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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생의 길고대의 명인 율곡과 임란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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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광주 작성일2017.03.30 조회3,42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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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명인 율곡(栗谷)과 임란 일화


연구위원 이광주

 

 

Ⅰ. 머리말


Ⅱ. 율곡의 생애와 사상
1. 율곡의 생애와 정치ㆍ저술 활동 

2. 율곡의 경세(經世)사상


Ⅲ. 율곡의 선견지명(先見之明)과 그 역사적 전개
1. 율곡의 선견지명
2. 고추수건에 얽힌 일화와 대명청병(對明請兵)
   1) 고춧가루 수건과 이항복에 얽힌 일화
   2) 조선의 대명청병 과정과 청병사신
3. 두률천독(杜律千讀)과 이순신
   1) 율곡과 이순신에 관한 일화  
   2) 두보 시(詩)의 성격과 두률천독의 의미
   3) 두률천독을 통해 임진왜란을 극복한 이순신


Ⅳ. 맺음말

 


I. 머리말

   상제께 김형렬이 “고대의 명인은 지나가는 말로 사람을 가르치고 정확하게 일러주는 일이 없다고 하나이다.”고 여쭈니 상제께서 실례를 들어 말하라고 하시므로 그는 “율곡(栗谷)이 이순신(李舜臣)에게는 두률천독(杜律千讀)을 이르고 이항복(李恒福)에게는 슬프지 않는 울음에 고춧가루를 싼 수건이 좋으리라고 일러주었을 뿐이고 임란에 쓰일 일을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고 아뢰이니라. 그의 말을 듣고 상제께서 “그러하리라. 그런 영재가 있으면 나도 가르치리라.”고 말씀하셨도다. (행록 1장 32절)
   위의 『전경』 구절에서 김형렬은 상제님께 고대의 명인(名人)에 대해 언급하면서 율곡 이이(李珥)의 일화를 그 실례로 들었다. 그러자 상제님께서도 그의 말에 동의하셨으니, 율곡과 임진왜란에 얽힌 일화는 누군가에 의해 꾸며진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전래되어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율곡은 그가 죽기 전에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그 대비책으로 이순신과 이항복에게 각각 ‘두률천독’과 ‘고춧가루를 싼 수건’을 일러주었던 셈이다.  
   이 일화의 주인공인 율곡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과 더불어 한국 유학을 대표하는 성리학자의 한 사람이다. 성리학자로서 율곡은, 이언적(李彦迪)과 이황 중심의 리(理) 중시 철학과 서경덕(徐敬德) 중심의 기(氣) 중시 철학을 종합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성리학의 연구를 정밀한 경지까지 개척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현실적인 경세(經世: 세상을 다스림) 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탁월한 정책들을 제시한 실학의 선구자였다. 또한 율곡이 태어난 오죽헌(烏竹軒)은 금강산 토성수련도장 연수에서 유ㆍ불ㆍ선 중 유교(儒敎)를 대표하는 곳으로, 연수생들이 반드시 둘러보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런 그가 병조판서로 있을 때 일본군의 침략에 대비해 경연(經筵)01에서 임금 선조(宣祖)에게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임진왜란에서 큰 공을 세웠던 이순신과 이항복에게 비법(秘法)을 전수해 전란(戰亂)에 대비토록 했다는 이야기가 오늘날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먼저 율곡의 생애와 사상의 일면을 살펴봄으로써 율곡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그가 전해준 비법이 가지는 의미와 그것이 임진왜란에서 어떻게 쓰였는가에 대해 관련 자료들을 토대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Ⅱ. 율곡의 생애와 사상


  1. 율곡의 생애와 정치ㆍ저술 활동
  성장과정
   율곡 이이(1536~1584)는 1536년(중종 31) 강원도 강릉 외가댁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字)02는 숙헌(叔獻)이며, 율곡(栗谷)이란 호(號)는 친가가 있던 경기도 파주 율곡마을에서 딴 것이다.03 그가 태어나던 날 밤, 어머니 신사임당의 꿈에 검은 용이 바다에서 날아와 침실 쪽 마루에 스며들었다고 하여 어렸을 때 이름을 현룡(見龍)이라 불렀고, 그가 태어난 방을 몽룡실(夢龍室: 용꿈을 꾼 방)이라 하였다.
   율곡은 모친으로부터 어린 시절 학문의 기초를 배운 뒤, 특별한 스승 없이 자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대단히 총명하여 이미 3세에 글을 읽었고, 서울에 머물던 7살 때에는 이웃에 살던 진복창의 인물됨에 대해 평한 「진복창전(陳復昌傳)」을 지었다. 여기서 율곡은 진복창을 소인(小人)으로 평하고 장차 큰 화(禍)를 일으킬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 예견은 그대로 적중하여 을사사화 때 진복창이 갖은 악행을 저질렀으니,04 율곡은 어릴 때부터 뛰어난 안목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가 10세 때 지은 「경포대부(鏡浦臺賦)」는 마치 인생을 달관한 사람의 작품으로 생각될 정도였다. 그때 이미 율곡은 유교 경전을 비롯해서 불교와 노장사상에 관한 책까지 두루 섭렵하여 학문에 상당히 조예가 깊었다. 또한, 13세 때 초시(初試)에 합격한 이래 모두 아홉 번을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05 이라 불렸다.
   율곡은 16세에 그가 가장 존경하던 어머니를 잃었다. 인생의 허무함을 느낀 율곡은 3년 동안의 시묘(侍墓)를 마친 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에 몰두했다. 이 사건은 후일 율곡이 정적(政敵)으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는 빌미가 되었지만, 그의 철학적 폭과 깊이를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다가 깨달은 바 있어 입산 후 1년 만에 강릉에 돌아와 마음을 가다듬고 일종의 좌우명인 「자경문(自警文)」을 지었다. 여기서 그는 학문의 목표를 성인(聖人)에 두고 이의 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는데, 무엇보다도 ‘입지(立志)’를 가장 강조하였다.06 
   율곡은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결혼하고, 그 이듬해 봄에 경북 예안에 머물고 있던 퇴계를 방문하였다. 23세의 청년과 58세의 원로 철학자가 이때 처음 만나 학문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다. 훗날 조선 유학사(儒學史)의 두 맥을 이루게 될 이들의 역사적인 만남은 실로 뜻 깊은 일이었다.
   이 만남에서 율곡은 퇴계의 교육자적 위상과 학문에 힘쓰면서 꾸리는 간소한 생활, 그리고 온화한 인간미 등에 깊은 감명을 받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올렸다.


  溪分洙泗派 시내는 수사(洙泗)07의 지류(支流)로 나뉘었고
  峰秀武夷山 산봉우리는 무이산(武夷山)08처럼 빼어났네.
  活計經千卷 살아가는 계획은 천여 권의 경전이고,
  行藏屋數間 나아가고 물러감에 두어 칸 집뿐일세.
  襟懷開霽月 마음은 환히 갠 달 같고,
  談笑止狂瀾 말씀과 웃음은 거친 물결을 멈추게 하네.
  小子求聞道 저로서는 도(道)를 듣고자 온 것이지,
  非偸半日閒 반나절의 한가로움을 훔치려는 것이 아니라오. 

 

  『전경』에 소개된 한문 구절09과는 순서와 몇 자(字) 다른 곳이 있긴 하지만 그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다. 율곡이 이틀을 묵고 떠나간 후 퇴계는 제자들에게 ‘후배가 가히 두렵다(後生可畏)’는 옛 말을 인용하며, 과연 식견이 높고 배운 것이 많은 사람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해 겨울 율곡은 그의 절친한 벗인 구봉(龜峰) 송익필(宋翼弼, 1534~1599)과 별시(別試)에 응했다. 이때 그가 지은 「천도책(天道策)」은 당시 시험관들로 하여금 경탄을 거듭하게 했고 명나라에도 널리 알려졌다. 훗날 율곡이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게 되었을 때, 그들이 율곡에게 ‘선생님’이란 존칭으로 예(禮)를 표한 일도 있었다.
   이 시험에서 율곡이 쓴 답안이 1등으로 발표되자 수험생들이 그의 주위로 몰려들어 연달아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율곡은 대답을 회피한 채 “송익필의 학문이 고명하고 넓으니 가서 물어보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만큼 율곡과 송구봉은 서로의 학문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고 주된 논지는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다.10 
   관직 생활의 시작
   율곡은 29세 때 승문원 권지를 시작으로 호조와 예조좌랑, 그리고 삼사(三司)11의 언관직(言官職)을 비롯해 홍문관교리ㆍ부제학, 승정원우부승지 등 중앙관서의 요직을 두루 거치게 된다. 아울러 청주목사와 황해도관찰사를 맡아 지방의 외직에 대한 경험까지 쌓는다. 
   1567년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등극한 해에 장인 노경린이 맏사위인 율곡에게 뒤처리를 부탁하고 죽었다. 그러자 율곡은 처가의 재산을 적서와 남녀의 구별 없이 동등하게 분배하여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진취적인 사고의 일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37세 때에 율곡은 성혼(成渾)과 이기(理氣)ㆍ사단칠정(四端七情)ㆍ인심도심(人心道心)에 관한 논변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율곡의 성리학 이론이 명쾌하게 밝혀져 그 내용들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40세 때에는 왕명으로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저술하였다. 이 책은 퇴계의 『성학십도(聖學十圖)』에 비견되는 것으로, 『대학』의 체계에 따라 유가의 경전과 선배 유학자들의 학설을 종합하고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이다. 그 주된 내용은 군왕의 도리에 대해 체계적으로 서술한 것이어서 후에 경연의 교본으로 쓰이게 되었다.
   한편, 당시에는 심의겸과 김효원의 대립으로 동ㆍ서 붕당의 조짐이 완연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그들의 대립에 대해 율곡은 ‘양시양비론(兩是兩非論)’을 내세우며 중립적인 입장에서 갈등을 해소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평소 서인이었던 심의겸과 친분이 깊었고 그를 지지하는 정철, 윤두수, 윤근수 형제와도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기 때문에, 동인 계열에서는 그를 서인으로 지목하고 배척함에 따라 동인들과는 자연히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정쟁이 심화되는 와중에 율곡은 건강상의 이유로 1576년 10월에 사직하였다. 그리고 본가가 있는 파주 율곡리와 해주 석담(石潭)을 오가며 교육과 교화 사업에 종사하면서 42세 때에 『격몽요결』을 저술하였다. 『격몽요결』은 실제 생활을 토대로 한 실천철학서이며 교육입문서로서 조선사회에서 『소학(小學)』 다음으로 많이 읽혀진 서책 중의 하나였다. 43세 되던 해에는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세워 많은 인재들을 육성하였고, 향약을 조직하여 주민들의 교화에도 적극 노력하였다. 이렇게 율곡은 다시 출사하기 전까지 5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대가족을 이루며 교육과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 활동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당시 산적한 현안들을 좌시할 수만은 없어 45세 때인 1580년에 대사간의 임명을 받들어 복관(復官)한 뒤, 생을 마감하기 전해인 1583년까지 이조ㆍ형조ㆍ병조의 판서와 우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48세 때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국방대책을 위한 「시무육조계(時務六條啓)」12를 올리고, 경연에 나아가 그 유명한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84년(선조 17) 1월 16일 율곡은 서울 대사동 자택에서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타고난 총명과는 달리 본래 허약하게 태어났던 율곡은 평생 병에 시달려야 했는데 병석에서도 항상 나랏일에 대한 걱정을 놓지 않았다. 그가 죽기 하루 전에도 서익(徐益)이 북방을 순찰하는 임무를 받아 떠난다고 하자,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육조방략(六條方略)」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는 곧 혼수상태에 빠졌는데, 그날 저녁 부인의 꿈에 흑룡(黑龍)이 침실에서 나와 하늘로 날아올랐다고 한다.
   그가 죽자 신분의 구별 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특히 그의 친구 송익필은 생전에 자신을 알아주었고 장차 나라를 위해 큰 정치를 펴리라 기대했던 율곡의 영전(靈前) 앞에서 애끓는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13 
  파주 자운산에 안장된 율곡은 인조 2년(1624년)에 문성(文成)14의 시호(諡號)를 받고 숙종 7년(1681년)에는 문묘에 배향(配享)되었으며, 전국 20여 개 서원에 제향(祭享)되었다. 그의 문인으로는 우리나라 예학(禮學)의 종장으로 불리는 사계 김장생을 비롯하여 조헌, 정엽, 안방준 등이 있는데, 사계 이후 율곡 문하(門下)의 폭이 훨씬 넓어져 퇴계의 영남학파에 비견되는 기호학파의 학맥을 형성하였다.

 
  2. 율곡의 경세(經世)사상
  율곡철학은 유가철학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면서 동시에 독창적인 일면을 지니고 있다. 그 특징은 한마디로 이기지묘(理氣之妙)로서, 이 세계의 일체 존재를 리(理)와 기(氣)가 오묘하게 합해 있는 구조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그의 존재론뿐만 아니라 심성론을 비롯한 가치관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그의 학문 또한 성리학(性理學)이면서 실학적(實學的)인 사유를 내포하고 있고, 그의 삶도 철학자로서의 삶과 경세가(經世家)로서의 삶을 병행하고 있다. 다른 철학자들과 달리 리와 기의 조화와 균형을 중시했던 율곡철학에서 실천사상인 정치ㆍ교육ㆍ국방사상의 측면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정치사상
   율곡은 그가 살던 16세기 후반의 조선사회를 건국 후 정비되었던 각종 제도가 무너지는 중쇠기(中衰期)로 파악하고 국가의 재정비가 시급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가 각 부서의 판서직을 역임하고 있을 때 상소를 통해 계속 주장했던 것이, 시대 상황에 맞게 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시의론(時宜論)과 실질적인 일에 힘쓸 것을 강조한 무실론(務實論)이다.
   율곡에 의하면 성왕(聖王)이 만든 법이라도 오래되면 시대상황에 맞지 않아 폐단이 생기므로 때때로 변통(變通)15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선대(先代)의 법을 적절히 변통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연산군대의 잘못된 법들도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다.16 율곡은 이런 악법들을 철폐하고 그 시대에 맞게 새로운 법을 제정해야 백성들을 구제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또한 그가 제시했던 ‘무실’은 일에 있어 공언(空言)을 일삼지 않고 실효(實效)를 보기 위해 힘쓰는 것이다. 그가 ‘무실(無實)’을 비판하고 ‘무실(務實)’을 제창한 것은, 당시 대부분의 정치적 발언들이 공언에 그쳐 실효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에 율곡은 정치적 성패의 관건이 ‘입언(立言)’에 있지 않고 ‘실천(實踐)’에 있음을 강조했다.
   그런가 하면 심의겸과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사림(士林)의 분열이 노골화되었을 때, 이의 해소를 위해 노력하던 율곡이 제시한 것은 국시론(國是論)이었다. 여기서 그는 백성의 의사로부터 발생한 공론(公論)을 따를 때 국시(國是)17가 정립될 수 있다고 하였다. 다만 민의의 집약인 공론은 자발성과 정당성을 전제로 한 것이어서, 중우(衆愚)에 의한 타락과 지배자에 의한 여론 조작의 위험을 제거하고자 공론의 주체를 사림(士林)으로 보았다. 그래서 사림이 융성하여 화목하면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과격하여 분당되면 나라가 어지러워진다고 하였다. 이처럼 율곡은 사림의 분열을 우려하여 당쟁을 없애고자 노력하면서 한편으론 공론의 활성화를 위해 언로의 개방을 주장하기도 했다.
   교육사상
   율곡의 교육론에서는 가장 먼저 입지(立志)가 다루어지고 있다. 입지란 뜻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니, 뜻은 곧 마음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의미한다. 학문에 있어서 우선 목표가 정해져야 실효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율곡은 『성학집요』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이 살피건대 배움에는 뜻을 세우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으니, 뜻이 서지 아니하고는 능히 공업(功業)을 이룬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立志’ 조목을 ‘修己’ 조목보다 앞에 두었습니다.18

율곡은 뜻을 세우는 것이야말로 학문의 근본 동기가 되어 활력을 불어넣어줄 뿐만 아니라, 교육의 성패까지 좌우한다고 보았다. 다만 뜻을 크게 가져 그 기준을 성인(聖人)이나 도(道)에 두고 실천적 생활 규범을 익히되, 행위의 준거(準據)로서 성현의 가르침과 행적을 참고하기 위해 독서가 필요하다고 했다. 즉 율곡에게 있어 학문이란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한 것이므로, 종일토록 독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이치를 궁구하고 바르게 행동하는 것이었다.
  또한 율곡은 중인(衆人)과 성인(聖人)의 다름이 기질의 차이에서 비롯되었으나 인간 본성은 모두 선하기 때문에 교육을 통해 기질의 변화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그가 제시한 것이 궁리(窮理)·거경(居敬)ㆍ역행(力行)이다. 즉, 올바른 이치를 깊이 탐구하고[窮理],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단정히 하며[居敬], 아는 바를 힘써 실천하는 것[力行]이다. 이처럼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원리가 근간을 이루는 율곡의 교육론에서 학교교육의 중요성도 강조되고 있는데, 그 구체적 방법으로는 학습 단계에 따른 점진적 방법과 반복학습의 원리, 상벌을 통한 강화의 원리 등이 있다.19

  
  국방사상
  16세기 후반의 국제 정세는 만주 대륙에서 여진족의 추장 누르하치가 주변 모든 부족을 통일하여 명을 위협하고 있었고, 남으로는 일본이 전국시대의 혼란을 지나 점차 통일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율곡은 국방에 대한 우려와 대책을 많은 상소들을 통해 제시하였다. 그가 출사한 지 2년 후에 올린 「간원진시사소」에서는 이미 실호(實戶)에 의한 군적정리와 군사의 정예화를 주장한 바 있고, 「만언봉사」에서는 군정(軍政)20을 개혁하여 내외의 방비를 굳게 해야 한다고 하면서, 군정의 폐단과 그 대책을 비교적 상세하게 밝혔다.
1583년(선조 16)에 있었던 여진족의 침입 이후 율곡의 국방에 대한 관심은 더욱 고조되었다. 그해 2월 왕명에 의해 올린 「시무육조(時務六條)」는 그가 평생을 통해 진언한 상소 정신이 집약된 것으로 그 대책 또한 군비, 양병, 조세, 행정, 교화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국방에 관한 문제들이 많이 언급되어 있었는데, 이는 그의 현실적인 국방 의식이 반영된 결과였다.
  이어 경연(經筵)에서 ‘십만양병’을 진언하였는데, 이때가 율곡이 세상을 뜨기 1년 전의 일이었다. 당시 병조판서로 재직 중이었던 율곡은 이렇게 말하였다.

  국세의 떨치지 못함이 심하니 10년을 지나지 아니하여 마땅히 멸망의 화(禍)가 있을 것입니다. 원컨대 미리 십만의 군사를 양성하여 도성에 2만, 각 도에 1만씩을 두어, 군사에게 호세(戶稅)를 면해 주고 무예를 단련케 하며 6개월에 나누어 번갈아 도성을 수비하다가 변란이 있을 때에는 10만을 합하여 지키게 하는 등 완급(緩急)의 대비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루 아침에 변이 일어날 때 백성을 몰아 싸우게 됨을 면치 못할 터이니, 그때는 일이 틀어지고 말 것입니다.21 

  이에 대해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을 비롯한 중신들은 ‘무사한 때에 군사를 양성함은 화를 기르는 것’이라며 반대했다. 그러자 율곡이 류성룡에게 이르기를, “나라의 형세가 몹시 위태한데도 속유(俗儒)들은 시무(時務)에 통달하지 못하니 다른 사람들은 진실로 기대할 수 없지마는 그대도 또한 이런 말을 하는가!”라며 나무랬다. 후일 임진왜란이 닥쳐온 후에 류성룡은 조정에서, “이제 와서 보니 이문정(李文靖: 율곡을 빗댄 말)은 참으로 성인이다.22 만약 그의 말을 채용했더라면 국사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또 그 전후에 건의한 계책을 사람들이 헐뜯고 비난했지만, 지금은 모두 확실히 요점에 맞았으니 참으로 따라갈 수 없다. 율곡이 생존했다면 반드시 오늘날에 쓸모가 있었을 것이다.”23라고 하며 율곡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율곡은 「문무책(文武策)」에서 “지극한 문(文)은 무(武)가 없을 수 없고 지극한 무는 문이 없을 수 없다.”24고 하여 문과 무를 대립적 개념으로 보지 않고 상호 보완적인 개념으로 이해하였다. 그에 의하면 문과 무는 마치 사람의 두 손과 같고 새의 두 날개와 같아 그 쓰임이 비록 둘이지만 사실은 하나라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시무육조」에서도 ‘어진 자와 능력 있는 자를 임용할 것’, ‘교화를 밝힐 것’과 같은 문(文)의 문제가 그의 국방 대책 속에 포함되어 있었던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는 오늘날 군사력과 더불어 안보의식을 중시하는 현대 국방의 통합적인 개념과도 궤를 같이 하는 것이어서 그 의의가 크다 하겠다. 

 

Ⅲ. 율곡의 선견지명(先見之明)과 그 역사적 전개

1. 율곡의 선견지명


  율곡은 병조판서로 재직 시 십만양병을 비롯해서 국방강화를 위한 대책들을 제시했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율곡은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앞으로 일어날 전란(戰亂)에 대비해 문(文)과 무(武)에 걸쳐 두 가지 비책을 마련해 놓았다. 그것은 바로 이항복(李恒福)과 이순신(李舜臣)을 만나 넌지시 ‘고춧가루 싼 수건’과 ‘두률천독’을 일러주는 일이었다.
  물론 당시에 그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율곡의 명망(名望)과 인품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그의 가르침을 소중히 간직하고 실천했던 것이다. 그의 사후 채 10년도 되지 않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그 비책은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김형렬이 상제님께 말씀드린 내용이 있지만 민간에서 전해오는 문헌설화나 구전설화를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율곡의 가르침이 가지는 의미와 그것의 역사적 전개에 대해 기술해보도록 하겠다.

2. 고추수건에 얽힌 일화와 대명청병(對明請兵)

1) 고춧가루 수건과 이항복에 얽힌 일화
  이항복(1556~1618)은 율곡보다 20세 연하로 호는 백사(白沙)ㆍ필운(弼雲)이라 하였고 ‘오성대감’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절친한 친구인 한음 이덕형(李德馨, 1561~1613)과 얽힌 해학들은 지금도 많이 전해오고 있다. 율곡의 추천에 힘입어 관직생활을 시작했던 이항복은,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선조를 호종(護從)25하며 큰 공을 세워 훗날 영의정에 오르게 된다.
  이항복은 율곡이 대사간(大司諫)26으로 한양에 머물고 있을 때, 그의 자택으로 찾아갔던 적이 있다. 그때 율곡은 이항복에게 학문하는 요점을 일러주면서 “나는 이미 낙향할 뜻이 있으니, 그대도 만일 뜻이 있다면 나를 석담(石潭)으로 찾아오게나.”라고 당부했었다. 그 후 이항복은, 인사권(人事權)을 가지고 있던 율곡의 집에 자주 찾아가는 것이 출세를 위한 행위로 비춰질 것을 우려해 스스로 출입을 금했다고 한다.27 이로 미루어보건대 이항복은, 율곡이 신병(身病)으로 인해 관직에서 물러나 있을 때 비책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율곡은 이항복에게 임진왜란에 쓰일 것이란 언급은 하지 않고 “슬프지 않는 울음에 고춧가루를 싼 수건이 좋으리라.”고만 일러주었다.28 이와 관계된 일화가 민간에서는 다음과 같이 구전(口傳)되어 오고 있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파견된 사신이 명나라에 청병을 하였는데 명나라에서는 농사철이라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그 청병사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율곡에게 문병을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율곡이 주머니 하나를 주면서 “위급할 때 이걸 열어보라.”고 하였으므로, 그는 항상 허리에 그 주머니를 차고 다니던 터였다.
  당시 조선은 명군이 파병을 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존망이 걸린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런 급박한 상황이고 보니 그 청병사신은 율곡에게서 받은 주머니를 열어보게 되었다. 열어보니 거기에 다른 것은 없고 오직 ‘고추수건’이라고만 적혀있었다. 이를 보고 깨달은 바가 있어 그 청병사신은 수건에 매운 고춧물을 적셔서 그걸 지니고 명나라 황제 앞으로 나아갔다. 그가 명나라 황제에게 명군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황제가 계속 거절하자 고추수건을 눈에 비빈 다음 비통하게 울면서 청병하였다. 아무리 슬퍼도 눈물이 마르기 마련인데 그 사신은 눈이 시뻘게지도록 계속 눈물을 흘렸다. 이를 본 황제도 마음이 크게 동하여 청병을 허락하면서, “그대의 충성이 이토록 지극하니 내 아니 들어줄 수 없구나!”라고 감탄하며 이여송과 이여백 형제를 보내주었다.29  

  이 설화를 통해 율곡이 이항복에게 전해주었던 비책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로 갔던 사신의 청병(請兵)30 과정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율곡으로부터 고추수건에 대한 비책을 받았던 사람이 이항복이었으므로 청병사신이란 곧 이항복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유사한 다른 설화에서도 이항복이 율곡으로부터 고추수건을 받은 후, 청병사신으로 명(明)에 갔다가 그것을 이용해 청병에 성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31
  그러나 다음에 제시될 실제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이와 다르게 이항복이 청병사신으로 명에 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항복은 임진왜란 발발 후 선조가 평양으로 피난 갔을 때 대명청병을 주장하며 자신이 청병사신으로 가겠다고 자청하긴 했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 국방부장관에 해당하는 병조판서의 자리에 있었으므로, 이렇게 위급한 때에 군(軍) 통수권자가 자리를 비워서는 안 된다는 대신들의 주청에 따라 그냥 남을 수밖에 없었다.32  명(明)나라에 갈 수 없었던 이항복은, 청병이 국가의 사활이 걸린 일인 만큼 사신으로 떠나는 누군가에게 그 비책을 건네주었을 것이다. 따라서 임진왜란 발발 후 대명외교를 통한 청병과정과 청병사신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율곡의 비책을 이용해 청병을 성사시킨 인물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2) 조선의 대명청병(對明請兵) 과정과 청병사신
  임진왜란은 1592년 4월 14일 20만에 달하는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정명가도(征明假道)33를 내세운 일본은 전력의 절대적인 우위를 바탕으로 조선군을 잇달아 물리치고, 신립장군이 이끄는 충주 방어선마저 무너뜨렸다. 이 소식을 접한 선조(宣祖)는 4월 30일 쏟아지는 빗속에 100여 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이때 이항복은 도승지(都承旨)34로서 호종대신들의 선두에서 등불을 밝히고 선조의 피난길을 도왔다.
  도성을 떠난 선조 일행이 임진강가에 닿았을 때, 비는 내리고 날은 어두워져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 이항복이 나루터 남쪽에 있던 화석정(花石亭)에 불을 질러 그 불빛을 이용해 간신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임진왜란을 예견한 율곡은 간간이 이 정자에 기름칠을 해 두었는데, 그 자손들이 율곡의 유언에 따라 선조 일행이 임진강가에 이르렀을 때 거기에 불을 놓은 것이라고 한다.35
  임진강을 무사히 건넌 선조 일행은 개성을 지나 평양성에 도착하였다. 그때 이항복은 일본군의 신속한 북상으로 보아 조선군의 자력으로 이를 막거나 회복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명(明)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길이 상책임을 주장하였다.36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많은 신료들은 조선군만의 힘으로 일본군에 대한 방어가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이항복의 대명청병안(大明請兵案)에 대해 소극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항복은 그의 절친한 동료인 이덕형에게 청병의 필요성을 역설(力說)하여 동의를 얻어낸 후, 여러 신료들을 설득하여 명에 구원병을 요청하고자 했다. 조정 신료들도 대동강 방어선이 무너진 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으면서 청병논의는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그때 이항복과 이덕형은 서로 자신이 사신으로 가겠다고 나섰으나, 이항복이 전시(戰時)에 병조판서라는 막중한 직책에 있었던 관계로 선조는 이덕형을 요동(遼東)으로 보내 원병을 청하도록 했다. 이항복은 청병사신으로 떠나는 이덕형에게 자신이 타던 말을 내준 후, 비장한 결의를 다지며 작별인사를 했다.37
  여기까지만 보면 이항복은 그의 지기(知己)이자 청병사신이란 막중한 소임을 맡은 이덕형에게 율곡의 비책을 건넸을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으로도 이덕형이 청병사신으로 떠난 이후 조승훈(祖承訓)군이 조선으로 출병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덕형은 자신이 사신으로 가던 중 의주에 도착한 명군과 만난 사실을 보고한 적이 있고38 그가 요동에 도착하여 청병한 것은 그 이후의 일이었다.39 이러한 사실은 조승훈군 선발대의 출병이 이덕형의 청병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을 의미한다.
  당시 명군의 출병은 일본군이 평양성까지 진군했다는 보고를 접한 뒤 조선을 구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자국 방어차원에서 이루어진 조치였다. 그래서 명군은 평양성에서 의주까지 쫓겨 온 선조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참전을 꺼리고 있었다. 이는 명나라 조정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명에 전해진 ‘여왜동모설(與倭同謀說)’40로 인해 조선을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명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그 소문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너무 짧은 기간에 도성이 함락되고 선조가 의주까지 피난 왔다는 소식에, 조선이 명을 침략하려는 일본을 돕기 위해 가짜 왕을 내세워 길잡이 노릇을 한다는 의심을 갖게 되었다.
  조승훈군은 그러한 의심이 풀리고 선조가 진짜임을 확인한 후에야 평양성전투에 참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이여송이 조선에 구원 왔다가 선조를 만난 후, 선조가 왕상(王相)을 지니지 못했다는 이유로 회군하려 했다가 선조의 통곡하는 소리가 용성(龍聲)이라는 이유로 회군을 중지했다는 일화가 생겨났다고 한다.41  
  기대했던 조명(朝明)연합군의 평양성 탈환작전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의주 행재소에 머무르고 있던 선조일행은 벼랑 끝에 내몰린 처지가 되고 말았다. 조선 조정은 더욱 명에 의지하여, 일본군의 침략 원인이 정명가도(征明假道)에 있으니 머지않아 요동을 침범할 것이란 이유를 들어 요동의 여러 기관으로 사신들을 보내 명의 재출병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명은 자국의 사정을 이유로 조선에 대한 출병을 지연시키면서 한편으로는 유격(遊擊) 심유경(沈惟敬)으로 하여금 왜(倭)와의 강화를 추진케 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 조정은 평양성에 주둔 중인 일본군이 땅이 얼어붙는 동절기에 요동 침범 작전을 개시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래서 심유경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명나라 조정으로 직접 진주사(陳奏使)42를 보내 청병토록 했다.43 진주사로 간 정곤수(鄭壽, 1538~1602)는 1593년 정월까지는 명군이 반드시 출병해야 한다는 것과 일본군 섬멸을 위해 5만 이상의 명군을 요청했다.
  정곤수는 청병을 성사시키기 위해 황극전(皇極殿 : 황제가 업무를 보던 곳) 뜰아래서 엿새 동안 밤낮으로 울고 아무것도 먹지 아니했다. 이에 명나라 사람들이 그 충심(忠心)에 크게 감동하였고 병부상서로 있던 석성도 원병을 보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자 마침내 신종(神宗)44의 마음이 움직여 대병을 보내주기로 약속하니,45 임진년 12월 25일 이여송(李如松)을 총대장으로 4만 5천여 명에 달하는 군사들이 압록강을 건너게 되었다.
  진주사로 명에 파견되었던 정곤수는 귀국한 후 그 다음해에 청병을 성공한 공로로 숭정대부(崇政大夫)46에 올라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가 되었고, 1597년에는 사은사(謝恩使)로 북경에 다녀왔다. 그리고 그가 죽은 뒤인 1604년에는, 이항복과 더불어 호종(護從) 1등 공신에 오르게 되었다.
  율곡이 이항복에게 전해주었던 비책은 명에 청병사신으로 가서 청병을 성사시킨 ‘정곤수’에게 건네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율곡의 비책은 청병사신이 명 황제의 마음을 움직여 청병을 성사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고, 이로 인해 조선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나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던 것이다.     
 

 3. 두률천독(杜律千讀)과 이순신
  1) 율곡과 이순신에 관한 일화
  이조판서로 재직 중이던 율곡은 류성룡을 통해 이순신과의 만남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그때 이순신(1545~1598)은 1582년 1월에 발포 만호에서 파직되었다가47 그해 5월 훈련원 봉사로 복직한 상태였다. 이런 그가 율곡의 요청을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같은 문중 사람이니 만나보아도 괜찮겠지만 인사권을 가진 자리에 있으니 만나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48
  이순신의 청렴함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지만 이로 미루어 율곡이 관직에 있을 때는 두 사람이 만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율곡은 이조와 형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에 이르기까지 정부의 요직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가 죽기 수개월 전에 정적들의 탄핵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파주와 처가가 있던 해주 석담에 머물렀으므로, 아마도 이때쯤 이순신에게 ‘두률천독[두보의 시(詩)를 천 번 읽음]’을 권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관련하여 율곡과 이순신에 얽힌 설화들이 다음과 같이 전해오고 있다. 

  (A) 율곡이 처음으로 이순신을 만났을 때 병서에 月黑雁飛高(어두운 밤에 기러기 높이 난다)와 毒龍潛處水偏淸(독한 용이 숨어 있는 곳은 물이 편벽되게 맑다)의 글귀가49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이순신이 병서에는 없고 당시(唐詩)에 있음을 아뢰이니 그 글귀가 쓰일 날이 있으리니 부디 잊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후일 이순신이 노량에서 왜병과 대적할 때에 기러기 날아오르고, 물빛이 매우 맑은 것을 보고 율곡이 일러준 시구(詩句)를 생각하여 왜적이 올 줄 알았다. 그래서 장수들에게 잠을 자지 말라고 명령하였으나 제장들이 믿지 않았다. 이순신이 군사들로 하여금 밤새 칼로 뱃전을 두드리게 하였는데, 아침이 되어보니 왜병들의 손가락이 배 안에 가득했고 바닷물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이로 이순신의 수군이 크게 승리할 수 있었다.50

  (B) 임란 중에 하루는 왜군들이 잠수를 해서 조선 군함 밑을 뚫고 있었다. 그들은 그 소리를 감추기 위해 가까운 산에서 동시에 도끼로 나무를 베고 있었다. 그때 이순신이 바다에 떠 있는 군선을 보고 문득 율곡(혹은 할아버지)이 훗날에 대비하라며 한지에 써 준 ‘伐木丁丁山更幽51’, ‘毒龍潛處水偏淸’이란 글귀를 생각해 냈다. 그래서 부하들을 시켜 배 밑을 창으로 찌르게 하고 산에서 나무 베는 왜군도 물리쳐 위기를 모면한 적이 있었다.

  위의 두 설화에는 일본군의 기습을 예상한 율곡이 이순신에게 그것을 암시하는 시구(詩句)를 일러주어 위기를 모면한 것으로 되어있다. 특히 (B)설화에는 두보의 시 중 제장씨은거(題張氏隱居)의 한 구절이 인용되어 있어 두률천독이 이와 관계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사의 기록이나 이순신이 임진왜란 기간 중 전쟁 상황을 상세히 기록한 『난중일기』를 비롯해 다른 문헌에서는 그러한 추정을 뒷받침해 줄 만한 자료를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두률천독’은 (B)설화에서처럼 단편적인 몇몇 시구만 일러주는 것과는 달리 글자 그대로 두보의 시52를 천 번 읽으라는 뜻이다. 이런 점들을 생각해 볼 때, 두보의 시 몇 구절에서 ‘두률천독’의 의미를 찾기보다는 두보와 그의 시가 갖는 성격,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정서 등을 살펴봄으로써 그 의미에 접근해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2) 두보 시(詩)의 성격과 두률천독의 의미
  두보(杜甫, 712~770)의 자는 자미(子美)이고, 호는 소릉(少陵)인데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의 벼슬을 지냈다 하여 두공부(杜工部)라고도 불렸다. 그는 이백(李白, 701~762)보다 11년 후에 나서 당(唐) 현종(玄宗)ㆍ숙종(肅宗)ㆍ대종(代宗) 3대에 걸쳐 살았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극성했던 당의 국력이 점차 기울어 극히 위험한 시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안사(安史)의 난(亂)53 이 일어나고 토번(吐藩)54의 침입에 의해 수도인 장안(長安)이 함락되었으며, 자사(刺史)55나 변방의 장수들까지도 소란을 피워 질서가 문란해졌다. 게다가 수해와 한발이 자주 발생해 굶주림의 고통을 가중시키곤 했다.
  이런 시대를 살았던 두보는 그의 일생동안 1,480여 수(首)나 되는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시는 엄격한 율시(律詩)56의 형식을 갖춘 것으로, 대상의 참모습을 충실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두보는 오랜 유랑생활을 통해 정치의 흥망과 사회의 혼란,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백성들의 참상을 직접 보고 느꼈다. 그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세상사와 인간의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했던 것이다.
  젊은 시절 두보는 재기발랄한데다가 노력도 많이 하여 문장력이나 시 창작력에 자신이 있어 반드시 입신양명(立身揚名)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과거에 낙제한 이후 43세까지 관직에 진출하지 못해 가난에 허덕이며 유랑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44세에 병갑(兵甲)57이나 관리하는 말직에 임명되었지만 아들이 굶어죽는 비통한 현실에 직면하기도 했다. 이후 그의 관직은 좌습유(左拾遺)58에 오른 게 고작이었고 그 자리마저도 곧 상실하게 된다. 
  그럼에도 두보는 시성(詩聖)의 칭호를 받고 있을 뿐더러 한시(漢詩)가 지어진 이후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시가 일대 진전을 이룬 시기는,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을 때 그가 수도인 장안으로 숙종을 찾아갔다가 적에게 포로로 9개월 동안 감금되었을 때였다. 이때 그가 쓴 「애왕손(哀王孫)」ㆍ「춘망(春望)」 등은 망국의 비애를 읊으며 군주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낸 작품이고, 「월야(月夜)」ㆍ「비청파(悲靑坡)」 등은 가족의 안부를 걱정하고 패전을 안타까워한 작품들이다. 이 장안의 유배생활 이후 그의 시는, 자신의 세계를 표현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처지와 슬픔을 인류 보편의 비애로 승화시키고 백성들의 고통을 대변하며 보다 객관성을 띄게 되었다.59
  동시대의 인물인 이백이 육조(六朝)60에서 안사의 난까지의 낭만정신을 잘 나타내었다면 두보는 안사의 난 이후 현실주의적인 시풍(詩風)을 열었다. 그는 대중들과 함께 사회의 혼란과 전쟁의 참상을 겪으면서 몸소 체험한 현실을 객관적으로 묘사하였다. 그래서 후대인들은 두보의 시를 ‘실록(實錄)’ 혹은 ‘시사(詩史)’라 하였고, 그는 민중을 위한 시인으로 널리 존경받고 있다. 
  이처럼 두보의 시에는 전쟁의 참상과 백성들의 고난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고, 나라와 백성을 염려하는 마음이 절절히 배어 있다. 이런 두보의 시를 율곡이 이순신에게 ‘천 번 읽으라’고 당부했으니, 이는 율곡이 앞으로 일어날 전란에서 이순신이 차지하게 될 역할과 그가 겪어야 할 고난들을 내다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율곡은 그가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마음을 한층 더 강하게 지니고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강인한 정신을 지니길 바랐던 것으로 여겨진다.


  3) 두률천독을 통해 임진왜란을 극복한 이순신
  1591년, 47세의 이순신은 그의 오랜 지기인 류성룡의 천거에 힘입어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에 임명되었다. 부임 후 그는 각종 군기와 군사시설을 점검하고 부족한 군사들을 충원하여 일본군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다음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군은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일본군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고 패전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연전연승하며 남해의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했다. 이로 인해 수륙병진(水陸竝進)으로 군사와 물자를 수송해서 조선 정복 후 명(明)나라로 가려던 풍신수길의 계획은 큰 차질을 빚게 되었다.
  이순신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적들을 벌벌 떨게 만든 장수였지만, 그가 전란 중에 기록한 『난중일기』를 보면 병마(病魔)로 인해 육체적인 고통을 토로하는 대목이 무려 180여 회나 나온다. 적지 않은 나이에 몸이 몹시 불편해 종일토록 누워서 신음했다거나 눕기조차 힘들었다는 기록도 수차례 나올 정도로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여 일본군의 도발을 모두 차단하였다.
  명군의 개입과 더불어 이순신의 활약으로 전황이 불리하다고 판단한 일본은, 명과 강화교섭을 추진했으나 그들의 요구가 관철되자 않자 곧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이때 그들은 간계(奸計)를 써서 이순신을 제거하고자 했는데 그를 시기하던 무리들도 이에 동조하여 이순신을 모함하였다. 죽음직전까지 몰렸던 이순신은 정탁(鄭琢)의 변호에 힘입어 겨우 풀려나 백의종군61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정2품 정헌대부까지 올랐던 이순신은 옥고(獄苦)를 치르고 나서 종과 같은 대우를 받고 아무런 직책도 없이 군역에 종사해야만 했다. 그 와중에 그가 극진히 모셨던 모친의 부음을 접하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 빨리 죽기만 기다릴 뿐이다.”며 비통한 심정을 토로하였다. 장례식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백의종군 길에 올라야 했던 그는 얼마 후 그가 수년간 공들여 키워놓은 조선수군이 일본군에 의해 괴멸되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하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울분을 삭혀야만 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놓인 것을 좌시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비록 직책은 없었으나 그를 따르는 군관들과 전황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다시 통제사의 지위에 오른 이후에는 조선 수군의 재건을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가 조금만 늦게 움직였어도 육로로 서진하는 일본군에 의해 몰살될 뻔한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그의 지극한 마음이 있었기에 조금도 머뭇거림 없이 전선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이순신은 적의 공격을 효율적으로 막기 위해 전라우수영에 남은 군선과 장졸들을 모아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교전에 앞서 그는 장수들을 모아놓고,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62는 불굴의 의지를 장졸들에게 심어주었다. 그리고 열배가 넘는 적들을 맞아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격전을 치러 대승을 거두었다. 이것이 바로 세계해전사에서도 보기 드문 명량대첩63이다. 이는 오직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생각하는 그의 충의정신이 투철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 이순신이 임진왜란 중에 쓴 『난중일기』 곳곳에 잘 나타나 있다. “…누웠어도 잠이 들지 못했다. 나라를 근심하는 생각이 조금도 놓이지 않아 홀로 배의 창가에 앉았으니 떠오르는 생각이 만 갈래였다.” 64, “…촛불을 밝히고 혼자 않아 나라 일을 생각하니 무심결에 눈물이 나온다.”65 이 모두가 이순신이 나라의 위기를 맞아 얼마나 걱정하고 노심초사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기사들이다.
  그리고 그의 애민정신(愛民精神)도 여러 행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전쟁이 소강상태일 때는 백성들의 생업을 보장해 주고 산업을 장려하기 위해 애썼으며, 군사들이 민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엄히 단속하였다. 피난민들을 위해서는 적선에서 노획한 쌀과 포목 등을 나누어 주어 편히 지내도록 도와주었다. 그래서 피난 갔던 백성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조선 수군이 적선을 물리치면 모두 다시 살 길을 얻은 것처럼 기뻐했다.
  이처럼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지극했던 이순신은 신병(身病)으로 인해 고통 받고 모친과 군사들을 잃는 아픔 속에서도 구국(救國)의 일념을 놓지 않았다. 이 땅에서 왜적을 몰아내기 위해 사력을 다했던 그가 노량해전에서 최후를 맞았을 때, 그 소식을 접한 백성들은 길거리로 몰려나와 통곡하였고 시장을 보던 사람들은 술을 마시지 않았으며, 선비들도 제문(祭文)을 지어와 제사지냈다고 한다. 그의 사후 권율과 더불어 선무 1등 공신에 이름이 올랐고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하사받았다.  
  율곡은 중앙의 관료로 있던 이항복에게는 어떤 한 경우에만 적용할 수 있는 비책(고추수건)을 일러주었다. 이에 반해 야전 지휘관으로서 7년의 전란 동안 직접 전투를 수행하며 수많은 고난들을 헤쳐 나가야 했던 이순신에게는 그의 정신을 재무장할 수 있는 비책(두률천독)을 일러주었다. 이로 인해 이순신은 그에게 닥친 크고 작은 시련들을 이겨내고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마음을 한결같이 할 수 있었다. 또한 전란 중에는 치밀한 작전을 구사하여 23전 23승이라는 세계해전사에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업적을 이루어 내며 7년 전쟁을 승리로 장식했다. 그래서 장수로서는 보기 드물게 성인(聖人)으로까지 추앙을 받아 왔고, 적국인 일본에서조차 그의 인물됨과 장수로서의 자질을 높이 평가하여 신(神)으로 섬김은 물론 그의 전략과 전술을 연구해 해전에 응용해 오고 있는 것이다.66 


  Ⅳ. 맺음말
  임진왜란 초기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백년 내전을 통해 잘 달련된 무사들이 20만에 달했고 조총(鳥銃)이란 최신식 무기도 보유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조선군은 전시(戰時)에 동원될 수 있는 인원이 채 만 명도 되지 않았고 잘 훈련된 정예병도 아니었다. 이처럼 조선군은 전력에서 일본군보다 절대 열세의 위치에 놓여 있었다. 그러했기에 개전 후 단 20일 만에 도성이 함락되고 임금이 의주로 몽진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으며, 전라도를 제외한 전 국토가 일본군의 총칼 아래 유린당해야만 했다.

  개전 초기의 상황만 놓고 보았을 때 불리한 전황을 뒤집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일본군을 물리치고 7년간의 병화(兵禍)를 종식시켰다.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겠지만 전란을 예견하고 그에 대비했던 선지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 중의 한 분이 바로 『전경』에 소개된 율곡 이이(李珥)이다. 그가 전란에 대비해 이항복과 이순신에게 준 비책은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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