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없는 종교, 힌두교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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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거룡 작성일2017.02.20 조회3,687회 댓글0건본문
글 이거룡 * (선문대학교 통합의학대학원 교수)
인도의 모든 것은 카스트제도 안에 있다. 그 바깥에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과거에 그랬다는 말이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인도 사람들이 ‘자기정체’를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지금도 카스트로 규정되는 자신의 계급이다. “What are you?”, 즉 “당신 정체가 뭐냐?”는 질문을 받을 때, 서양 사람들은 자신의 직업을 말하지만, 인도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속해 있는 카스트 상의 신분을 댄다. 이것은 인도 사람들에게 자기 정체성(identity)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카스트라는 이야기다. 상대방에게 자신의 카스트를 알려줌으로써 자신의 가장 정확한 정체를 전달하는 것이다.
카스트(caste)라는 말은 영어도 아니고 인도어도 아니다. 그것은 ‘단일 혈통의’라는 의미를 지닌 포르투갈어 ‘카스타’(casta)에서 온 말이다. 16세기 경 포르투갈 사람들이 처음 인도로 들어왔을 때, 인도 사람들이 직업과 혈통을 중심으로 끼리끼리 그룹을 이루어 사는 양태를 보고 ‘카스타’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러다가 나중에 영어식으로 표현하여 카스트가 된 것이다. 사성계급을 좀 더 세분한 것을 ‘자티(jati)’라고 하며, 사실 인도 사람들의 삶을 규정하는 것은 자티이다.
바라문, 크샤트리야, 바이샤, 슈드라의 사성제도(四姓制度)를 가리키는 인도어는 따로 있다. ‘바르나’(varna)라는 말인데, 어원적으로 ‘색깔’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에 착안하여 원래 카스트의 구분이 피부색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다시 말하여 흰 피부의 정복민(아리아인)과 검은 피부의 피정복민(토착민) 사이의 구분이 카스트제도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카스트제도의 기원에 대한 한 설명일 뿐이다. 카스트제도의 기원에 대해서는 한 마디로 단정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카스트제도는 수세기를 거치면서 다수 대중의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하여 형성된, 지금도 형성 도상에 있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1200년 무렵의 『리그베다』에 이미 카스트제도의 기원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이에 따르면, 태초에 라는 원인(原人)이 있었는데, 스스로 존재하는 자였다. 그는 깊은 명상 뒤에 인간을 창조하기로 작정하고 자신을 제물로 제사를 지냈다. 그 결과로 그의 머리에서 바라문이 나오고 두 팔에서 크샤트리야가 나왔으며, 배에서는 바이샤가, 그리고 두 발에서는 슈드라가 나왔다. 이 신화를 토대로 본다면, 카스트제도는 원래 사회적 기능상의 분류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하여, 카스트제도는 사회 각 구성원들의 역할분담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사실 공동 직업은 ‘공동 기원’ 또는 ‘혈통’과 함께 카스트제도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이다. 예를 들어, ‘방기’자티는 거리의 쓰레기를 치우며, ‘도비’자티는 세탁하는 일에 종사한다.
지금 인도에서 통용되는 카스트제도는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는 다소 다르다. 대체로 말하여, 바라문·크샤트리야·바이샤는 ‘두 번 태어난 자’(再生族, dvija)라 하여 하나의 범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여기에는 엄격한 구분이 적용되지 않으며, 다만 상대적인 차이가 인정될 뿐이다. 이들은 영적으로 거듭 태어났기 때문에 현생에서 해탈 가능한 사람들로 간주된다. 이에 비하여 슈드라 계급은 위의 세 계급과 완전히 다른 부류로 이해되며, 현생에서는 해탈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이다. 또한 우리는 흔히 슈드라와 아웃카스트(outcaste)를 동일한 부류로 혼동하는데, 인도에서 이 둘은 전혀 다르게 취급된다. 슈드라는 비록 천민이지만 그래도 카스트를 가진 사람들이다. 이에 비하여 아웃카스트는 아예 카스트조차도 없는 천민이다. 이들을 가리키는 인도말이 없다는 것은, 이들은 사람도 아니라는 뜻이다.
인도 사람들의 실생활에서 카스트제도가 표면적으로 잘 드러나는 부분은 결혼이다. 카스트 간 결혼은 엄격히 금지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카스트제도는 처음부터 혈통의 순수성을 보존한다는 측면이 강하다. 카스트제도에는 스스로 ‘고결한 민족’이라고 자부했던 아리아인들이 미개한 토착민들과 피를 섞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는 말이다. 대개 결혼은 동일한 자티 안의 사람들끼리 이루어진다. 같은 바라문계급이라도 그 안의 세부 계급인 자티가 동일해야 결혼할 수 있다. 우리가 동성동본의 결혼을 금하는 것처럼, 인도 사람들도 아주 가까운 사람끼리는 결혼하지 않는다. 자티보다 더 세분된 구분을 ‘고트라’(gotra)라고 하는데, 같은 고트라에 속한 사람들끼리의 결혼은 피한다. 같은 자티에 속해있는 사람들 중에서, 다른 고트라에 속한 사람들과 결혼이 이루어진다. 특히 상층계급의 여자가 하층계급의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터부시한다. 그 반대의 경우는 그래도 관대한 편이다. 이런 점에서 바라문 여자와 슈드라 남자의 결혼은 최악이며, 이 둘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짠달라’라는 계급의 최하층 천민으로 떨어진다.
인도헌법으로 본다면 카스트제도는 위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카스트제도가 인도 사람들의 삶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것은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다. 85% 이상의 인도 사람들이 믿고 있는 힌두교는 곧 카스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힌두교를 떠받치고 있는 두 기둥이 업과 윤회라면, 카스트제도를 떠받치고 있는 두 기둥 역시 업과 윤회이기 때문이다. 업과 윤회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한, 카스트제도는 요지부동이다. 누구는 전생의 업이 좋기 때문에 훌륭한 가문의 바라문으로 태어난 것이고 또 누구는 전생의 나쁜 업 때문에 슈드라로 태어나 길거리에서 똥을 치운다는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한, 카스트제도는 유지될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지극히 비현실적이고 불평등한 것으로 보이는 카스트제도지만, 업에 대한 믿음이 철저한 인도 사람들에게 카스트제도는 지극히 평등하다. 여기서 평등이란 ‘법 앞에 평등’이나 ‘신 앞에 평등’이 아니다. 그것은 ‘업(業) 앞에 평등’이다. 각자 전생의 업이 다르기 때문에 현생에 각기 다른 처지와 신분으로 태어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카스트제도는 ‘불평등의 평등’이라는 논리 위에 서 있다.
5. 깨달음에 이르는 길, 요가
넓은 의미에서 요가(yoga)는 의미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해탈 또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요가라고 한다. 해탈은 업(業)을 끊고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요가다. 요가라는 말의 어원을 따지자면, 이 말은 원래 ‘결합하다’, ‘멍에를 매다’라는 의미의 범어(梵語) 동사어근 ‘유즈’(yuj)에서 온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요가는 몸과 마음을 결합하여 하나 되게 하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몸과 마음이 하나 된 개체가 궁극적 실재와 하나 되는 것이다.
하나가 된다는 것, 즉 합일은 완성이며 자유이다. 상호 유기적인 관계에 있어야 할 두 부분이 따로 노는 것, 그것은 갈등이며 구속이다. 몸과 마음이 따로 놀지 않을 때, 하나로 결합되어 합일될 때 자유가 있으며, 자유는 기쁨이다. 해탈은 다른 말로 자유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유는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자유라는 건 늘 피 냄새를 풍기는, 인내를 요구하는 구석이 있다. 요가도 마찬가지다. 요가를 통한 해탈 혹은 자유는 그냥 이론으로 이해하는 차원에서 얻어지지 않는다. 오랜 기간의 힘든 수련과정이 필요한 것도 이런 이유다.
우파니샤드에서는 우리의 몸을 마음에 잡아매고 궁극적으로는 절대자와 합일하여 완전한 자유에 이르는 과정을 마차로 목적지까지 노정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마차의 주인은 아트만, 즉 우리의 이다. 마차는 우리의 몸이며, 마차를 몰고 가는 마부는 우리의 지성이다. 고삐는 우리의 의근(意根)에 해당하며, 말은 우리의 감관 혹은 욕망이라 할 수 있다. 길은 감각의 대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요가는 몸(마차) 안에 있는 우리의 자아가 지성(마부)으로 하여금 의근(고삐)을 잘 조절하여 여러 말(욕망)들이 엉뚱한 샛길로 빠지지 않고 힘을 모아서 한 방향으로 달리게 하는 수행법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우선 짚고 넘어갈 것은, 우리의 욕망이 말에 비유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요가라는 것이 결코 인간의 욕망을 꺾어버리거나 죽이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마차를 타고 목적지를 향해 가고자 할 때, 만일 말을 죽여버리면 어떻게 될까, 마차는 움직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욕망은 해탈이라는 목적지에 이를 수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에너지의 원천이다. 그것은 제어되고 한 곳으로 집중될 필요가 있을 뿐, 결코 부정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을 긍정적인 입장에서 접근하는 것은 인도종교의 가장 특징적인 측면 가운데 하나이며, 이 점에서 힌두교는 불교와 갈라진다. 아무튼 우파니샤드의 이 비유는 요가의 정곡을 찌르는 면이 있다.
인도에서 요가의 역사는 길다. 심지어 기원전 3000년경의 인더스 문명에서 출토되는 테라코타에서도 요가 자세를 취한 수행자를 볼 수 있을 정도이다. 적어도 5천년 이상 되는 장구한 역사를 통하여 힌두교의 각 종파는 각기 제 나름대로 다양한 요가 전통을 발전시켜왔다. 따라서 수많은 형태의 요가가 있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신체수련 중심의 하타(hatha)요가뿐만 아니라, 인도에서는 라자(raja)요가, 만트라(mantra)요가, 라야(raya)요가, 박티(bhakti)요가, 카르마(karma)요가, 갸나요가 등 다양한 종류의 요가가 행해지고 있다.
그러던 중에 기원전 2세기경의 인물로 알려지는 파탄잘리라는 사람이 요가를 일목요연한 체계로 정리하고 라는 문헌을 남겼다. 이 책은 이미 오래 전에 우리말로 번역되어 소개된 적이 있다. 인도의 요가에 대한 여러 종류의 책들이 나와 있지만, 『요가수트라』야말로 요가에 대한 가장 정통적이고 기본적인 안내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가수트라』에서 요가는 ‘심작용(心作用)의 지멸(止滅)’로 정의된다. 분주하게 대상을 옮겨 다니는 우리의 마음이 한 곳에 집중되고 마침내는 전혀 아무런 작용도 없는 단계, 그것이 요가이며, 그곳에 이르게 하는 방법 또한 요가라고 했다.
요가는 다리를 꼬고 앉는 게 전부가 아니다.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에서는 요가 수행의 8단계가 언급된다. 우선 첫 번째 단계로 윤리적인 준비단계[禁戒]가 요구된다. 윤리적으로 되먹지 못한 사람은 요가를 닦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우리가 생활 속에서 금해야할 다섯 가지, 즉 살생하지 말 것, 거짓말하지 말 것, 남의 것을 훔치지 말 것, 음란에 빠지지 말 것, 음주를 금할 것 등이 강조된다.
요가의 두 번째 단계는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 신에게 헌신 등이 적극적으로 권장되는 단계[勸戒]이다. 이 단계 역시 윤리적인 준비단계라 할 수 있지만, 첫 번째 단계가 주로 금지에 중점을 두고 있다면 두 번째 단계는 주로 권장사항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요가 수행자로서 적극적으로 행해야 하는 덕목들이다. 물론 요가는 윤리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결국에는 윤리의 틀을 깨고 그 너머로 나아가는 것이지만, 그런 의미에서 초(超)윤리적이라 할 수 있지만, 초윤리는 결코 윤리를 무시하라는 게 아니다. 윤리적인 단계를 딛고 넘어서야 한다.
세 번째 단계는 어떤 요가 자세를 취할 것인가를 익히는 좌법(坐法)의 단계이다. 일반적인 의미의 요가는 이 단계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본다. 우리가 요가하면 흔히 결가부좌를 틀고 앉은 수행자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요가 경전들에는 수많은 좌법들이 소개된다. 심지어 어떤 경전에서는 원래 8만 4천 가지의 좌법이 있었는데 오늘날에는 84가지 정도가 전해질 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파탄잘리는 이상적인 요가의 자세로 적합할 수 있는 기준으로 두 가지를 들고 있다. 우선 요가 자세는 편안해야 하며, 또한 오래 지속될 수 있어야 한다. 이 기준에 부합되는 가장 대표적인 자세가 바로 결가부좌이다.
네 번째 단계는 호흡조절[調息]이다. 이 단계는 앞의 좌법과 함께 하타요가(hatha -yoga)에서 가장 핵심을 이루는 부분이다. 요가 수행자가 윤리적인 준비를 하고 좌법을 익히는 것은 결국 우리의 마음을 잠잠하게 하기 위한 것인데, 호흡조절이야말로 마음을 가라앉히는 핵심 중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호흡은 마음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마음이 급해지면 저절로 숨이 거칠어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반대로 급해진 마음을 진정시키려할 때, 요가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심호흡을 한다. 숨을 깊이 들이쉬어 아랫배까지 밀어 넣었다가 천천히 뱉으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진정된다.
이와 같이 호흡은 마음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으므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하여 호흡을 연구하고 제어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호흡법을 익히는 것도 무척 긴 시간을 요하는 어려운 과정이다. 우리는 대개 요가에서 가르치는 호흡법과 정반대의 호흡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숨을 들이쉴 때는 배가 들어가고 숨을 내쉴 때는 오히려 배가 나오는 것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들숨과 날숨만 있을 뿐, 멎는 숨이 거의 없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요가의 다섯 번째 단계는 수행자가 자신의 감관을 제어하는 단계[制感]이다. 앞에서 ‘마차의 비유’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의 감관 혹은 욕망은 말과 같다. 길이든 아니든 갈 수만 있다면 어디든지 내달리는 것이 말이다. 우리의 감관이라는 것도 이와 같다. 대상이 있으면 곧장 쫓아간다. 늘 바깥으로 향해 있는 것이 감관이다. 제감은 이와 같이 바깥으로만 내닫는 감관을 안으로 끌어들이는 과정이다. 마치 거북이가 사지를 두꺼운 갑 속으로 끌어들이듯이, 바깥을 지향하는 감관들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준비 과정이 끝나면, 다음 단계부터는 수행의 중점이 정신적인 영역으로 옮겨간다. 여섯 번째 단계인 집지(執持)는 한정된 심적 영역에 마음을 한정시키는 것이다. 마음은 오관의 배후에 있는 내적 감관이다. 마음이 감관에서 떨어져 있으면, 설사 눈이 보고 있다 해도 보는 것이 아니며, 귀가 듣고 있다 해도 듣는 게 아니다. 마음이 따라가지 않으면 설사 감관이 대상을 향해 있다 해도 인식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보면, 바로 앞 단계에서 감관을 거두어들인다는 것은 결국 우리의 마음이 감관과 분리될 때 완전해진다고 볼 수 있다.
피상적인 표면을 따라 부유하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우리의 마음은 하나의 대상에 머물지 않는다. 마치 나비가 이 꽃 저 꽃을 분주히 옮겨 다니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이런 저런 대상들을 끊임없이 옮겨 다닌다. 집지의 목적은 마음을 지속적으로 한 대상에 집중하도록 하며, 다른 대상으로 옮겨갈 때는 재빨리 원래의 대상으로 되돌려 놓는 것이다. 이동과 방해의 빈도가 낮을수록 집지는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일곱 번째 단계는 정려(靜慮)이다. 범어로는 이 단계를 디야나(dhyana)라고 하는데, 흔히 불교에서 사용되는 선(禪)이라는 말은 바로 디야나에 대한 한역(漢譯)이다. 정려는 우리의 마음이 선택된 한 대상을 향하여 아무런 장애 없이 흐르는 상태를 가리킨다. 마음을 더욱 내면으로 거두어들여 한 대상에만 유지시킴으로써 집지의 단계에서 정려의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요가의 마지막 단계는 삼매(三昧)이다. 이 말도 우리가 생활 속에서 자주 쓰는 말이다. 원래 범어로는 라는 말인데, 한문으로 음역되는 과정에서 삼매가 된 것이다. 『요가수트라』에서는 이 단계를 ‘다만 명상의 대상에만 의식이 있고 마음 자체에는 없는 상태’라고 말하지만, 사실 이 단계는 말로 설명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삼매는 이해의 대상이 되는 지식이 아니라, 깨달아 알아야 하는 언표불가능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요가수트라』에서 말하는 요가의 8단계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요가는 실천이고 체험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가는 책으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반드시 스승이 필요하다. 반드시 일정한 자격을 갖춘 스승의 지도 하에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수행법이다. 요가에서 ‘내면으로의 침잠’은 곧 ‘우주로의 확산’이다.
6. 포기의 철학
베다 이래로 힌두교 전통은 네 가지 단계를 거치는 이상적인 삶의 형태를 강조하고 있다. 첫 단계는 금욕과 학습의 기간(brahmacarya)이다. 아동기를 벗어나는 성인 입문식을 마치고 스승의 지도하에 베다 등의 학문을 익히며, 각 개인이 속한 카스트의 구성원으로서 해야 할 의무를 배운다. 이 기간 중에는 특히 금욕적인 생활이 강조된다. 두 번째 단계는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는 단계(grihastha)다. 남녀가 살을 부대끼며 사랑을 하고 자식을 낳아 대를 잇는 단계다. 욕망은 금지되는 것이 아니라 바른 방향으로 피어날 수 있도록 이끌어진다. 세 번째 단계는 앞의 두 단계를 통하여 이룬 경제적인 기반과 가업을 후손에게 물려주고 숲으로 들어가 명상하는 단계(vanaprastha)다. 아내와 함께 혹은 무리를 이루어서 숲으로 들어가 명상에 전념한다. 마지막 단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운수의 길을 떠난다(sannyasa). 이때는 탁발이 주요 생계수단이다.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세상을 떠도는 산야신(sannyasin, 遊行者)이 된다. 인생의 마지막 단계는 포기에 바쳐진다. 행위도 가족도 사회도 초월하며, 해탈에 대한 집착도 벗어버린다.
이 네 단계를 통하여 이루어야할 인생의 목적은 부의 축적(artha), 의 실현, 의무(dharma)의 실천, 그리고 이다. 종교적인 삶의 목적 가운데 하나로 욕망의 실현이나 부의 축적을 들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가치 있는 행위는 오직 부와 세속의 욕망을 실현한 기반 위에서 가능하다는 통찰이다.
힌두교인이라면 누구나 산야신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 이전에 부를 축적하고 욕망을 실현하는 과정이 있다는 것을 지나치기 쉽다. 세속을 떠나기 전에 우선 이루어야 할 것은 세속에서의 승리다. 가장으로서의 의무를 다한 자만이 숲에서 명상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누구나 산야신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속의 삶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인생의 마지막 단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이런 점에서 힌두교는 철저하게 길의 종교다. 길의 종교여야 한다. 길이 목적일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힌두교는 목적보다는 길 자체에 충실할 때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종교다.
불행하게도, 현금의 힌두교인들에게 산야신은 다만 이상적인 인간상에 지나지 않는다. 무어라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나타난 결과로 볼 때 이들이 산야신으로 길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과정에 충실하지 못한 결과라는 것은 분명하다. 베다의 인도사상은 우선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무의미하다. 당장의 끼니가 걱정인 사람들에게 명상과 요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근자에 들어 인도사상에 대한 관심이 가난한 인도 사람들보다는 오히려 물질의 풍요를 체험한 서구 사람들이라는 것은 이 점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물질의 한계를 본 사람만이 내면으로 관심을 돌릴 수 있다. 그 한계를 직접 체험하지 않는다 해도, 적어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그것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가진 자만이 버릴 수 있다. 구걸하는 거지와 탁발 수행자의 차이도 그것이다. 거지의 구걸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이지만, 산야신의 탁발은 이와 다르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와 육교 위에서 구걸하는 거지의 무소유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물질에 대한 갈급함이 해결되지 않고서는 정신적인 추구는 어렵다. 물론 물질적인 성취가 정신적인 추구의 충분조건일 수는 없다. 물질의 풍요가 오히려 정신의 황폐함으로 이어지기 쉽다는 것을 우리는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필요조건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 없이는 정신적인 추구가 불가능하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힌두교는 가진 자들의 종교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물질문명의 발달은 자유와 초월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가능성을 높여 준다. 물질의 풍요를 걱정할 이유는 없다. 물질의 풍요는 새로운 정신문명의 탄생을 가능케 하는 필요조건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해진 욕망이 포기되지 않는 한, 그것이 체념되지 않는 한, 초월은 없다. 일찍이 니체가 경고한 것처럼, 물질의 풍요가 지니는 의미를 곡해하는 한, 우리는 ‘가축(家畜) 무리의 푸른 목장의 행복’에 만족할 수밖에 없으며, 그 종착지는 인간성 상실이다.
7. 인도 내외에서 힌두교의 현황
힌두교인들은 포교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으며, 포교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개종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자신의 종교를 다른 종교로 바꾼다거나, 다른 사람의 종교를 자신의 종교로 바꾸어야할 이유를 모른다. 마하트마 간디는 “힌두교인은 보다 훌륭한 힌두교인이 되고, 기독교인은 보다 훌륭한 기독교인이 되며 이슬람교인은 보다 훌륭한 이슬람 교인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힌두교인이 이슬람 교인이 될 필요도 없고, 기독교인이 이슬람교인 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각자 자신의 전통 위에서 보다 훌륭한 종교인이 되는 것이 이상적인 신앙이라고 보았다. 알다시피 간디는 힌두교뿐만 아니라, 기독교, 이슬람교, 자이나교, 불교 등 여러 종교 전통들을 섭렵했고, 또한 이 종교들이 지니고 있는 장점을 높이 평가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힌두교인이라고 했다.
이와 같이 힌두교인들이 포교나 개종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것은, 진리에 대한 이들의 독특한 사유방식과 관련을 지닌다. 진리는 하나지만 여기에 이르는 길은 여럿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인도인들의 뿌리 깊은 생각이다. 진리가 유일하다고 해서 여기에 이르는 길조차도 유일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마치 산의 정상은 한 곳이지만,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여럿 있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리그베다』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직 하나뿐인 이, 그를 현자들은 여러 이름으로 부른다.” 진리는 결코 어떤 하나의 종교가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베다시대 이래로 힌두교는 여러 다양한 신들 중의 한 신을 특히 주신(主神)으로 모시는 종파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물론 힌두교의 경우 종파라고 해도 막연한 것이며, 조직화된 교단 또는 교회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다. 힌두교 사원은 인도 각지에 무수히 존재하고 있으나 독립적이며 횡적인 조직은 없다. 그 중 와 시바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힌두교의 주요 종파를 형성하였다. 비슈누종파는 학문적 성격이 강하며, 비교적 사회의 상층부에 속한다. 비슈누종파의 신앙에는 비슈누가 동물이나 인간의 모습으로 지상에 출현한다고 믿는 사상이 크게 발달했다. 비슈누의 10화신 중에서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인 와 크리슈나는 특히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이에 따라 비슈누종파는 라마파와 크리슈나파로 나뉘었다. 비슈누종파에 비하여 시바종파는 주로 사회 하층부에 세력이 있으며, 고행, 주술, 열광적인 제의(祭儀)가 특색이다. 또한 인도에서는 베다 이래로 주요 신들의 배우(配偶) 여신에 대한 숭배가 현저했다. 에게는 사라스바티(Sarasvati, 辯才天), 비슈누에게는 가 배우 여신으로 간주되며, 시바의 배우 여신으로는 칼리 등 많은 이명이 있다. 이들 여신을 라고 하며, 이들을 숭배하는 샥티종파도 있다.
중세 인도에는 이슬람교, 특히 수피즘이 유입되었다. 16세기 무렵부터는 힌두교와 이슬람교가 융합된 종교개혁의 기운이 생성되었으며, 그 결과로 시크교(Sikhism)가 성립되었다. 근대 이후에는 간디, 람 모한 로이(Ram Mohan Roi), 타고르(R. Tagore), 슈리 오로빈도 고슈(Sri Aurobindo Ghosh) 등의 사상가들에 의하여 주도된 반영(反英) 독립운동에서 힌두교가 그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주축이 된 것은 중요하다.
포교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 특징 때문에, 베다시대부터 지금까지 힌두교는 거의 인도 안에서 유지되어 왔다. 근대 이전에 인도 부근의 네팔, 인도네시아 지역에 전파되었으며, 근대에 이르러 인도인들의 이주에 따라 세계 각지로 전파되었다. 현재 힌두교를 국교로 하는 나라는 네팔이다. 인도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나 많은 사람들이 힌두교를 믿는다. 이와 같이 힌두교는 주로 인도 안에서만 유지되어왔지만, 신도 수로 보면 결코 소규모의 종교가 아니며, 심지어 세계의 3대 종교로 일컬어지는 불교보다 신도수가 많다. 인도에만 인구의 80%이상, 즉 8억의 힌두교인들이 있으며, 네팔에 230만 명, 방글라데시에 천 4백만 명, 인도네시아일대에 330만 명의 힌두교인들이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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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소개
이거룡 : 델리대학교 철학과에서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다. 자연치유, 요가명상, 인도철학을 전공하고 있으며 현재 선문대학교에서 통합의학대학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아름다운 파괴』, 『이거룡의 인도사원순례』, 『두려워하면 갇혀버린다』, 『구도자의 나라』, 『전륜성왕 아쇼까』, 『몸 또는 욕망의 사다리 - 인도철학에서 사이버네틱스까지』(공저), 『인문학의 창으로 본 과학』(공저), 『미래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 『고전의 반역』(KBS고전아카데미, 공저), 『달라이라마의 관용』(번역서), 『인도철학사Ⅰ- Ⅳ』(전4권, 번역서) 등 여러 책이 있다
《대순회보》 1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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