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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논단세계와 인간에 대한 대순진리회와 불교의 관점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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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재호 작성일2017.01.27 조회3,2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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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와 인간에 대한 대순진리회와 불교의 관점 비교

연구위원 이재호 

 

    한 시대의 사회 문화는 인간이 어떠한 사고(思考) 구조를 가지고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형성된다. 동양 사회는 동양적인 사고 구조를 가지면서 살아온 사람들에 의해 동양 문화를 형성해 왔고, 서양 사회는 서양적 사고 구조를 가지면서 살아온 사람들에 의해 서양 문화를 형성해 왔다. 사고나 생각이란 어떤 문제에서 출발하여 결론으로 이끄는 관념의 과정 혹은 문제 해결의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사고의 주체인 인간은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관점을 가지고 대상을 인식해 나간다. 여기서 사고 형성의 출발점이 되는 ‘관점(觀點)’1)의 사전적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면 첫째는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할 때 그 사람이 보고 생각하는 태도나 방향 또는 처지이다. 둘째는 사물과 현상에 대한 견해를 규정하는 사고의 기본 출발점이다. 

    이 글의 주제인 세계와 인간에 대한 관점은 세계관과 인간관에 포함되는 문제들이다. 관점의 사전적 의미를 적용해 보면, 세계관과 인간관은 세계와 인간에 대한 체계화된 나름대로의 견해를 말한다. 이 글에서는 세계관과 인간관의 형식으로 구분하여 서술하기 보다는 세계와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에 초점을 맞추어서 전개하려고 한다. 그리고 ‘세계’라는 단어 속에는 우주라는 의미, 사회라는 의미, 하늘과 땅이라는 자연의 의미도 내포되어 있는 다소 포괄적인 뜻을 지니고 있는 말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상제님께서 이 땅에 강세하여 선천의 모순을 진단하고 후천선경을 여신 것은 역대 성인들로서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차원의 대공사(大公事)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신성(神聖)·부처·보살이라는 차원 위에 계시는 상제님이시기에 가능한 일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인의 차원과 성인을 넘어서는 차원의 차이는 무엇일까 생각하게 된다. 물론 그 차이는 신명계의 신격(神格)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차이는 성인이 세계를 인식하는 관점과 상제님이 세계를 인식하는 관점을 비교해 봄으로써 명확히 드러난다. 그러므로 관점의 차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또한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사고의 전환 내지는 인식의 전환이 있어야 대상에 대한 관점 변화가 가능하며,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그 시대의 모든 문화에 반영되어 후세에까지 그러한 영향력이 전달된다. 그러므로 세계와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가지는 의미는 그만큼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선천 종교로 대표되는 유·불·선 가운데에서 여기서는 불교를 중심으로 세계와 인간에 대해 어떠한 관점을 가지고 있으며, 대순진리회에서는 또한 어떠한지 비교 검토함으로써 세계와 인간을 바라보는 대순진리회만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들을 우리의 수도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문제이다. 

 

1) 공 개념의 이해

    ‘공(空)’이란 용어의 원어는 고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인 ‘ ( nya)’로 ‘무엇인가 결여되어 있는 상태’, 즉 ‘없는 상태’를 나타내는데 이 말이 불교에 도입되어 ‘공(空)’으로 한역되었다. 석가모니 당시에는 모든 현상은 인연에 의해 성립한다는 연기설을 바탕으로 공의 이론이 전개되었고, 그 후 ‘반야경’을 중심으로 한 대승불교에 이르러서 공은 불교사상의 근본 개념으로 다루어진다. 대승불교에서 이 말은 자성(自性 : 모든 존재가 갖추고 있는 변하지 않는 성질)·실체(實體)·본성(本性)·자아(自我) 등과 같이 인간이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들이 실제로 없다고 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책상’이라는 사물을 생각할 경우, 그 책상에는 책상의 변하지 않는 본질이란 없다고 하는 것을 ‘공(空)’이란 말로 나타낸다. 책상이란 나무와 못 등이 결합(인연)되어 잠시 책상이란 이름을 붙였을 뿐, 사람이 사용하다가 낡아서 해체하면 나무와 못으로 분리되어 더 이상 책상이 아닌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인도의 나가르주나[龍樹 : 150~250]를 비롯한 대승불교의 중도(中道)의 진리를 찾던 사상가[중관파(中觀派)]들은 ‘책상의 자성’이라는 영원한 성격에 집착되어 있는 것은 ‘책상’이란 말에 사로잡혀 함부로 가치판단을 부여하는 인간 내면의 본성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와 같은 집착을 일으키는 원인으로서 잘못된 분별(分別)을 없앨 것을 강조하였다. 특히 ‘자아’와 같이 인간 내면의 본질로 간주되는 것에 대해서도 그와 같은 본질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아라는 말에 집착되어 있는 인간의 잘못된 생각을 경계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그러한 본질, 자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공(空)’이란 용어가 사용되고 또한 우리들이 언어에 대해 일방적으로 부여하는 개념 분별로서의 잘못된 생각을 없앨 것을 공사상은 강조하는 것이다.2)

    불교는 연기설을 근본으로 하여 인도 전통사상에서 말하는 영원한 생명력을 지니는 순수 정신인 아트만[我]을 부정하고 있다. 이것이 불교의 무아설(無我說)인데, 무아설은 인도 전통사상의 부정이며, 그것은 현실 속에서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고정 불변하는 실체적 존재로 여기고 이것에 집착하게 될 때 발생하는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사상적 대안이었다. 그러나 공 개념을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앞에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이, 현실 그대로가 아니라고 해야 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 대중들이 중관파(中觀派)의 공(空)개념으로 세상을 볼 경우에 현실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기 힘들게 된다. 또한 실체라고 여길만한 것은 없으며, 모든 존재는 인연에 따라 임시로 결합된 환상과 같은 것이므로 어떤 것도 긍정할 수 없는 공허한 허무주의에 빠지게 된다. 불교와 대립의 각을 세웠던 유교가 불교를 비판한 부분이 바로 이점이다.

  

2) 유교의 불교 공사상 비판

    북송(北宋)시대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의 불교 비판에서도 불교는 궁극적 실재로서의 리(理)를 부정하기에 허무의 가르침이고 부도덕의 가르침이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장자와 노자와 선불교의 폐해에 대하여 말하였다.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선학(禪學)이 가장 많이 도(道)를 해친다. 장자와 노자는 의리(義理)를 끊어 없애는 데에 아직 미진하다. 불교는 인륜을 이미 무너뜨렸고 선불교에 이르러서는 처음부터 허다한 의리를 소멸시켜 남김이 없다. 이로써 말하면 선불교가 가장 폐해가 깊은 것이다.”3)

  

    주자에 따르면 불교는 인간의 현실 세계에서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법칙을 무시함으로써 윤리를 세우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들은 당연한 법칙뿐만 아니라 반드시 그럴 수밖에 없는 이치를 부정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불교인들이 만물의 근원적이며 변하지 않는 이치인 리(理)를 공(空)으로 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리를 공으로 보는 결과는 성리학적 의리(義理)의 부정이다. 공을 주장하는 한 공자의 가르침인 의리를 세울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불교는 우주만물에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실리(實理)를 부정하고 허리(虛理)를 주장하는 착오를 범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착오의 폐단은 어떠한 실천도 불가능하게 하며, 그 결과 가치와 윤리의 부정으로 귀결되는 도덕의 부재(不在)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다.4)

    이처럼 공사상은 ‘현실이란 인연에 의해 임시로 존재하는 세계’라는 성격과 그러므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그 결과 중관파의 공사상을 통해 사람들은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 자체에 가치 기준이 있는 것으로 이해하기 시작했고, 이것에 대한 보완으로 자기 마음의 인식에 따라 가치 기준이 달라진다는 유식(唯識)사상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유식사상은 불교철학을 이론적으로 심화시키는 역할을 했지만 유식사상 이후의 불교는 서양 철학의 용어로 표현하면 지나치게 ‘인식론적 관념론’5)으로 흐르게 된다. 특히 중국 선불교에서 그런 특징이 매우 두드러진다. 

    

    불교에서는 인간을 욕망이나 무지(無知), 무명(無明) 등에 의해 괴롭게 살아가는 존재로 보고 있다. 또한 세상에서 영원하게 존재하는 것이 없는, 즉 제행무상(諸行無常)하기 때문에 현실은 괴로운 것이다. 인간이 이러한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해탈 혹은 열반에 이르는 것인데, 그것은 깨달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해탈에 도달하는 것이 최선의 삶이다. 불교의 인간 문제는 부파불교의 아라한과 대승불교의 보살로 대표될 수 있다. 

    석가모니 입멸(入滅) 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제자들은 스승이 남긴 법(法)과 율(律)에 대한 입장을 달리하게 되어 교단은 분열하게 된다. 석가모니 입멸 후 100여 년이 지날 무렵에는 전통적인 계율을 고수하려는 보수적 경향의 상좌부(上座部)와 계율을 자유로이 해석하려는 진보적 경향의 대중부(大衆部)로 분열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20여 부파(部派)로 분열되는데 이 시기의 불교를 부파불교(소승불교)라고 하고 분열 이전을 초기 불교라고 한다.6)

    부파불교에 있어 석가모니는 다만 ‘법을 인도하는 스승’이었으며 중요한 것은 인격으로서의 부처가 아니라 그가 깨닫고 설한 ‘법(法)’이었다. 그러므로 부파불교는 법 중심의 불교로서 계율을 중시하는 출가자 중심의 불교였다. 그러나 세속의 일에 종사하는 일반 재가자(在家者)들은 계율을 엄격하게 지킬 수가 없고, 선정(禪定)도 충분히 실천할 수 없어 참다운 교법을 터득하기란 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기에 재가자들은 오로지 석가모니의 자비에 의한 구원만을 바라게 되었다. 이러한 종교적 욕구에 따라 석가모니는 마침내 ‘중생을 구제하는 이’, 즉 ‘구제불(救濟佛)’로서 신격화된다.7) 

    대승불교는 대중부 등 진보적 경향의 부파, 불탑신앙, 혹은 힌두교의 영향 등에 의해 성립한 것으로 추측된다. 대승불교는 ‘대승(大乘 : 큰 수레)’으로 많은 중생들을 구제하겠다는 이타(利他)의 정신으로 탄생된 새로운 불교이며, 자기 자신의 열반만을 목적으로 하는 기존의 부파불교를 ‘소승(小乘 : 작은 수레)’이라고 비판하였다.8)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를 잘 나타내는 개념이 ‘아라한’과 ‘보살’이다. 아라한(阿羅漢 : 나한)은 팔리어로 ‘고귀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아라한은 완전해진 사람, 존재의 참 본질에 대한 통찰을 얻어 열반(涅槃) 또는 깨달음에 이른 사람을 말하며, 욕망의 사슬에서 벗어나 다시는 윤회하지 않는다고 한다. 부파불교에서는 아라한이 되는 것이 불교수행자가 추구해야 할 최고의 목표라고 보았다. 

    보살(菩薩)은 산스크리트어로 ‘깨달음을 추구하는 이’,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확정된 이’라는 뜻으로 역사상의 부처인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기 전의 상태, 또는 현세나 내세에서 부처가 되도록 확정되어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지만 대승불교에서의 보살은 다른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자신의 목표인 열반(涅槃)을 연기하겠다는 서원(誓願)을 세운 사람이다. 그 이전의 부파불교에서는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면서도 스스로의 힘으로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는 아라한(阿羅漢)이나 성문(聲聞) 혹은 스승의 지도 없이 홀로 깨달음에 이르는 독각(獨覺, 緣覺)을 이상형으로 삼고 있었으나, 대승불교에서는 그러한 전형(典型)들을 개인적인 구원에만 관심을 둔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보살의 전형을 강력하게 내세워 그 위상을 높였던 것이다. 이러한 보살의 개념이 등장하면서 자비의 가치와 지혜의 가치가 대등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대승불교는 남인도의 안드라 지방과 갠지스 강 중류 지역에서 일어나 서부의 데칸고원을 거쳐 인도 북서부에 전파된 것으로 보고 있다.9) 이런 전파 과정에서 대승불교는 그 지방의 기후·풍토 혹은 문화적인 사정에 따라 초기불교의 사상이 조금씩 변모해 나간다. 특히 다양한 불·보살이 신앙의 대상으로 등장하여 중생들을 구제하는 구제불(救濟佛)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 큰 특징이다. 현재 인도 영토인 캐슈미르 지방과 파키스탄 영토인 간다라 지방을 포함한 인도 북서쪽이 대승불교에서 중요한 지역이다. 

    인도 북서쪽은 예로부터 인도와 인도 바깥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이곳은 그리스와 아랍의 서아시아, 티베트, 중국 등 많은 이민족들의 통로이자 인도 문화가 다른 세계로 전파되는 길목이다. 이 지역은 인도에서도 가장 강우량이 적어 건조하면서 추운 곳이며, 또한 페르시아나 그리스 등 여러 이민족들의 침입을 오랫동안 받아왔던 고난의 역사를 간직한 척박한 땅이다. 이 열악한 환경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환경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하였고, 인도 전통 신앙과 외래 사상의 혼합으로 구원 신앙이 자연스럽게 형성될 만하였다. 

    부파불교는 석가모니가 설한 법을 충실히 실천할 것을 가르쳤을 뿐, 예배 대상이나 예배 의례를 설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세속적인 차원에서 각 지방의 힌두교 전통의 신들을 흡수하여 부처·보살·명왕(明王)·천(天) 등의 형태로 자리 잡아가면서 불교 신들의 조직을 형성하였다. 미륵불과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등도 지방신과 불교의 결합 혹은 외래 사상을 불교가 흡수하면서 신앙의 대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10)

  

미륵불의 출현 배경

    미륵불은 초기불교 시대에는 보살의 위치였다. 즉 미륵은 이 세상에 부처로 출현하기 위해 도솔천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는 보살이다. 그런데 대승불교에 이르러 구제불(救濟佛)로서 새로운 기능과 성격을 띠게 된다. 그것은 서아시아의 메시아(구세주) 신앙이나 조로아스터교의 미트라(충성과 신앙 수호의 신) 신앙의 영향을 받아, 인도 북서부에서 새로운 성격이 부여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서기 400여 년 경부터 일련의 미륵 경전들이 제작되어 미륵불에 의한 인간 구제가 크게 강조되어, 후대에 중국·한국·일본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아미타불의 출현 배경

    아미타불은 정토 신앙의 주인공으로서 아득한 과거에 이타(利他)의 서원(誓願)을 세운 법장보살로 태어났다가, 현재 그 서원이 이루어져서 서방의 극락정토에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불교의 전반적인 흐름으로 볼 때 아미타불은 매우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우선 아미타불은 인간이 사는 이 세상을 말세로 규정하고 있다. 말세이기 때문에 부처의 가르침이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에서 번뇌와 속박에 시달리고 있는 인간이 아무리 수행을 거듭한다고 해도 이 세상에서는 결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기 주체에서 비롯하는 모든 계획을 포기한 채, 오로지 아미타불에만 의지하여 구원을 받으려고 하였다. 

    문헌상으로 보면 아미타불은 ‘아미타유스[무량수(無量壽)]’와 ‘아미타바[무량광(無量光)]’라는 두 가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전자는 인도 불교의 내부에서 발전한 영원한 수명을 갖는 부처라는 관념에서 유래한 것이다. 후자는 불교 내부의 유래라는 설이 있고, 조로아스터교의 태양신 신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설도 있다. 당시의 인도 북서부에 이란의 광명(光明) 사상이 정착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인도 쿠샨왕의 황금 주화에 둥근 빛을 가진 왕의 조각이 들어 있는 것이나, 간다라 지방의 불상에 광배(光背)가 새겨져 있는 것이 모두 그 사상의 영향이라고 한다. ‘한없는 빛을 가진 부처’도 그러한 광명 사상의 불교적 발전일 가능성이 크다. 

 

관세음보살의 출현 배경 

    관세음보살은 민간신앙적인 현세 기복의 기능을 끌어들인 보살이다. 『법화경』에 처음으로 이 보살이 등장한다. 이 경전에서는 마음속으로 관세음보살을 염원하면 온갖 재앙으로부터 구원받는다는 현세 이익적인 공덕이 강조되고 있다. 관음은 보통 머리 위에 화불(化佛)을 가지고 있거나 천관(天冠)을 쓴 모습인데, 이것은 이란의 영향인 것으로 보인다.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도 관세음보살이 다른 국토에서 왔다고 했으니, 아마도 이 보살은 이란의 종교 문화적 영향을 받아 인도 북서부에서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란의 수신(水神)인 동시에 풍요의 여신 아니히타가 당시 간다라 지방에서 나나이야 여신 및 아르드후쇼 여신으로 정착되어 있었으므로, 그것이 불교화 된 보살이 곧 관음이라고 볼 수 있다. 관음 신앙이 확대되어 감에 따라 각지의 민간 신앙은 관음을 예배 대상으로 하게 되었고, 관음은 각 지역의 민간 신앙을 흡수하여 불교화시켜 갔다.

    이러한 불·보살들의 출현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다음과 같다. 미륵불의 출현에서 구세주 신앙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점, 아미타불은 동양의 시간 개념에서 보기 힘든 말세를 상정하였고 대중들은 아미타불에게 구원받는다는 점, 관세음보살을 염원하면 재앙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은 인도 전통신앙이나 불교에서 자신이 지은 업(業)에 따라 결과가 따르는 업설(業說)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부분이다. 결국 이런 여러 측면들은 인도 북서부의 지역적 특징과 함께 유일신을 신앙하는 서아시아나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불교가 흡수한 부분들이다.

    그 후 인도 계통의 승려인 구마라집(鳩摩羅什 : 344~413)이 실크로드를 거쳐 중국의 장안(長安)에 들어와 대승불교의 인도 경전들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사업을 담당했다. 이를 계기로 대승불교의 『법화경』·『금강반야경』·『중론』 등이 번역되면서 공(空)의 사상이 중국에 알려지게 되었고, 동북아시아에 대승불교가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중국 불교는 화엄사상에 이르러 현실지향적인 중국인들의 사고방식과 맞물려 현실을 긍정하는 입장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나 화엄사상 역시 불교의 사상이므로 공(空)과 연기의 관계를 떠나서는 말할 수 없으므로, 현실을 무상(無常)으로 인식하는 허무주의적 요소를 여전히 지닐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불교가 초월만을 지향한 채 일상의 현실을 간과하며 세계를 바라보는 역사성이 결여된 점은 오늘날에도 해결해야할 과제로 남아 있다.

    부파불교가 석가모니가 설한 무아(無我)와 연기(緣起)의 법을 깨닫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면, 대승불교는 공사상이 바탕이 되어 힌두교 전통의 신들과 인도 외부의 사상이 결합되어 구원의 불·보살들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이에 일반 대중들은 고단한 세상을 벗어나기 위해 구원불에게 의지하여 구제받고 내세(來世)의 이상향에 태어나기를 염원하였다. 대승불교의 이러한 구원신앙은 석가모니의 사상과는 무관한 변형된 불교의 모습으로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상제님께서는 지금까지의 세상인 선천은 모두 상극(相克)에 지배되어 왔고 그러한 상극에 의해 세상에 원한이 쌓이고 맺혔다고 규정하셨다. 이것은 상제님께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자 대순진리회의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 입각하여 상제님께서는 첫째 천지의 도수를 정리하고, 둘째 신명을 조화하여 만고의 원한을 푼 다음이라야 비로소 상생의 법리로 후천 선경을 세울 수 있다고 하셨다.(공사 1장 3절) 천지의 도수를 정리한다는 말씀은 상극으로 인해 어그러진 천지의 법칙을 정리한 것이며, 그런 다음 신명계를 조정하여 모든 원한을 해소한 뒤 상생의 도를 세우면 비로소 후천의 선경을 열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곧 선천의 법으로는 더 이상 근원적인 모순을 개선할 수 없고 새로운 세계 질서의 재편성인 ‘개벽’이 필요하다는 상제님의 의지의 표명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선천 종교인 불교에서는 인간과 신(불·보살)을 분리함으로써 부처를 이상적인 전형으로 설정하고 있고, 후대의 중국 불교에 와서는 그 분리 간격이 좁아지기는 한다. 그러나 불교가 추구하는 궁극적 목적에 도달하는 것과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오로지 인간의 수행 여부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보았다. 즉 그 종교의 목표에 도달하느냐 못하느냐의 책임은 전적으로 인간에게 달려 있었으며, 선천 종교들은 이 모순된 세계 안에서 잘 깨달으며 살아가는 법을 인간에게 가르쳤던 것이다. 그러므로 선천 종교는 현실 속에서 그 종교가 제시하는 수행 체계를 따라 수행하면, 그 종교에서 제시하는 궁극적 경지에 도달하며 다음 생엔 극락이나 천국에 태어날 수도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우주 및 세계가 상극의 기운으로 점철된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선 전혀 문제 삼고 있지 않다. 

    하지만 상제님께서는 선천의 모순이 발생한 원인을 인간만의 잘못으로 보진 않았고, 선천 종교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하늘(신)의 잘못이 크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세계질서 안에서 개혁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다. 묵은 하늘 아래의 모순된 세상과 인간을 새로운 구조로 개벽하는 것이 상제님의 천지공사이다. 그러므로 대순진리회의 수도는 천지의 기운을 상생으로 바꾸면서 인간 스스로를 바꾸는 과정이므로 선천 종교의 수행과는 다른 차원으로 보아야 한다. 

    

    상제님께서는 기존의 천계·지계·인계를 새롭게 정립하기 위해 해원상생(解 相生)·보은상생(報恩相生)의 양 원리인 대도에 입각하여11) 천지공사를 단행하신다. 우선 상제님께서 삼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가지고 정립해 나간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천계공사(天界公事)이다. 선천 종교는 하늘이나 신에 대해서 우월성과 절대 존중만을 가르쳐 왔다. 그래서 성인들의 말씀을 ‘경(經)’이라고 하였다. 불교에서는 ‘권위 있는 책’ 혹은 ‘석가모니의 말씀’을 한역하면서 ‘경’이라고 번역하였다. 여기서 의미가 확장되어 각 종교 사상의 핵심을 담고 있는 것이 ‘경’이며, 경은 성인·불·보살 등이 말한 진리와 그들의 위대함과 공경을 담고 있다. 물론 성인·불·보살 등이 진리를 깨우쳐서 인간에게 교화한 점은 참으로 위대한 면이다. 

    그러나 상제님께서는 성인들이 절대적이라고 설정한 하늘(신)의 문제점을 지적하시며, 선천의 상극이 인간에 의해서만 빚어진 결과로 보진 않았다. 왜냐하면 “묵은 하늘은 사람을 죽이는 공사만 보고 있었도다.”(공사 1장 11절), “세속에 전하여 내려온 모든 의식과 허례를 그르게 여겨 말씀하시길 ‘이는 묵은 하늘이 그르게 꾸민 것이니 장차 진법이 나리라’ 하셨도다.”(교법 1장 18절), “하늘도 노천(老天)과 명천(明天)의 시비가 있으며”(교법 3장 6절) 라는 『전경』의 여러 구절에서 지금까지의 하늘, 즉 신명계(神明界)도 상극에 지배되어 왔다고 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신정(神政)이 문란해진 것을 새로이 조정하고, 문곡성(文曲星) 등의 별자리를 재배치하시고, 비겁에 쌓인 신명들을 해원시켜 생명이 있는 모든 창생들과 상생하도록 천계공사를 보신 것이다.

   둘째 지계공사(地界公事)이다. 상제님께서는 지기(地氣)가 통일되지 못하여 인류는 종교·사상·문화가 지역의 차이에 따라 달라지면서 서로가 반목(反目) 투쟁하게 되었다고 보셨다. 각 지역에 따라 자신의 종교나 문화의 우월성 혹은 주체성을 확보하려고 전쟁이 일어나고 세상이 참혹하게 된 부분을 상제님께서 재정립하시고, 갈등과 대립을 없애기 위한 기강(紀綱)을 잡으려고 지기 통일공사를 행하신다. 그래서 강산 정기를 합치려고 부모산의 정기부터 공사를 보시는데, 부모산은 전주 모악산(母岳山)과 순창 회문산(回文山)이다.(공사 3장 6절) 마치 부모는 집안의 분쟁을 없애고 가풍(家風)을 바로 세울 수 있는 중심이 되듯이 부모산은 지기를 통일하는 시작의 상징성을 띄고 있는 것이다.

    셋째 인계공사(人界公事)이다. 상제님께서 인류의 기록에서 원( )의 시작은 요임금의 아들인 단주이며, 단주의 원을 풀면 수천 년 동안 쌓인 인류의 원이 풀린다고 보고 단주 해원공사를 단행하신다.(공사 3장 4절) 인계공사의 주된 내용은 인간의 불평등을 없애고, 원과 한을 풀어주며 욕망도 채워주고, 신명을 인간의 마음에 드나들게 하여 인간의 체질과 성격을 고쳐서 지상신선을 실현하는 것이다.12) 이것이 곧 대순진리회에서 말하는 인간이 도달해야 하는 경지이며, 인존(人尊)이다.

    이처럼 선천 모순의 원인을 묵은 하늘과 땅, 인간의 총체적인 문제로 규정한 것에서 상제님의 세계와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을 포착할 수 있다. 상제님께서 언급하신 ‘묵은 하늘’이란 단어 속에는 인간을 둘러싼 세계와 자연, 그리고 신명계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그렇다면 하늘과 땅과 인간이 서로의 작용에 영향을 주고받는 측면에서 상제님이 세계를 인식하는 관점은 오늘날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유기체적 세계관이면서 선천 종교가 보지 못한 신명계를 함께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불교는 선천의 현실을 가장 잘 인식하고 있는 종교일지도 모른다. 상극의 구조 아래에 있는 인간은 몸과 마음의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몸과 마음의 한계에 부딪히면 인간은 현실에서 괴로움을 느끼기 마련이므로, 석가모니는 세상을 고해(苦海)라고 표현한 것이다. 결국 인간은 깨달음을 얻어야 생사윤회로부터 자유롭게 되며, 여기에 도달하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다. 그렇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에서 그런 깨달음에 이른다는 것은 너무 이상적이었다. 그래서 불교인들은 죽어서라도 갈 수 있는 이상향을 생각했던 것이다. 

    불교에서는 유심정토(唯心淨土) 사상처럼 현실이 곧 불국토(佛國土)라고 보는 사상도 있었지만 적어도 일반 대중들에겐 그런 사상이 주류를 차지하진 못했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 인간의 수행 부족으로만 보았지 이 세계가 안고 있는 구조적인 상극의 모순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불교는 인간이 세계를 바라볼 때 공(空)개념으로 바라보던지 아니면 인간 마음의 인식 전환에 가치를 두고 있었지, 현실의 구조적인 모순을 개혁하는 데까지는 미치지 않았고 구원불에게 귀의하려고만 하는 소극적 대처 방안을 취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선천 세계의 기본 틀 속에서 모순을 해결하려고 한 것이다. 

    반면 묵은 하늘의 상극적 기운 아래에 세계와 인간이 놓여 있어 인간의 역사는 신명계의 영향 아래에서 펼쳐진다는 전체적인 관점에서 상제님께서 바라보셨다는 점이 선천 종교의 성인들과는 다른 차원이다. 하지만 본 논문이 선천 종교와 대순진리회의 비교우위를 논하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없으나, 선천 종교의 무용론(無用論)을 얘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선천 종교와 대순진리회의 관계는 인류 정신문명의 발전 단계로 해석해야 할 부분이다. 선천에서 많은 성인들이 인류를 위해 교화하였기에 오늘날 우리들이 상제님의 대도(大道)를 접해도 이해할 수 있는 지각능력이 갖추어지게 된 것이고 수도를 해나갈 수 있는 것이다.13) 선천 종교의 가르침이 밑바탕이 되었기에 그 다음 단계로 상제님의 대도가 나올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전체적인 입장에서 선천 세계를 바라보는 상제님의 관점을 인간의 문제와 수도의 측면에 어떻게 적용해 볼 것인가가 우리의 과제이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 속에 살아가는 존재이므로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나 상황 속에 놓여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상제님께서 세계와 인간을 동시에 보셨듯이 우리도 수도 과정에서 어떤 사람과 그 사람의 환경을 따로 보아서는 안 된다. 개인에게 어떠한 문제가 생겼다고 가정할 때, 그 사람만의 문제라고 본다면 묵은 하늘의 폐단을 모르는 채 인간의 수행과 노력만을 강조해온 선천 종교의 관점과 같은 차원인 것이다. 사건이나 문제의 좀 더 근원적인 원인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런 다음에 나의 잘못이면 나를 고치고 환경이 원인이면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전체적인 관점이다. 단 그 밑바탕엔 남을 잘 되게 하는 상생의 마음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자신의 잘못으로 안 좋은 결과가 발생했을 경우에 자기 한계를 자책하며 자기비하에 빠지는 것도 금물이며, 자기 마음만을 탓하고 문제 해결에 소홀히 하는 것도 문제이다. 대순진리회에서는 개인이 마음을 잘 먹는 것과 자신의 양심을 속이지 않는 무자기(無自欺)는 수도의 기본적인 자세이고, 거기서 한 걸음 나아가 자신을 둘러싼 주변 상황이나 환경을 주도적으로 헤쳐 나아갔을 때 신명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대순진리회는 신도(神道)이기 때문이다. 수도의 과정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마음으로 심고(心告)를 드리는 것과 그것에 맞는 구체적인 행위를 실천했을 때 우리가 바라는 방향으로 일이 전개되어 진다. 또한 상제님을 근본으로 연원(淵源)과 연운(緣運)의 체계 질서를 올바르게 정립했을 때 대순진리회가 추구하는 수도의 목적인 도통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1) 국립국어연구원, 『표준국어대사전』 上, 두산동아, 2000, p.581

2) 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 『불교사상의 이해』, 불교시대사, 2002, pp.152∼155

3) 『주자어류』, 卷第126, 「釋氏」22, 「有言莊老禪佛之害者 曰 禪學最害道 莊老於義理絶滅猶未盡 佛則人倫已壞 至禪 則 又從頭將許多義理絶滅無餘 以此言之 禪最爲害之深者」(윤영해, 『주자의 선불교비판 연구』, 민족사, 2000, p.242 재인용)

4) 윤영해, 『주자의 선불교비판 연구』, 민족사, 2000, pp.242∼243

5) 인간은 어떤 대상을 인식할 때 마음 안에 있는 것만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인식대상은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것에 한정된다. 이것이 인식론적 관념론의 개념인데, 불교의 사유방식이 서양 철학의 관념론과 동일한 개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내 마음이 외부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이 유사하다.

6) 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 『불교사상의 이해』, 불교시대사, 2002, pp.127∼128

7) 위의 책, pp.132∼133

8) 위의 책, pp.136∼137

9) 나카무라 하지메, 김지견 옮김, 『불타의 세계』, 김영사, 1999, p.484 

10) 위의 책, pp.478∼481

11) 『대순지침』, p.19

12) 心也者鬼神之樞機也門戶也道路也. 吾心之樞機門戶道路大於天地(행록 3장 44절)

13) 특히 불교에서 이룩한 수도(修道)의 대중화에 대한 단적인 예를 살펴보자. 신라시대의 원효(元曉 : 617∼686) 및 중국 당나라 때의 선승인 육조 혜능(六朝 慧能 : 638∼713)은 불법을 경전이나 교학(敎學) 위주로 신앙해 나가던 상황을 전환시켜, 일반 대중들이 생활 속에서 선(禪)을 수행해 나갈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데 공헌한 인물들이다. 대중들과는 동떨어져 높고 멀리 있는 듯한 진리나 도(道)를 오늘날 일상생활 속에서 자기화 해나갈 수 있는 것도 선천의 깨달은 인물들의 헌신이 기초가 된 덕분일 것이다.

 
《대순회보》 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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