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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혼, 도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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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3.09 조회2,19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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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는 오랜 역사적 전통의 기반 아래 무형, 유형의 다양한 문화유산을 일구어 왔다. 탈춤과 같은 무형문화에서부터 건축물이나 나전칠기, 그림과 글씨 등과 같은 유형문화에 이르기까지 여러 다양한 문화유산들이 전해왔다. 그 중 가장 널리 민족의 삶에 분포되었으며 친숙한 문화로 도자기를 들 수 있겠다. 전국 어디를 가나 옛 도자기(陶瓷器) 없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생활과 함께한 도자기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것은 우리 선조들의 문화와 정치, 경제를 이해하는 데 귀한 시금석이 된다.

 

도자기의 유래와 종류

 

  우리나라 도자기 문화는 기원전 6,000~5,000년경 신석기시대의 토기(土器)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지에서 유물을 발굴할 때 가장 먼저 출토 되는 것이 흔히 질그릇이라고 하는 빗살무늬 토기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옹기도 토기의 하나로 들 수 있다.

  흙을 빚어 구운 모든 기물을 도자기(陶瓷器), 또는 줄여서 도자(陶瓷)라고 하는데, 그러한 도자기는 토기, 석기, 도기, 자기 등의 종류로 구분한다. 토기(土器)는 점토를 빚어 700℃~800℃에서 구운 것으로 대부분 유약을 바르지 않는다. 토관, 화분, 기와 등과 신석기시대의 것이 이에 속한다. 도기(陶器)는 도토[陶土: 붉은 색이나 검은색의 진흙(또는 점토)]를 사용하여 800℃~1,000℃에서 구운 것으로 조질이 치밀하고 단단하다. 고급식기류, 커피세트, 내장타일, 변기 등과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가 여기에 해당한다. 석기(石器)는 천연점토 그대로 사용하여 1,100℃ 이상의 높은 온도에서 구운 것으로 전기용 애자(子: 전기용 절연재)나 장식품 등과 통일신라시대의 경질토기가 이에 속한다. 자기(瓷器)는 도자기 중에서 가장 발전된 것으로 자토(瓷土, 회색이나 백색의 고령토)를 원료로 하여 1,200℃~1,500℃ 정도의 높은 온도에서 구워 만든 것이다. 이때 흙속의 유리질들이 녹아 강도가 매우 높은 것이 특징이다. 청자와 백자가 여기에 속하는데 청자로부터 비롯되어 더 발전된 형태가 백자이다. 이는 고령토와 유약의 차이에서 오는 것인데, 백자에서 사용되는 고령토와 유약이 청자의 것보다 더 순수하고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굽는 온도 또한 청자의 경우 1,280℃ 정도이지만, 백자의 경우는 1,300℃ 정도로 더 높다.

 

도자기 만들기

 

  일반적으로 도자기 만드는 과정은 모두 여섯 단계이다. 순차적으로 수비(水飛), 성형(成型 : 모양만들기), 시문(施紋 : 문양넣기), 초벌구이(애벌구이), 시유(施釉), 재벌구이로 진행된다.

  1. 수비 - 우리 옛 도자기가 간직한 아름다움의 비밀은 태토, 즉 흙에 있다. 좋은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좋은 흙을 찾아야 한다. 우리나라에는 각 지역마다 독특한 흙이 있다. 이렇게 찾은 점토나 사토 같은 원료를 곱게 분쇄한 후 불순물을 체에 걸러 제거하고, 물속에 넣고 휘저어서 미세한 앙금만을 채취하는 과정이다.

  2. 성형 - 채취한 앙금을 물기를 빼고 일정기간 그늘에서 말린 후 충분히 반죽하여 원하는 형태를 만든다. 기형(器型)을 만드는 방법은 물레성형(成型)이 대표적이며, 석고틀을 이용한 압출성형(押出成型)도 많이 이용된다.

  3. 초벌구이 - 성형한 기물(器物)을 그늘에 말려 초벌구이(또는 애벌구이)를 하는데, 800℃~900℃ 정도로 굽는다. 초벌구이를 하는 이유는 기물을 단단하게 하여 문양을 넣을 때 물감이 번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4. 시문 - 초벌구이한 기물의 표면에 용, 당초, 모란 등 원하는 문양을 넣어 유약을 바른다. 고려청자만의 독특한 상감(象嵌)01기법이나 양각(陽刻), 음각(陰刻), 투각 등의 경우는 초벌구이를 하기 전에 문양을 새긴다.

  5. 시유 - 일찍이 중국인들은 고려청자를 보고 비취처럼 아름답다고 하여 청자를 “비색(翡色. 또는 翡翠色) 청자” 라 격찬했다. 청자나 백자가 그토록 아름다운 것은 성형된 기물 위에 입혀진 유약 때문이다. 유약은 기본재인 장석, 규석 그리고 도석 등을 아주 잘게 분쇄한 다음, 여기에 융재에 해당하는 나무재나 석회석, 또는 대리석 적정량을 섞어 물에 개면 찰기가 생긴다. 초벌구이를 한 기물에 유약을 잘 입혀서 가마에 쟁이고 불을 때면 표면의 유약이 녹아 아름다운 도자기가 만들어진다. 시유의 방법에는 기물을 유약에 담그는 담금법과 분무기로 분사하는 분사(噴射)법, 그리고 붓에 유약을 묻혀 칠하는 필화(筆華)법 등이 있다.

  6. 재벌구이 - 도자기는 첫째도 흙, 둘째도 흙, 그리고 불때기라 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기장이 가마에 불을 때는 작업은 도자기의 공정에서 가장 중요하고 특별한 작업이다. 작품을 가마에 넣고 나면 인간의 의지를 떠나 가마의 신에게 맡겨진다고 하는데 이는 가마에 불을 붙이고 나면 오직 결과만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재벌구이는 1,200℃~1,300℃에서 3~4일간 불을 때는 작업으로 환원염(還元焰) 및 중성염(中性焰) 산화염번조(酸化焰燔造) 등의 방법이 있다.

 

청자, 분청사기 그리고 백자

 

  먼 옛날 생활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도자기는 가야, 삼국시대를 거치면서부터 점차 균형 잡힌 조형미와 소박한 한국미가 특징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우리의 도자기 문화는 삼국시대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는데, 삼국시대 이후 우리 도자기 문화는 크게 고려의 청자와 이조백자, 그리고 청자에서 백자로 이어지는 과도기에 만들어진 분청사기로 구분할 수 있다.

  불교국가인 고려사회는 중앙집권적인 귀족사회가 점차 안정되어가면서 문화적으로도 성숙하였다. 이러한 토대 위에 도자기 기술도 더욱 발전하여 한반도의 도자기 역사상 가장 세련되고 화려한 분위기의 청자(靑瓷)가 생산되었다.

  청자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데, 은은하면서 맑고 그윽한 비색의 순청자(純靑磁)와 유려하고 탄력 있는 선의 흐름과 회화적이면서 시적인 운치가 있어 고려의 자주성이 잘 드러나는 상감청자(象嵌靑磁), 그리고 물감을 붓에 듬뿍 묻혀 무늬가 두드러지게 한 퇴화문(堆花紋)과 같은 그림을 그려 넣은 화청자(畵靑磁)로 나누어진다.

  고려인들이 선호한 문양으로는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무늬, 길상적 의미를 지닌 구름과 하늘세계를 상징하는 학이 어우러진 운학문(雲鶴紋) 등이 있다.

  고려 후기 청자에서 백자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서민의 정서를 띠면서도 독창성과 현대적 감각이 잘 표현된 분청사기가 만들어졌다. 분청자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청자에 하얀 백토로 분칠을 했다는 뜻이다. 분청사기는 상감청자에서 변형·발전된 것으로 활달하고 자유스러운 가운데 대담하면서도 유려한 선의 흐름이 내재되어 있다. 이것은 추상적이고 불확실한 내세보다 구체적이며 실증적인 현실을 강조한 고려 말의 신진 사대부들의 의식의 변화에 기인한다. 그러한 신흥 사대부의 요청으로 고려 말의 상감청자가 실용화, 대중화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분청사기인 것이다.

  당시 일본인들은 수더분하여 친근하게 다가오는 분청사기의 하나인 막사발(또는 황도사발)을 특히 동경하였다. 그들은 이 막사발을 오사카성(大阪城)과도 바꾸지 않았다고 한다. 막사발을 구하려는 일본인들의 욕망이 임진왜란을 일으키는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으로 수많은 사기장들이 일본으로 잡혀감으로써 일본은 도자기를 제작하는 계기를 맞았고, 이와는 반대로 조선의 분청사기는 16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점차 줄어들다가 그 맥이 끊어졌다. 분청사기의 소멸로 우리나라의 도자기 문화는 청자시대에서 백자시대로 넘어가게 된다.

  고상한 선비정신이 배어 있는 듯한 조선의 백자, 거기에는 여유로우면서도 꼿꼿한 조선인의 모습이 담겨 있다. 길이 아니면 가지 않았던 선비정신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에 단 한 점뿐인 작품을 만들어 내려고 고뇌하던 사기장의 창조적 쟁이[匠人]정신, 이 둘이 융합하여 과장이나 기교가 없이 조화된 절제의 미를 창조해 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흰 무명옷이 또 하나의 상징이 되었듯, 도자기에서도 순수를 상징하는 순백자(純白瓷)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 외에도 상감백자(象嵌白瓷), 청화백자(靑畵白瓷), 철화백자(鐵畵白瓷), 진사백자(辰砂白瓷) 등의 종류가 있다.

  조선 왕실이나 선비들은 중국에서 수입한 코발트02로 문양을 넣은 도자기를 선호하였는데, 특히 깨끗한 백자위에 청화안료로 사대부의 기개를 나타내는 사군자나 용을 그린 청화백자(靑華白瓷: 푸른색 무늬를 넣은 자기)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 문양으로 모란, 당초, 학 등을 선호하였다.

  백자는 조선인의 강인한 심성과 온화한 정서를 담아내었으며, 화선지에 그림을 그린 듯 한 청화백자의 섬세한 필치는 마치 자연을 마주하고 있는 듯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간결하게 표현된 여백의 미와 단순한 형태와 차분한 색이 주조를 이루는 백자는 수많은 세계의 도자기 중에서도 높은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도자기의 혼(魂) 사기장(沙器匠)

 

  우리의 문화유산인 도자기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너머로 보이는 가난하고 고단한 생활, 질박한 생을 숙명으로 안고 살다간 사기장의 삶과 그들의 역사가 있다. 시련은 사람을 옥으로 만들기도 한다. 사기장, 그들은 고단하고 질박한 삶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들의 처지를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예술로 승화시킨 사람들이다. 그러한 겁액을 극복한 사기장의 정신은 세월을 건너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살아있는 교훈이 된다.

  무슨 일이든 10년이면 그저 좀 알만 하고, 20년쯤 하면 전체적으로 파악이 되고, 30년을 해야 비로소 그 하는 일에 대해 자신할 수 있다고 한다. 한사람의 사기장은 숱한 세월을 굽고, 부수고, 연구하여 오로지 스스로의 노력과 의지로만이 만들어진다. 도자기 만드는 기술이 손에 익을 대로 익고, 마음에는 한 점 사심이 없어 무심하기까지 한 사기장은 도자기로 흙과 하나가 된다. 그래서 사기장이 만드는 도자기는 손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텅 비어 무심한 마음으로 빚은 도자기는 사기장의 생명이자 혼이 된다. 흙으로 빚은 도자기에는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묻어 있다.

  우리 모두가 사기장이 도자기를 빚는 일념(一念)으로 하루하루를 정성스럽게 생활한다면 각자가 소원하는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참고문헌>

ㆍ강경숙, 『한국도자사』, 평화당, 1993
ㆍ『한국민속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
ㆍ이기백, 『한국전통문화론』, 일조각, 2002
ㆍ윤용이, 『우리 옛 도자기』, 대원사, 2004
ㆍ윤용이, 『아름다운우리도자기』, 학고재, 2004
ㆍ신정희, 『사기장 신정희』, BOOKin, 2007

 

01 상감은 자기(瓷器)가 마르지 않았을 때 문양을 음각(陰刻)하고, 그 부분에 백토니(白土泥), 또는 자토니(紫土泥:붉은 흙)를 메꾸고 초벌구이를 한 다음 다시 청자유(靑瓷釉)를 바르고 재벌구이를 하는 자기의 장식기법이다. 상감기법은 은입사기법 또는 나전칠기의 기법에서 영향을 받아 유래되었는데, 12세기 고려청자에서 처음 고안되어 15세기까지 애용되었다.

02 백자에 문양을 넣을 때 사용하는 푸른색 물감으로 도자기 외에 유화물감이나, 유리 등의 착색제로 쓰인다. 조선시대에는 아라비아에서 나는 코발트를 수입하여 사용하였는데, 코발트는 당시 같은 양의 금값보다 비쌌기 때문에 청화안료로 문양을 넣은 청화백자는 상대적으로 가격이 비싸다. 아라비아를 한자로 회회(回回)라고 하여, 아라비아에서 수입한 푸른색 안료인 코발트를 회회청(回回靑)이라고 불렀다. 

 

《대순회보》 1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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