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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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재헌 작성일2017.02.20 조회2,988회 댓글0건본문
이재헌(금강삼종대학 교수)
▲ 금강대도 전경
금강대도(金 剛大道)는 1874년에 창도되어 2010년 현재 137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신종교이다. 창도주는 토암(土庵) 이승여(李承如, 1874-1934)와 자암(慈庵) 서의복(徐宜福, 1884-1927)이고, 제2대 도주는 청학(靑鶴) 이성직(李成稙, 1913-1957)과 보단(寶丹) 민영인(閔永仁, 1913-1959), 제3대 도주는 월란(月鸞) 이일규(李一珪, 1934-2004)와 향련(香蓮) 김동윤(金東允, 1937-현재)이다. 이들은 총칭 ‘대도덕성사건곤부모(大道德聖師乾坤父母)’라 하여 삼위일체의 건곤부모(乾坤父母)로 신봉되고 있다.
금강대도는 교조의 탄생으로부터 도기(道紀)를 계산하여 1874년을 개도(開道) 원년(元年)으로 보지만, 실질적인 포덕은 1910년 토암과 자암이 금강산을 떠나 계룡산으로 남천포덕(南遷布德)한 때로부터 시작된다. 그 이후로 현재까지 100여 년 동안 줄곧 충청도를 중심으로 종교 활동을 해 왔으며, 충청도를 대표하는 한국의 자생 신종교이다.(1934년 조선총독부의 조사에 의하면 村山智順,『朝鮮の類似宗敎』당시 신도수가 13,000여명으로 전국적으로 천도교, 보천교에 이어 세 번째의 교세로 파악되고 있는데, 그 교세의 90% 이상이 충청도에 집중되고 있어서 적어도 충청지역에서는 제1의 교세를 보여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 서슬 퍼런 무단통치 하에서도 보본숭조(報本崇祖)의 민족정신과 심성배합(心性配合)의 수행정신을 고취하여 1930년대 중반에 벌써 한국 전체에서 손꼽히는 교세를 자랑했고, 일제 말기에는 요시찰대상으로 철저한 탄압을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해방 이후에는 서구문화의 물결과 자본주의의 물질만능주의 풍조 속에서도 도성덕립(道成德立)의 목표를 잃지 않고, 충청도를 중심으로 하여 국내는 물론 세계의 도덕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1. 금강대도의 역사
1.1 제1대 도주 이토암(李土庵)과 서자암(徐慈庵)
창도주 이토암과 서자암은 본래 강원도 통천(通川) 사람으로 금강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 이토암은 1874년 5월 19일에 태어났으며 본관은 한산(韓山)이고 고려 말의 유학자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18세손이다. 서자암은 1884년 11월 25일에 태어났으며 본관은 달성(達城)이고 약봉(藥封) 서성(徐渻)의 14세손이다. 1898년 결혼하였고, 토암이 33세 되던 1906년 결정적인 종교적 체험을 통해 대도를 자각하게 되었다. 이 때 토암이 깨달은 대도는 ‘선후천 교역기에 타락된 인간의 도덕성을 건곤부모(乾坤父母)인 자신이 개화(開化)함으로써 큰 겁운에 쌓여 죽어가는 인류를 구원하고, 나아가 우주의 화평을 이룬다는 것’이었다.
1910년 한일합방 직전에 토암과 자암은 제자의 인연을 찾아 충청도 계룡산으로 남천포덕을 단행하였다. 그는 첫 제자 백련(白蓮) 정태용(鄭泰鎔)과 함께 3월 15일에 길을 떠나 23일 만인 4월 8일에 드디어 계룡산 백암동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백남(白南) 김도명(金道明) 등 제자들을 만나 본격적인 포덕을 시작했다. 1910년대 일제의 서슬퍼런 무단통치 정책 하에서 대도의 싹을 틔워야만 했던 토암은 초기 10여 년 동안 계룡산을 중심으로 은거지를 옮겨가며 비밀리에 포덕을 해 나갔다. 처음 백암동에서 네칸 초가를 사서 거주하다가 이듬해 1911년 2월에 공주군 반포면 남산소로, 1912년 1월에는 공주군 반포면 석봉리 황적동으로 옮겨 살았다. 여기서 장자 이성직(李成稙, 1913-1957)을 얻게 되니, 그가 훗날 금강대도의 제2대 도주가 된다.
1914년에 최초의 한문경전인 『교유문(敎諭文)』을 저술하고, 가르침을 요약하여 암송하게 만든 「명교장(明敎章)」을 발표하는 등 자신의 종교 사상을 체계화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1916년 2월에 대덕군 구즉면 신동리 녹골로 이주를 하였고, 1922년에는 신도안의 논산군 두마면 석교리(石橋里)에 법당을 조성하여 금불(金佛)을 봉안하고 ‘진종동붕교(眞宗同朋敎)’의 간판을 걸었다. 이것은 일제의 무단통치에 대응하여 아직 확고해지지 않은 금강 도덕을 지키려는 임시적인 은도의 방편으로 일본불교의 이름을 잠시 빌려 쓴 것이다.
50세 되던 1923년 현재의 충남 연기군 금남면 금천리에 도장의 기지를 마련하고 도약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니, 처음 계룡산에 남천포덕한지 13년 만이었다. 이곳은 계룡산을 태조(太祖)로 하고 우산봉(雨傘峰)을 중조(中祖)로 하는 풍수상의 길지이며, 특히 금병산(錦屛山)의 병풍 뒤쪽이라 하여 피난처로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금천에 성지를 마련하고 포덕의 안정적인 기틀을 마련한 토암은 경전을 계속해서 편찬하였다. 그는 계룡산에서 본격적인 포덕을 하기 시작했던 1914년(41세)부터 경전을 입으로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가 구술한 것을 수행 제자들이 받아 적어 경전화해 나갔다. 이후 1932년(59세)까지 약 18년간 경전을 구술하였으니, 모두 11경 28권의 방대한 양을 남겼다. 1914년에 『敎諭文』 5권을 시작으로 『眞宗寶鑑』 상·하권(1923), 『眞宗大全』(1923), 『念佛經』(1923), 『玄化眞經』 상·하권(1925), 『淸難經』(1927), 『三淸玄化經』 3권(1930), 『黃寶經』(1930), 『玄妙經』(1931), 『金剛化身經』(1932), 『道德歌』 10권을 차례로 발표하였다. 이것은 토암 사후에 편집된 것이 아니고 생존 시에 스스로 구술한 것이니, 교주의 사후 언행록이 주류를 이루는 다른 종교의 경전과는 다른 형태이다. 토암은 어렸을 적에 가계가 군색하여 정식으로 서당에 다닐 수가 없었는데, 이들 경전은 동양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천지인(天地人) 삼재의 도와 유불선(儒佛仙) 삼교의 가르침을 종횡으로 관통하고 있어서 제자들은 이것이 바로 토암이 생이지지(生而知之)한 성인임을 증거해 주는 것이라고 한다.
1925년에 처음으로 ‘선화부(宣化部)’를 두고, 그 책임자인 ‘선화사(宣化司)’로 하여금 전국 각지의 도인들을 관장케 하는 등 교화조직을 정비하였다. 1926년에는 잠시 ‘관성교(關聖敎) 연기지부(燕岐支部)’간판을 걸기도 했으니, 이는 당시 유행했던 민중도교의 선서(仙書) 신앙과 삼성제군(三聖帝君), 즉 관성(關聖)·문창(文昌)·부우제군(孚佑帝君)에 대한 대중적인 신앙을 이용하여 신도설교(神道設敎)로써 제자들의 이완된 신앙을 다잡고, 충효성경(忠孝誠敬)이라는 자신의 가르침을 드러내려 했던 은도의 방편이었다고 한다. 금강대도에서는 이들을 각각 충(忠)·효(孝)·성경(誠敬)의 덕목을 상징하는 신명으로 재해석을 하고 있으며, 천계(天界)에서 건곤부모님의 개화(開化) 사업을 도우시는 보좌신명(補佐神明)이라 하여 특별히 존숭을 하고 있다.
1927년 드디어 ‘금강도총본부(金剛道總本部)’라는 간판을 걸면서 지금까지의 은도적인 방편행을 청산하고 주체성을 확립해 나가게 된다. 이렇게 대중을 교화할 수 있는 조직과 제도를 정비해 나가면서 그는 제자들에게 충효성경(忠孝誠敬)과 가화(家和), 청결(淸潔) 등 자신의 가르침을 펴나갔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일제 강점기에 쇠약해져 가는 민족의식을 불어넣는 데에도 주력하였다. 예컨대 1923년 금천에 법당을 건설하고 불상을 봉안하면서, 불상 안에 단군의 성상(聖像)을 비밀리에 봉안하기도 하였다.
1931년 12월 25일 자암이 44세를 일기로 열반에 드니 제자들은 어머니를 잃은 슬픔으로 중복(重服)을 입고 3년상을 치렀다. 1934년 3월에 토암은 대전의 충남도청 앞 광장에 전국의 도인들을 소집하여 대강연회를 열 계획을 세웠으니, 그 목적은 포덕과 함께 민족의식의 선양(宣揚)에 있었다. 그리하여 도인들은 배달민족을 상징하는 흰옷을 입고 손에는 태극기와 함께 사구기(四九旗, 금강대도의 道旗)를 들고 수천 명이 광장에 모여들었으나, 배반자의 밀고로 사전에 발각되고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동아일보』,『조선일보』1934년 5월 14일자 기사) 이에 토암의 장남이며 훗날 제2대 도주가 된 청학 이성직과 몇몇 제자들이 보안법 위반으로 검거되어 옥고를 치르게 된다. 토암은 이때의 강연회 실패와 제자의 배반에 가슴 아파하며 병세를 보이기 시작하더니, 결국은 그해 11월에 61세를 일기로 열반에 들었다. 제자들은 또한 아버지를 잃은 슬픔으로 중복(重服)을 입고 3년상을 치렀다.
1.2 제2대 도주 이청학(李靑鶴)과 민보단(閔寶丹)
금강대도의 제2대 도주 청학(靑鶴) 이성직(李成稙)은 1913년 5월 5일에 계룡산 황적동에서 이토암의 장남으로 태어났고, 보단(寶丹) 민영인(閔永仁)은 여흥민씨 당진공(唐津公)의 13세손으로 1913년 5월 12일에 충북 청원군 강서면 용정리에서 태어났다. 이청학과 민보단은 1928년에 결혼하였다. 1934년 충남도청 앞 만세사건을 주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이윽고 토암이 열반하자 1937년 25세에 도통을 계승하였다. 1937년 일본 종교계 시찰을 나갔는데, 일본 진언종의 총본부를 방문한 청학은 그를 시험, 회유하려는 온갖 책략에 맞서서 오히려 덕으로 그들을 감탄케 하니 일본 승려들은 그를 홍법대사(弘法大師)의 후신이라며 칭송하였다고 한다.
청학은 환국 후에 대도의 교리와 의례를 체계화하는 일에 매진하였으니, 특히 자신의 종교적 이상을 상징화하여 「흥기도덕가(興起道德歌)」를 가르쳐 주고, 가사 내용에 따라 태극무(太極舞), 무극무(無極舞), 봉무(鳳舞), 학무(鶴舞) 등 자연 만상의 이치에 맞는 여러 가지 가무(歌舞)를 추게 하여 도인의 사기를 북돋워 주었다. 이러한 청학의 비범한 신도설교가 알려지자 도세는 다시 일익 번창하게 되었고, 일제는 예의주시하게 된다.
이윽고 일제는 금강대도의 말살을 계획하고, 1941년 금천리 법당에 난입하여 도주 이하 50여 명을 검거, 당시의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죄목을 씌워 투옥하였다. 이 때 옥중 순도자가 10여 명에 달하였고, 도장내의 성전과 부속건물이 일체 파괴되었으며, 도인들은 뿔뿔이 흩어지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이 사건을 이른바 신사사변(辛巳事變)이라고 한다.
신사사변 이후 1년여 동안의 옥고와 고문에서 풀려난 청학은 금천리 성지에서 쫓겨나 조치원읍 신흥동에 거주제한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청학은 일경의 감시가 심한 중에도, 눈을 피해 찾아오는 제자들을 접견하고 모든 의식을 비밀리에 거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해방이 멀지 않았으니 민족정신을 잃지 말라고 가르치는 등 민족의식의 앙양에 주력하였다. 이처럼 청학의 항일운동이 암암리에 계속되고, 또 금강대도 간부들이 전날 불법 검거와 건물의 불법철거한 일로써 충남도경 및 김갑순을 상대하여 민사 및 형사소송을 제기하니, 일제는 비상시국의 경찰임시조치법에 의거 청학을 다시 검거하려고 하였다. 이에 청학은 미리 준비해 둔 금병산(錦屛山) 삼태봉(三台峰)의 토굴로 피신을 하였고, 다시 은거지를 충북 청원군 오창면 양대리, 낭성면(琅城面) 두문동(杜門洞) 등으로 옮기며 피신을 하였다.
광복 후 두문동을 떠나 금천으로 돌아온 청학은 도장을 재정비, 성전과 총본원의 건물을 재건하였으며, 금강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하여 청소년 교육에도 주력하였다. 또한 ‘성재(誠齋)’라고 하는 정기적인 수련과정을 두어서 도덕 강론과 심성 수련을 격려하고 적극적으로 선도포덕에 진력하니 당시 도인 수가 수만에 달했다.
1950년 5월에는 큰 전쟁이 날 것을 예견하고, 제자들에게 경거망동하지 말고 밖으로 돌아다니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또한 ‘피병란(避兵亂)’ 보결(寶訣)을 내려 주며 제자들을 안심시키니, 제자들이 더욱 그를 우러르게 되었다. 이러한 청학의 법력이 세상에 알려지자 금천리는 피난처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과연 남북 양군이 금강을 사이에 두고 격렬한 전투를 여러 번 벌이면서도 금천리 성역에는 단 한발의 포탄도 떨어지지 않았고, 또 청학의 말을 듣고 그를 따랐던 피난민들은 단 한 사람도 피해자가 없었다. 정감록에 등장하는 ‘십승지지’에는 유구(維鳩)와 마곡(麻谷) 사이가 피난처라고 했지만, 실상 6·25 때는 금천리 일대가 피난처로서 민중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1950년 11월에는 『보경(寶經)』을 하사하여 도인들의 수행법을 마련하였고, 1953년에는 금강인쇄소를 설치, 토암이 남긴 『대성경(大聖經)』을 간행하는 등 금강대도의 종교적 체계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1957년에 이르러 일제하에 겪은 옥고의 여독으로 환후가 재발하여 마침내 열반에 드니 향년 45세였다. 청학 사후에는 보단(寶丹)이 홀로 도무를 관장하다가 1959년에 또한 돌아가게 되니 제자들은 모두 중복(重服)을 입고 부모를 잃은 것처럼 슬퍼하였다. 금강대도에서는 스승이 돌아가면 부모와 똑같이 중복으로 3년상을 치른다. 스승은 인간의 심성(心性)을 일깨워주기에 그 은혜는 부모와 같고, 건곤부모님은 천지간 삼라만상의 부모님이기에 육친(肉親)과 똑같이 상을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1.3 제3대 도주 이월란(李月鸞)과 김향련(金香蓮)
금강대도의 제3대 도주 월란(月鸞) 이일규(李一珪)는 1934년 4월 29일에 충남 연기군 금남면 금천리에서 이청학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향련(香蓮) 김동윤(金東允)의 본관은 안동이며 상촌공(桑村公)의 19세손으로 1937년 12월 26일 충북 영동군 심천면 각계리에서 태어났다. 월란과 향련은 1959년에 결혼하였다.
월란은 4, 5세 무렵부터 사서삼경을 읽기 시작하였고, 15세 무렵에는 당시 금강대도에서 설립한 금강고등공민학교에서 수학하면서 유불선 삼교를 섭렵하였다. 이후 다소 늦은 나이에 신학문에 들어갔으니, 23세가 되어서야 청주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성균관대학교에 입학하여 약학과를 거쳐 동양철학과에서 금강대도의 사상을 철학적으로 심화시킬 수 있었다. 1964년 도통을 계승하여 월란이 2004년 열반할 때까지 근 40여 년 동안 금강대도의 제3대 도주로서 중생구제 사업에 헌신하였다.
월란은 금천리 성지에서 태어나 70여생을 살다가 역시 그곳에서 돌아갔으니, 금강대도의 모든 시련기를 끝내고 실질적인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던 종교지도자였다. 특히 6, 70년대 대한민국의 경제부흥기에 대도의 교리와 의례를 확립해가면서 교화 조직의 체계화와 금천 성지의 현대화, 그리고 경제안정 및 인재육성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오늘날 금강대도는 계룡산 주변 충청도의 신종교 중에서 가장 건실한 발전을 거듭해 나갈 수 있었다.
특히 그의 사상은 의성(義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의성’이라는 두 글자를 사용하여 대도의 사상을 개념적으로 종합하였을 뿐만 아니라, 실제의 삶에서도 온몸으로 의성을 실천궁행하였다. 그는 ‘금강삼대보훈(金剛三大寶訓)’을 내려주어 수행의 지침을 삼게 하였는데, 백지환원(白紙還元)·중용지도(中庸之道)·지성무식(至誠無息)이 그것이다.
그가 제3대 도주로서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것은 금천 성지를 총본원으로 하고 전국에 100여개의 본원. 분원. 회관을 건립하여 교화 조직을 확대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1년에 20회 정도 총회일이 되면 전국 각지에서 이곳 충청도로 도인들이 모이게 되니, 이곳은 모든 도인들의 신앙의 구심점이요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그가 가장 역점을 두어 추진한 사업은 금천 성지를 성역화하는 일이었으니, 전국에서 찾아오는 도인들을 수용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으로 해야 했던 일이었다. 금강(金剛) 개도(開道) 100년이 되는 1973년과 연화(蓮華) 개도 100년이 되는 1983년 두 차례에 걸쳐서 금천리 일대를 대대적으로 성역화 함으로써 신앙과 수도의 중심지로서 손색없는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또한 국가적인 경제발전 정책에 맞추어 운수사업과 표고버섯 재배 등의 경제사업을 추진하는가 하면 ‘자경보양원(慈敬保養院)’을 설립하여 노인복지 사업도 실시하고 있다. 인재육성을 위해 ‘금강삼종대학(金剛三宗大學)’을 두고 정규대학설립을 추진하고 있으며, 금강대도 종리학(宗理學)의 체계적 연구를 위하여 ‘금강대도종리학회’를 두고 매년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2001년에는 1941년 일제에 의해 법당이 강제로 훼철된 이래 정확히 60년 만에 삼종대성전(三宗大聖殿)을 신축 건립하였으며, 이때를 기하여 ‘무극(無極)적 은도(隱道)’의 시대를 청산하고 ‘태극(太極)적 개화(開化)’의 시대가 왔음을 선언함으로써 대사회적인 도덕성 개화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할 것을 천명하였다. 그리고 장자인 법산(法山) 이경구(李敬求)와 도향(桃香) 양정숙(梁貞淑)에게 대종법사(大宗法師), 대종덕사(大宗德師)라는 사호를 내리고 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선언함으로써 제4대 도주의 법통을 분명하게 하였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대도의 현대화를 위해 전력을 다하던 월란은 2004년 6월 71세를 일기로 열반에 들었다. 전국의 수십만 제자들이 3년간 중복을 하여 애도를 다하니 이것은 근세에 보기 드문 광경으로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1.4 제4대 도주 이법산(李法山)과 양도향(梁桃香)
현재 금강대도는 성덕산(誠德山) 이법산(李法山)과 성인전(誠仁田) 양도향(梁桃香)이 이끌고 있다. 법산(法山)은 1961년 1월 18일 충남 연기군 금남면 금천리에서 이월란의 장남으로 태어났고, 도향(桃香)은 1959년 2월 6일 충북 영동군 학산면 박계리에서 태어났다. 둘은 1982년 결혼하였고, 2002년 대종법사(大宗法師), 대종덕사(大宗德師)자리에 올랐으며, 2010년에 제4대 도주 용화교주(龍華敎主)로 등단하였다.
법산은 청주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건국대학교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으며, 양도향은 대전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법산은 과거 3대 교주의 시대를 무극(無極)적 은도(隱道)라 규정하고 본인이 태극(太極)적 개화(開化) 시대를 연다고 하면서 대내외에 금강대도의 위상을 확고히 하고 대도를 일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도발전 5개년 사업을 연차적으로 추진하면서 인재육성과 문화의 진작, 사회복지 및 경제 활성화에 역점을 두고 있다. 특히 2010년 남천포덕 100주년을 맞이하여 총본원의 모든 시설물을 재정비하고, 대성경 번역작업에 박차를 가하며, 각종 서적을 발간하고, 종리학회(宗理學會)를 통하여 건곤부모의 생애와 사상을 역사적, 철학적으로 규명하고자 노력하는 등 중생들과 함께하는 삶 속의 종교, 사회 속의 종교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 금강대도의 교리
금강대도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인류를 구원해 줄 구세주로서 건곤부모(乾坤父母)의 지상화현을 믿는 종교이다. 금강대도를 창도한 제1대 도주 토암과 자암을 대성사부모(大聖師父母), 제2대 도주 청학과 보단을 도성사부모(道聖師父母), 제3대 도주 월란과 향련을 덕성사부모(德聖師父母)라 하여 이들을 ‘삼신일체 삼불세존 대도덕성사건곤부모’로 신봉한다. 건곤부모란 천지(우주)와 인간을 낳고, 기르고, 다스리는 아버지 어머니이니, 결국 우주를 주재하는 근원적인 존재가 인간의 모습으로 왔다는 것이다. 건곤부모는 본래 천상계를 다스리던 천존(天尊)으로서 선천(先天)시대에 석가, 공자, 예수와 같은 성인들을 인간세계에 내려 보내 인간을 교화하게 했는데, 이미 그들의 운도가 다했기 때문에 우주의 절대자인 건곤부모 자신이 직접 인간의 몸으로 화신하여 출세하였다는 것이다.
이토암의 『도덕가』에 보면 “천지(天地)는 부모라 하고 일월(日月)은 형제라 하며 성신(星辰)은 붕우라 하였으니 천하지인(天下之人)이 누가 형제 아니 되며 누가 붕우 아니 되리.”라 하였고, 또한 “천지는 부모시니 우주 만물을 나와 형제라 해도 과언이 아니요,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니 비록 금수, 곤충, 초목이라도 마땅히 사랑하여서 함부로 죽이거나 꺾지 말아야 하느니라.” 하였으니, 전 우주를 건곤부모님이 낳은 하나의 가정으로 보고 전 우주적인 가화(家和)를 노래한 것이다.
건곤부모가 삼위일체로 출세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천지를 낳고 기르고 다스리는 세 가지 작용을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제1대 도주는 도덕의 씨앗을 뿌렸고, 제2대 도주는 그것을 가꾸었으며, 제3대 도주는 그 열매를 거두는 역할을 맡았으니, 3대의 도주가 몸은 비록 셋(여섯)이지만 그 근원은 하나로서 삼신(三身)이 일체(一體)가 된다는 것이다.
또한 건곤부모는 유불도 3교의 진정한 스승이며 유일무이한 절대적 구세주이므로, 공자와 같이 배워서 알게 된 학이지지(學而知之), 석가와 같이 고행을 통해서 깨달은 곤이지지(困而知之)가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알았던 생이지지(生而知之)의 성인이라고 믿어지고 있다. 토암은 “대개 한 집안에 두 아비가 없고, 일세에 두 성인이 없고, 일시에 두 종교가 없다.”고 하여 자신만이 진정한 구세주요, 금강대도 만이 진정한 종교임을 자부하기도 하였다.
금강대도의 신앙대상관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도주를 절대 유일자로 신봉함은 물론, 그 도통의 계승을 혈통적으로 해왔다는 점이라고 하겠다. 도주위가 혈통적으로 계승될 수밖에 없는 것은 마치 한 집안에도 종가가 있어서 조상의 대를 잇듯이 도덕지가에 있어서도 종가가 있어서 금강대도를 이끌어 나가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효도와 조상 공경, 그리고 가화를 중시하는 금강대도의 교리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여 진다.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현재의 시대를 음·양이 평등되는 오중(午中)시대로 보아, 이 시대의 인류구원자로 출세하는 성인은 음양이 배위를 하여 남녀가 평등한 것이니, 아버지와 어머니가 동등한 지위와 권능을 갖는 건곤부모가 되는 것이다. 특히 자애로운 어머니가 오심으로 해서 선천시대에 멀고 높게만 여겨졌던 ‘하느님-아버지’의 세계가 인간세계로 가깝게 다가오게 되는 것이며, 드디어 하느님-아버지(乾父)와 땅님-어머니(坤母) 그리고 인간-자식(人子)이 동고동락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금강대도는 대도덕성사건곤부모의 도덕과 심법을 따르는 종교이다. 금강대도의 목표는, “대도덕성사건곤부모의 심법(心法)을 의성(義誠)의 정신으로 수행, 전수하여 심성을 배합하고, 유불선(儒佛仙) 삼종일합의 진리를 궁행, 연마함으로써, 개인적으로 심성신(心性身)이 합일된 이상적 인간상, 즉 차생군자(此生君子)와 내생선불(來生仙佛)의 생극락(生極樂)과 사극락(死極樂)을 누리고, 우주적으로는 천지인(天地人)이 합일되는 도덕문명의 극락세계, 즉 대동세계를 이룩하는 것이다.” 이른바 도성덕립(道成德立)이 최대의 목표이다.
금강대도의 중요한 상징으로는 도기(道旗)와 성위기(聖位旗)가 있다. 도기는 사구기(四九旗)라고도 하는데, 금강대도가 서방경신사구금(西方庚辛四九金)의 기운을 응하여 창도되었기 때문에 사(四)자와 구(九)자를 상형한다고 하며, 그 승수인 36은 천도수로서 삼십육궁도시춘(三十六宮都是春)이라고 하여 우주만물이 모두 그 수에 따라 변화를 일으킨다고 한다. 또한 음양오행의 상생상극을 도형화 한 것이라고도 하며 사방의 괘는 후천괘라고 한다. 성위기는 삼신일체의 대도덕(大道德) 성사건곤부모를 상징하는 것으로, 가운데의 열쇠는 인류가 겁운을 피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비결을 상징한다고 한다. 또한 이것은 천지인과 유불선, 심성신, 조부자(祖父子) 등의 삼합의 원리를 의미한다고도 한다.
3. 수행과 의례
금강대도의 의례는 한마디로 의성(義誠) 사상의 행위적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건곤부모를 지성껏 믿어서 그 심법을 전수 받으려는 몸짓인 것이다. 의성을 다해야 하는 실천도덕으로는 충효성경(忠孝誠敬)과 가화(家和) 청결(淸潔)이 있다. 청학은 “충효는 수도의 뿌리[修道之根]요, 성경은 달도의 근본[達道之本]이며, 가화는 적덕의 근원[積德之源]이요, 청결은 안정의 터[安定之基]라.”고 말한다.
도인들이 개인적으로 실천해야 할 수행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항상 「보고(寶誥)」[건곤부모의 성덕을 찬양하는 글]를 외우면서 대도덕성사건곤부모의 심법에 귀의토록 모든 정성을 다 한다.
둘째, 모든 계율을 항상 생활 속에 실천에 옮긴다.
셋째, 광화중생(廣化衆生)과 오만성업(五萬聖業)을 위한 각종 사업에 열심히 참여한다.
넷째, 건곤부모의 말씀, 즉 『대성경(大聖經)』을 지성껏 외우고 연구해서 실천에 옮긴다.
집단적인 의례의 경우 총본원에서는 1년에 20회의 총회일이 있어 치성(致誠)과 제향(祭享)이 올려지며, 전국 각지의 본원·분원·회관에서는 지역 실정에 따라 한 달에 한번 씩 소규모의 총회가 열리고 있다. 총본원 총회는 4대 도주의 탄강일과 제향일이 중심이 되며, 기타 단군을 추모하는 개천절과 어천절, 그리고 1941년 신사사변 때의 순도자를 추모하는 성경숭의절(誠敬崇義節) 등이 있고, 매년 정초에 도인 상호간 세배를 하는 신년하배식(新年賀拜式)과 칠월칠석인 쌍칠절(雙七節), 도주의 성산에 벌초를 하는 성산봉성절(聖山奉省節) 등이 있다. 총회 시 집회 장소는 대개 건곤부모의 존영을 모신 삼종대성전(三宗大聖殿)이 중심이 된다. 대개의 의식은 헌작과 배례, 보고(寶誥) 봉독과 성훈(聖訓) 등이 핵심을 이룬다. 배례는 건곤부모 각위에 5배씩을 하는 게 독특하며, 보고는 3회-9회 정도 반복해서 암송을 한다. 제수는 고기를 쓰지 않는 것이 특색이며, 복장은 도복(道服)이나 전통 한복을 입고, 제향을 올릴 때에는 경복(輕服; 건, 행전에 흰옷)을 입는다..
집단적 수련은 겨울에 전 도인이 총본원에 모여 열흘간 수련하는 ‘성재(誠齋)’라고 하는 수련 과정이 있다. 성재가 끝나면 수련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수련한 정도에 따라 등급을 매겨 주는데, 성구전(誠九轉), 정구전(正九轉), 대원구전(大圓九轉)의 총 27단계가 있다. 여름에는 주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수련법회가 열린다.
금강대도를 신앙하다가 죽은 사람들은 그 믿음과 수행의 정도에 따라 10단계로 나누어 부처와 신선으로 천도를 하게 되니, 의성사(義誠師), 성경사(誠敬師), 봉성사(奉誠師), 봉도사(奉道師), 봉덕사(奉德師), 성신사(誠信師), 경신사(敬信師), 정신사(正信師), 봉신사(奉信師), 평신사(平信師)가 있고, 또한 등외로 천도되는 사문제자(沙門弟子)가 있다. 이들에 대해서는 1년에 2회씩 향사(享祀)를 거행하며, 앞으로 사당에 모셔 영원히 숭배가 된다고 한다.
금강대도의 실천계율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금강실행십조(金剛實行十條)
일왈. 경천지(敬天地: 하늘과 땅을 공경하라.)
이왈. 예불조(禮佛祖: 부처님께 예배하라.)
삼왈. 봉조선(奉祖先: 조상을 받들어라.)
사왈. 효쌍친(孝雙親: 부모님께 효도하라).
오왈. 수국법(守國法: 나라의 법을 지켜라.)
육왈. 중사존(重師尊: 스승을 존중하라.)
칠왈. 별부부(別夫婦: 부부간의 도리를 분별하라.)
팔왈. 애형제(愛兄弟: 형제간에 우애하라.)
구왈. 목종족(睦宗族: 종족간에 화목하라.)
십왈. 신붕우(信朋友: 친구간에 믿음을 지켜라.)
○ 금강삼대보훈(金剛三大寶訓)
일왈. 백지환원(白紙還元: 백지로 돌아가 순수하게 믿어라.)
이왈. 중용지도(中庸之道: 항상 가장 올바른 도를 지켜라.)
삼왈. 지성무식(至誠無息: 지극한 정성으로 쉬지 말고 나아가라.)
○ 금강십계율(金剛十戒律)
일왈. 물기천지인(勿欺天地人: 하늘·땅·사람을 속이지 말라.)
이왈. 심신청정결(心身淸淨潔: 마음과 몸을 깨끗하고 맑게 하라.)
삼왈. 연성극기욕(煉性克己慾: 성품을 단련하여 욕심을 이겨내라.)
사왈. 경석자서지(敬惜字書紙: 글씨 쓴 종이를 공경하고 아끼어라.)
오왈. 언행중여산(言行重如山: 말과 행동을 산 같이 무겁게 하라.)
육왈. 계살제중생(戒殺濟衆生: 죽이는 것을 경계하여 중생을 구제하라.)
칠왈. 불식어육류(不食魚肉類: 어류·육류를 먹지 말라.)
팔왈. 일부당일처(一夫當一妻: 한 남편에 한 아내)
구왈. 물취타인물(勿取他人物: 남의 물건을 갖지 말라.)
십왈. 물범죄과오(勿犯罪過誤: 죄와 과오를 범하지 말라.)
4. 조직과 운영
조직상에 있어서 대외적으로는 금강대도로 통칭하여 말하지만, 내적으로는 ‘금강대도(金剛大道)’와 ‘연화대도(蓮華大道)’로 양립해 있다. 이는 남녀평등의 오중대운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토암·청학·월란의 3대를 금강대도의 도주, 자암·보단·향련의 3대를 연화대도의 도주로 숭배한다. 따라서 남자는 금강도인, 여자는 연화도인이라 부른다.
조직 기구는 도주의 집무처인 종법원 산하에 종법위원회와 종정위원회, 종의회가 있고, 그 아래에 금강대도총본원과 연화대도총본원이 병설되어 있다. 금강대도와 연화대도에 똑 같은 기구와 직제들이 있는데, 크게 보면, 교화·행정·사업 기구로 나눌 수 있다.
교화 기구로는 개화원, 강법원, 교화원 등이 있는데, 각각 위원을 두어 선도포덕을 담당케 한다. 성직자로는 도직(道職)이라 하여 개화사, 강법사, 교화사, 선도사, 선덕사 등의 직책을 전 도인에게 부여하여 각각 포교의 임무를 맡도록 하고 있다. 행정 기구는 선화원, 종무원, 종심원, 종리원, 교무원, 관리원, 도무연수원, 의전원, 도사편찬위원회 등이 있으며, 전국 각 지방에 본원, 분원, 회관을 100여개 두고 있다. 현재 교세는 70여만으로 자체 집계하고 있다. 사업 기구로는 성업추진위원회, 자경보양원, 의성장학회, 일신상회 등이 있다. 그 밖에 삼종대학과 종리학회가 있고, 육영단체로 성경도우회, 백운도우회, 효제성신회 등이 있다.
종단 운영은 도인들의 성금, 예금과 각종 사업에 대한 헌성금으로 충당되고 있다. 도인들의 성, 예금은 정액제로 되어있으며, 수납은 각 지방조직을 통해 전달되고 있다. 조직 운영은 도주의 카리스마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현재 중점을 두고 추진하는 사업으로는 대성경의 번역 및 간행, 도사(道史)의 편찬, 종리학 수립, 성직자 교육기관 설립, 금강삼종대학 설립, 장학회·양로원[자경보양원] 운영, 버섯 재배, 식품 사업, 의류 사업 등이 있고, 총본원 성역화 사업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가고 있다.
총본원의 중요 건축물로는, 건곤부모의 존영을 모신 삼종대성전, 단군과 태상노군 삼성제군의 존영을 모신 삼청보광전을 중심으로 하여, 오만수련광장과 오만등대, 금종루, 금강개도백년탑, 연화개도백년비, 삼종개화문 등이 있다. 또한 의성 신앙을 상징하는 성경대-의성탑이 있고, 건곤부모 6위의 성적을 기리는 연화대-성적비가 있다.
5. 금강대도의 사상적 특징
첫째, 생태중심적 세계관을 계승,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다. ‘금강실행십조’에 나타난 경천지(敬天地) 사상은 천지인 삼재의 동양적 세계관을 계승하면서도 한걸음 더 나아가 생태의식의 계발과 실천을 촉구하고 있다.
둘째, 선·후천의 교역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천지의 개벽(開闢)이 아니라 인간 도덕성의 개화(開化)로 본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신종교의 공통사상이라고 일컬어지는 후천개벽(後天開闢)사상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며, 도덕개화(道德開化)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셋째, 심성신(心性身) 삼합의 수련관을 정립하여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다. 금강대도 수련법의 독특성은 심성의 수련이 몸의 수련과 일치가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토암은 “심성을 수련하여 몸까지 달하면 몸은 천지를 짝하고 마음은 일월을 합하리라.”고 말하였다.
넷째, 동양의 전통사상을 계승하여 이를 새롭게 재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양적 세계관의 기본원리라고 할 수 있는 음양과 건곤, 오행, 그리고 천지인과 유불선 등의 개념과 사상을 대부분 수용하여 이를 독특한 건곤부모 신앙으로 체계화하고 있다. 토암은 “나는 다른 게 아니라 선성(先聖)이 지키신 도를 다시 밝히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다섯째, 한국적 종교사상을 계승하여 이를 새롭게 승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남천포덕 초기부터 단군에 대한 숭봉의식이 있었고, 신앙대상의 주체성이 바로 서게 된 오늘날에 있어서도 3대 건곤부모에 대한 숭봉과 함께 여전히 단군국조에 대한 의례가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 단적으로 이를 증명한다. 이 밖에도 단오, 유두, 칠석 등 단군 이래의 민속을 계승해 오고 있는 점, 백의민족의 전통대로 흰 한복을 즐겨 입는다는 점, 그리고 3-5년에 한번 씩 중요한 고비가 있을 때마다 직접 옥황상제를 주신으로 모시는 천제를 행하여 한민족 고유의 제천의례를 지켜내고 있다는 점 등은 금강대도가 한국적 종교문화를 계승하려는 강한 의지의 소산이다.
여섯째, 어육을 금하여 채식주의를 철저하게 실천한다는 것이다. 이청학은 “어육을 먹는 자는 인도(人道) 환생은 가능하지만 신선과 부처되기는 어렵다.” 고 하였다. 천지의 호생지덕(好生之德)을 실천하는 수련을 통해 천지의 화육에 참여하는 인간이 차마 생명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음식의 청결’로도 말하고 있는데, 청결한 음식은 어육을 금하는 것, 즉 불식어육류(不食魚肉類) 이다.
《대순회보》 15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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