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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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3.09 조회2,152회 댓글0건본문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마을과 산천의 안녕과 풍요를 위해서 묵묵히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 주었던 장승. 그것은 우리의 이웃이며 혹은 마을 지킴이로서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존재로 인식되어 왔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작품도 아니요 특출한 기술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투박한 모습을 하고 있는 나름의 멋이 있는 장승! 그 세계로 들어가 보자.
장승의 기원
장승의 기원은 사찰의 토지 경계 표시에서 나왔다는 장생고 표지설, 솟대ㆍ선돌ㆍ서낭당에서 유래되었다고 보는 고유민속 기원설, 남방 벼농사 기원설ㆍ환태평양 기원설과 같은 비교민속 기원설 등이 있다. 확실한 기원은 알 수 없지만 현재로서는 고유민속 기원설과 비교민속 기원설이 함께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편 고유민속 기원설에서는 장승을 솟대, 선돌, 신목(神木) 등과 함께 신석기, 청동기 등 선사시대의 원시 신앙물로서 유목 및 농경문화의 소산으로 보기도 한다. 장승은 일종의 수호신상으로 제정일치 시기 씨족, 부족민의 공통적 염원을 담은 지배이념의 표상으로 기능하다가 삼국시대 들어 중앙집권적 기틀이 마련되고 불교, 도교, 유교 등의 통치 이데올로기가 체계화 됨에 따라 불교와 습합되어 전승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신라시대 초에 중국으로부터 풍수지리, 도참설(圖讖設) 등을 배워 온 도선국사(道詵國師)에 의하여 만들어진 사찰, 탑 등과 더불어 국가 산천을 비보(裨補)[도와서 모자람을 채움]한다는 중요한 임무를 갖고 있던 장생에서 뿌리를 찾기도 한다.
장승의 기능
장승은 소재나 소속에 따라 마을 장승, 사찰 장승, 공공 장승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마을에 있는 수호신을 모신 상당(上堂)으로서 장승이 일반적이고, 사찰 장승은 풍수지리설에 의한 보호와 진압의 기능을 지녔으며, 공공장승은 성문ㆍ병영 그리고 길과 바닷길의 안전을 지키는 기능을 지녔다.
장승은 이와 같이 세운 목적이나 위치에 따라 기능이 다르다. 장승은 단순한 경계표나 이정표의 역할에서부터 잡귀와 질병에서 사람들을 보호해주는 수호신, 때로는 개인의 소원성취를 기원하는 신앙의 대상이 되기까지 하였다.
또한 장승의 기능을 시대별 추이에 따라 보면, 신라 말기의 ‘장생’의 주기능인 임금의 만수무강 기원이 고려에 들어와 국가비보사찰을 표기하면서부터 국기(國基)의 연장을 위한 산천비보장생이 되었고, 조선조에는 사찰영역의 경계를 표시하다가 점차 그 기능이 소멸되었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수(壽)ㆍ부(富)ㆍ귀(貴)ㆍ강녕(康寧)ㆍ자손중다(子孫衆多)가 가문의 최상의 목적이었다. 이것을 달성하기 위하여 겉으로는 유교를 신봉하며 합리주의 사상을 유지하던 유신(儒臣)들도 가정에서는 불교신앙의 오랜 전통을 벗어나지 못하고, 원찰(願刹)ㆍ원당(願堂)을 건립하여 가문의 융성과 자손의 번창을 기원하였다. 유신들은 “두창은 중국의 강남에서 오는 역신(疫神)인 호귀(胡鬼)마마가 우리나라에 와서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며 병을 퍼뜨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을로 들어오는 동구나 고갯마루에 무서운 장승을 세워 호귀마마가 마을 침입을 못하고 달아나게 하였다 한다.
장승의 영험을 믿었던 백성들은 가족의 질병 쾌유, 장사하러 떠나는 사람의 재수와 안전 기원, 처녀ㆍ총각의 훌륭한 배우자 만남, 기우(祈雨), 어부의 무사귀환 등을 빌었다. 이렇듯 장승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임금을 위하다가 산천 및 사찰과 서민의 삶을 위하는 존재로 기능이 바뀐 것으로 그 명맥을 이어왔음을 알 수가 있다.
장승의 형태와 제작
장승을 제작하는 재료로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기본적으로 나무와 돌이 있다. 사용된 재료에 따라 구분하면 목장승과 석장승, 그리고 복합장승으로 분류된다. 목장승은 소나무나 밤나무를 주로 사용하며 2, 3년마다 새로 만드는데 경우에 따라 하나, 한 쌍, 다섯 방위에 남녀 한 쌍씩을 혹은 경계 표시마다 세우기도 한다.
목장승의 형태는 나무 장대에 새를 조각하여 올려놓는 솟대형과 통나무에 먹으로 사람 얼굴을 그리고 글자를 써서 나무에 묶어서 기대어 놓은 목주형, 인태신을 조각한 신장조상형이 있다.
석장승의 형태는 선돌형, 석적형(돌무더기), 석비형, 신장조상형이 있고, 복합장승은 흙무더기나 돌무더기에 솟대와 석인이 복합된 형태이다. 한편 사찰에서 세운 석장승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암석인 화강암을 사용한 것이 제일 많다. 우리 민족의 조형기예가 숙련된 것이라기보다는 창작성이 뛰어났고, 모방이라기보다는 개발에 노력한 근거를 이 장승에서 뚜렷이 볼 수 있다. 장승은 웅위(雄威)한 것, 익살스러운 것, 소박한 것들로 볼수록 구수하고 멋이 있다.
장승의 생김새에는 인면형(人面形), 귀면괴수형(鬼面怪獸形), 미륵형(彌勒形), 문무관형(文武官形) 등이 있다. 인면형 중의 남장승은 머리에 관을 쓰고 눈을 부릅뜨고 수염을 달고 있는 형상이며, 여장승에게는 관이 없으며 얼굴에 연지와 곤지를 찍고 몸체를 청색으로 채색하기도 한다. 귀면괴수형은 왕방울 눈과 주먹코에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다. 미륵형은 불교조각과는 다르게 질박하여, 자비스럽고 친밀감이 든다. 이밖에도 형태에 따라 석비형(石碑形)ㆍ입석형(立石形)ㆍ석적형(石蹟形) 등이 있다.
장승은 그 형태나 크기에 있어서도 다양하거니와, 몸체에 새기거나 쓰인 이름도 다양하다. 천하대장군ㆍ지하여장군류,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ㆍ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과 같은 도교적 장군류, 방위신장류, 불교의 영향을 받은 호법선신(護法善神)ㆍ방생정계(放生定界) 등의 호법신장류, 풍수도참과 결부된 진서장군(鎭西將軍)ㆍ방어대장군(防禦大將軍) 등의 비보 장승류(裨補 類), 두창 장승류 (痘瘡
類)가 있는데 이 가운데 천하대장군ㆍ지하여장군의 명문이 가장 많다.
이렇듯 장승 형태에 나타나듯이 우리나라는 오래 전부터 많은 외침과 전쟁이 있었고, 그 과정에 괴질 등으로 어려워진 나라와 고달픈 백성들의 삶의 연속이었는데 나라와 마을의 안정을 위해 장승을 대체로 강인한 힘이 느껴지는 신장이나 장군류 형상 등으로 세워서 그 당시 겪고 있던 어려움들을 극복하고자 노력했음을 알 수가 있다.
장승의 제작은 장승제 전날 이루어지며 매년, 2년 또는 윤달이 드는 해마다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마을의 산주들은 서로 자기 산의 나무를 장승목으로 써주기를 원한다. 산이 결정되면 노인들은 농기(農旗)를 들고 풍장을 치고, 청년들은 낫과 톱, 도끼 등을 들고 산에 오른다. 장승목으로는 소나무ㆍ밤나무ㆍ물오리나무ㆍ버드나무 등이 쓰인다. 적당한 나무가 선정되면 그 앞에 주ㆍ과ㆍ포 등을 차리고 간단한 제를 올린다. 그리고 나서 “이 나무는 마을 사람들과 산주가 의논하여 빌렸으니 그리 아시오”라고 산신에게 고하기도 한다. 나무를 베어 들고 내려올 때는 남상으로 쓰일 재목이 먼저 내려오고 그 뒤를 여상목이 따른다. 순이 바뀌거나 남녀를 함께 들고 내려와서는 안 된다. 베어온 나무는 솜씨 있는 마을 주민에 의하여 다듬어진다. 까뀌ㆍ자귀ㆍ대패 등에 의하여 능숙한 솜씨로 마을 특유의 장승 생김새가 잡히면 촌로가 묵(墨)으로 마무리하고 명문(銘文)을 쓴다.
이렇게 만들어진 목장승은 이전의 장승을 뽑고 대신 세우는가 하면, 이전의 장승들을 그대로 놔두고 그 옆에 추가하여 세우는 경우도 있다. 이때, 오래되어 썩은 장승이나 이미 넘어진 장승은 뒤쪽에 뉘어놓고 절대 사람의 손을 타지 않도록 주의하는 경우도 있다.(경기도 광주 일대) 석장승은 교체할 필요가 없으므로 금줄이나, 솟대만을 새것으로 바꾼다.(괴산군 청천면 사담리)
장승제
장승제는 마을 입구나 사찰입구에 세워진 장승을 대상으로 지내는 마을공동제의이다. 그 유래는 370여 년 전 병자호란 당시 호군들이 남한산을 포위하고 있으면서 점령지 주민을 괴롭히고 전란이 끝난 직후부터 전염병이 창궐하여 부락의 안녕과 전염병 침투를 막기 위한 방편으로 부락민이 산신에게 치성을 드리고, 부락 어구에 장승을 세워 수호토록 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제일(祭日)은 음력 정월 대보름으로 택하는 경우가 가장 흔하다. 이날은 상원(上元)02이라고 하여 그해 중 가장 풍만한 보름달이 처음 뜨는 날로, 그 신비로운 달에 대한 경외심은, 그들이 축일로 택하여 1년 동안의 모든 염원을 올리는 가장 적합한 날이라고 여기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시간 역시 제일(祭日) 밤에 행하는 경우가 가장 많으며 그 외에 제일 전날의 자정 직전이나 제일 아침 또는 대낮에 지내는 등 각양각색이다.
제관(祭官)은 제를 맡아서 치르는 이들을 일컫는데 그 자격은 나이 지긋한 성인남자, 부정이 없는 자, 주변이 정결한 자, 심신이 깨끗한 자, 제일의 일진이 생기(生氣), 복덕(福德), 천의(天宜)에 맞는 자 등이어야 한다. 제관이 정해지면 그로 하여금 제단이나 장승 주변을 청소시키고 주위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펴 일반인의 출입을 금한다. 제의의 절차는 분분하지만 그 순서를 보면, 진설(陳設) - 재배(再拜) - 헌작(獻酌) - 재배(再拜) - 독축(讀祝) - 소지(燒紙) - 헌식(獻食) -파제(罷祭)[진도군 군내면 덕병리]와 같이 간단히 지내는 곳이 많다.
헌식은 마을 당산이나 장승 앞, 또는 길거리에 음식을 묻거나 뿌리는 일로 진도군 군내면 덕병리의 경우는 ‘소고기 한 점이 귀신 천을 쫓는다’는 말이 있듯이, 장승 앞에 우육(牛肉)을 묻는다. 제의가 끝나면 제단이나 제주의 집, 또는 이장 집에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음복을 하고, 제관의 노고를 위로하여 풍물을 치면서 흥겹게 지낸다. 이때가 되어야 비로소 각종 금기가 해제되는 것이다.
장승의 현대적 계승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과거에는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한 것들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요소요소에 신격들을 배치하여 그들의 신력을 빌고자 하였다. 오늘날 미신 타파를 비롯하여 물질문명의 도입, 의술의 발달, 외래종교의 도입 등으로 인해 농촌의 기본적 민간 신앙의 구조가 무너지는가 하면 속신의 무능력을 업신여김에 따라 부락 단위의 신앙적 형태가 십 수년 사이에 적지 않은 손상과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장승은 기능과 이름이 시대와 놓인 상황에 따라 약간 변했을 뿐 꾸준히 우리와 호흡을 같이 하였다.
이와 같이 장승류의 맥이 오늘날에 맞는 새로운 변환을 시도하였으니, 바로 1980년 중반부터 각 대학에 세워지기 시작한 ‘시국 장승’이다. 각 대학에서는 통일을 의미하는 상징물을 세운 것이 다름 아닌 ‘장승’이었다. 여러 대학에 세워진 장승들의 생김새도 학생들의 참신한 상상력에 의하여 만들어진 까닭에 각 대학마다 독특하고도 해학적인 모습을 가득 담고 있다.
민간신앙을 미신이라고만 치부하며 그 사이에 두꺼운 벽을 쌓아 버린 시각으로는 문화의 실질적인 계승발전이 불가능하다. 장승도 형태와 기능이 장승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새로이 인정받을 수 있는 장승의 계승 및 부활이 가능한 것이다. 서서히 사라져가는 장승에 대한 재현뿐 아니라, 장승이 우리의 소망 및 문제점을 함께 나누고 풀어 줄 것이라는 믿음이 다시 살아나는 기점이기도 하다. 장승의 역할이 여기서 머물지 않고 지역과 지역 사이의 경계에도 서로의 불신을 없애고 믿음과 더불어 상부상조한다는 의미의 장승을 세울 수 있듯이, 장승에 담겨 있는 조상들 삶의 멋과 지혜가 우리의 생활 속에 더불어 다가올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01 ‘장승’은 장생(長生), 장생( ), 장승(長丞), 장선(長善, 長仙), 장신(長信), 법수(法首), 수구(水口)막이, 돌하르방 등을 포괄한 말로서 현행 유일의 표준말이다.
02 명일(名日)의 하나. 음력(陰曆) 정월(正月) 보름날
참고문헌
ㆍ김두하, 『벅수와 장승』, 집문당, 1995
ㆍ『브리태니커 백과 사전CD GX』, (C)한국브리태니커회사, 2002
ㆍ『한국세시풍속사전』「정월편」, 국립민속박물관, 2004
ㆍ김두하, 『장승과 벅수』, 대원사, 2004
《대순회보》 10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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