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의 업은 후손에게 유전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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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2.23 조회3,068회 댓글0건본문
근래 예방의학이 발달하면서 자신의 가족이나 가까운 친척의 건강 상태와 앓은 병, 유전병, 사망 원인 등의 의학적 내력인 가족력(家族歷)을 살펴 병의 예방과 치료에 이용하고 있다. 부모나 조부모가 특정 질병을 앓았다면 자신도 그와 같은 질병에 걸릴 확률이 높으므로 미리 검진하고 예방하는 것이다. 이런 질병 외에도 특정 형질이 선대로부터 후대에 전해지는 것을 유전이라고 한다. 유전을 확연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머리카락 색, 키, 생김새 등의 외모이다. 외모 외에도 지능도 유전의 영향이 크다는 것이 정설이며 과학적으로 확실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성격, 기질, 적성 등의 정서적인 부분도 자신의 부모나 선조를 닮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제아무리 운동을 열심히 하여 왕(王) 자 복근을 얻는다 해도 자신의 아기가 태어날 때부터 그런 복근을 가지는 것은 아니며, 김연아 선수가 결혼해 딸을 낳아도 그 아이가 자동으로 엄마가 지닌 뛰어난 실력을 물려받는 것도 아니다. 즉 생물학적 정보 이외에 후천적 노력으로 얻은 재능이나 실력 또는 삶의 경험이 후세에 온전히 전해지지는 않는다는 게 상식적이며 기존의 과학적인 입장이다.
그런데, 기존의 이런 입장을 뒤엎는 새로운 과학인 후성학(後成學 : Epigenetics)이 등장하였다. 후성학이란 우리의 경험이 유전자의 배열을 바꾸지 않고 유전자의 작용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 후성학의 등장으로 과학이 전면 부정했던 선조의 경험이 후손에게 전해진다는 입장이 되살아나고 있다.
◈ 기존 과학이 밝힌 유전
유전의 규칙성을 발견하여 유전학의 과학적 토대를 쌓은 사람은 오스트리아의 수도사였던 멘델(Mendel, 1822~1884)이다. 멘델 이전에는 유전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정자와 난자 속에 있는 액체가 섞여서 부모의 특징이 이어지는 혼합 이론이 사용되었다. 멘델은 이 이론에 대항하여 부모의 특성, 즉 형질을 결정하는 물질은 어떤 단위로 환원될 수 있는 물질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그 후 서턴(Walter S. Sutton, 1877~1916)이 현미경으로 메뚜기의 생식 세포 분열을 관찰하던 중 감수 분열 시 세포 속에 있는 염색체의 행동이 멘델이 가정한 유전 인자의 행동과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903년 “유전 인자는 염색체 위에 있으며, 이는 염색체를 통해 자손에게 전달된다.”는 염색체설을 발표하여 유전학 기초를 세웠다. 또한 서턴은 염색체 수보다 유전 인자 수가 더 많으므로 하나의 염색체에 여러 가지 유전 인자가 존재할 것이라는 가설을 제시하였다. 1909년 요한센(Wilhelm L. Johannsen, 1857~1927)은 ‘유전자(gene)’라는 용어를 처음 제시하였으며, 1926년 모건(Thomas H. Morgan, 1866~1945)은 초파리를 재료로 한 실험을 통해 “유전자는 염색체 위의 일정한 위치에 존재하며, 대립 유전자는 각각 상동 염색체의 같은 위치에 있다.”는 유전자설을 발표하였다.
이 염색체는 세포의 핵 속에 있으며 세포가 분열할 때만 일반 현미경으로 관찰된다. 전자현미경으로 핵 속을 관찰하면 실 모양의 구조물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 실 모양의 구조물을 염색사라고 하며 핵 속에 풀린 상태로 있다가 세포 분열 시 꼬이고 응축되어 막대 모양으로 된 것이 염색체이다. 이 염색체는 DNA(deoxyribonucleic acid)와 히스톤 단백질로 이루어져 있으며, 유전 물질의 본체가 바로 DNA이다.
이 DNA가 유전 물질이라는 여러 가지 간접적 증거가 발견되었다. 그 증거로는 첫째, 한 생물의 모든 체세포가 갖는 DNA 양이 같다는 것이다. 둘째, 체세포의 DNA 양은 생식 세포의 DNA 양의 2배라는 점이다. 대를 거듭하더라도 자손이 갖는 유전 물질의 양은 어버이와 같아야 하므로 생식 세포에서는 유전 물질이 반으로 줄었다가 수정에 의해 원래의 양으로 회복된다. 셋째, 세균에 자외선을 쪼였을 때 돌연변이가 일어나는 비율이 가장 높은 파장은 260nm로 DNA가 자외선을 최대로 흡수하는 파장과 일치한다. 일반적으로 돌연변이는 유전물질의 변화에 의해 일어나며, 260nm의 자외선은 세균의 DNA에 최대로 흡수되어 DNA의 구조적 변화를 일으킴으로써 세균의 돌연변이율을 증가시켰다고 유추할 수 있다. 이후 여러 과학자들의 노력으로 DNA가 바로 유전 물질임이 밝혀졌으며, 1953년에 마침내 제임스 왓슨(James Watson, 1928~ )과 프랜시스 크릭(Francis Crick, 1916~2004)에 의해 DNA가 이중나선 구조로 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DNA가 유전 물질임이 분명해지자 DNA의 유전 정보가 어떻게 표현되는 지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졌다. 그 결과 유전자는 단백질 합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이 밝혀졌다. 크릭은 DNA의 유전정보는 핵 안에서 다른 핵산인 RNA에 전달되고, 이 RNA가 세포질로 나와 단백질 합성에 관여한다는 ‘유전 정보의 중심설’을 발표하였다.
현재의 유전학은 분자 수준에서 접근하여 인체의 유전정보를 완전히 해독하려는 게놈프로젝트(Genome Project)에 착수하여 2003년 미국에서 처음으로 인간의 유전자 지도를 100% 완성했다. 해독 결과 원래는 10만 개 정도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던 유전자가 실제로는 2만~2만 5천 개만 있다고 밝혀져서 과학자들의 예상을 깼다. 또한 이 유전자가 인체의 모든 생명 현상을 통제하고 지령을 내린다고 생각하였지만 유전자를 활성화하고 발현시키는 것은 주변 환경의 영향에 달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유전 정보를 담고 있는 것은 DNA이고 우리의 정보가 여기에 프로그램 되어 있지만 정작 유전이 되는 현상은 환경과 상호작용을 통해 일어나는 것임이 밝혀지고 있다. 유전자는 실제로는 환경에 의해 통제받거나 유기체의 환경에 대한 자각에 의해 조종받는다는 것이다. 또한 DNA 이외의 단백질 등도 유전 정보를 지니고 있음이 최근 연구에 의해 발표되었다.
◈ 새로운 유전학, 후성학
유전 정보가 100% 일치하는 일란성 쌍둥이라고 하더라도, 오랜 기간 산후에 두 개체의 형질이 100%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유전정보가 같다고 하더라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 그 유전자 발현 양상 및 활성에 차이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유전자 발현 양상의 차이가 생기는 원인 중 하나로 후성학적 현상이 논의되고 있다.
후성유전의 예로 염색질 개조(chromatin remodeling)가 있다. DNA와 그 나선 안에 파묻혀 있는 공 모양의 히스톤(histone) 단백질을 통틀어 염색질(chromatin)이라 하는데, DNA가 히스톤을 감싸는 방식이 변하면 유전자 발현의 양상도 변한다. 이와 같은 염색질 개조는 종종 DNA 메틸화(DNA methylation)에 의해 일어난다. DNA의 염기 서열에서 시토신(cytosine)과 구아닌(guanine)이 연속적으로 번갈아 존재하는데 여기에 메틸기(CH3)가 붙으면 시토신이 메틸시토신으로 변한다. 아직 그 원인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특히 메틸화가 심하게 일어난 부분은 그 정보가 발현되지 않는다. 이렇게 메틸화 반응이 일어나도 DNA의 염기 서열 정보는 바뀌지 않고 그대로 유지된다.
실제 일란성 쌍둥이에 대한 조사에 따르면, 3살 전후에서 이 일란성 쌍둥이 사이의 DNA 메틸화 양상은 매우 비슷하나, 50살이 되어서는 그 양상이 매우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유전자의 활성 및 발현 양상의 차이에 DNA의 메틸화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분자생물학 수준에서 후성학의 연구가 이루어지는 것 외에 후성학적 이론을 뒷받침하는 간접적인 증거들도 있다. 한 예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네덜란드 전역에 식량공급이 차단되었던 1944년에 엄마 뱃속에서 겨울을 보낸 아이들이 있다. 이 아이들이 태어난 후 성장 과정에서 보통 아이들보다 유달리 당뇨병, 고혈압 등의 대사 장애에 많이 걸렸다. 유사한 예로 미국에서 9.11 테러 전에 임신되어 태어난 아이들 또한 대사 장애에 많이 시달렸다. 이런 예들은 부모의 정서적 경험이 후손에게 전달되어 영향을 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와 유사한 예들이 많이 보고되고 있다.
후성학이 학문적으로 이제 시작 단계이지만 그 연구가 계속 진행되면서, 선천적으로 가진 유전자뿐만이 아닌 살아가는 환경 또한 상당히 중요함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동일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또한 우리를 포함한 자연의 많은 생명체에는 자신뿐만이 아닌 선조들의 경험과 삶 그리고 주변 환경의 정보가 입력되어 있는 것이다.
◈ 세상을 기억하는 몸
우리말 몸은 ‘모으다’에서 유래되었고 몸의 영어 단어인 ‘body’는 ‘box’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둘 다 ‘모아 담는다’는 의미이다. 이 말은 곧 몸은 이 세상을 담는 그릇이며 우리가 세상과 맺은 관계의 기록이라는 의미이다.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소장이자 의철학자(醫哲學者)인 강신익 교수는 우리는 살아가면서 무수히 많은 경험 즉 먹었던 것, 사랑, 이별 등의 모든 것이 고스란히 우리 몸속 세포에 각인되고 유전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런 정보는 어디에 기록되는 것인가? 강 교수에 의하면 후성학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런 정보는 유전자뿐만이 아닌 단백질 등의 다른 부분에도 기록되어 전달된다고 한다. 그는 우리 몸을 “과거 조상의 삶과 현재의 삶이 담겨있어 세상을 담는 봉투요, 역사책이며 미래를 여는 창”이라고 보았다.
이처럼 현재의 최신 과학은 몸을 단순한 기계나 육체로 보는 관점이 아닌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런 관점은 우리 몸에 과거 무수한 조상들의 정서와 삶이 녹아있으며 우주 음양오행의 원리가 녹아 있는 소우주체로 보는 동양 전통의 인체관에 점차 접근하고 있다. 이처럼 조상들의 삶이 우리 몸에 녹아있다면 우리는 정서와 생활습관을 바르게 하는 수신(修身)을 통해 후손에게 잘 물려주어야 할 것이다.
《대순회보》 1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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