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신신앙(山神信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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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2.20 조회1,653회 댓글0건본문
사람은 자연에서 태어나서 살다가 결국 죽어서 자연으로 돌아간다. 이 말은 자연이 곧 나의 출발점이요, 동행자이고 귀착점이라는 말이다. 내가 자연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자연에 의지하여 살다가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믿으면, 자연의 생명체를 함부로 해치지 않고 오히려 자연을 나 자신처럼 여기며 애정을 갖고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농경사회에서 자연환경에 순응하며 자연을 생산의 원천으로 살아온 우리 민족은 자연을 인간과 같이 희로애락과 지덕체를 겸비한 또 하나의 인간으로 생각하는 자연관을 갖고 있었다. 그런 관념 속에서 산(山)은 그저 해발 얼마인 흙과 바위와 나무와 물이 있는 곳이 아니고, 생물이나 무생물도 사람에게 기뻐하고 화내고 칭찬하고 벌을 주는 등 인격을 갖고 있다고 여겼다. 특히 유난히 산악지대가 많은 자연환경에서 우리 민족은 일찍이 산악을 신성한 것으로 여기고, 숭배와 경외의 대상으로 삼았다. 또한 그 산에는 하늘의 신이 내려와 좌정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그 신이 바로 산신(山神)이었다.
더구나 이 산신은 만물을 생육(生育)시킨다고 믿었기에 ‘산신 할머니’, ‘산신 할매’처럼 여신(女神)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는 점이다. 지리산의 ‘마고할미’, 한라산의 ‘설문대할망’이라고 한 것에서 여신으로서의 산신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고 산신의 시원이 여성은 아니었다. 산신에 관한 최초의 기록인 ‘단군신화(檀君神話)’에는 단군이 사후에 아사달(阿斯達)의 산신으로 좌정했다고 하여, 최초의 산신은 본래 남성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 남신은 통일왕조가 성립하고 농경이 도입되면서, 여성이 가지는 생산성의 속성과 겹합되어 여신으로 변모하게 된다. 또한 고려 이후로는 다시 산신의 성별이 남성으로 바뀌지만, 일부에서는 여성 산신의 신앙이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그것은 여성이 갖는 다산, 풍요, 풍농의 상징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제주도 ‘설문대할망 신화’에서 그러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태초에 하늘과 땅이 서로 붙어 있었는데 설문대할망이 천지를 분리시켜 하늘을 위로 가도록 하고 땅은 아래로 가도록 한 뒤 사람들이 살 수 있도록 물속에서 치마로 흙을 파 올려 제주도를 만들어 놓았다. 다시 흙을 일곱 번 떠놓아 한라산을 만들었다. 한라산을 쌓기 위해 흙을 퍼서 나르다 치마의 터진 부분으로 새어나온 흙이 360여 개의 오름이 되었다. 또 한라산 봉우리가 너무 뾰족해서 그 부분을 꺾어서 잡아 던지니, 아랫부분은 움푹 패여 백록담이 되고 윗부분은 산방산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설문대할망이 오줌을 누자 온갖 생명이 쏟아져 나왔다. 큰 고래에서부터 작은 물고기, 해산물과 해초에 이르기까지 제주의 바다를 풍요롭고 기름지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오줌은 비가 되어 척박한 제주 땅을 적셔주어 토전(土田)의 윤택과 오곡을 풍성하게 하였다. 또한 그녀를 믿고 따르는 제주인들이 자신에게 제를 올리면 강우와 다산(多産) 그리고 풍요를 안겨주었다. 시간이 흘러 그녀는 설문대하르방과 짝을 이뤄 오백 아들을 낳고 한라산을 수호하는 산신으로 좌정하였다.”
여기 신화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산신의 주된 신력(神力)인 강우(降雨)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농업을 기반으로 삼아왔다. 농업에는 물이 필요하며, 그것은 곧 비를 의미하였다. 따라서 강우의 예지 능력을 가졌을 경우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 한 예로 신라 9대 왕 벌휴이사금(伐休尼師今, ?∼196)은 풍운(風雲)을 점쳐서 미리 수재(水災)와 한재(旱災) 그리고 흉년(凶年)이 있을 것을, 또 남의 사정을 아는 까닭에 사람들이 성인이라 불렀다고 한다.01 더구나 강우의 능력을 가진 신(神)이라면, 사람들에게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라 할 수 있다. 특히 강우의 능력을 소유한 신들 속에서 산신은 강우의 능력뿐만 아니라 만물을 낳는 지모신(地母神)02의 능력을 가진 경외의 최상위 대상이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산신에 대한 경외심을 일으키게 되었고, 더욱 경배하는 작용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지가 만물을 낳아서 키우는 모신(母神)으로서 숭상하는 믿음은 세계의 농경문화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이 신화에서 강우의 또 다른 측면을 엿볼 수 있는데, 그것은 설문대할망의 방뇨 행위에서다. 송석하(宋錫夏)의 『한국민속고(韓國民俗考)』에 따르면 여자들의 방뇨는 전라도 지방에서 전승된 것으로, 가뭄이 심해지면 마을 부녀자들이 산 정상에 올라 방뇨를 했다고 한다.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희한하고 이상한 사람으로 보겠지만, 엄연히 이것은 강우와 관련된 농경의례(農耕儀禮)03의 한 부분이었다. 곧 산신을 노하게 하여 비를 유도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여성이 신이 내려오는 통로이자 인간과 신이 만날 수 있는 신성한 장소를 오염시키면, 신은 노하여 이 더러움을 정화하기 위한 장치인 ‘비[우(雨)]’를 내린다는 상징성을 띠고 있다.04 그만큼 산신은 농경사회에서 물이나 비바람을 관제하여 한해의 풍년을 좌우하는 것으로 관념되어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여신 못지않게 산신의 신격(神格)으로 등장하는 존재가 호신(虎神), 즉 호랑이05다. 호랑이는 동물 중에서도 우리 민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일제시대 일본인이 채록한 한국의 민속자료 중 산신과 호랑이의 관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산수(山水)의 신으로는 산신, 수신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산신각 안의 산신화상은 대개 호랑이를 데리고 있는 도사 또는 불승과 같은 복장을 한 노인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또한 호랑이도 산군(山君)이라는 딴 이름이 부여되어 있고, 호랑이는 산신의 사자이며 혹은 산신으로도 생각하고 있다. 또한 산 그 자체를 산신으로 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예를 들면 개성 교외에 있는 덕물산(德物山)의 경우는 산꼭대기에 있는 수목의 가지를 채집하는 것조차 금기되고 있다. 그곳에는 산신나무가 서 있고 산신암(山神岩)이 있어서 산신제를 행하고 있다. 무경(巫經: 무당이 독송하는 경문)으로 산신경(山神經), 산신축(山神祝) 등이 있다. 산에 나 있는 것을 채집하고 산에 나무를 베러 산에 들어갈 경우에 행하는 산신제는 조선 사람이 산악을 얼마나 숭배하는가를 충분히 나타내고 있다. 또한 옛날부터 산수를 주유하며 팔도의 명산을 찬미하는 풍습이 있었던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이 글에서 호랑이가 산신의 사자(使者)이며 또는 산신으로 생각하고 있고 산과 호랑이 자체를 산신으로 본다고 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산신에 대한 신관(神觀)을 나타낸다. 그리고 ‘산신화상(山神畵像)’은 산신도(山神圖)를 말하며, 산신은 호랑이를 거느린 노인의 모습임을 볼 수 있다. 또한 ‘산군[山君: 백수(百獸)의 우두머리]’이라는 말은 호랑이의 별칭으로, 그 외에 산군자(山君子)·산령(山靈)·산신령(山神靈), 백두산 인근에서는 노야(老爺) 혹은 대부(大父)로 불렀다. 이렇게 산의 주인으로까지 불린 데에는 오래전부터 호랑이를 숭배와 경외의 존재로 여겼기 때문이다. 곧 우리민족의 풍속에 대하여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 ‘예(濊)’조에 “그 풍속은 산천을 존중한다. 산천에는 각기 부계(部界)가 있어서 서로 간섭할 수 없다고 하고 호랑이에게 제사 드리며 그것을 신으로 섬긴다.(祭虎以爲神)”고 하는 기록에서, 일찍이 우리민족은 호랑이를 신성시하여 섬겼음이 나타난다. 더구나 조선시대의 백과사전류인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도 “익히 호랑이를 산의 주인[山君]으로 여겨, 무당이 진산(鎭山: 큰 산)에서 도당제(都堂祭)06를 올렸다.”라는 기록을 볼 때, 호랑이는 후대에 이르기까지 산신으로서의 숭배를 받았다. 반면 신화의 첫 등장인 ‘단군신화’를 보면, 호랑이는 자신의 야성적인 성질을 뛰어넘지 못해 곰에게 인간이 되는 기회를 빼앗겨 초라하게 비춰지는 모습이 아이러니하다.
“이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에 살고 있었다. 늘 환웅에게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를 빌었다. 이때 환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 심지와 마늘 스무 줄기를 주었다. ‘너희가 이를 먹고 백 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바로 사람이 되리라.’ 곰과 범은 이를 받아먹었다. 삼칠일을 삼가여 곰은 여자가 되고 범은 삼가지 않아서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웅녀와 결혼해주는 사람이 없어 매양 신단수 아래서 아기 갖기를 빌었다. 환웅이 이에 사람으로 변하여 웅녀와 혼인하였다. 잉태하여 아기를 낳으니 단군왕검이라 하였다(時有一態一虎同穴而居 常祈于神雄 願化爲人 時神遺靈艾一炷蒜二十枚曰 爾輩食之不見日光百日便 得人形熊虎得而食之 忌三七日熊得女身 虎不能忌而不得人身 熊女者無與爲婚故每於壇樹下呪願有孕 雄乃假化而婚之孕生子號曰壇君王儉).”
그럼에도 호랑이는 풍속이나 민담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동물로 우뚝 선다. 풍속에서는 화재(火災), 수재(水災), 풍재(風災) 등의 재앙을 막아주는 벽사(辟邪)의 기능을 갖춘 존재이자, 마을을 수호하고 농업의 강우를 주관하는 신수(神獸)로 등장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민담의 내용에도 고정적인 이야깃거리였는데 사람이 착한 일을 하면 그를 도와주기도 하고 사람에게 도움을 받으면 은혜를 갚기도 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런가하면 현실에서는 산중 혹은 인근 마을에서 사람이나 가축에게 해를 끼치는 가장 두려운 호환(虎患)의 존재였다. 어쩌면 인간에게 쉽게 동화되지 못하는 호랑이를 두려워하는 인간의 본능이 급기야 호랑이를 신앙의 대상으로 올려놓게 되어 살아 있는 호랑이를 산신령으로 받들고 제사까지 지내는 풍속을 남긴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산신에 대한 숭앙과 외경은 사찰의 수호신으로 다시 한 번 변화를 겪는다. 주지하다시피 산신은 본래 불교와 관계가 없는 우리 고유의 토착신이었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두 개의 길로 나뉘어졌다. 그 하나는 민간신앙으로 전승되었고, 다른 하나는 불교의 한 신앙 형태로 흡수되었다. 곧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온 후 토착신인 산신이 불교와 습합(習合)07하여 사찰의 경내를 수호하는 수호신으로서 신앙되거나 영험 많은 부처의 화신으로 재앙을 덜게 하는 기복적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산신을 모셔놓은 전각이 바로 산신각(山神閣)인데, 다른 불교국가에서는 볼 수 없는 공간이라 한다. 산신각의 위치는 불가의 주 경배 대상이 모셔진 불전의 뒤쪽에 위치하며 산신각, 산령각, 삼성각, 칠성각, 칠성보전 등으로 불리며 독립된 전각으로 존재한다.
산신각 내에는 산신의 신격이 의인화된 초상이 그려져 있는 산신도가 자리해 있다. 산신도는 불로초나 부채를 들고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선풍도골(仙風道骨)의 노인으로 묘사된 산신과 산신의 사자로 묘사된 호랑이 그리고 인간의 뜻을 하늘에 전달하고 하늘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는 통로인 우주목(宇宙木) 소나무로 표현된 그림이 일반적이다. 그 뿐만 아니라 불가의 산신도에는 산신은 물론이고 도교에서 연원된 북두칠성 및 불교적인 독성[獨聖: 나반존자(那畔尊者)의 다른 이름]을 함께 모시며 복합구조를 이루고 있다. 또한 그 도교적 색채를 산신도 배경에 있는 3개의 산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 산들은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三神山), 즉 봉래산(蓬萊山)·영주산(瀛洲山)·방장산(方丈山)을 묘사한 도교의 이상향을 일컫는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도 금강산을 봉래산(蓬萊山), 지리산을 방장산(方丈山), 한라산을 영주산(瀛洲山)이라 하여 이 세 산을 삼신산으로 일컬어왔다. 이뿐만 아니라 부안의 변산(봉래산), 정읍의 두승산(영주산), 고창의 방장산을 ‘호남의 삼신산’이라 부르며, 하늘의 신이 깃든 곳으로도 여겼다. 이렇게 우리 고유의 ‘산신신앙’은 불교와 도교의 습합을 통해 더욱더 민중 속으로 깊숙이 스며들었다.
지금까지 예로부터 전승된 ‘산신신앙’을 살펴보았다. 우리에게 있어 산신은 산을 수호하는 절대적인 신령으로, 농경사회에서는 물이나 비바람을 관제하여 한 해의 풍년을 좌우하는 신격으로 받들었다. 그래서 나라에 전란이 있거나 어려운 일이 생겨 신조(神助)를 바랄 때는 여지없이 제사를 올리고 기원하였으며, 한 마을의 평안이나 농작·기우 등에도 마땅한 예로서 정성껏 산신께 기원하였다. 이렇게 우리민족은 마을의 안녕을 비롯해서 나라의 번영을 기원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산신에 대한 믿음과 숭배가 두터웠다. 또한 우리의 ‘산신신앙’은 불교와 도교의 만남을 통하여 다시 새롭게 이해되고 대중적 신앙으로 자리 잡았고, 두 종교가 이 땅의 전통적 종교로 뿌리를 내릴 수 있게 하는 토양의 역할을 했던 것이 무엇보다 큰 의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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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엘리아데 지음 / 박규태 옮김, 『상징, 신성, 예술』, 서광사,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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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王占風雲 預知水旱及年之豊儉 又知人邪正 人謂之聖.
02 지모신은 천신과 짝을 이룬 신격으로 만물을 생성하게 하는 힘 또는 근원으로 간주된다. 또한 천부지모(天父地母)의 양상을 띤 건국신화에서 왕조의 창건주를 낳는 모신(母神)적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땅(大地)이 곧 어머니(母)로 여겨졌고, 과거 농경 사회에서 모든 생산물은 땅에서 얻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땅은 생활의 터전인 동시에 만물이 생성되는 근원이었다.
03 농경사회에서 농작물의 풍요한 수확을 위하여 신적 존재에게 기원하는 행위. 고래로 영고(迎鼓)·동맹(東盟)·무천(舞天)·제천(祭天) 등이 농경의례이며 가뭄을 해소하여 농작물의 순조로운 성장을 기원하는 기우제 역시 농경의례다.
04 용신(龍神)이 있다고 믿는 용소(龍沼)에 심한 가뭄이 들면, 개를 잡아서 생피를 뿌리거나 머리를 던져 넣는 풍습도 그러한 것이다. 또한 경주 지방에서는 기우제 때 무당들이 속옷을 벗고 치마만 입은 채로 치마를 들며 춤을 춘다. 이것은 음란한 행위가 아니라 기우제라는 엄숙한 제의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상징적인 행위이다. 이 역시 여인들이 방뇨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성의 부정적인 행위를 드러내어 하늘을 노하게 하여 비를 부르는 것이다.
05 호랑이란 말은 ‘호랑(虎狼)’이라는 한자어에 우리말 접미사 ‘-미’가 붙어서 구성된 낱말이다. 곧 범과 이리의 조어(造語)이다. 그런데 ‘호랑’이라는 낱말의 어원이 당시 일본 사람들이 범과 이리 같은 사나운 맹수들을 통칭하여 ‘호랑’이라 불렀다고 해서, 그 이후로 흡수되어 일컫게 되었다고 한다. 호랑이의 순수 우리말은 ‘범’이다.
06 동네 사람들이 도당(都堂)에 모여 그 마을의 수호신에게 복을 비는 굿.
07 습합이란 두 문화가 절충하여 서로 변모하고 때로는 제3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문화변용을 말하는데, 습합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예기(禮記)』에서다. 즉 “천자가 악사에게 명하여 예악을 습합하게 한다(內命藥師習合禮樂).”하여 습합을 ‘조절’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런 습합현상은 종교사의 발전과정에서도 특히 신종교에서 흔히 발견되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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