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의 길최익현(崔益鉉)과 박영효(朴泳孝)의 원(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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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성수 작성일2017.01.27 조회3,980회 댓글0건본문
최익현(崔益鉉)과 박영효(朴泳孝)의 원(冤)
연구위원 김성수
Ⅰ. 머리말
Ⅱ. 본 론
1. 19세기 쇄국과 개화의 중심 - 최익현과 박영효
1) 화서학파의 이념과 최익현
2) 개화사상가 박규수에게 사사한 박영효
2. 최익현과 박영효의 활동
1) 최익현의 주요 상소와 유배
2) 최익현의 의병활동
3) 급진개화파 박영효와 갑신정변
4) 갑오개혁 시기 박영효의 개혁활동
3. 한일합방과 최익현·박영효의 원
1) 조선을 서양세력으로부터 보호
2) 최익현의 원
3) 박영효의 원
Ⅲ. 맺음말
Ⅰ. 머리말
“상제께서 최익현과 박영효의 원을 풀어 주신다고 하시면서 「천세 천세 천천세 만세 만세 만만세 일월 최익현 천포 천포 천천포 만포 만포 만만포 창생 박영효(千世千世千千世 萬世萬世萬萬世 日月崔益鉉 千胞千胞千千胞 萬胞萬胞萬萬胞 蒼生朴泳孝)」라 쓰고 불사르셨도다.”(공사 2장 22절)는 『전경』 구절에서 몇 가지 궁금한 점을 갖게 되었다. 첫째는, 최익현과 박영효의 원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하는 점이었고 둘째는, 대개 죽은 사람에 대해 원을 풀어주셨던 것과는 달리 당시 살아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1939년까지 호의호식(好衣好食)하며 살게 될 박영효의 원도 풀어주신 점이었다. 이를 알아보기 위하여 그들이 평생 견지했던 사상(思想)과 그에 따른 활동(活動)을 중심으로 하여 두 사람의 생애를 조망해보았다.
최익현과 박영효는 둘 다 격동의 구한말 시대를 살다 간 인물들이었다. 당시 조용한 은자(隱者)의 나라 조선에 불어 닥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거대한 물결은 조선 내부에 두 가지 상반(相反)된 대응방향을 형성시켰다. 도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외세를 배격하고 전통적인 가치관을 강화시키자는 쇄국파(鎖國派)와 서학을 비롯한 새로운 사상과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도모하자는 개화파(開化派)가 바로 그것이었다.
최익현은 한말 위정척사파의 선두주자였던 화서 이항로의 맥을 계승한 대표적인 쇄국주의자였으며, 대쪽 같은 성품과 기개는 목숨을 건 수 차례의 상소과정과 의병운동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또한 그의 일심에 대해서는 상제님께서도 인정하신1) 바 있을 정도로 한 평생 지극한 자세를 견지하였으나, 도학적인 신념을 위해 고종부자의 연을 끊는 죄를 범했던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대업을 이루기에는 충분한 자질을 지니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박영효는 한말 개화 사상가였던 박규수에게 사사(師事)하였고, 부마라는 특수 신분으로 인해 일찍부터 벼슬길에 올랐던 인물이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조선의 부국강병을 도모하기 위하여 갑신정변(1884)을 일으켰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중간에 잠시 귀국은 있었지만 20여 년을 일본에서 머물며 조선 정부의 전복(顚覆)을 통한 개혁을 시도하였다. 마침내 1907년 조선 땅을 밟게 되었으나 얼마 후인 1910년에 합방을 맞으며 개화를 통한 조국의 번영에 대한 꿈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친일파라는 낙인까지 찍히게 되어 후세에 전해졌다.
한편 공사 2장 22절에서 두 사람의 원을 풀어 주시는 장면은 아마도 한일합방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시점일 것이다. 그런데 이때는 이미 상제님께서 조선을 서양세력으로부터 보존하시기 위해 일본으로 잠시 넘기기로 결정하시고 그에 필요한 조치를 모두 취하신 상태였다. 조선이 흘러갈 방향을 이미 알고 계시던 상제님께서는 구한말의 역사를 대표할 수 있는 이 두 사람의 처지가 매우 안타까우셨을 것이라 짐작된다. 서로 방향은 달랐지만 그들이 걱정한 것은 백성과 조국의 앞날이었다. 한일합방은 극단적인 배일주의자였던 최익현의 입장에서는 생각하기도 싫은 조국의 미래였을 것이고, 살아생전의 모습대로라면 정말 죽어서도 눈을 못 감는 상황이 펼쳐졌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민족의 장래를 위한 배후세력으로 일본을 선택한 박영효 또한 조선이 일본에 합방되고 그것이 우리 민족의 아픈 기억으로 남게 됨으로써 결과적으로 민족반역자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박영효는 살아 있지만 이미 죽느니만 못한 사람이 된 것이었다.
Ⅱ. 본론
1. 19세기 쇄국과 개화의 중심 - 최익현과 박영효
1) 화서학파(華西學派)의 이념과 최익현(崔益鉉)
개국 이래 조선사회를 지탱해 온 통치이념은 도학(道學 : 주자학)이었다. 그런데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도학이 점차 쓸모없는 개념논쟁으로 치닫게 되자, 여러 가지 이질적(異質的) 사상조류들(陽明學, 實學, 西學)로부터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조선사회는 심각한 사상적 동요를 경험하게 되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한 노력 또한 도학자들 사이에 일어났는데, 그 중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 바로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 : 1792~1868)였다.
그는 양근 벽계(楊根 檗溪 : 현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 벽계마을)에서 태어나 생애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냈다. 그의 학문적 연원은 부친 이회장(李晦章)과 부친의 친구들로부터 시작되나 그의 학문은 어느 특정 스승의 영향이 아닌 스스로 독서하고 궁리하여 체득한 것이었다. 그는 주자의 『사서집주』와 『주자대전』을 20년 넘게 연구하였고 이어서 『송자(송우암)대전』도 공부하였다. 그리고 “학자가 주자를 종주(宗主)로 삼지 않으면 공자의 문정(門庭)에 들어갈 수 없고, 송자를 헌장(憲章)하지 않으면 주자의 통서(統緖 : 한 갈래로 이어온 계통)에 접할 수 없다.”라고 선언함으로써 ‘공자 → 주자 → 우암’으로 이어지는 도통(道統 : 도학을 전하는 계통)을 제시하였다.
구한말 화서의 도학(道學)은 ‘심주리론(心主理論)’과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을 두 중심축으로 삼고 있는데, 이 이론들은 화서학파를 강인한 이념집단으로 만드는 기반이 되었다. 율곡으로부터 이어지는 주기론(主氣論)적 경향이 기호학파의 전통이었고 화서 자신 또한 기호학파의 학맥에 놓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선기후·이주기역(理先氣後·理主氣役)을 주장하여 주리설(主理說)을 확고하게 제시하였다.
주리설은 당시의 혼란했던 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화서의 형이상학적 재각성이라 볼 수 있으며, 이는 화서학파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또 화서는 공자의 춘추대의, 맹자의 벽이단론, 주자의 정통론, 우암의 북벌론을 계승하는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의리론(義理論)을 제시하였는데, 이는 화서학파의 행동원리(行動原理)가 되어 훗날 활발한 의병운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 : 1833~1906)은 14세부터 21세까지 화서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일찍부터 벼슬길에 나갔다. 그는 중암 김평묵과 더불어 스승의 심주리론(心主理論)을 끝까지 지지한 제자였으며 화서의 문인 가운데서 가장 높은 벼슬에 올라 커다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이었다.
포천에서 태어난 그는 4세 때 단양으로 이주하였고 다시 11세 때 화서가 살고 있던 양평으로 이사하였다. 이를 계기로 14세부터 화서 문하에서 수학하게 되었는데, 화서는 그의 탁월한 자질을 사랑하였고 15세 때는 훗날 그의 호가 된 ‘면암(勉菴)’이라는 글을 써 주기도 했다. 면암은 22세 때 포천 고향으로 이사를 온 후부터 성균관에 들어가 과거공부에 열중하여 23세에 명경과에 급제하였으며 24세 이후 성균관전적을 거쳐 사헌부지평, 사간원정원, 이조정랑에 올랐다. 30세 때 신창 현감으로 재직 중 상관인 충청감사에게 항의 하다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고, 32세부터 다시 부름을 받고 벼슬에 나가 예조좌랑을 거쳐 사헌부장령을 지냈다.
그는 30대까지 대체로 평탄한 관료생활을 하였으나 중년인 40대부터는 대원군의 정책에 반대하고 일본을 배척하는 주장을 펴면서 파란을 겪게 되었으며 그 뒤로는 스스로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과격한 상소는 조정 대신들의 공격을 받게 되어 두 차례에 걸친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다.
면암은 60대 이후의 만년(晩年)에도 계속하여 도학적(道學的) 척사론(斥邪論)에 입각한 척왜상소를 올렸으며 의병운동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1906년 74세의 노구로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킨 지 열흘 만에 체포되어 쓰시마 섬에 구금되었고, 4개월 후인 11월 17일(음) 감옥에서 병사(病死)하였다.
2) 개화사상가 박규수에게 사사(師事)한 박영효
19세기 중엽 조선에서는 서양 열강의 침입으로 조성된 민족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일환으로 개화사상이 형성되었다. 그 시초는 중인(中人) 출신 역관이었던 오경석(吳慶錫 : 1831~1879)이었다. 그는 1853~58년의 기간 동안 4차례나 중국 북경에 다녀왔는데, 그 때마다 『해국도지』, 『영환지략』 등의 ‘신서(新書)’를 구입해왔다. 조선에 돌아온 그는 박제가 등의 실학사상을 계승하는 한편 자신이 구입해 온 신서들을 탐독하며 개화사상을 정립해갔다. 서양열강의 침투로 붕괴되어 가는 중국의 실상을 직접 목격하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러한 위기가 조선에도 도래할 것임을 예견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 친구였던 유홍기(劉鴻基,유대치 : 1831~1884?) 또한 오경석의 영향을 받아 함께 개화사상을 습득하게 되었다.
오경석과 유홍기 외에 초기 개화 사상가로 알려진 또 다른 인물이 있다. 그는 조선후기 실학자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朴珪壽 : 1807~1876)였는데, 1861년 조선정부에서 중국에 파견한 위문사절단(영불연합군의 북경점령에 대한)의 부사(副使)로 북경에 다녀오면서 서양열강의 침략상을 목격한 뒤 큰 충격을 받고 신서들을 읽으며 스스로 개화사상을 섭렵해 갔다.
이후 오경석과 유홍기는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병인양요를 보면서 나라를 서양의 침입으로부터 구해내는 길은 개화사상으로 나라를 크게 개혁하고 자주부강한 근대국가를 이루는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정치에 관여할 수 없는 중인(中人)의 신분이었으므로 양반 자제들을 선발하여 그들이 형성한 개화사상을 가르쳐 정치세력으로서의 개화파를 형성시키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그들은 1869년에 고위 양반출신의 개화사상가인 박규수와 동지로서 합류하게 되었다.
박규수는 1870년도부터 자신의 사랑방에서 서울 북촌(양반 거주지역)의 양반자제 중 영민하기로 평판이 나 있던 김옥균, 박영교, 홍영식, 유길준, 박영효, 서광범 등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초기 개화사상가들의 노력에 힘입어 1874년 김옥균이 관계에 진출하게 되자 마침내 정치세력으로서의 초기 개화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급진개화파였던 박영효(朴泳孝 : 1861~1939)의 사상은 바로 박규수에 의해 형성된 것이었다. 박영효는 철종 12년 수원에서 진사 박원양의 3남으로 출생하였다. 출생당시 그의 집안은 짚신을 팔고 다닐 정도로 가난하였지만 박규수의 추천에 의해 11세가 되던 1872년 철종의 장녀 영혜옹주와 결혼한 뒤에는 금릉위 정일품 상보국숭록대부가 되었고, 한성으로 이주하여 진골(현 종로구 운니동)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결혼 후 몇 개월 만에 영혜옹주가 죽어서 홀로 되었지만 박영효는 이후 죽을 때까지 조선 왕조의 부마로서 대접을 받았으며 이는 그의 언행과 생활에 귀족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박영효는 부마라는 신분 덕분에 20세의 젊은 나이에 의금부판사에 임명되는 등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었으며, 1882년에는 수신사절의 대표가 되어 일본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한 그는 10년이 지난 1894년이 되어서야 고국 땅을 밟게 되었다. 그러나 그도 잠깐 이듬해인 1895년 7월에 다시 일본으로 2차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1907년이 되어 조선에 들어오지만 다시 제주도에 1년간 유배되었다가 마산에서 한일합방을 맞았다. 1910년 일제의 회유책에 의해 후작의 작위를 받았으며, 1911년에는 조선귀족회 회장, 1918년에는 조선은행 이사를 역임하였다. 1920년 동아일보 초대사장에 취임하였고, 1926년 중추원부의장, 1932년엔 일본귀족의원을 지냈으며 1939년 9월 21일 사망하였다.
2. 최익현과 박영효의 활동
1) 최익현의 주요 상소와 유배
면암이 임금께 올리기 위해 작성한 소(疏)는 총 30편이다. 이중 5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1895년(63세) 이후인 만년(晩年)에 작성된 것이다. 하지만 중년에 작성된 5편중 1873년(계유년, 41세)과 1876년(병자년, 44세)의 상소는 각각 그를 제주도와 흑산도에 수년간 유배를 보낼 만큼 파괴력이 있는 상소였다. 47세에 유배에서 돌아온 그는 약 20년 가까이 은거생활을 하였고 이 시기에는 상소도 올리지 않았다. 을미년(1895) 이후부터 척왜(斥倭)를 주제로 한 상소를 활발히 올렸고, 1906년에는 대마도에서 죽음 직전에 임금께 올리는 마지막 상소를 남겼다. 30편의 상소 중 그의 사상과 행적을 파악하는데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면암으로 하여금 첫 번째 유배를 떠나도록 만든 상소는 그의 나이 41세 때인 1873년(계유) 11월 3일에 올린 <호조참판을 사직하고 겸하여 생각한 바를 진달하는 소(辭戶曹參判兼陳所懷疏)>인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황묘(만동묘)의 훼철은 군신의 윤리를 무너뜨린 것이요
② 서원의 혁파는 사제의 의리를 끊어 놓은 것이요
③ 죽은 자를 남의 후사로 입양시키는 것은 부자의 인륜을 문란하게 하는 것이요
④ 국적(國賊)을 신원(伸寃)해준 것은 충신과 역적의 분별을 혼동하는 것이요
⑤ 호전(胡錢 : 청나라 돈)을 사용하는 것은 중화와 이적의 분별을 어지럽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면암의 지적은 사실상 1863년부터 73년까지 계속되어 온 고종의 부친인 대원군의 실정(失政)을 탄핵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거기에다가 더하여 “오직 친친(親親)의 열(列)에 속한 사람은 다만 그 지위를 높이고 그의 녹을 중하게 하고 그와 좋아하고 미워함을 같이만 하시고, 나라 정사에는 간여하지 말도록 하시기를 『중용』 구경(九經)의 교훈과 『논어』의 ‘위치를 벗어나 정사를 논한다’는 경계와 같이 하여 … ” 라는 말로 대원군이 고종을 대신하여 정권을 행사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도 피력하였다.
면암의 이 상소는 큰 파문을 몰고 왔다. 조정 신료들은 그를 국문하여 엄혹한 형벌을 내리도록 격렬하게 요청하였고 고종은 면암을 제주도에 위리안치 하도록 명하였다. 하지만 10년에 걸친 대원군의 섭정은 이 상소를 계기로 해서 끝이 났으며 고종은 친정(親政)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고종은 면암의 상소대로 만동묘를 복원시키고 호전(胡錢)을 폐지하였으니 비록 유배를 보내기는 하였으나 최익현의 상소를 대체로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대원군의 정권에 대한 욕심은 실각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어 1881년 9월 고종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자신의 서자 이재선(李載先)을 왕으로 만들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이 시도는 가담자 이풍래의 밀고로 발각되어 실패하였고 고종은 이재선을 포함한 관련자들을 처형하였다. 아버지인 대원군은 처벌할 수 없었으나 이제 부자(父子) 사이는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고 말았다.
사실 1873년 고종이 친정을 선언할 당시 대원군의 실정(失政)은 여러 계층으로부터 반발을 사고 있었다. 서원의 권한과 그 수를 축소하고 양반으로부터도 호포를 징수하여 지배계급이었던 양반들은 그의 타도를 원하고 있었고,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 전쟁을 계속하여 사회를 불안하게 하였으며 당백전과 호전(胡錢)을 유통시켜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갔기 때문에 전 국민이 그의 실각을 원하는 상황이었다. 만일 시간이 조금 더 흘러 대원군이 자식(子息)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정치에서 물러났다면 원(冤)도 남지 않았을 것이고, 다시 1881년의 역모도 꾸밀 이유가 없어 부자 사이가 그처럼 끊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을 해 본다.
혹자는 대원군의 권력에 대한 야심이 부자 사이를 끊어지게 만들었던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고 면암의 상소는 그리 중요한 요인이 되지 못한다고 반박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면암의 상소는 고종으로 하여금 대원군을 몰아내게 하는 직접적인 구실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대원군의 정권에 대한 갈증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는 비난을 면키는 어려울 것이다.
“죄는 남의 천륜을 끊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나니 최익현이 고종 부자의 천륜을 끊었으므로 죽어서 나에게 하소연하는 것을 볼지어다.”(교법 3장 21절)라고 하신 상제님의 말씀으로 우리는 단지 우국지사(憂國之士)로만 알려져 있는 최익현의 행동에 대해 한층 더 깊이 있게 조명해 볼 수 있다.
면암의 두 번째 유배는 44세 때인 1876년(병자) 1월 22일에 올린 <도끼를 가지고 궁궐에 엎드려 화의를 배척하는 소(持斧伏闕斥和議疏)>에서 비롯되었다. 1876년 일본군함 운양호가 강화도에 들어와 위협하자 조선정부는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때 면암은 조헌(趙憲 : 1544~ 1592) 이 임진왜란 직전 우리나라를 위협하는 일본 사신의 목을 베라는 상소를 올릴 때 도끼를 소지하였던 예(例)를 따라 광화문 밖에서 도끼를 지참하고 엎드려 상소를 올렸다. 그는 이 상소에서 일본과의 화친이 국가의 혼란과 멸망을 초래하게 되는 5가지 이유를 들었다.
① 우리가 미약하고 저들이 강한 데 따른 강화는 저들의 끝없는 요구에 직면할 것이므로 그를 모두 들어줄 길이 없고,
② 강화에 따라 우리의 땅에서 나오는 생필품인 유한(有限)한 농업 생산물과 저들의 손에서 나오는 사치품인 무한(無限)한 공업 생산물이 교역되면 우리의 경제를 지탱할 수 없으며,
③ 왜인은 이미 양적(洋賊)과 일체인데 이들을 통해 사학(邪學 : 서교)이 들어와 온 나라에 가득하면 인륜(人倫)이 무너지고 금수(禽獸)가 될 것이고,
④ 저들이 우리 땅에 들어와 왕래하고 살면서 우리의 재물과 부녀를 마음대로 약탈할 때 막을 수가 없을 것이며,
⑤ 병자호란 때의 만주족과 달리 저들은 화색(貨色 : 재물과 여색)만 탐하는 금수로서 금수와 화친하여 어울릴 수 없다.
그런데 일본이 침입하려 한다는 소문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고 피난민이 길을 메우는 상황에서 이런 그의 상소가 다수의 지지를 받을 리가 만무하였다. 더구나 고종(高宗) 또한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버리고 개화정책(開化政策)을 추진하는 입장이었으므로, 신하들의 잇따른 처벌요청이 쇄도하자 이를 받아들여 면암을 흑산도에 위리안치 하도록 명하였다.
병오년(1906) 7월 11일에 일본 대마도에서 작성된 면암의 마지막 상소 <유소(遺疏)>는 그의 충정(忠情)과 척왜(斥倭)에 대한 결의를 잘 드러내고 있다.
죽음을 앞둔 신 최익현은 일본 대마도 경비대 안에서 두 번 절하고 황제 폐하께 말씀을 올립니다. 삼가 아룁니다. 신이 금년 윤4월에 의거(義擧)를 시작할 때 대략 상소로 아뢰었는데, 그 상소가 진달되었는지의 여부를 모르겠습니다. 신이 거사를 잘못하여 마침내 체포되는 욕을 당하여 7월 8일 일본 대마도로 압송되어 지금 그들의 경비대 안에 수감되었사오니 스스로 헤아리건대, 필경 살아서 돌아갈 희망은 없사옵니다. 이제 이놈들은 처음에는 강제로 신의 머리를 깎으려다가 마침내 다시 교활한 수단으로 달래고 위협하니 놈들의 심사를 측량할 수 없으며, 저를 반드시 죽이고야 말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신이 여기에 온 뒤로 한 술의 밥이나 한 모금의 물도 다 적에게서 나온 것인즉, 설령 적이 신을 죽이지 아니한다 해도 신이 차마 구복(口腹) 때문에 자신을 더럽힐 수는 없기에 식사를 거절하고 옛 사람의 ‘자신을 깨끗이 하여 선왕(先王)에게 부끄러움이 없다’는 의리를 따르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신의 나이 74세이니 지금 죽은들 무엇이 아까우리까만, 다만 역적을 능히 치지 못하고 원수를 능히 없애지 못하며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강토를 도로 찾지 못하여 4천 년 화하(華夏)의 정도(正道)가 흙탕에 빠지는 것을 붙들지 못하고, 삼천리강토에 있는 선왕의 백성이 어육이 되는 것을 구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신이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하오나, 왜놈은 멀어도 4~5년 사이에 반드시 망할 징조가 있는데 다만 우리가 대응할 도리를 다하지 못할까 걱정입니다. <… 이하 생략 …>
유소에서 그는 왜놈들이 주는 음식도 거부할 정도의 기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자신은 죽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미래에는 왜(倭)가 망해 물러가리라는 예측을 하고 있다. 하지만 미래는 그의 예측과는 매우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서 조선은 1910년 일본에 합병되고 말았다.
2) 최익현의 의병활동
구한말 상소운동을 주도하던 면암은 1905년 을사늑약을 기점으로 하여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가와 민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장투쟁이 필요함을 절감하였다. 그는 주로 동학농민전쟁의 후유증으로 반일의병을 조직하기 어려운 호남지역을 무대로 활동하였다. 동시다발적으로 의병을 일으켜야 일본의 강력한 군사력을 분산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 이미 의병이 조직되어 있던 충청도 지방을 떠나 아무런 연고도 없던 호남지역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이곳에서 전(前) 낙안군수 임병찬을 만나 서로 힘을 합하여 병기(兵器)와 군량(軍糧)을 준비하였고, 마침내 1906년 6월 4일(음 윤4월 13일) 전북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거의(擧義)하였다. 이로써 을사늑약 이후 호남지역에서 최초의 의병이 조직되었다. 공사 1장 24절에는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키는 장면이 나온다. ‘…최익현이 홍주(洪州)에서 의병을 일으키니 때는 모를 심는 시기이나 … 최익현은 의병의 갑작스러운 약세로 순창에서 체포 되니라.…’
을사늑약 직후 일어났던 대표적인 의병은 충청남도의 ‘홍주의병’과 전라북도의 ‘태인의병’이었고, 이 두 지역의 의병에 대해서는 일제가 특별히 주목하여 주모자들을 가혹하게 처벌하였다. 홍주의병은 이조참판을 지냈던 민종식이, 태인의병은 의정부 찬정을 역임한 최익현이 각각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재야 학자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타 지역의 의병부대와는 대조적이었다. 규모 또한 각각 1천이 넘었으므로 일제는 여러 지역으로의 파급효과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홍주에서 의병이 일어난 시기는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에 의하면 1906년 3월 21일(음 2월 27일)이었다. 이는 대한매일신보 광무 10년(1906) 3월 21~22일자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그리고 면암이 태인 무성서원에서 거의(擧義)한 날짜는 1906년 6월 4일로 꽤 차이가 나고 있다. 모를 심는 시기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공사 1장 24절의 거의는 3월에 발생한 홍주의병보다는 6월의 태인의병 쪽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면암의 문인이었던 최제학의 기록에 따르면 면암은 당시 거주지였던 충청남도 정산(定山) 땅에서(홍주의병장이 된 민종식도 이 당시 정산에 거주하고 있었다) 홍주의병이 봉기한 이후에 그곳을 떠나서 호남으로 향했다고 한다. 그리고 태인의병은 홍주의병에 자극받아서 촉발되었다 한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호서(湖西)와 호남(湖南)의 우국지사들은 그 부당성을 상소로 호소하는 한편, 의병을 일으키려는 움직임을 구체화하였다. 충청도의 이설·김복한 등은 조약의 체결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구금되었다가 1906년 2월초에 석방되었다. 이들은 충남 정산(定山)의 유력한 인물이었던 안병찬과 정산에 낙향해 있던 민종식에게 글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자고 권유하였다. 또 이때를 전후하여 안병찬은 최익현에게 홍주에서 거병하자고 요청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이때 최익현은 호남의 선비들과도 접촉 중이었다.
이러한 거의(擧義) 과정에서 나타나는 정황 외에, 최익현이 체포된 후인 1906년 8월 17일자 『만세보』에 실린 판결문에서도 최익현의 태인의병이 홍주의병과 연계투쟁을 전개하면서 일제와의 외교적 담판을 통해 국권을 되찾을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최익현이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고 해도 틀린 표현은 아닌 것이다.
정리하자면,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켰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장소는 전북의 태인이지만 그는 홍주의병의 거의(擧義)에도 일정부분 관여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전경』의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키니’라는 부분과 ‘때는 모를 심는 시기’라는 부분 사이에는 ‘태인으로 내려 와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는 부분이 생략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 무리가 없을 것 같다.
태인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전북도민들은 최익현의 명성 때문에 적극 호응하였다. 참가한 유생은 5백을 넘었고 일주일 만에 의병은 9백여 명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태인의병은 거병 목표가 전주를 거쳐 북상하여 서울에 포진한 일본 세력과 외교적 담판을 벌여 그들을 몰아내는 것이었으므로 활발한 전투를 전개하지 않았다. 게다가 일본이 조선의 진위대(鎭衛隊)를 통하여 의병을 진압하기로 하자 면암이 “동족끼리는 싸울 수 없다”며 의병의 해산을 지시하는 바람에 불과 10여 일만에 태인의병은 해산되었다.
6월 14일(윤 4월 23일) 진위대는 끝까지 자리를 지킨 최익현을 비롯한 13명을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하였다. 1906년 8월 14일 일제는 이들에게 군율위반죄를 적용하여 최익현에게 쓰시마 섬 감금 3년, 임병찬에게 감금 2년, 고석진·최제학에게 군사령부 감금 4개월, 나머지에게는 태형 100대를 선고하였다. 최익현과 임병찬은 8월 27일에 쓰시마 섬의 이즈하라에 소재한 일본군 위수영으로 압송되었으며, 면암은 1907년 1월 1일(음 1906년 11월 17일) 새벽에 순국하였다.
3) 급진개화파 박영효와 갑신정변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하고 고종이 친정(親政)을 시작한 이후에 조선의 대외정책(對外政策)에는 많은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보통 정권이 바뀌면 전임자와는 다른 정책을 도입하여 권력기반을 강화하는 것이 신임자의 전략이기는 하지만 1863년부터 박규수에게 수학하면서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형성해 왔던 사실이야말로 고종이 개화 쪽으로 눈을 돌린 보다 근본적인 이유라고 생각된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의 체결 후 고종은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 등의 개혁의 의욕에 차 있는 젊은 관리들과 가까이 하면서 그들의 말에 귀 기울였다. 이런 고종의 정책은 원로대신과 유림(儒林)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하였다. 일례로 김홍집이 1880년 2차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조선책략』이라는 책을 가져왔는데, 이를 고종이 읽어보고 대신들에게 배포하자 개혁정책의 필요성에 대한 시비(是非)가 일어 온 나라가 떠들썩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시기 개화를 추진했던 관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 민씨 척족의 후원아래 발탁되고 키워진 개명 관료들(속칭 온건개화파)과 박영효와 김옥균 등 박규수 문하의 개화당(속칭 급진개화파)이 그것이다. 이 두 그룹은 초기엔 서로 협력하면서 조선의 개화정책을 이끌어 갔으나 1882년 임오군란 발생 후에는 서로 입장을 달리하게 되었다. 민씨 세력을 등에 업은 온건 개화파는 개화의 모델을 청(淸)에서 찾으려 하였고, 박영효 등의 급진개화파는 일본(日本)에서 그 모델을 찾고자 하였던 것이다.
한편 임오군란이 진압된 이후 배상문제로 일본에 사절을 파견할 때 박영효는 정일품 금릉위라는, 수신사로 파견되기에는 지나치게 높은 지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수신사의 임무를 자원하였다. 이 때 박영효는 일본으로 가는 배 안에서 태극사괘(太極四卦)를 사용한 우리나라 최초의 국기(國旗)를 만들었으며 일본에 도착하여 이를 게양하였다. 태극기의 효시가 된 이 깃발에서 열강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신음하던 조선을 국기를 가진 당당한 주권국가로 만들고 싶어 하던 박영효의 심정을 엿볼 수 있다. 수신사 일행은 개화당 인사들로 채워졌고 이들은 1882년 9월부터 4개월 동안 일본의 근대문물을 시찰하는 한편 일본의 정치인들 및 일본에 주재하고 있던 각국의 외교사절들과 폭넓게 교류하였다.
수신사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 온 박영효는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고 여러 가지 사업을 벌여 나갔다. 우선 신문발간사업을 추진하였다. 귀국하면서 인쇄기계와 일본인 기술자 등을 데리고 들어왔던 그는 박문국(博文局)을 설치하고 유길준으로 하여금 신문발간을 하게 하였다. 이 사업은 박영효가 한성판윤에서 물러나면서 일시 중지되었다가 1883년 10월 한성순보(漢城旬報)의 간행으로 늦게야 빛을 보게 되었다.
또 다른 사업으로는 치도사업(治道事業)을 들 수 있는데, 이는 박영효가 실각(失脚)하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근대적인 도시를 만들기 위한 이 사업은 도시의 미관과 위생을 위해서는 반드시 시행되어야 할 사업이었지만, 철거를 당해야 하는 한성부민(漢城府民)들의 반대와 박영효의 적극적인 개화정책에 위협을 느낀 민씨 세력의 견제에 부딪혀 실패하고 말았다.
1883년 4월 23일 한성부판윤에서 물러나 광주유수(廣州留守)로 임명된 박영효는 관할지역 내에서 합법적으로 양병(養兵)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신식군대의 양성에 주력하였다. 1천 명 정도의 병력을 모집하여 신식훈련을 시켰는데 김옥균이 일본으로부터 필요자금을 빌리는 데 실패하였고 민씨 세력들의 의심을 사 이번에도 광주유수에서 면직되면서 그가 훈련시킨 병사들은 친군영 전영으로 흡수되었다.
이렇게 하는 일마다 반대세력에 의해 좌절을 경험하게 된 박영효를 비롯한 개화당 인사들은 언제 목숨이 없어질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고, 마침내 거사(擧事)를 결심하게 되었다. 그들은 1884년 12월 4일 우정국(郵征局) 개국 축하연에 반대파를 초대하여 제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같은 계획은 다케조에 일본공사와 거사 10일 전에 협의가 되었는데, 개화당이 친청파제거와 내정개혁을 맡고 일본은 군대를 움직여 이를 보호해주기로 합의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거사가 성공하기는 하였으나 일본의 배신으로 3일 만에 청군에게 진압되고 말았으며 박영효는 김옥균, 서재필, 서광범 등과 일본으로 도망쳤다. 이들은 청과의 종속관계 청산과 내각에 의한 왕권견제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혁신정강 14개조도 만들어 두었으나 공포도 못해보고 사장(死藏)되었다.
4) 갑오개혁시기 박영효의 개혁활동
1894년 동학농민전쟁의 진압을 구실로 하여 조선에 진주한 일본 군대는 7월 23일 조선 왕궁을 점령하여 민씨정권을 전복하고 대원군을 중심으로 한 친일정권을 수립하였다. 갑신정변(1884)의 실패로 일본에 망명하였던 박영효는 1894년 8월 10년 만에 조선 땅을 다시 밟게 되었다.
1894년 12월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앞두고 있던 일본은 이번에는 대원군을 몰아내고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을 탄생시켰다. 박영효는 내무대신으로 임명되었고 홍범14조를 입안하였으며 1895년 7월 물러날 때까지 근대국가를 지향하는 각종 개혁조치들을 주도적으로 추진하였다. 이 시기 박영효는 왕실과 내각의 명백한 분리를 전제로 하는 입헌군주제를 지향하였고, 갑신정변 이후 망명기간 동안 섭렵한 서양의 ‘천부인권설’을 바탕으로 민(民)의 권리증진과 계몽에 진력하였다. 한 가지 예로 교육제도에 관심을 기울여 한성사범학교관제, 외국어학교관제 등을 공포하고 약 200명의 유학생을 일본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와 같은 사상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모순된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군권(君權)의 감소(減少)와 입헌군주제를 지향하면서도 내각의 장악 과정에서는 왕실의 권력에 영합하는 행태를 보인 점이 그것이다. 일본은 박영효에게 김홍집 등의 구(舊)대신과 협조하여 내정개혁을 하여 일본에 유리한 정국(政局)을 만들어주기를 기대하였으나 박영효는 반대로 왕실에 접근하여 구(舊)대신들을 밀어내었다. 구(舊)대신들과의 투쟁에서 승리한 그는 가일층 자신의 주도로 국정을 좌지우지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그는 일본에 대해 거리를 두고 독자노선을 취하였으므로 그들의 경계심을 자극하였고 국정에 조금도 간여할 수 없게 된 왕실과도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박영효에게 일자리를 부탁했다가 거절당해 앙심을 품고 있던 일본낭인 사사키 히데오라는 자가 박영효가 왕비시해와 정부전복을 계획하고 있다는 모함을 하였는데, 왕실은 이를 이용해 박영효를 쫓아내었다. 1895년 7월 7일 박영효는 내무대신에서 면직되었고 일본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가 일본으로 다시 망명하였다.
3. 한일합방과 최익현·박영효의 원
1) 조선을 서양세력으로부터 보호
최익현과 박영효가 각자의 이념(理念)에 따라 조선과 조선백성들의 미래를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을 때, 그들은 알지 못했으나 이미 조선의 운명은 결정되고 있었다. 서교(西敎)와 물질문명(物質文明)을 앞세우고 동양을 점령해가던 서양세력을 막기 위한 상제님의 공사가 진행되고 있던 것이었다.
교운 1장 9절을 보면 “ …서양의 모든 문물은 천국의 모형을 본딴 것이라 이르시고 그 문명은 물질에 치우쳐서 도리어 인류의 교만을 조장하고 마침내 천리를 흔들고 자연을 정복하려는 데서 모든 죄악을 끊임없이 저질러 신도의 권위를 떨어뜨렸으므로 천도와 인사의 상도가 어겨지고 삼계가 혼란하여 도의 근원이 끊어지게 되니 원시의 모든 신성과 불과 보살이 회집하여 인류와 신명계의 이 겁액을 구천에 하소연하므로 내가… ”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을 보면 상제님께서 강세하시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물질에 치우친 서양문명의 폐해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서양인들은 이처럼 도의 근원을 끊어지게 만든 자신들의 문명을 무기로 하여 동양을 정복하고 있었고 더불어 무력을 앞세워 서교(西敎)를 전파하여 식민지의 정신문화마저 절멸시키고 있었다.
맹목적으로 서양문명을 추종하는 사람들과 물질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에게 상제님 말씀이 빨리 와 닿지 않는 현상을 보면 상제님께서 왜 당시 조선을 일시적으로 일본에 맡기면서까지 서양세력으로부터 보호하려고 하셨는지 어렴풋이 이해가 된다.
상제께서 어느 날 가라사대 “조선을 서양으로 넘기면 인종의 차별로 학대가 심하여 살아날 수가 없고 청국으로 넘겨도 그 민족이 우둔하여 뒤 감당을 못할 것이라. 일본은 임진란 이후 도술 신명사이에 척이 맺혀 있으니 그들에게 일시 천하 통일지기(一時天下統一之氣)와 일월 대명지기(日月大明之氣)를 붙여주어서 역사케 하고자 하나 한 가지 못 줄 것이 있으니 곧 인(仁)이니라. 만일 인자까지 붙여주면 천하가 다 저희들에게 돌아갈 것이므로 인자를 너희들에게 붙여주노니 잘 지킬지어다.”고 이르시고 “너희들은 편한 사람이 될 것이오. 저희들은 일만 할뿐이니 모든 일을 밝게 하여주라. 그들은 일을 마치고 갈 때에 품삯도 받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가리니 말대접이나 후덕하게 하라.” 하셨도다. (공사 2장 4절)
“이제 동양 형세가 위급함이 누란과 같아서 내가 붙잡지 아니하면 영원히 서양에 넘어가리라.” 깊이 우려 하시사 종도들에게 계묘년 여름에 “내가 일로 전쟁(日露戰爭)을 붙여 일본을 도와서 러시아를 물리치리라.”고 말씀하셨도다. (예시 1장 23절)
2) 최익현의 원(冤)
위정척사론에 근거하여 서양세력을 배척하는 데에 앞장섰던 최익현은 1876년 일본이 무력을 앞세워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이후 공격의 대상을 서양에서 일본으로 전환시켰다. 그는 일본이 이웃나라가 아닌 침략세력이며 제국주의 서양과 본질적으로 동일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앞잡이라는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을 제시하였으며, 대마도에서 순국할 때까지 상소운동과 의병운동을 주도하여 척왜(斥倭)의 선봉이 되었다.
의병을 일으키면서는 스스로 일본군에게 상대가, 되지 않음을 알고 있었으나 죽음으로써 반일투쟁을 마무리짓겠다는 그의 의지는 헛되지 않아 1907년 후반에 시작된 전라도 의병의 기폭제가 되었다. 이 상태로 조선이 주권을 회복하고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면 최익현 또한 지하에서라도 즐거워했을 테지만 현실은 그렇게 되지 못하고 그가 그토록 싫어하던 일본에 의해 조선이 합병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상제님께서는 아마도 그의 이런 원을 풀어주셨던 것이 아닌가 한다.
또 한 가지는 고종부자의 연을 끊게 된 사건이다. 문제가 된 1873년(계유)의 <호조참판을 사직하고 겸하여 생각한 바를 진달하는 소(辭戶曹參判兼陳所懷疏)>를 올리고 제주도에 위리안치 중이던 1875년(을해년) 1월에 그가 <백종형(伯從兄)에게 보낸 편지>에는 상소 당시 면암의 의도를 읽을 수 있는 부분이 들어있다.
오늘의 의논이 이랬다저랬다 말이 많아 그 요령을 얻을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을 들면 골육지친(骨肉之親)을 이간했다고 하는 데 불과합니다. 그러나 당초 조금이라도 내 뜻이 그러했다면 남녘 바다 귀신이 또한 응당 벌을 주어 죽인 지 오랠 것이니, 어찌 이제까지 생명을 보전하였겠습니까? 그쪽에서 기어이 모함을 하려는 자는 말할 것도 없고 이쪽에서 바른말이라 하는 사람도 반드시 그 옳고 그름을 파헤쳐서 시원스럽게 밝혀주지도 못합니다. 또한 친친(親親)의 서열에 있는 자란 하필 사친(私親 : 대원군을 뜻함)만이겠습니까? 무릇 외척과 내외 훈친(勳親)들로서 집정(執政)·대간(臺諫)에 관계하지 않은 사람은 모두 친(親)이라 말할 수가 있으니 상소문의 결사(結辭)는 결코 과격한 것이 아닙니다. …
이와 더불어 교법 3장 21절의 “최익현이 … 죽어서 나에게 하소연하는 것을 볼지어다.”라는 상제님 말씀을 떠올려보면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종부자의 연을 끊게 만든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모르고 행했다고 그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닐 터,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한 평생을 바쳤다고 생각했던 그가 정작 사후(死後)에 맞닥뜨리게 된 중죄인(重罪人)으로서의 처지가 그로서는 황당하다 못해 원(冤)이 맺힐 법하기도 한 것이었으리라.
3) 박영효의 원(冤)
한일합방 이전까지 박영효의 일생을 관찰해보면 한 가지 특이한 점이 눈에 뜨인다. 그것은 정말로 되는 일이 없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개화와 관련하여 그가 계획하고 추진한 일은 번번이 누군가의 미움을 사거나, 혹은 배신으로 좌절되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의 빈약한 운세로 인해 유야무야 되어 버리고 말았다.
1882년 22세의 나이로 수신사가 되어 일본을 다녀온 이후 한성판윤이 되어 신문발간 사업, 치도(治道)사업을 추진하였으나 민씨 척족의 미움을 사 광주유수로 좌천되었다. 광주에서 이번에는 근대적 군대양성을 시도하였으나 여기서도 쫓겨나게 되었다. 2년 후에는 목숨을 걸고 갑신정변을 일으켜 성공하는 듯 했으나 이 역시 결정적인 순간에 일본 측이 배신을 함으로써 3일 천하로 그치고 그는 일본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894년 12월 17일 김홍집·박영효 내각이 성립되어 갑오개혁의 주체로서 조선의 개화정책을 펴 나갔는데, 이번에도 역모혐의를 뒤집어쓰고 일본으로 다시 도망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일본에 망명해 있던 시절 조선에서는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하여 일본 내의 조선인 망명자들은 박영효를 중심으로 결집하게 되었고, 의화군(1870~1917)을 왕위에 옹립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거사시점을 1898년쯤으로 잡고 준비하였으나 의화군이 일본에서 회합한 망명자들과 찍은 사진을 본국으로 보낸 것이 궁내부에 탐지되어 사전에 계획이 노출되었고 의화군 자신도 미국으로 건너가 버림으로써 무산되었다.
1900년 7월에는 러시아와 일본 간에 만주·한반도를 분할 점령하자는 밀약이 오고 갔다는 소식이 조선에 전해지면서 조선 내에 위기의식이 감돌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 박영효로 하여금 또 다른 거사를 계획하게 만들었다. 거사자금 마련을 위해 활빈당원까지 동원하였는데 이들은 박영효로부터 조용히 일처리를 하라고 지시를 받았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공개적으로 부호들한테 돈을 요구하고 공공장소에서 연설까지 하였으므로 정부의 눈에 띄어 토벌되고 말았다.
이후 박영효는 1905년 5월부터 고베에 한국인 학생들을 위한 교육기관인 조일신숙(朝日新塾)을 설립하여 장래의 박영효 파(派)를 양성하고자 하였으나 계속되는 재정난으로 인해 1년 반 만에 문을 닫게 되었다.
박규수에 의해 개화사상에 눈을 뜬 박영효는 인생의 대부분을 조선의 개화를 위해 소비하였다. 하지만 위에 서술한대로 모두 헛된 노력으로 끝나고 말았다. 갑신정변 당시 일본의 힘에 의존한 개혁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이후 그는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개화를 이루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해왔다. 하지만 그에게 밀어닥친 한일합방이라는 사건은 그간의 모든 희망마저 접을 수밖에 없는 거대한 환경의 변화임에 틀림없었다. 이점에서 비록 사상(思想)은 다르지만 최익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풀리지 않는 원(冤)을 맺을 수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한일합방 이후 일제의 회유책에 넘어가 후작의 작위를 받았으며, 이후에도 각종 요직을 역임함으로써 대표적인 친일파로 낙인찍혀 후세에 전하게 되었다. 상제님께서는 이례적으로 당시 살아 있던 박영효에 대해서 원을 풀어 주셨는데, 이는 안 그래도 하는 일마다 그 뜻을 이룰 수 없었던 박영효가 이제는 차라리 죽는 것보다도 못한 처지가 될 것을 안타깝게 여기셨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Ⅲ. 맺음말
격동의 구한말 시대를 살다간 두 인물의 행적을 따라가 보니 서로 방향은 정반대였지만 각자 국가와 민족을 위해 애쓴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최익현은 척왜(斥倭)의 선봉이 되어 만백성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고, 박영효는 일본을 개화에 이용하려다 도리어 이용당해 대표적인 친일파로 남게 되었다. 당시의 사회분위기로 볼 때 척왜에 대해서는 광범위하게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던 반면에 청에 대해서는 병자호란 시 적대하던 감정은 잊혀지고 어느새 명(明)과 청(淸)을 동일시하는 사고가 퍼져 있었다. 그런데 구한말의 반일감정은 흥선 집권기에 쇄국정책에 힘을 싣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조장된 면이 많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시대의 친청(親淸)과 친일(親日)을 바라보는 현재의 시각에는 약간의 조정이 필요할 듯하다.
수백 년 동안 조선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던 화이론(華夷論)으로 인해 당시 조선의 백성들은 상대적으로 중국으로부터의 속박에는 무감각해져 있던 듯하다. 그러나 현재의 시각으로 본다면 일본에 굴욕을 당하는 것이나 중국에 굴욕을 당하는 것이나 치욕스럽기는 똑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철저한 화이론의 신봉자였던 최익현은 적어도 외교적 자주권만을 놓고 볼 때는, 박영효가 민족반역자로 낙인찍힌 사례와 비교하여, 다소 과대평가된 점이 있지 않은가 싶다.
어쨌든 상제님께서는 이 두 사람의 원을 풀어주시는 공사를 보셨다. 그리고 두 사람의 원(冤)은 공통적으로 조선이 일본에 합방됨으로써 생기게 된다는 것을 살펴 보았다. 이제 좀 더 멀리 떨어져서 이를 바라다보니 그 두 사람의 원은 어쩌면 나라를 빼앗기는 조선백성 전체의 원을 대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순회보》 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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