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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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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상덕 작성일2022.06.23 조회1,39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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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팀 한상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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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19의 장기화로 불안감과 우울감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코로나와 우울감을 합친 ‘코로나 블루(Corona Blue)’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코로나 재확산을 반성하며 개선책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국가의 환란에 대한 반성과 유비무환의 교훈이 담긴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의 『징비록(懲毖錄)』을 소개하고자 한다.
  『징비록』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재상이었던 류성룡이 임진왜란을 몸소 겪은 후 집필한 전란의 기록이다. 그는 임진왜란 이전부터 정부의 요직에 있었고 왜란 중에는 전시 총사령관인 도체찰사(都體察使)와 영의정을 겸임하여 왜군을 물리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재상이다. 그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와 『징비록』을 남겼다. 징비란 『시경(詩經)』 「소비(小毖)」 편에 나오는 ‘여기징이비후환(予其懲而毖後患)’이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는데, 자신의 지난 잘못을 징계하여 훗날 닥쳐올지도 모를 우환을 경계한다는 의미다. 이 책에는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에 걸쳐 일어난 임진왜란의 실상과 임진왜란 이전의 국내외 정세 그리고 전쟁 이후의 상황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당시 조선은 조선왕조가 생긴 이래 200여 년 동안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시기였다. 조선의 정계는 당쟁으로 심한 국론 분열을 겪는 상황으로 전쟁에 대한 준비는 미비했다. 하지만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 시대의 혼란기를 수습하고 정권을 잡고서 일본 전역을 통일한 시기였다. 그가 일본을 통일하자 약 30만 명에 이르는 사무라이는 처치 곤란한 상황이 되었다. 히데요시는 불안정한 일본의 정세를 단합하기 위해 20만 대군을 이끌고 대륙 진출의 야욕을 드러낸다. 임진왜란 초기, 전쟁 준비를 소홀히 한 조선의 군대는 참담한 패배를 당한다.
  전쟁이 일어난 지 약 보름 만에 선조(宣祖, 1552~1608)는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피난한다. 류성룡은 선조를 호종(扈從)하며 국경을 넘어 명나라로 피난하자는 주장에 반대하고 국내에서 끝까지 항전하여 민심을 수습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선조의 피난 행렬을 보는 백성들의 불편한 시선도 생생히 기록하였다. 마산(馬山: 현재 파주시)역을 지날 무렵, 밭에서 일하던 사람이 일행을 바라보더니 통곡하며 말했다. “나랏님이 우리를 버리시면 우린 누굴 믿고 살아간단 말입니까?” 이때 류성룡은 백성들을 지켜주지 못한 조정의 무능함을 뼈저리게 반성하며 그들을 구제하기 위한 마음을 다졌다.
  임진왜란, 그 전란 중에 류성룡은 여러 공적을 남겼다. 그 첫째는 인재 등용이었다. 류성룡은 종6품의 정읍 현감 이순신(李舜臣)을 7등급의 품계를 뛰어넘어 정3품 전라좌수사에, 형조정랑 권율(權慄)을 의주목사로 천거하여 국방에 대비하게 했다. 훗날 이들은 각각 해전과 행주산성에서 승리를 이끌어낸다. 전략이 중요한 전쟁 상황에서 인재를 알아보는 그의 탁월한 안목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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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로 방어체제의 개혁을 주장했다. 기존의 제승방략(制勝方略)을 대신하여 진관(鎭管)의 법을 복구시키자는 것이었다. 진관의 법은 평소 지역별 군사훈련을 받은 진관에 소속되어 있는 군사들이 전시에 현지 상황에 맞게 독립적으로 싸우게 하여 유연하게 적을 교란하는 장점이 있었다. 반면 제승방략은 적의 침입 경보가 내려지면 근처의 군사들이 한군데 모여 중앙에서 파견된 장수의 지휘를 받는 체제였다. 하지만 전란 중에 군사들이 지휘관을 기다리는 과정에서 적의 공격에 효율적으로 대비하기 어려움을 지적하고 진관의 법을 건의한 것이다. 하지만 류성룡의 주장은 “이미 오래전부터 사용해온 제승방략을 갑자기 바꿀 수는 없다.”라는 반대 논리에 막혀 아쉽게도 폐기되고 말았다. 또한, 그는 화기의 제조, 성곽의 수축(修築)을 통한 군비를 확충하고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국방력 강화에도 힘썼다.
  셋째로 군량미의 조달이다. 임진왜란은 사실상 식량 전쟁이었다. 적의 침입이 긴박하여 임금조차도 먹을 것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당시 이처럼 열악한 조건에서 그는 정주 인근 창고의 곡식을 조사해 집결시키고 공명첩과 면역첩을 발급해 백성들의 기근을 해결하기 위해 고심했다. 훗날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배경에는 이순신의 서해안 운송로 장악과 식량을 조달하기 위한 류성룡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
  ‘어찌 앞사람의 잘못을 뒷사람이 고칠 줄 모르고 그대로 답습하여 일을 망친단 말인가! 이러고서도 무사하기를 바란다면 이는 요행에 기대는 것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류성룡의 또 다른 업적이 있다면 임진왜란의 전후 상황에서 과거의 반성이라는 목적의식을 갖고 『징비록』과 같은 사료를 기록하여 후세를 위해 남겨준 것이다.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의 상황에서 재상의 위치에서 지난 잘못의 반성을 통해 미래의 환란을 대비하고자 했던 류성룡의 삶은 지금의 나를 되돌아보게 한다. 수도의 과정에서도 이러한 삶의 자세는 중요하다. 수칙에는 ‘일상 자신을 반성하여 과부족이 없는가를 살펴 고쳐 나갈 것’이라는 구절이 있다. 수도하다 보면 누구나 크고 작은 실수나 잘못을 저지르기도 한다. 하지만 실수나 잘못 이후에도 이를 고치지 않는다면 똑같은 과오를 반복하게 된다. 잘못을 발견했다면 자신을 되돌아보며 객관적인 자기 성찰을 통해 발전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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