상으로 십자군 전쟁 이후 1348년에서 1350년 기간 중에 대략 유럽인구 삼분의 일 이상의 생명을 앗아간 흑사병은 유대인을 최악의 곤경에 빠뜨렸다. 유대인이 우물에 독을 쳐서 역병이 발생했다는 터무니없는 소문이 퍼지면서 흥분한 군중들에 의해 곳곳에서 유대인에 대한 대규모적인 테러와 학살극이 연출되었다. 이는 곧 영국(1290년), 프랑스(1306년, 1311년, 1394년), 독일(14세기), 러시아(15세기말) 등의 유대인 추방령으로 이어졌다. 한편 그리스도교화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유대인들도 더 이상 이전과 같은 관용을 기대할 수 없게 되어 추방당하는 운명에 처해지게 되었다.
게토와 홀로코스트 : 박해와 추방의 역사 속에서 유대인들은 16세기 이후 차츰 ‘게토’라 불리는 격리된 지역에서 살아야만 했다. 16세기 무렵 서유럽의 모든 유대인은 이런 게토에 수용되어 자치정부와 문화적 자율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자치와 자율성은 어디까지나 게토 내에 한정된 것이었고,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게토 밖으로의 외출은 철저히 통제되었다. 그러나 마침내 이런 게토로부터 해방되는 날이 왔다. 그것은 인간 이성의 힘과 진보 그리고 자유와 평등을 외친 18세기 유럽 계몽주의 정신에 의한 것이었다. 가령 1789년 프랑스 혁명을 기점으로 하여 먼저 프랑스의 유대인이 게토로부터 해방되어 시민권을 획득했고(1791년), 이어서 나폴레옹의 등장과 더불어 이탈리아, 독일,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등에서도 게토의 벽이 허물어져 내렸다.
그러나 유대인의 시련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아니, 가장 혹독한 시련이 이들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6백만 명이 조직적으로 학살당한 홀로코스트가 그것이다. 유대교의 현대사에서 핵심적인 세 가지 사건으로서, 18,9세기 게토로부터의 정치적 해방, 20세기 나치정권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홀로코스트), 그리고 1948년 이스라엘 정부 수립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중 홀로코스트가 유대교의 전체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이고 결정적인 전환점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 홀로코스트라는 이해하기 힘든 사건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은 무척이나 다양하다. 어떤 이는 과거 유대인들이 겪어온 모든 고난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여전히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로 이해하는 반면, 어떤 이는 아예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죽었다고 절규하기도 한다. 그러나 더 많은 유대인들은 이제 더 이상 도살장에 끌려가는 순한 양처럼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다는 절박한 심경에 동의하는 듯하다. 종말론적 희망에 갇힌 기도만이 아니라 무언가 행동해야 한다는 이들의 자의식은 정치적 시오니즘 운동의 유산에 힘입어 홀로코스트가 남긴 정신적 황폐와 패배주의를 뚫고 급기야 현대의 신화라고 불리는 이스라엘 정부 수립(1948년)을 목도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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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소개
박규태 : 서울대 인문대학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동경대학에서 일본종교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사)한국종교문화연구소 소장을 역임하고 현재 한양대 국제문화대학 일본언어문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일본정신의 풍경’, ‘상대와 절대로서의 일본’, ‘아마테라스에서 모노노케히메까지’, ‘일본을 강하게 만든 문화코드’(공저), ‘일본의 이해’(공저), ‘종교읽기의 자유’(공저), ‘종교 다시 읽기’(공저), ‘세계종교사’(공저) 등 여러 책이 있다.
《대순회보》 1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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