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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생의 길허미수와 송우암의 해원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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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태용 작성일2017.03.30 조회3,54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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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미수와 송우암의 해원에 관하여


연구위원 김태용

 

 

Ⅰ 머리말

 

상제께서 동곡에 머무실 때 그 동리의 주막집 주인 김사명(金士明)은 그의 아들 성옥(成玉)이 급병으로 죽은 것을 한나절이 넘도록 살리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도저히 살 가망이 보이지 않자 아이의 어머니가 죽은 아들을 업고 동곡 약방으로 찾아 왔도다. 상제께서 미리 아시고 “약방의 운이 비색하여 죽은 자를 업고 오는도다.”고 말씀하시니라. 성옥의 모는 시체를 상제 앞에 눕히고 눈물을 흘리면서 살려주시기를 애원하므로 상제께서 웃으시며 죽은 아이를 무릎 위에 눕히고 배를 밀어내리시며 허공을 향하여 “미수(眉)를 시켜 우암(尤菴)을 불러라.”고 외치고 침을 흘려 죽은 아이의 입에 넣어주시니 그 아이는 곧 항문으로부터 시추물을 쏟고 소리를 치며 깨어 나니라. 그리고 그 아이는 미음을 받아 마시고 나서 걸어서 제 집으로 돌아가니라. (제생 9절)

 
상제님께서는 병을 고치실 때 약재를 사용하기도 하셨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보통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처방을 내리기도 하셨다. 김사명의 죽은 아들 성옥을 살리실 때에도 특별한 약재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다만 신명을 부르신 뒤 침을 아이 입에 흘려주셨을 뿐이다. 그런데 이때 상제님께서는 ‘우암’을 직접 부르지 않으시고 ‘미수’를 시켜서 부르셨다. 『전경』 전체를 통틀어 상제님께서 그 해당 신명을 직접 부르지 않으시고 다른 신명을 통해 부르신 경우는 이곳에서만 보이는데, 그 배경이 과연 무엇인지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송우암과 허미수는 서인과 남인의 영수로서 동시대를 살면서 첨예하게 대립한 정적(政敵)관계였다. 그들의 대립은 근본적으로 유학자로서 그들이 가진 학문관의 차이에서 기인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유학에서는 수기치인(修己治人: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은 후에 남을 다스림)을 학문의 목표로 설정하고 있기에, 자신의 학문을 닦는 것이 개인의 수양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에 대한 적극적 개입으로 나아가게 된다. 즉 천지의 이치를 궁구하고 나면 그에 따라 스스로를 연마하는 수양론이 나오게 되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정치사상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학에서 한 개인의 학문관은 그 사람의 정치관을 결정하게 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미수와 우암의 생애와 특히 학문관을 중점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이들이 어떤 정치철학을 가지게 되었고, 그 결과 어떻게 서로 대립하게 되었는지를 조명해 보고자 한다. 이 작업을 통해서 상제님께서 미수를 시켜 우암을 부르신 데 대한 배경이 어느 정도 밝혀지리라 본다.

 


Ⅱ. 허미수와 송우암의 삶과 정치관

 
1. 시대 배경


14세기말 조선왕조의 지도이념으로 수용된 성리학은 점차 보편화되고 자기발전을 거듭하여 16세기 명종, 선조대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정착되었다. 이 시기에 이르면 성리학적 질서와 가치관은 민간에까지 보편화될 뿐만 아니라, 퇴계·율곡 등 성리학에 밝은 많은 학자들이 등장하여 이론적으로도 확고한 틀을 갖추게 된다.01


17세기에 이르면 성리학은 다양한 방향으로 발전해갔지만, 각 학파들은 자신들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도교·불교뿐만 아니라 유학내의 다른 학파들조차도 배척하는 경향을 띄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성리학은 차츰 교조(敎條)02화 되어가고 명분에 대한 강한 집착이라는 형태로 변질되어 갔는데, 이에 대한 반발로 성리학만을 절대시하는 학문태도에 반대하는 새로운 학풍이 일어났다. 또 이것은 무엇보다도 양란(兩亂: 임진왜란, 병자호란)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당해 성리학이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기도 하였다.


주자주(朱子註)를 중심으로 하는 <사서(四書: 논어, 맹자, 대학, 중용)>와 <삼경(三經: 시경, 서경, 역경)>에 집중하는 성리학이 당시의 학문 풍토였다면, 새로이 나타난 학풍은 본원적 유교 경전인 <육경학(六經學 : 시경, 서경, 역경, 춘추, 예경, 악경)03>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중심에 미수 허목(許穆, 1595∼1682)04이 있었으니, 당시 성리학을 대표하고 있던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05과는 학문관의 차이로 인한 정치적인 대립이 야기될 수밖에 없었다.

 


2. 미수와 우암의 삶

 
가. 허미수의 가계와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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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미수의 외조부인 임제(林悌, 1549~1587)는 조선 중기 시인 겸 문신으로서 동서의 당파싸움에 실망하여 벼슬을 버리고 명산을 순유하다가 요절한 인물이다. 그는 민중적인 문학작품을 많이 남기기도 하였는데, 특히 사대(事大) 질서를 옹호하는 성리학적 명분론에 크게 반발하였다.06 또 허미수의 가계(家系)는 서경덕을 중심으로 한 소북계07였으며, 그의 부친 허교(許喬, 1567~1632)는 도가적 학풍을 띄었던 김시습의 도맥08을 이은 박지화09의 문인이었다.


이런 가풍 속에서 미수 허목은 현감이었던 교(喬)의 삼형제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7년 연상의 종형인 허후(許厚)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23세 되던 해 종형과 함께 정구(鄭逑)10을 찾아가 사사(師事)하였다. 30세에 경기도 광주에 있는 자봉산에서 광범위한 독서와 학문에 정진을 거듭하였으며 32세에 박지계 사건11으로 정거(停擧)12되자 부친의 임지를 따라 전국을 유람하였다. 그후 허미수는 산림에 묻혀 현실에 전혀 물들지 않고 학문 연마와 유유자적한 삶으로 장년기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는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던 중 56세 되던 효종 원년(1162)에 능참봉13에 제수(除授: 천거에 의하지 않고 임금이 직접 벼슬을 내림)되었으나 바로 사직하였으며, 64세에 다시 지평(持平)14으로 제수되어 관직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미수는 삼척부사로 재임하기도 하였는데 그 기간 동안 향약으로 지방교화에 힘썼다. 특히 그 지역이 동해의 밀물과 폭우로 수환(水患)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동해송(東海頌)과 척주시(陟州詩)를 지어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15을 세웠는데, 이 이후로는 조수가 밀어닥치지 않았다 하여 퇴조비(退朝碑)라고도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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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미수는 68세가 되던 1662년에 경기도 연천으로 낙향하여 80세가 되던 1674년까지 학문에 매진하였는데 이때 예학에 관한 이론을 더욱 정립하게 된다. 그는 숙종 원년(1095년) 81세 되던 해에 임금의 부름으로 인해 관직에 나아가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이 되었으며, 1678년 서인 송우암의 처벌문제로 영의정인 허적과 뜻이 맞지 않아 낙향하였다가 1682년 88세로 생을 마감하였다.16

 


나. 송우암의 가계와 생애

 

우암 송시열은 충북 옥천에서 태어났으며, 미수 허목보다 12살이 어리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친 송갑조(1574~1628)의 엄격한 지도하에 성리학에 입문하여 공자·주자·율곡의 학문을 익혔다.


우암은 부친의 가르침에 따라 주자와 율곡의 학문을 정통으로 받들어 자신의 학문적 목표와 기준으로 삼고 이를 심화(深化)시켜 나갔다. 24세인 1630년(인조 8)에 사계 김장생(1548~1631)의 문하로 들어가 『근사록(近思錄)』·『심경(心經)』·『가례(家禮)』·『소학(小學)』 등을 배웠으며, 27세인 1633년(인조 11)에 생원시에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를 논술하여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우암은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의 천거로 경릉참봉이 되었으나 곧 사직하였다. 다시 봉림대군(후일의 효종)의 스승으로 임명되지만, 1년 남짓만에 발생한 병자호란 때 송우암은 남한산성까지 왕을 모시고 갔다가 청나라와의 화의가 성립되자 다시 낙향하였다.


송우암이 재차 벼슬길에 들어선 것은 효종이 왕위에 오르면서였는데, 그는 곧바로 찬선(贊善 : 조선시대, 세자시강원에 속하여 왕세자의 교육을 맡아보던 정3품 벼슬)으로 천거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조판서로 승진하여 효종을 도와 북벌을 추진하였다. 그후 좌참찬, 우의정 등을 역임하면서 서인의 영수로서 자리를 굳혔다.


그는 67세 되던 해 서인이 남인과의 정권 다툼에서 패하자 제주도로 유배를 가야 했으며, 73세인 1680년 다시 정치에 복귀하게 되었으나 곧 정계에서 은퇴하고 청주 화양동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숙종이 희빈 장씨의 소생인 왕자를 왕세자로 책봉하자 시기상조라는 반대 상소를 올림으로써, 우암은 다시 현실 정치에 개입하게 된다. 우암의 상소에 격분한 숙종은 83세의 우암을 제주도로 유배를 보내고, 넉 달 뒤 국문(鞠問)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올라오는 우암에게 정읍(井邑)에서 사약을 내렸다. 83세로 생을 마감한 우암은 고집이 세고 과격하였지만, 무엇보다도 바른 것을 행동으로 보여 준 실천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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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미수와 우암의 학문관과 정치관

 

가. 허미수의 학문관과 정치관


허미수는 양란 이후 흐트러진 국가운영과 현실적 사회 문제를 성리학이 해결하지 못 하는 것을 보고, 기존의 유학자들이 추구했던 성리학과 달리 원시유학인 육경학을 학문의 바탕으로 삼았다. 물론 이는 가계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기도 했다. 그가 <육경>을 학문의 표준으로 삼은 것은 공자라는 성인의 경지에서 현실을 진단해야 바른 처방이 나올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공자의 ‘예(禮)는 도리를 다하여 자기의 본분을 지키는 것이고, 악(樂)은 서로 화합하여 하나됨을 이루는 것’17이라고 하는 예악론(禮樂論)에 따라 허미수도 <육경> 중에서 『예경(禮經)』과 『악경(樂經)』에 많은 관심을 두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도 자신의 저작인 『미수기언(眉記言)』에서 “도덕과 인의, 군신과 부자도 예가 아니면 설 수 없고 피폐한 정치와 무질서해진 법, 흩어진 백성과 혼란한 나라도 예가 아니고서는 평정할 수 없다.”, “성인의 정치는, 사람은 마음으로 감복시키고 마음은 음악으로 감복시키는 것이니 임금이 된 이는 음악을 만들어서 잘 조절하여 중화(中和)를 잃지 않게 하여야 한다.”라고 하여 예와 악을 강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허미수는 예가 규범·준칙이라는 이유 때문에 지나치게 엄격하고 고정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예의 엄격함은 악에 의해서 보완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그는 예와 악을 통해 문란해진 신분질서나 정치기강을 바로 잡을 수 있고, 인간 감정의 융화도 바르게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허미수는 『춘추』도 중시하였다. 『춘추』에는 군주를 높이고 신하를 낮추며 왕도(王道)를 행하여 인륜기강을 바로잡고 선으로써 악을 규탄하는 내용18이 담겨있다. 이러한 『춘추』를 통해서 허미수가 주장하고자 하는 의도는 현실적으로 침체된 임금의 권력을 높이고자 하는 데 있었다. 다만 그는 임금 스스로가 권력을 높이기보다 신하들이 스스로 왕권을 높여주길 기대했다.


이와 같이 그가 육경학에 치중한 것은 성리학이 아닌 유학 본래의 정신에 주목하고, 서인들이 주장하였던 신권 중심의 정치보다 왕권 중심의 왕도정치를 이루고자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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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송우암의 학문관과 정치관

 

우암의 학문적 기초는 주자·율곡으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세계로, 이는 부친 송갑조가 공자에서 주자로, 주자에서 율곡으로 학문의 순서가 이어지는 것이니 마땅히 공자를 배우려면 율곡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암은 독자적인 학문세계를 만들어 나가게 된 이후부터는, 율곡으로부터 학문을 시작하는 학문관에서 벗어나서 공맹지학(孔孟之學: 공맹의 학문)을 계승한 주자의 학문과 인생을 자신의 학문의 본보기로 삼기 시작했다. 주자 중심의 학문관을 가진 송우암은 서인의 영수로서 다음과 같이 성리학에 바탕을 둔 정치관을 갖게 된다.

 


군주는 성리학에 매진하여 성의정심(誠意正心)의 바탕을 마련해야 하며, 그 이후에 수신과 제가·치국·평천하를 해야 한다. 그리고 정치란 군주가 신료들을 뽑아 시키는 것이다. 그런 만큼 훌륭한 신료를 뽑는 것이 정치에 있어 중차대한 일이 된다. 군주는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말고 공평한 마음으로 정치에 임해야 하며, 올바른 정치를 위해서는 군주를 바르게 할 수 있는 대인을 뽑아 재상에 임명하고 공평·정직·과감한 사람을 언론의 직에 임명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모든 정사(政事)는 임명한 신료들에게 일임해야 하며 군주가 신료들에게 정사를 일임하면 정사에 개입하지 말아야 하며, 군주가 정사에 개입하는 것은 체통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러한 정사의 문란은 체통의 붕괴에서 비롯되기에, 재상이 신료의 영수로서 정치를 주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군주의 사사로운 은총을 입은 무리가 권력을 농단하면 정사는 문란해진다.(「기축봉사」 중)19

 


이와 같이 우암은 임금이 강력한 왕권을 가지는 정치가 아닌, 신료(臣僚) 위주의 신권정치를 추구하였다. 또한 그는 병자호란 후 청나라의 내정간섭이 날로 심해지자 부패한 신료들로 인해 정치권력이 타락하고 백성들의 생활마저도 피폐해지는 상황들이, 결국에는 성리학 이념의 동요에 기인한다고 보고 이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송우암은 성리학에 입각한 학문관 및 정치사상으로 시대상황을 인식하고 처방을 내렸다.20 그러나 그의 신권중심의 정치사상은 임금을 무시하는 태도로 비쳐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그는 남인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어 유배라는 힘든 과정을 거치고 죽음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Ⅲ. 허미수와 송우암의 대립 전개


미수와 우암이 활동하던 조선사회는 양란을 거친 후 와해된 사회질서를 재건하고 상처받은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임금을 비롯한 모든 백성들이 노력하던 시기였다. 당시 정치를 이끌어가던 남인과 서인은 청나라에 대한 복수를 해야 한다는 북벌론(北伐論)과 예치(禮治)21를 대내외 정책의 기본방향으로 삼았다.


그러나 인조반정22 당시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이 동조하는 형식을 취했으므로 정계의 주도권은 자연 서인들이 가지게 되었고, 남인들은 서인들에게 불만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서인과 남인 사이의 공존의 틀은 깨어지고 서로 대립의 노선을 걷게 되었으니 바로 그 중심에 미수와 우암이 있었다. 미수와 우암의 대립은 근본적으로 그들의 학문관과 정치관의 차이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했는데, 이것은 군비를 확충하는 문제와 예송 문제에서 첨예하게 드러나게 된다.

 


1. 군사력 강화


병자호란으로 인조는 청태종의 군영이 있던 한강변 삼전도(三田渡)23에서 청나라 왕에게 치욕적인 항복의 예를 행하였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청나라에 볼모(1637년)로 끌려갔다. 그후 10년 만에 조선으로 돌아온 봉림대군은 소현세자가 급서(急逝)하고 인조가 승하한 후 임금(효종)이 되었다. 그는 등극하자마자 청나라에 복수하기 위해 북벌을 기치로 내세우며 군비확충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효종은 청나라에 유화적인 자세를 취하던 세력들을 몰아내고 반청적인 인사들을 중용했는데, 거기에는 대군으로 있을 당시 자신의 사부였던 송우암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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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은 송우암으로 하여금 친청파인 김자점을 탄핵하고 북벌정책에 반대하는 문신들을 회유하도록 했다. 또한 우암과 더불어 북벌을 위하여 군사력 강화에 힘을 기울였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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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허미수는 원칙적으로 북벌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가 중시한 예악은 국가사회의 기강과 질서를 확립하여 사회 안정을 꾀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한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의 북벌은 과도한 군비 지출을 가져와 백성의 부담을 가중시키고 민심이 이탈하는 현상을 초래할 것이라 여겼다.25 또한 그가 우려했던 부분은 국방 강화를 명분으로 집권층들이 사병(私兵)26을 양성하는 것과 감영에 소속된 둔전(屯田: 고려·조선 시대에 군량을 충당하기 위하여 변경이나 군사 요지에 설치한 토지)이 모두 개인 가문[私門]의 이득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러한 우려 때문에 미수는 다음과 같은 상소를 숙종에게 올렸다.


비옥한 땅을 나누어 둔전을 삼으니, 지부(地部 : 호조)가 크게 구부러져 조(租)의 수입이 날로 줍니다. 아문(衙門 : 관원들이 정무를 보는 곳)에 바치는 세(稅)는 10분의 2 혹은 3이 되지만 실용이 되지 못하며, 나머지는 모두 사재(私財)가 되고 있으니, 이것이 재정이 크게 무너지는 까닭입니다. 영문의 사병은 아문에서 통솔하고 병조가 관리하지 못하니, 많은 병졸이 모두 사가(私家)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이는 고려말기 가병(家兵)과 비슷합니다. 둔전과 사병은 공실(公室)의 큰 좀이요 사문의 큰 이(利)가 되고 있습니다.27


이처럼 허미수는 북벌을 위한 군비확충이 오히려 개인 가문의 축재(蓄財)에만 이용되고 있을 뿐 큰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북벌보다는 민심을 수습하고 백성들이 맡은바 일을 잘 하게 하는 농본정책(農本政策)이 부국(富國)하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그런데 당시의 국내외 정세를 살펴보면 북벌은 실현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먼저 국외적으로는 효종 즉위 다음해인 1650년 청나라군이 중국 남부의 경동(慶東)과 계림(桂林)을 함락시켰고, 1656년에는 주산(舟山)열도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1659년 청나라군이 운남(雲南)으로 진격하자 명나라 부흥의 마지막 희망인 영명왕(永明王)마저 버마로 도망하였으며, 3년 후인 1662년에는 청나라 장수 오삼계가 버마까지 진격해 영명왕을 살해함으로써 명나라는 완전히 망해버렸다.28 이처럼 청나라는 군사적으로 매우 강대한 위세를 떨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국내 정세는 두 번의 전란으로 인해 백성들의 생활이 파탄지경에 이르렀고, 각 지역마다 유민은 증가하고 도적떼가 늘어났으므로 농촌 경제마저 불안정하여 더 이상 군비확충이 어려웠다.


이처럼 당시의 실제 현실은 북벌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우암은 대의명분에 입각하여 청나라를 배격하고자 했던 것이고, 허미수는 이상적인 북벌보다는 일단 현실적으로 도탄에 빠진 민생부터 안정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2. 예송논쟁


미수와 우암의 더욱 극단적인 대립은 예송논쟁(禮訟論爭)에서 드러난다. 예송논쟁이란 왕이 죽었을 때 상복을 몇 년 동안 입어야 하느냐에 대한 논쟁이다. 효종의 아버지인 인조는 1610년 당시 한준겸의 딸인 한씨와 혼인하였으나 인열왕후(한씨)가 1635년에 사망하자, 3년 후에 영돈녕 부사 조창원의 딸을 새 왕비로 맞아들였다. 당시 인조의 나이는 43세였으며 새 왕비(자의대비 조씨)는 14세였고, 인조의 아들 봉림대군은 자의대비보다 5살이나 더 많은 19세였다.

 


가. 기해예송


봉림대군은 인조가 승하하자 1649년에 임금(효종)이 되었다. 즉위 초부터 북벌을 강력하게 추진하던 효종은 재위 10년이 되던 해인 1659(己亥)년에 갑자기 승하하게 되었는데, 그때까지 살아있던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몇 년간 입어야 하는가가 문제가 되었다.


원래 조선시대의 궁중예법에 따르면 왕이 죽으면 그 왕에 대한 예로 상복을 3년 동안 입어야 했다. 그런데 서인들은 효종이 왕이었으나 장자가 아니었으므로 자의대비가 1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기년복) 주장하였다. 그러나 남인들은 효종이 비록 둘째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인조의 뒤를 이은 적법한 왕이었으므로 자의대비가 왕에 대한 예의를 갖춰 3년복(참최복)을 입어야 한다고 맞섰다.


이 논쟁을 기해예송이라 하는데 기년설(1년)을 내세운 서인측과 참최설(3년설)로 맞선 남인측은 처음에는 단순한 견해 차이에서 출발하는 듯했으나, 논쟁이 진행되는 동안 양측의 학문관과 정치이념의 차이가 뚜렷이 부각되었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서인의 송우암, 남인의 허미수 두 사람이 있었다.


우암이 주장한 기년설은 주자의 예설인 『가례』를 중시한 김장생의 『가례집람(家禮輯覽)』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의 논리는 성리학 이념의 핵심인 종법(宗法: 중국 주나라 때 성립한 장남이 그 집단의 대표 지위를 계승한다는 조직 규정)이 유지되어야 하기에, 왕이라도 차자일 경우에는 적통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우암의 주장 근저에는 왕이 권위로 통치하는 것보다는 신하들이 중심이 되는 신료위주의 정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있었다. 이와 반대로 허미수는 고례(古禮 : 주나라 이전 고대의 예법)에 입각한 예학으로 ‘차자(次子)라도 왕이라면 적통으로 봐야 한다’라는 논리로 3년설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복제논의는 천리(天理)인 종법이 모든 경우에 적용되어야 하는 불변의 법칙으로 보는가, 아니면 왕에게는 변형될 수 있는 가변적인 법칙으로 보는가에 대한 논의였다. 허미수와 송우암의 대립되는 논쟁에 각각 남인과 서인의 지지가 있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이때 서인의 중진 원두표가 허미수의 3년설을 지지하는 일이 발생하자, 현종은 서인과 남인 간의 당파 싸움뿐만 아니라 서인 내부의 분열로 나라의 기강이 흔들릴 것을 우려하여 송우암을 지지하는 하교를 내렸고29, 결국 7년간30의 기해예송은 서인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서인과 남인은 예송논쟁 이전에는 당이 다른 사대부로 서로 공존하는 관계였으나 예송 이후에는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적대시 하는 관계로 변하게 된다.

 


나. 갑인예송


현종 15년(1674), 효종의 비(妃)이자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 장씨가 세상을 떠나자, 그때까지도 살아있던 자의대비가 상복을 몇 년간 입어야 하는가가 또다시 논의되었는데 이를 갑인예송이라 한다.


이 갑인예송에서는 서인이 9개월설(대공설)을, 남인이 1년설(기년설)을 주장하였다. 갑인예송은 15년 전에 벌어졌던 기해예송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문제였으나, 예조에서는 인선왕후를 장자비(長子婢)로 보는 1년 복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예조에서 갑자기 문제를 제기하면서 예전 기해예송때 효종을 적통이 아닌 차자로 보았으므로 인선왕후도 차자비로 보는 것이 옳다 하여 대공설로 개정하였다.


현종은 예조의 의견대로 9개월설을 인정하여 자의대비의 복제를 9개월복으로 시행하였다. 그러나 9개월 중 5개월이 지날 즈음 대구 유생 도신징(都愼徵, 1604~1678)이 이것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섬으로써 다시 논쟁이 불거졌다.


이 논쟁은 왕권 회복을 바라는 현종과, 서인들에게서 정권을 빼앗고 싶은 남인들에게 있어서는 다시없이 좋은 기회였다.


이에 현종은 서인들에게 왜 대공설이 되어야 하는지를 재차 묻게 되고, 결국 기년설을 채택하게 되었다. 현종은 서인들이 왕권을 무시한다고 여겨 서인들을 정계에서 내몰기 위해 남인 중심으로 내각을 구성하였다. 이를 빌미로 정권 만회의 기회를 잡은 남인은 서인에 대한 공격을 가하였으며, 그들의 관직 삭탈을 단행하는 동시에 송우암을 유배 보내게 하였다.

 


3. 송우암의 죽음


갑인예송의 승리로 정권을 잡은 남인들은 서인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놓고 집안싸움을 일으키게 된다. 허미수는 서인을 강력하게 응징하고 송우암을 죽여야 한다는 강경한 입장이었으며(이 파를 청남이라고 부름), 허적은 서인을 적당하게 처벌하자는 온건한 입장(이 파를 탁남이라고 부름)이었다.


청남과 탁남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어가고 있을 때 숙종은 남인이 정권을 잡은 지 1년도 안 되어서 다시 서인을 집권시키는 경신환국(庚申換局)을 단행하게 된다. 경신년인 1680년 3월 영의정인 허적의 집에 그의 조부 허잠을 위한 연시연(延諡宴: 시호를 받은 데 대한 잔치)이 있었다. 그날 비가 오자 숙종은 허적의 연회에 궁중에서 쓰는 용봉차일(龍鳳遮日 : 기름을 칠하여 물이 새지 않도록 만든 천막)을 보내려고 하였으나 벌써 허적이 가져간 뒤였다. 임금의 허락도 받지 않고 가져간 데 대해 노한 숙종은 그 잔치에 남인들이 모두 모여 있음을 알고는 곧바로 철원에 귀양가 있던 김수항을 불러 영의정을 삼고, 조정의 요직을 모두 서인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리고 허적의 아들 허견의 역모사건이 터지자 남인들은 완전히 몰락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다시 서인들이 득세하기 시작하였으며, 송우암 또한 정계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숙종에게 왕통을 이을 왕자가 없었다가, 즉위 후 15년 만에 희빈 장씨가 대를 이을 왕자를 낳는 일이 생겼다. 숙종은 대단히 기뻐하였지만, 서인은 남인의 집안과 관계가 있는 희빈 장씨의 소생인 왕자가 세자로 책봉되면 또 한 번의 큰 화가 올 것을 두려워하여 왕자의 세자 책봉을 막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였다. 이러한 낌새를 느낀 숙종은 원자(元子: 아직 왕세자에 책봉되지 아니한 임금의 맏아들)의 명호(名號)를 종묘에 서둘러 고하였다. 신하들과 아무런 상의도 없이 숙종이 이 일을 처리하자, 그러한 처사가 예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한 우암은 숙종을 책망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렇지 않아도 서인들이 장희빈의 소생인 왕자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숙종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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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소문은 송우암뿐만 아니라 서인을 제거하는 밑바탕으로 작용하였는데, 숙종은 서인들을 제거하는 동시에 다시 남인들을 각 요직에 등용시켰다. 정계에 복귀하자마자 남인들은 과거 서인들에게 당했던 치욕을 갚기 위해 영의정 김수항을 비롯한 많은 서인들을 사형에 처하게 하였고, 송우암을 제주도로 유배 보내었다. 수개월 후 숙종은 우암에게 국문(鞠問)을 받으라는 하교를 내렸다. 이때 남인들은 서인과 남인의 쫓고 쫓기는 당파 싸움이 송우암을 제거하면 끝을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숙종에게 우암을 죽이도록 설득하였다. 이로 인해 우암은 한양으로 올라오던 중 전라도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남인과 서인(노론)의 관계가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관계는 예송논쟁 시절보다 더욱 심해졌고, 서로 혼인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의복까지도 달리하면서 적대감을 나타냈다.


수십 년이 지나도 당파싸움이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영조와 정조는 탕평책(蕩平策)31을 써서 서인과 남인의 화해를 도모하였으나, 그들은 쉽사리 화해하지 못했다. 그후 서인과 남인 두 당파는 정조 말기의 세도정치32하에서 일시적으로 당파가 종식된 듯했으나 조선 말기까지 사라지지 않고 존재했었으며, 그들의 원한은 풀리지 못한 채 계속 남아 있었다.

 


Ⅳ. 구전설화로 본 미수와 우암의 관계


미수와 우암의 대립은 송우암의 죽음으로 끝을 맺었다. 한편 이 두 사람을 동시에 상제님께서 언급하신 곳이 바로 제생 9절이다. 이 구절에서 죽은 아들 성옥을 업은 어머니가 상제님을 찾아오자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해 상제님께서는 “미수를 시켜 우암을 불러라.”고 외치시고 침을 흘려 죽은 아이의 입에 넣어주셨다. 그러자 그 아이는 항문으로부터 시추물을 쏟은 후 곧 살아났는데, 이것은 우암이 사약을 마시면서 항문을 틀어막고 죽었던 다음의 장면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우암 선생님이 중년에 병이 났어. 병이 좀체 낫지 않자 우암 선생은 미수 선생에게 가서 약을 지어 와야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아들을 불러서,


“너 오늘 미수 선생님한테 가서 병세를 이야기 하고 약을 구해오너라!” 하니 아들 말이,


“미수 선생이 약을 지어 줄까요?”


“허허, 국가정치에서는 생각이 다를지언정 친구 간에 아파서 약을 지으러 갔는데 무슨 상관있냐? 가서 약을 지어오너라.”


그때는 부모 명령이라면 어길 수도 없는 것이고 해서 갔단 말이야. 미수 선생을 뵈니


“어떻게 왔는가, 자네가?”


“아, 제 부친 병환이 이렇게 저렇게 되어서 이렇게….”


“그래?”


미수 선생이 약방문을 적어주면서, “이 약방문대로 써라.”고 했거든?


그래서 갖고 왔는데, 그 우암 선생이 약방문이 어떻게 생겼는가 보니 비상 석 냥 중을 먹으라고 되어있어.


아들이, “보십시오. 미수 선생이 아버지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하였어.


우암 선생이 “아, 그럴 리가 있겠냐? 가서 약방문대로 지어갖고 오너라!”


음. 그러니까 대인은 사람을 의심을 안 해. 소인들이 그러지. 정치 같으면 죽이겠지만 하지만 정치가 아니거든. 그래서 비상 석 냥 중을 사다가 두 냥 중을 먹으니까 났었어. 그런데 한 냥 중을 안 먹었으나 났었으니 아들을 보내 치하를 하라고 했지.


“가서 치하하고 오너라.”


그 약을 먹고서 나았기에 미수 선생한테 갔단 말이야. 가서 뵈오니,


“석 냥 중을 다 먹었는가?”


“한 냥 중을…”


“너의 아버지 오사(誤死: 형벌이나 재난을 당하여 비명에 죽음) 하시겠다.”


오사하시겠다 하시는거야. 석 냥 중을 다 먹었으면 안 죽는데 두 냥 중을 먹었으니 오사하겠다고 그런단 말이야. 아들이 별 소리를 다 듣고 인제 집으로 왔지.


집에 와서 아들이 아버지에게 “가서 뵈었더니 ‘너희 아버지 오사하겠다.’라고 했다.”고 말씀드렸더니.


우암 선생이 “어허 내가 잘못 한 것 같다.”


그랬단 말이야. 그 뒤에 독상(獨相) 십 년 후에 사화(士禍)가 일어나서 정당 싸움에 말려들어서 섬으로 귀양 갔다가 여기 정읍 시안바다에 와서 우암 선생이 작고했어. 사약을 내렸단 말이야. 사약을 내렸는데 사약을 두 번 내려도 안 죽어. 사약을 먹어도 안 죽어. 반대 정당에서는,


“우암 선생은 그렇게 사약 내려 안 죽습니다. 그분이 저 노년에 병이 났을 적에 허미수 선생이 약을 지어주었습니다. 비상 두 냥 중을 먹어 성석이 돼서.”


그런데 우암 선생이 자기 요(尿)를 평생을 자셨어. 자기 오줌을 젊었을 때부터 먹었다고. 그래서 비상 드신게 성석이 된단 말이야. 석 냥 중을 다 먹었으면 성석이 되어 떡매로 내리쳐도 안 죽는데, 그 두 냥 중만 먹어서 약하니까 죽은거란 말이야.33

 

후일 전해진 이야기로는 사약의 약사발을 받을 때 한 사발로는 숨을 거두지 않아 세 사발이나 먹었으며 그래도 숨을 거두지 않아 항문을 틀어막아 약이 새지 못 하도록 한 것만으로도 그의 튼튼했던 몸을 짐작할 수 있다.34


상제님의 권능으로 죽은 아이를 살리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나,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상제님께서 미수로 하여금 우암을 부르게 하신 일이다. 상제님께서는 이 방법을 통해 적대관계였던 서로간의 원한을 풀게 하신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근본적인 것을 처리함으로써 문제시 되었던 그 일을 해결하는 상제님의 공사 사례를 볼 때, 조선 중기 남인과 서인의 영수였던 허미수와 송우암 간의 막혔던 벽을 허무는 것은 당파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쌓여있던 원의 고가 풀리는 계기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모든 사사로운 일이라도 천지공사의 도수에 붙여두면 도수에 따라서 공사가 다 풀리니라.”35는 말씀으로 볼 때 제생 9절은 상제님께서 미수와 우암의 해원공사 도수에 붙여서 한 아이의 생명을 살리신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Ⅴ. 맺음말


지금까지 상제님께서 죽은 아이를 살리시는 과정에 나타난 미수와 우암의 관계에 대해 알아보았다. 허미수와 송우암은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이지만, 허미수는 ‘육경학’을 송우암은 ‘성리학’을 추구하는 학문관의 차이가 있었고, 이것은 결국 정치사상적 차이로 인한 북벌론과 예송논쟁에서 첨예한 대립을 만들어 냈다. 이들의 대립관계는 개인과 개인의 대립이 아닌 당파끼리의 대립이었으며, 효종, 현종, 숙종 등 3대에 걸쳐 정권을 서로 뺏고 빼앗기는 관계였었다. 결국 두 당파의 대립은 학자이며 정치가인 송우암이 천수(天壽)를 다 하지 못한 채 83세의 나이에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숙종이 우암을 죽이는 결정을 내렸으나 그 후면에는 허미수를 중심으로 한 남인(청남)이 있었다. 우암은 임금을 바꾸려는 역모를 꾸미지 않았으나 역모죄에 해당하는 죄값을 치렀는데, 사약을 받을 당시 그의 죄목은 역모죄와는 전혀 다른 ‘죄인들의 수괴’라는 것이었다. 우암이 사약을 먹고 죽음으로써 서인이라는 당파가 사라진 것도 아니고, 서인과 남인의 관계가 개선된 것도 아니었다. 만약 우암이 국문을 받기 위해 서울로 압송되었다면, 우암은 자신의 떳떳함을 주장했을 것이고 전국 각지에 있는 서인 및 유생들은 목숨을 걸고 우암을 살리기 위해 봉기하였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그의 죽음은 더 많은 원을 품게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상제님께서 죽어가는 아이를 살리고자 하실 때 “미수를 시켜 우암을 불러라.”고 하신 것은 미수와 우암 간의 맺혀 있던 벽을 허묾으로 해서, 조선 중기 이후 서인과 남인 간의 당쟁으로 희생당한 많은 사람들의 원을 푸는 공사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제님의 천지공사의 도수로 인해 죽은 아이는 자연스럽게 살아났을 것이다.

 

 

01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중기의 사회와 문화」, 『한국사』 31권, 1998, p.267
02 역사적 환경이나 구체적 현실과 관계없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진리인 듯 믿고 따르는 것.
03 정옥자, 「미수 허목 연구」, 『한국사론』 5집, 1979, pp.204~205
04 허목의 본관은 양천(陽川)이며, 자는 문보(文甫)·화보(和甫), 호는 미수(眉),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05 본관은 은진(恩津)이며 자는 영보(永甫), 호는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 아명은 성뢰(聖賚).
06 한영우, 「허목의 고학과 역사인식」, 『한국학보』, 1985, p.50
07 소북계는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의 북인 정권이 몰락한 후 남인에 편입된 근기남인(近畿南人)이다. 서경덕과 조식학파로 이루어진 북인은 경기·전라우도와 경상우도가 주로 정치적 기반이었으며, 인조반정 이후 북인 가운데 서경덕학파가 근기남인학파로 조식학파가 이황학파로 흡수되면서 서인은 호서, 영남남인은 영남, 근기남인은 경기지역을 주로 정치적 기반으로 하였다.(Encyber 두산세계대백과, 2002)
08 『해동전도록』에 의하면, 조선시대 도가는 김시습을 시발(始發)로 하여 홍유손, 정희랑, 윤군평, 곽지허, 정렴, 박지화로 도맥이 이어지고 있다.
09 박지화(朴枝華, 1513~1592). 자는 군실(君實), 호는 수암(守菴),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 
10 정구(鄭逑, 1543~1620)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시호는 문목(文穆)으로 오건(吳健)에게 수학하고 조식(曺植)·이황(李滉)에게 성리학을 배웠다. 
11 서인계열 유생 박지계가 인조의 사저였던 계운궁에 대해 추숭(追崇)의 의(議)를 제창하자 허목이 유생들을 선동하여, 그가 국왕에게 아첨하여 禮를 문란하게 하였다 하여 비판하고 그의 이름을 유적(儒籍)에서 지워버렸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허목은 이귀의 청에 의해 과거정지령을 받아 과거응시 자격을 박탈당하였다.(박해현, 「허목의 동사 저술과 그 동기」, 『한국사상과 문화』 21집, 2003, p.286
12 조선 시대에, 시험장에서 부정행위를 한 유생에게 일정 기간 동안 과거를 못 보게 하던 벌.
13 조선시대에, 능을 관리하던 종9품 벼슬.
14 조선시대 사헌부의 종5품 벼슬. 지평의 직무는 정치 시비에 대한 언론활동, 백관에 대한 규찰과 탄핵, 풍속교정, 억울한 일을 풀어주는 일 등 이었다.
15 瀛海瀁 百川朝宗 其大無窮 東北沙海 無潮無汐 號爲大澤 積水稽天 渤汪濊 海動有 明明暘谷 太陽之門 羲伯司賓 析木之次 牝牛之宮 日本無東 鮫人之珍 涵海百産 汗汗漫漫 奇物譎詭 宛宛之祥 興德而章 蚌之胎珠 與日盛衰 旁氣昇 天吳九首 怪夔一股 回且雨 出日朝暾 軋炫煌 紫赤滄滄 三五月盈 水鏡圓靈 列宿韜光 扶桑沙華 黑齒麻羅 撮家 蠻之 爪蛙之 佛齊之牛 海外雜種 絶黨殊俗 同咸育 古聖遠德 百蠻重譯 無遠不服 皇哉凞哉 大治廣博 遺風邈哉 너른 바다 끝이 없도록 온갖 냇물 모여드니 그 큼에 궁함이 없네. 동북쪽의 모래 바다 밀물없고 썰물없어 큰 물이라 부른다네. 푸른 바다 하늘 같아 출렁댐이 넓고 깊어 바다가 움직이니 구름이 이네. 밝고 밝은 양곡으로 태양빛이 쪼여드니 햇님 맞는 日官은 공손하네. 석목이란 별자리는 암소가 사는 성궁이니 해 돋는 동쪽 끝이라네. 교인들의 구슬과 보배, 바닷속의 온갖 산물, 넉넉하고 넘처나네. 기이한 물건들이 조화부리니 꿈틀꿈틀 상서롭고 덕 일으켜 빛나도다. 조개 속에 밴 진주는 달과 성쇠 함께 하며 기운 따라 눈비 내리네. 머리 아홉달린 해신들과 외발달린 괴물짐승, 태풍 몰고 비 뿌리네. 아침 햇살 솟아나서 깊고 오묘하고 넓고 크게 빛이 나니 제왕의 빛 푸른하늘이라. 삼오야의 둥실 뜬 달, 하늘 높이 비추이니 별빛 황채 움츠리네. 해 뜨는 곳의 사화 부족, 흑치 나라의 마라 종족, 상투 묶은 보가 종족. 연만 나라의 굴과 조개들, 조와 나라의 원숭이들, 불제 나라의 소 종류들. 바다 밖의 잡종들도 무리 풍속 다르지만 용서하며 함께 사네. 옛 성인의 덕화가 멀리 끼치니 오랑캐들도 알아차려서 복종하지 않은 곳 없네. 아름답고 빛나도다. 드넓은 학문으로 크게 다스리니 끼친 풍속 길이길이 오래 가리.
16 정옥자, 「미수 허목 연구」, 『한국사론』 5집, 1979, pp.199~203
17 이경무, 「정명(正名)과 공자(孔子) 인학(仁學)」, 『범한철학』, 2004, pp.71~72
18 김준석, 「허목의 예악론과 군주관」, 『동방학지』, 1987, p.265
19 손문호, 「송시열의 정치사상 연구」-기축옥사를 중심으로, 『호서문화논총』 4호, 1987, pp.41~42
20 위의 책, p.47
21 예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형태. 구체적으로는 군주는 군주로서, 신하는 신하로서, 백성은 백성으로서 나름의 도리를 다하는 것.
22 서인과 남인이 주축이 되어 광해군 및 대북파(大北派)를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 종(倧: 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사건.
23 우측에 만주문, 좌측에 몽고문, 후면에 한문으로 조각되어 있다.
24 효종과 우암이 군사력 강화에 힘을 기울였지만, 이에 대한 서로의 생각은 달랐다. 효종은 군사적으로 청나라를 정벌하자는 생각이었지만, 우암이 생각하는 북벌은 조선이 힘을 길러 청나라를 정벌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북벌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에게 가능한 ‘북벌’은 청을 정벌하는 것이 아니라 청과 국교를 단절하고 명을 임금의 나라로 섬기는 의리를 지키는 것이었다. 그것을 하기 위해, 청과 국교를 끊고 명을 섬길 수 있는 정도의 군사력이 송시열이 바랐던 조선의 군사력이었다.(이덕일,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김영사, 2001, pp.81~84)
25 한우영, 「허목의 고학과 역사인식」, 『한국학보』, 1995, p.54
26 인조반정 후 서인과 남인들은 자신들의 권력 기반이 되는 아문(牙門 = 군대)을 설치하여 병권을 확대하였다.
27 각주 24의 책, p.57
28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1997, pp.235~236
29 각주 27의 책, p.243
30 기해예송은 처음 1년설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1년이 얼마 남지 않은 때에 남인의 허미수가 3년복을 주장하자 복상에 대한 여론이 다시 일어나면서, 기해예송은 7년간의 긴 세월동안 논쟁이 이어졌다.
31 당쟁의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각 당파에서 고르게 인재를 등용하던 정책.
32 세도정치 왕실의 근친이나 신하가 강력한 권세를 잡고 온갖 정사(政事)를 마음대로 하는 정치. 조선 정조 때 홍국영에서 비롯하여 순조·헌종·철종의 3대 60여 년 동안 왕의 외척인 안동 김씨, 풍양 조씨 가문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33 『한국구비문학대계』 5-5 전라북도 정주시 정읍군 편, 2002, pp.576~579
34 김동필, 『정읍의 전설』, 신아출판사, 1991
35 행록 4장 29절.  

<대순회보 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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