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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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영진 작성일2017.02.20 조회3,379회 댓글0건본문
최영진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 교수, 한국 동양철학회 회장, 철학박사)
1. 유교의 성립
유교는 공자(孔子, BC 552~479)가 당시까지 전승되어 온 문화와 사상을 집대성하여 체계화함으로써 성립된 것이다. ‘자기 자신을 수양함[修己]’과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림[治人]’을 목표로 삼고, 중용과 ‘인의예지(仁義禮智)’를 기본적인 덕목으로 삼고 있다. 경전은 『논어(論語)』 ⋅ 『맹자(孟子)』 ⋅ 『대학(大學)』 ⋅ 『중용(中庸)』 등 사서(四書)와 『시경(詩經)』 ⋅ 『서경(書經)』 ⋅ 『역경(易經)』 ⋅ 『예기(禮記)』 ⋅ 『춘추(春秋)』 등 오경(五經)이다.
유교 형성의 연원은 공자 이전으로 소급된다. 이 점은 『중용』의 “공자는 요순(堯舜)을 조종으로 이어받으시고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을 본받으셨다”라는 기록에서도 확인될 수 있다. 요순은 BC 2000년경의 인물로 추정되며, 문왕과 무왕은 BC 1120년경에 성립된 주나라의 군주들이다. 이를 근거로 유교의 도통은 ‘요·순 → 우 → 탕 → 문왕·무왕 → 주공 → 공자 → 맹자’로 이어진다고 보는 것이 전통적 견해이다.
동북아시아에서는 상고대로부터 중원지역 한족(漢族) 중심의 문화와 ‘이(夷)’이라고 불리는 주변 동부지역의 문화가 상호 교섭하면서 발전하여 왔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맹자』에 기록된 “순임금은 동이(東夷)의 사람이다”라는 기록이 주목된다. 순임금은 유교에서 성인으로 받드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논어』의 다음과 같은 기록도 매우 중요한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공자가 구이(九夷) 지역에서 살고 싶어 하셨다. 어떤 사람이 “누추한 곳인데 어떻게 사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공자가 ‘군자가 살고 있는데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논어(論語)』, 「자한(子罕)」)
이 기록은 BC 6세기 경 구이지역에 공자가 ‘군자가 살고 있는 곳’이라고 평가할 만한 문화권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준다. 구이문화권에 한국역사상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이 위치한다.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유교는 상고대로부터 전승되어 온 ‘문화’를 집대성하여 이루어진 것이고 그 ‘문화’는 한족과 주변 구이족과의 교섭과정을 통하여 형성되었다. 그런데 구이문화권의 중심에 고조선이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유교에는 고조선의 문화적 인자(因子)가 내함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유교가 단순히 중국에서 유래된 외래사상이 아니라, 그 형성의 연원이 한민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시사해 주고 있다.
2. 중국 고대 유교사상의 근본 문제
『논어』 「미자(微子)」 편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공자가 길을 가다가 제자인 자로를 시켜 장저(長沮)와 걸익(桀溺)에게 나루터가 어디에 있는지를 묻게 하였다. 이들은 공자가 주유천하 하는 것을 비웃으며 “도도한 물결에 천하가 다 휩쓸려 가는데 그대는 누구와 함께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가⋅”라고 물었다. 자로가 그 말을 전하자 공자는 “새나 짐승과 함께 무리지어 살 수는 없으니 내가 이 사람들과 더불어 살지 않는다면 누구와 함께 살겠는가⋅ 천하에 도가 있다면 내가 세상을 바꾸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안타까워하였다.
권력자들과 갈등을 빚고 은자들의 조롱을 받으면서 공자가 이 세상을 바꾸어 새롭게 만들려고 한 사회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그리고 공자를 비웃는 은자들이 꿈꾸었던 세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공자가 ‘인간은 인간과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간파하였듯이, 우리는 공동체를 구성하고 그 구성원의 일부로서 살아간다. 그러나 각 구성원들의 가치관과 이해관계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욕구와 욕구가 충돌하게 되며 이를 방치할 경우 그 공동체는 와해되고 만다. 그러므로 공동체를 유지하고 구성원들의 역량을 결집하여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지켜야 할 규칙과 리더십이 요구된다. 유교 경전에 나타나는 통치자의 리더십에는 힘으로 피통치자를 복종시키는 ‘이력복인(以力服人)’과, 덕으로 감복시키는 ‘이덕복인(以德服人)’이라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이것은 『논어(論語)』 「위정편(爲政篇)」 의 다음 구절에서 확인 될 수 있다.
법령[法制 ⋅ 禁令]을 가지고 백성들을 이끌며 형벌을 가지고 질서를 잡는다면 민(民)은 이것들을 면하려고만 하지 수치심은 없게 될 것이다. 덕을 가지고 이끌며 예를 가지고 제일하게 한다면 민은 수치심을 갖게 되고 또한 선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 글에서 공자는 사회를 운영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하나는 ‘법(法)과 형(刑)’으로 다스리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덕과 예’로 다스리는 것이다. 법령은 백성들을 강제적으로 규율하는 공동체의 법규이다. 법령을 어기는 공동체의 구성원에게는 폭력적인 형벌이 가해진다. 즉 힘으로 구성원들을 통제하는 것이다. 공자는 이러한 방법으로 사회를 이끌어 갈 경우에 발생하는 가장 큰 문제는 ‘수치심[恥]’을 마비시키는 것이라고 진단한다. 수치심이 마비되면 외적으로 형벌이 두려워 악한 일을 하지는 못하지만 내면적으로 악한 마음이 없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법 ⋅ 형은 마음을 감화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를 유지하고 이끌어 가기 위하여 더욱 강도 높은 법령과 형벌이라는 폭력적 수단을 요구하게 되는 악순환에 빠지고 만다.
그 반대가 되는 방법이 덕과 예로써 다스리는 것이다. 이 방법으로 공동체를 운영할 경우 그 구성원들은 잘못을 범하면 ‘수치심’을 느끼고 선하게 감화된다는 것이 공자의 견해이다. ‘덕’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본래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도덕적 마음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선을 실천하고 불선을 싫어하는 마음[정감]’이다. 그리고 예는 ‘길례(吉禮), 흉례(凶禮), 군례(軍禮), 빈례(賓禮), 가례(嘉禮)’와 같은 오례(五禮)를 가리킨다. 이것은 공동체 내부의 위계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전승되어 온 제도이며, 인륜에 근거한 자율적 행위 규범이다. 덕과 예로써 사회를 이끌어 가면, 그 구성원들이 사회의 규율을 위반할 경우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본래적인 도덕적 정감’이 발동하여 스스로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수치심을 느낄 경우 누가 강제로 시키거나 형벌을 가하지 않아도 자율적으로 질서를 준수하게 된다. 민이 불선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지도자의 덕에 의하여 감발된 것이다. 그러므로 공동체를 이끌어 갈 지도자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을 수양하여 도덕적 인격을 완성해야 한다. 이것이 ‘수기’이다.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춘추전국 시대 제후들은 패권을 독점하려는 야욕을 달성하기 위하여 강력한 부국강병책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이 정책을 추진하는 데에 필요한 자금을 민으로부터 강제적으로 조달하기 위하여 법을 제정하였다. 이 경우 민은 법에 의한 통치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공자는 바로 이 점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국가는 민을 위하여 존재하며 민을 통치의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위민정치사상(爲民政治思想)’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하면, 공자가 추구하는 ‘살기 좋은 사회’는 사회 구성원들이 각각 본래 타고난 도덕적 정감에 의하며 자신들의 욕구를 적절히 통제함으로써 자율적으로 공동체의 질서를 준수하고 공공의 선을 실현시켜 나가는 ‘도덕적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에게 ‘도덕적 정감’이 발동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 선하기 때문이라고 맹자(孟子, BC 371~289)는 주장한다. 이것을 ‘성선설’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성(性)’은 인간이 타고난 성품을 가리킨다. 본성의 선함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의예지(仁義禮智)’ 네 가지 덕목으로 나눌 수 있다. 인은 사랑, 의는 정의, 예는 질서, 지는 지혜의 원리하고 할 수 있다.
맹자는 인간이 누구나 타고나는 도덕정감으로 ‘다른 사람에게 잔인한 짓을 차마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을 들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성선’의 증거라고 주장하였다. 그 구체적인 예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지금 어떤 사람이 갑자기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면 모두 깜짝 놀라 ‘측은지심(惻隱之心, 마음이 아프고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된다. 그것은 안으로 어린아이의 부모와 교제하려는 것이 아니고, 마을 친구들에게 칭찬을 받으려는 것도 아니며, 아이를 구해주지 않았다는 비난을 싫어해서 그러한 것이 아니다.
맹자는 도덕적 정감, 즉 ‘다른 사람에게 잔인한 짓을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 에는 위의 인용문에 나오는 ‘측은지심’과 아울러 ‘수오지심(羞惡之心: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타인의 불의를 싫어하는 마음)’, ‘사양지심(辭讓之心: 타인의 입장을 배려하는 마음)’, ‘시비지심(是非之心: 선악과 시비를 판단할 수 있는 마음)’ 등 네 가지가 있다고 보았다. ‘측은지심’은 인의 단서로서 사랑의 원리가 발현된 정감이며, ‘수오지심’은 의의 단서로서 정의의 원리가 발현된 정감이며, ‘사양지심’은 예의 단서로서 질서의 원리가 발현된 정감이며, ‘시비지심’은 지의 단서로서 지혜의 원리가 발현된 정감이다. 이것을 사단(四端)이라고 한다. 맹자는 이러한 도덕적 정감을 가지고 세상을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맹자는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잔인한 짓을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에 토대를 둔 정치[不忍人之政]’ 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인간이 선한 도덕적 본성, 그리고 이것이 발현된 선한 도덕적 정감을 가지고 태어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천(天), 즉 하늘이 인간에게 선한 본성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맹자는 다음과 같은 시를 인용하여 이 점을 논증하고 있다.
하늘이 뭇 백성을 낳으셨으니 사물이 있으면 법칙이 있는 것이다. 백성들이 항상 변치 않는 것을 잡고 있어서 아름다운 덕을 좋아한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 속성을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나는데, 그것은 바로 ‘아름다운 덕을 좋아함’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아름다움[懿]’이란 선을 위시한 모든 가치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 구절은 인간은 선천적으로 도덕적 가치를 지향하는 속성을 갖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중용』의 다음 구절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늘이 명한 것을 본성이라고 하며, 본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고 하며, 도를 닦는 것을 교라고 한다.
본성은 하늘이 부여하였기 때문에 여기에 근거하여 인간이 마땅히 준수해야 할 도리가 정립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늘이 명한 것이 성이다’라는 명제는 본성과 하늘이 동일한 속성, 즉 절대선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하면, 인간의 본성은 하늘에서 부여받았기 때문에 하늘과 동일한 절대선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발현된 마음이 ‘불인인지심[사단]’이며 이것을 실천하는 정치가 ‘불인인지정’이다. 그러므로 ‘하늘-성-불인인지심[사단]-불인인지정’은 가치론적으로 동일하다. 이것을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은 학설과 대립되는 것이 순자(荀子, BC 314-221)의 ‘성악설’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 그 선은 인위적인 것이다. 사람의 본성은 태어나면서 이익을 좋아하니, 이것을 따르기 때문에 쟁탈이 생겨나고 사양이 없어진다. 태어나면서 미워함이 있으니 이것을 따르기 때문에 잔인한 도적이 생겨나고 충신이 없어진다.…그러므로 반드시 스승과 법의 교화와 예와 의의 인도를 받은 뒤에 사양이 생겨나고 규범과 도리에 맞아 다스려지게 된다.
순자는 인간의 감각적 욕망이나 본능적 욕구를 ‘성’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맹자가 말하는 성이 도덕적 본성을 가리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러므로 성을 그대로 따를 경우 사회적 질서가 혼란에 빠지게 된다고 진단하였다. 그리하여 인간이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선하게 교화하기 위해서는 후천적인 교정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성이란 본시 질박한 바탕이며 ‘인위’는 꾸밈과 예의 융성함이다. 본성이 없으면 ‘인위’를 가할 바가 없고 ‘인위’가 없으면 본성은 스스로 아름다워지지 않는다”라고 하여 ‘아름다움’이라는 가치는 인위적 교정의 소산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후천적 교정의 기제가 바로 ‘스승 ⋅ 법 ⋅ 예 ⋅ 의’라는 외재적 규범이다. 이것은 마치 구부러진 나무를 교정목을 사용하여 곧게 펼 때에 그 ‘곧음’이 나무의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외재적인 교정목에 있는 것과 같다. 예의와 법도의 성립근거에 대해서도 순자는 외재적인 학습에 둔다. 순자에게 있어 선 ⋅ 미 등의 가치는 사회적 규범을 인식하고 실천하여 체화함으로써 획득되는 것이다. 따라서 가치 그 자체는 외재하는 사회적 규범이다.
지금까지 검토한 바와 같이, 고대 유교사상은 공자에 의하여 시작되어 가치의 근거를 내재적으로 파악하는 맹자와 외재적으로 파악하는 순자의 사상체계로 발전되었다.
3. 중국 중세 ⋅ 근세의 유교사상
BC 202년 유방이 한나라를 건국한 뒤, 한무제는 동중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가를 통치하기 위한 교화의 이념으로 유교를 채택하였다. 그 이후 청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유교는 관학(官學)으로 기능하였다. 중국의 중세에 해당하는 한나라부터 당나라까지, 유교는 주로 정치·행정·교육 등 주로 실용적인 분야에서 기능하였다. 그리고 유교경전에 대한 해석학이 발달하였다. 이 시기 사상계는 인도에서 수용된 불교가 주도하고 도가사상이 철학적으로 발전하였으며 유교는 큰 영향력을 갖지 못하였다.
송대에 성리학이 성립되면서 유교가 획기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성리학은 남송의 주자(朱子, 1130~1200)가 북송시대 유학자들의 학설을 종합하여 유교를 새롭게 재구성한 것이다. 주자는 윤리적 성격이 강한 유교에 철학적 근거를 부여하여 불교와 도가철학을 비판하였다. 성리학은 우주의 궁극적 존재인 ‘태극’에 대한 논의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본성과 사회제도의 문제까지 망라되어 있다. 이 학문은 이기론(理氣論)으로 인간과 사회와 자연을 통일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이와 같은 이론체계는 전시대의 유교에서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서구학자들은 이를 ‘신유학(Neoconfucianism)’이라고 부른다.
성리학에서는 세계를 설명하는 방식이 그 이전의 유학과 질적으로 달라진다. 이전의 유학자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를 세계의 전체로 인식하고, 운동의 원인을 현상계 자체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강하였다. 그런데 주자는 세계를 운동하고 변화하는 현상계와, 그 형이상학적 근거가 되는 원리의 세계라는 이중 구조로 파악하였다. 인간의 마음은 사물의 자극을 받지 않을 때는 발동하지 않아서 고요하다가, 자극을 받으면 발동하여 움직이고, 다시 고요해지는 반복 운동을 거듭한다. 자연계도 밤과 낮이 순환하며 더위가 가면 추위가 오고 추위가 가면 더위가 오는 반복 운동이 계속된다. 인간의 마음과 자연은 동일한 패턴으로 변화한다. 주자는 마음의 작용과 천체의 운동을 관찰하고 역법(曆法)에 관한 문헌들을 연구하여 이와 같은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는 필연적인 이유와 근거를 탐색하였다. 그리하여 순환적으로 운동하여 변화하는 현상계를 ‘기(氣)’로, 그 근거를 ‘리(理)’로 규정하였다. 『주역』 「계사전」에 이런 구절이 있다.
“한 번은 음적인 방향으로 운동하고 한 번은 양적인 방향으로 운동해가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
이 구절에 대하여 주자는 “음양이 순환적으로 운동하는 것은 기이며, 그 리가 곧 도이다.”라고 설명하였다. 여기에서 세계는 리와 기의 이중 구조로 파악된다.
리와 기의 개념은 사실(fact)과 가치(value)의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사실의 측면에서 보면 리는 자연과 인간의 마음을 포함하여 모든 사물을 존재하게 하고, 그 존재 양상을 규제하는 형이상학적 근거이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자연계는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다.”고 말하듯이, 리는 사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질서 있게 운동하도록 통제하는 법칙이다. 이것을 ‘시킨다’ 또는 ‘주재한다’라고 표현한다. 기는 사물들을 실질적으로 구성하는 질료이며 운동에너지이다. 즉, 현실 세계를 구성하고 운동 변화하는 모든 것은 기이며, 그 존재 원리와 운동 법칙이 리인 것이다.
가치의 측면에서 보면, 리는 모든 가치의 근거가 되는 절대선이며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당위의 도덕법칙이다. 기는 무수하게 차이가 있는 상대적인 가치를 갖는다. ‘리=절대적 가치, 기=상대적 가치’라고 도식화할 수 있다.
주자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문제는 ‘성선(性善)’의 형이상학적 근거를 확립하는 일이었다. 그는 ‘성은 곧 리이다(性卽理)’라고 주장하였다. 본성은 모든 가치의 근거가 되는 절대선이며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당위의 도덕법칙인 리 자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악한 요소도 타고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주자는 인간의 성을 맹자가 말하는 도덕적 본성인 ‘본연지성(本然之性)’, 순자가 말하는 감각 욕구의 본성인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구분하였다. 본연지성은 ‘리’ 그 자체를 가리키기 때문에 순수하게 선하여 악이 없다[純善無惡]. 그러나 기질지성은 리가 기에 의하여 일정부분 가리어진 성을 가리키기 때문에 선할 수도 있고 선하지 않을 수도 있다[有善有惡]. 그러므로 기질지성을 순화하여 본연지성의 선함을 실현해야 한다. 이것을 ‘수양(修養)’이라고 하는데, 수양공부의 핵심은 마음을 한 곳으로 집중하여 정신을 통일하는 ‘경(敬)’이며, 그 구체적인 방법이 ‘예(禮)’이다. 이것은 맹자적 사유를 중심으로 순자적 사유를 종합한 것이다.
명대에는 왕양명(王陽明, 1472~1528)이 ‘심이 곧 리이다(心卽理)’라고 주장하여 성리학을 비판하고 새로운 이론체계, 곧 심학(心學)를 수립하였다. 그리고 청대에는 실학적 사유가 크게 발전하여 대진(戴震)에 의하여 기철학(氣哲學)이 정립되고 실증적인 고증학이 발달하였다.
4. 한국유학의 전개과정
(1) 조선 전기
중국에서는 주자 이후 성리학은 이론적으로 크게 발전하지 못하였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고려말부터 본격적으로 성리학이 수용되어 조선시대에 획기적인 이론체계가 구축되고 창출되었다.
고려에서부터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된 것은 단순한 역성혁명(易姓革命)이 아니라 ‘문벌귀족사회’에서부터 ‘사대부사회’로, ‘중세사회’에서 ‘근세사회’로 발전한 것이다. 조선 건국의 주체는 사대부들인데, 이들은 주로 공민왕대에 급성장하여 중앙정계에 진출한 관료 겸 학자이다. 이들은 조선이 건국된 이후 정치 ⋅ 행정은 물론 학술과 문화 등 전 영역을 장악하여 유교적 사회를 창출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성리학에는 본래 유교 이외의 사상을 이단으로 배척하는[闢異端] 비판의식이 매우 강하게 내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대부 사회인 조선에서 불교와 도교는 변방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는 유학사상사적 시각에서 볼 때, 3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1단계는 고려말 사대부가 구법파와 신법파로 분화되어 대립하는 시기이다. 이것은 주자학을 수용하여 현실 정치에 적용하는 과정이다. 그 중심인물은 이색(李穡,1328~1396) ⋅ 정몽주(鄭夢周,1337~1392)와 정도전(鄭道傳,1342~1398)이다. 이색은 고려왕조를 유지하면서도 전면적인 개혁이 가능하다고 보았으나 정도전은 왕조가 교체되지 않으면 당대의 모순을 해결할 수 없다고 진단하였다. 2단계는 조선 건국[1392]에서부터 16세기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이전까지이다. 정도전 ⋅ 서경덕(徐敬德, 1489~1546) ⋅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이 대표적 학자이다. 이들에 의하여 불교와 도가철학에 대한 비판이론이 체계적으로 구축되는데, 이것은 조선성리학 정립을 위한 정지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3단계는 퇴계와 고봉, 율곡과 우계의 논변을 통하여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이라는 새로운 이론이 창출되는 시기이다.
주자는 인간의 마음 가운데 ‘성(性)’을 주제로 삼아 그 형이상학적 근거를 확립하는 데 중점을 두었는데, 사단칠정론은 ‘정(情)’을 주제로 삼아 이기론을 가지고 도덕정감의 형이상학적 근거를 구축한 것이다. 이 이론은 중국유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한국의 독자적인 학설로서 성리학을 한 단계 발전시키고 송대의 성리학을 조선의 성리학으로 토착화시키는 기반이 되었다.
퇴계는 “사단은 리가 발현함에 기가 그것을 따르고 칠정은 기가 발동함에 리가 그것을 타고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사단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인간의 도덕적 정감이다. ‘리’ 그 자체인 본연지성은 ‘순선무악’하지만 ‘정감’은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는 상대적 존재이다. 퇴계는 형이상학적 세계뿐만이 아니라 현실세계에서도 순선무악함이 실현될 수 있다는 신념을 논증하기 위해서는 정감의 영역에서도 ‘순선무악’함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제시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정감을 일반적인 보통 정감인 ‘칠정’과 도덕정감인 ‘사단’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사단은 ‘리가 발현된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 말은 사단은 리라는 절대 가치체가 발현된 것이기 때문에 ‘순선무악[절대선]’하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사단은 본연지성과 동일하게 리 그 자체로 규정되어 순선무악한 도덕성을 갖게 된다. 다만 사단은 본성이 현실세계에 발현된 존재이기 때문에 ‘기가 그것을 따른다’라고 덧붙였다. 반면, 율곡은 사단과 칠정은 모두 ‘기가 발동함에 리가 그것을 타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인간의 정감은 칠정 하나이며 사단은 칠정가운에 순선한 부분을 가리킨다고 보았다. 퇴계와 율곡의 사단칠정론은 성리학의 새로운 이론으로서, 조선 후기 유학사상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
(2)조선후기
성리학
1645년 중국에서 명나라가 멸망하면서 청으로 왕조가 교체된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1603년 막부정권이 성립되는 등 동북아시아 지역에 커다란 지각변동이 일어난다. 조선도 이에 상응하는 변화를 겪게 된다. 임진왜란[1592~1596]을 계기로, 조선을 건국하고 정국을 주도해온 훈구파에서부터 성리학의 이념에 보다 충실한 사림파로 정권이 교체되며, 경제적으로도 토지생산성이 높아지면서 사유개념이 확산되었다. 특히 1637년 병자호란으로 조선이 멸망 직전까지 가면서 사회가 극심한 혼란에 휩싸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국가를 다시 만들자’라는 국가재조론(國家再造論)이 대두될 만큼 질적인 사회변동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17세기 이후 조선 후기를 근대사회의 태동기로 규정하는 경우도 있다. 16세기 퇴계와 율곡에 의하여 정립된 조선성리학은 이 시기를 이끌어갈 지도 이념으로 기능하게 된다. 그리고 성리학 이외에 양명학 ⋅ 실학 등 다양한 유학사상이 등장하여 사상계가 다변화된다. 물론 이 시기에도 학계와 정계 등 사회 전반을 주도한 것은 성리학이다. 18세기 학계가 수도권과 지방으로 분열되는 시기와 맞물려 ‘호락논쟁(湖洛論爭)’이라는 대규모 학술논쟁이 발생하는데, 이를 통하여 새로운 성리학 이론이 창출되었다.
‘호(湖)’는 충청지역, ‘낙(洛)’은 서울 지역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호락논쟁’이란 충청지역에 거주하는 학자들과 서울지역에 거주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이라는 의미이다. 조선후기 학계는 퇴계학설을 종지로 하는 영남학파와 율곡의 학통을 계승하여 형성된 기호학파로 구성되었는데 이 논쟁은 기호학파, 그 가운데에서도 주류인 노론 내부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 논쟁의 주제는 ‘마음이 아직 발동하지 않았을 때에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기가 맑고 순수한가, 아니면 청탁이 있는가’ ‘성인의 본심과 범인의 본심은 같은가 다른가’ ‘인간의 본연지성과 금수초목의 본연지성은 같은가 다른가’라는 3가지이다. 낙론은 ‘같음[同]’의 논리를 기반으로 하고 호론은 ‘다름[異]’의 논리를 기반으로 하여 이론을 구축하고 상호 논쟁을 통하여 유교의 심성론을 더욱 정밀하게 발전시켰다. 그 이후 19세기 기호학파에서는 호론과 낙론의 대립적인 학설을 종합하여 새로운 성리학 이론이 창출되었다.
퇴계의 학통을 계승한 영남학파에서는 17세기 후반 이현일(李玄逸,1627~1704)이 율곡의 학설을 비판하고 퇴계의 학설을 변호하여 그 정통성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19세기에 이진상(李震相,1818~1886)은 율곡학파의 종지인 ‘심시기(心是氣, 마음은 기이다)’를 비판하고 ‘심즉리(心卽理, 마음은 리이다)’설을 제창하였는데 이것은 조선성리학에서 이단으로 배척하는 양명학의 핵심이론이기 때문에 영남학파에서도 극렬한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기호학파의 대표적 학자인 전우(田愚,1841~1922)가 이를 비판하고 한주학파에서 이를 재비판하면서 심설논쟁이 야기되었다. 이후 이 논쟁은 조선성리학파 전체로 확산되어 20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지금까지 검토한 바와 같이, 조선성리학은 3차례 집단적이고 지속적인 논쟁을 통하여 형성되고 발전 ⋅ 심화되었다. 16세기의 ‘사단칠정논쟁’, 18세기의 ‘호락논쟁’, 19세기의 ‘심설논쟁’이 그것이다. 이 논쟁들을 통해서 새로운 이론이 창출되어 중국의 주자학과 구별되는 조선성리학이 정립된 것이다. 이와 같은 대규모 논쟁은 중국이나 일본에서 찾아 볼 수 없다.
양명학 ⋅ 실학 ⋅ 서학
조선전기가 성리학 일변도였다면, 조선후기는 성리학파에 속하는 유학자들의 학적 관심분야가 양명학과 실학 그리고 도가철학에까지 확대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조선 중기에 전래된 양명학은 퇴계가 비판한 이후 수면 아래로 잠복되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화되면서 주류에서 소외된 소론 학자 일부가 양명학을 연구하여 ‘한국적 양명학’을 수립하고 학파를 형성하였다. 그 대표적 학자가 정제두(鄭齊斗,1649~1736)이다. 그의 학설은 강화도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하여 한국양명학파를 형성하였다.
조선후기 학계의 최대 성과는 실학의 성립이다. 실학은 ‘허학(虛學)’의 대립 개념으로서 실천적 ⋅ 실용적 ⋅ 실증적인 학문을 말한다. 실학은 조선성리학을 비판적으로 발전시켜 질적으로 새로운 학풍을 형성한 것이다. 그러나 실학이 유교의 도덕 우위적 가치관을 벗어난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점은 대표적인 실학자 가운데 한 명인 홍대용의 다음 주장에서 잘 나타난다.
학문에는 세 가지 등급이 있다. 윤리적인 문제를 연구하는 ‘의리지학(義理之學)’, 나라를 경영하는 데 필요한 학문인 ‘경제지학(經濟之學)’, 진리를 표현하는 ‘사장지학(詞章之學)’이 그것이다. …‘의리’를 버리면 ‘경제’가 이익만을 추구하게 되고 ‘사장’이 외적인 형식에만 치우치게 되니 어찌 학문을 말할 수가 있겠는가. 또한 ‘경제’가 없으면 ‘의리’를 실현할 바가 없고 ‘사장’이 없으면 ‘의리’가 나타날 수 없다. 요컨대 세 가지 가운데 하나라도 버리면 학문을 말할 수가 없는 것이지만 ‘의리’가 그 근본이 아닌가.
그는 ‘의리지학’과 ‘경제지학’과 ‘사장지학’의 균형성을 강조하면서도 윤리 ⋅ 도덕의 문제를 연구하는 ‘의리지학’을 근본으로 보는 것이다.
실학파는 영남학파 계열과 기호학파 계열로 나눌 수 있다.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 영남학파의 남인은 기호학파의 서인으로부터 결정적인 타격을 받고 정계의 주도권을 상실하였다. 그리하여 향촌 근거지인 영남으로 물러난 ‘영남남인’과 경기지역에 자리를 잡은 ‘기호남인’으로 나뉘게 된다. 이 가운데 기호남인은 숙종 초년 남인의 총수였던 허목(許穆,1595~1682)의 제자와 그 계열을 중심으로 학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허목 ⋅ 윤휴(尹⋅,1617~1680) 등 기호남인의 사상은 주자학의 체계로 부터 일정 부분 이탈한 ‘탈주자학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이들의 학맥을 계승한 이익(李瀷,1681~1763)의 성호(星湖)학파에 이르러 실학이 체계를 갖추게 되고 다산학(茶山學)이 성립된다.
18세기 이후 정국을 주도한 세력은 기호학파 가운데 강경론자인 노론, 그중에서도 수도권에 근거지를 둔 낙론계열이었다. 이 계열의 진보적 소장 학자 그룹에 의하여 ‘북학사상(北學思想)’이라는 실학사상이 형성된다. 여기에서 ‘북학’이란 ‘청나라의 문물을 학습함’이라는 의미이다. 북학 운동은 청나라의 선진성을 인정하고 이것을 배워 조선사회를 개혁하자는 것이다. 그 대표적 학자가 홍대용(洪大容,1731~1783) ⋅ 박지원(朴趾源,1737~1805) ⋅ 박제가(朴齊家,1750~1805) 등이다.
17세기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지식인들은 청을 오랑캐, 곧 ‘야만’으로 규정하고 청나라를 정벌하여[北伐] 복수설치(復讐雪恥)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중국이 야만족의 지배를 받고 있으므로 조선만이 중화문명을 계승하고 있다는 ‘조선중화주의’가 나타난다. ‘북벌대의(北伐大義)’는 노론의 핵심적 이념이었다. 이 노론에 속하는 낙론계열 학자들이 ‘북학’을 주장한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들은 인간의 본성과 금수초목의 본성은 동일하다는 ‘인물성동론’을 논거로, 금수와 같은 청나라도 조선과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에 청의 선진적인 문물은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시기 한국철학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은 중국을 통하여 서양의 과학기술과 천주교, 곧 ‘서학(西學)’이 전래되었다는 사실이다. 한역 서학서들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기존의 우주관과 세계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하였다. 이는 실학사상 형성의 외래적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천주교를 수용하여 유교 경전을 새로운 관점에서 주석하였으며, 최한기(崔漢綺,1803~1879)는 서양과학을 수용하여 기학을 제창하였다.
서구 세력에 대한 조선유학의 대응
조선은 개항 이후 세계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일부분으로 편입되면서 전근대 사회에서부터 근대 사회로 이행된다. 그러나 조선의 근대화는 타율적이며 종속적인 ‘일그러진 근대화’였다. 조선의 근대는 ‘서세동점(西勢東漸)’, 곧 서구 제국주의의 폭력과 문명의 충격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는 동북아시아 유교문화권에서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사건이었다. 서구의 충격에 대한 당시 지식인들의 대응양상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는 기존의 성리학을 굳건하게 지키고 자본주의와 가톨릭 교리 등 서구문명을 배척함으로써 전통적 가치와 체제를 수호하고자 진력하였다. ‘동도서기론자(東道西器論者)’들은 전통문화와 사상을 기반으로 서구문명을 탄력적으로 취사선택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문명개화론자(文明開化論者)’들은 유교는 타도되어야 하며 그 대안으로 서구의 과학 ⋅ 기술과 제도는 물론 종교와 가치관까지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주장은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과 박영효 등에게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 당시 척사위정론이 힘을 잃어가면서 지식인 사회의 관심사는 동도서기론을 취할 것인가, 아니면 문명개화론을 취할 것인가라는 문제였다. 문명개화론자들은 서양문화를 새로운 ‘보편문화’로 받아들이고 기독교를 포함한 서양문화의 전면적 수용을 통해 개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동도서기론과 문명개화론의 대립과 유사한 구도는 중국에 있어서 중체서용론자(中體西用論者)들과 천두슈(陳獨秀) ⋅ 후스(胡適) 등 『신청년(新靑年)』을 중심으로 한 학자들 사이에서도 나타난다.
1900년대 일부 지식인 그룹은 서양의 사회진화론을 수용하고 서구 비판과 국권회복을 위한 ‘강한 나라 만들기[自强]’ 운동을 전개하였다. 박은식(朴殷植,1859~1925)은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양명학의 이론을 재구성하여 야만적 근대성에 대한 비판 이론을 창출하였다.
(3) 현대 한국사회에 있어 유교에 대한 인식
약 1세기 전 나라가 일제에게 패망하자 그 책임이 조선 500년 동안 지배이념이었던 유교에게 돌려졌다. 유교는 타도되어야 하며 그 대안으로 서구의 과학 ⋅ 기술과 제도는 물론 종교와 가치관까지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반대로 망국의 원인은 유교를 올바르게 실현하지 못한 데에 있으므로 유교를 재건하고 발흥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군의 학자들이 있었다. 장지연(張志淵,1864~1921)은 『유교변(儒敎辨)』에서 조선이 유교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쇠망하게 된 것은 ‘진유(眞儒)를 쓰지 않은 연고’라고 지적하였다. 서병두(徐炳斗,1879~1930)의 『유교발흥론(儒敎勃興論)』과 우리가 앞에서 인용한 박은식의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등도 같은 맥락에서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일제시대 이후 80년대까지 유교에 대한 평가는 지극히 부정적이거나 아예 관심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현상윤이 『조선유학사』 가운데
「조선유학(朝鮮儒學)의 조선사상사(朝鮮思想史)에 급(及)한 영향(影響)」에서 ‘모화사상’ ‘가족주의’ 등이 유교의 죄라고 비판한 것이 부정적 견해의 대표적인 실례다. 박정희 시절 개발독재체제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서 반공과 더불어 ‘충효’가 강조되었던 사례는 유교를 더욱 비판적으로 인식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나라가 패망한지 불과 1세기 만에 우리가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게 되자 유교에 대한 재평가가 진행되고 있다. 그리하여 ‘유교자본주의’라는 틀로 한국경제발전의 동인을 진단하고, 유교의 정치사상에서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아울러 서구의 개인주의 ⋅ 물질만능주의 등 근대사상의 한계를 유교에서부터 모색하는 작업도 시도되고 있다. 특히 유교를 생태학이나 페미니즘과 같은 새로운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움직임이 주목된다.
현대 한국사회에서 ‘종교’로서의 유교의 위상은 높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한국은 동아시아 한자문화권 가운데에서 유교적 전통이 가장 강하게 전승되어 있는 사회임에는 틀림없다. 한국인의 가치관과 정서의 기저에는 유교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대순회보》 1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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