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의 길폐백 도수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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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춘근 작성일2018.10.19 조회4,896회 댓글0건본문
구의3 방면 교감 곽춘근
목차 Ⅰ. 머리말 Ⅱ. 무극도 창도 이전 도주님의 공부 Ⅲ. 폐백 도수 Ⅳ. 결론 |
Ⅰ. 머리말
도주님의 행적은 1909년 이후 50년 동안 끊임없이 이어진 공부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상제님의 공사 내용과는 달리 도주님의 이 많은 공부에 대해서는 자세한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는다. 수도인들 중에는 도의 법을 세우신 도주님의 50년 공부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이 글 역시 이러한 동기에서 시작되었다. 특히 도주님의 50년 공부 중에는 1924년 여름부터 5달 동안 행하셨던 종남산 영성정에서의 공부도 있다. 이것을 ‘폐백 도수’라 한다. 하지만 이 ‘폐백 도수’의 의미를 좀 더 알 수 있는 내용이 교운 2장을 보아도 다른 서술이 없고, 이 공부에 대한 다른 연구 자료도 없어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이러한 장애는 도주님에 대한 연구의 일반적인 현재 상황이다.
이 글은 ‘폐백 도수’를 이해를 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을 찾는 데 목적이 있다. 연구 주제를 ‘폐백 도수의 고찰’로 잡은 이유는 이 연구를 통해 도주님의 공부 속에서 무극도 창도의 의의를 조금이나마 살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도주님의 공부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한 가지 사례를 제시하고자 함이다. 사실 도주님의 ‘폐백 도수’는 우리 종단의 초기 성립과정과 관련된 중요한 행적 중 하나이다.
도주님에 대한 다른 연구와 마찬가지로 이 연구의 가장 큰 장벽은 직접적인 1차 자료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간접적인 자료를 통해 우회하여 접근하는 방법을 취해야 했다. 하지만 간접적인 접근방법은 태생적으로 연구의 제한이 있으므로, 이 방법으로 도주님께서 영성정에서 공부하신 목적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점이 이 글의 한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간접적인 방법이 도주님께서 행하신 ‘폐백 도수’를 단편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라는 점에서 연구의 가치를 두고자 한다.
이 글은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폐백 도수’를 고찰하고자 한다. 첫째는 영성정 공부를 전후한 도주님의 행적에 대한 고찰이다. 교운 2장의 서술 내용을 중심으로 각 구절들의 연관관계를 도주님 행적의 연속성 속에서 이해하고자 한다. 둘째는 ‘폐백 도수’라는 명칭에서 보이는 ‘폐백’의 용례(用例)를 분석하여 ‘폐백’의 뜻이 도주님께서 행하신 공부와 연결될 수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Ⅱ. 무극도 창도 이전 도주님의 공부
도주님의 공부는 1909년 이국땅인 만주 봉천지방에 가시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1958년 화천 하실 때까지 장장 50년에 걸친 공부였다. 또한 도주님께서는 이 공부를 통해 무극도와 태극도의 교단을 이끄시며 상제님의 대순하신 진리가 이 땅에 뿌리내리도록 하셨다. 이렇게 상제님의 공사를 계승하여 행하신 도주님의 50년 공부는 일반적으로 ‘공부’로 통칭하고 있다. 도주님의 50년 행적을 ‘공사’라 칭할 수도 있지만, 이 글에서는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공부’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그리고 도주님의 일부 행적도 여기에 포함했다.
대순사상에서 도주님에 대한 연구는 첫발을 내딛는 단계에 있다. 도주님 관련 연구로는 진정애의 「정산 조철제의 교리체계 형성에 관한 연구」01와 황희연의 「도주 감오득도에 관한 문헌적 고찰」02 그리고 《대순회보》의 「전경 다시 읽기」03 코너 등이 있다. 하지만 이 연구들은 도주님의 각 공부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현재 도주님의 공부에 대한 연구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은 《대순회보》 15호에 나오는 「교운 2장 연구」04이다. 그런데 이 내용 역시 도주님의 공부를 단편적인 서너 문장의 평가적 서술로 기술하고 있어서 구체적인 연구로 보기는 어렵다. 앞으로 논지를 전개할 때 이 내용에 대해서는 잠깐씩 인용할 것이다.
이 글의 연구 범위는 도주님께서 행하신 ‘폐백 도수’(1924년)를 전후로 한 시기로서 1920년대 전반기를 중심으로 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 도주님의 공부가 무극도 창도로 이어지고 있는 점에 주목하였다.
1. 1917년부터 무극도 창도까지 도주님의 행적
도주님의 행적을 이해하는 것은 밀양 종남산 영성정에서 이루어진 ‘폐백 도수’를 간접적으로 고찰하는 첫 번째 방법이다. 도주님께서 행하셨던 공부는 종통계승자로서 상제님의 진리를 세상에 펼치기 위한 어떤 ‘연속성’을 가지고 진행하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래서 도주님 행적의 전후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폐백 도수’를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1917년 귀국 이후 1925년 무극도 창도까지의 도주님의 행적에 대하여 교운 2장을 바탕으로 먼저 살펴보겠다.
도주님께서는 1917년 2월 10일(음력, 이하 모든 날짜는 음력으로 표시함) 상제님의 삼계 대순의 진리를 감오득도하셨다. 그리고 상제님의 종통을 계승하시고05 그해 4월 귀국길에 오르셨다. 상제님의 계시에 따라 태인으로 가기 위해 만주에서 뱃길로 귀국하시던 중 폭풍을 만나 서산군 태안면에 도착하신 후 안면도로 옮기셨다. 이곳에서 정당리 느락골에 우일재를 마련해 공부하시면서 마을 사람들을 포덕하셨다. (교운 2장 9절)
1918년 가을 도주님께서는 상제님께서 공사를 행하셨던 곳인 김제시 원평을 거처 동곡약방을 순회하셨는데, 이것은 “김제 원평에 가라.”는 상제님의 계시에 따른 것이었다. 10월에는 대원사에 가셔서 이정률에게 황새 마을에 집을 구하라고 명하시고, 몇 달 동안 머물며 공부를 하셨다. (교운 2장 10절~12절)
1919년 1월 15일(정월 보름)에 정읍 마동에서 선돌 부인으로부터 상제님께서 도주님께 전하는 ‘봉서’를 받으시고 보름 동안 머물다 황새 마을로 돌아오셨다. 7월 15일(백종일)에는 금산사를 순회하시고, 9월에는 동곡약방에 비치되어 있던 둔궤가 보천교 본부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이를 통사동 재실로 옮겨오셨다. 이후 부안 변산 굴 바위로 순회하시어 상제님의 대순하신 진리를 2백여 명의 사람들에게 설법하셨다. (교운 2장 13절~19절)
1920년 들어서 도주님께서는 통사동 재실에서 불면 불식으로 공부하시던 중 2월 17일 지금까지 열리지 않았던 둔궤가 벼락소리가 나면서 열렸다. 도주님께서는 경남 함안군 반구정에서 공부하실 때, 이 둔궤를 그곳으로 옮겨오셨다. (교운 2장 20절)
1921년 3월 26일부터 7월 7일까지 도주님께서는 대원사에서 백일 도수 공부를 하시면서 종도들에게는 칠성경을 외우게 하셨다. 공부를 마치고 나오신 도주님께서는 “이곳이 바로 상제께서 천지신명을 심판한 곳이니라. 아직 응기하여 있는 것을 내가 풀었노라.”고 하시며 공부의 의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9월 5일 동곡약방 뒤 장탯날에 초분되어 있던 상제님의 성골을 통사동 재실로 모셔 오셔서 치성을 드리고 공부를 하셨다. 보름 뒤 상제님께서 강세하신 날 종도들과 함께 치성을 올리신 후, 도주님께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를 계속하셨다. 12월 30일 문공신과 합세한 사람들이 통사동 재실에 침입하여 상제님의 성골을 강탈하여 갔다. (교운 2장 21절~24절)
1923년 1월 경남 함안군 회문리를 순회하시고 밀양시 종남산 세천동에 사는 김병문의 집에 가셨다. 그곳에서 3달 동안 공부를 하셨는데 이를 ‘둔 도수’라 하셨다. 6월 23일 상제님 화천치성 전날 함안군 회문리에서 “금년이 이재신원(利在新元) 계해년이라.”고 말씀하시며 전교(傳敎)를 내리셨다. 이때 주선원과 주선원보라는 직책을 새로 마련하시고 전교의 임무를 담당하게 하셨다. 이후 9월까지 경북 청도군 유천의 박동락의 집에서 ‘단 도수’를 행하셨는데 이것은 ‘진인보두법’이었다. 10월부터 다음 해(1924년) 2월까지 청도 적천사 도솔암에서 돌담을 높이 쌓고 "단 도수"를 행하셨다. 24방위를 정하여 천지신명을 응기시키고 저녁 7시부터 다음 날 새벽 6시까지 공부를 하셨다. (교운 2장 25절~28절)
그 후 도주님께서는 밀양시 종남산 세천동 김병문의 집으로 오셔서 ‘둔 도수’ 공부를 하시고, 1924년 4월 전북 정읍시 태인에 도장 터가 마련되자 이곳에서 치성을 올리셨다. 치성을 마치신 후, 도주님께서는 칼을 자루에서 뽑아 들고 육정신을 외우시면서 ‘보두법’을 행하고, 종남산 세천동에서 공부할 때 써 놓았던 여러 글 종이를 불사르셨다. 이해 여름(5월~6월경)부터 도주님께서는 밀양시 종남산 영성정에서 ‘폐백 도수’를 밤 10시부터 다음 날 아침 6시까지 5달 동안 계속하시고 함안군 반구정으로 옮겨 마치셨다. 그리고 11월 태인 도장으로 가셨다. (교운 2장 29절~31절)
1925년 4월06 전북 구태인 도창현에 도장이 완성되자 도주님께서는 무극도를 창도하시고 상제님을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상제’로 봉안하시며 종지 및 신조와 목적을 정하셨다. (교운 2장 32절)
2. 폐백 도수 전후의 공부
1920년부터 1925년 무극도 창도 사이에 도주님께서 행하신 공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둔궤가 열림(1920년 2월 17일) → 대원사 백일 도수(1921년 3월~7월) → 성골을 모시고 공부(1921년 9월 이후) → 둔 도수(밀양 세천 김병문의 집, 1923년 1월~3월) → 단 도수, 진인보두법(청도 유천 박동락의 집, 1923년 6월~9월) → 단 도수(청도 적천사 도솔암, 1923년 10월~1924년 2월) → 둔 도수(밀양 세천 김병문의 집, 1924년 2월~3월) → (진인)보두법(태인 도장, 1924년 4월) → 폐백 도수(밀양 종남산 영성정과 함안 회문리, 1924년 5월~10월) → 무극도 창도(태인 도장, 1925년 4월).
공부를 명칭에 따라 구분하여 보면, ‘둔 도수’라 명명된 공부는 2번 나온다. 하나는 밀양시 세천동 김병문의 집에서 1923년 행하셨던 공부이고, 다른 하나는 1924년 태인 도장 치성 전에 행하셨던 공부이다. ‘단 도수’라 칭해진 공부는 1923년 3달 동안 박동락의 집에서 행하셨던 공부와 이어서 적천사 도솔암에서 1924년 2월까지 행하셨던 공부이다. 특히 ‘진인보두법’이 2번 나오는데 1923년 박동락의 집에서 행하셨던 ‘단 도수’와 1924년 4월 태인 도장에서 치성을 마치시고 행하셨던 공부에 등장한다. 그리고 밀양시 종남산 영성정에서 1924년 5달 동안 행하셨던 공부는 ‘폐백 도수’라고 표현되어 있다. 무극도 창도 이전까지의 공부 중에서 도주님께서 행하신 마지막 공부가 ‘폐백 도수’였다.
이상에서 살펴보는 바와 같이 도주님의 행적은 계속된 공부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도주님께서 행하신 이들 공부 중에서 교운 2장에 그 의미를 조금이나마 부연 설명하고 있는 것은 대원사 백일 도수 공부와 청도군 유천의 박동락의 집에서 행하신 내용에 대한 것뿐이다. 그리고 그 외의 다른 공부들은 공부의 명칭만 서술되어 있어서 그 의미를 추정하기가 쉽지 않다.
이 글에서는 이들 공부 중 종통계승의 의미를 담고 있는 ‘성골을 모시고 이루어진 공부’는 의미 분석에서 제외하였다. 왜냐하면 전후로 이어지는 공부와의 연속성 속에서 어떤 공부였는지 의미 파악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이런 한계점을 가지고 각 공부에 대하여 좀 더 살펴보고자 한다.
1) 대원사 백일 도수
종도들에게 칠성경을 외우게 하시고 도주께서 대원사에 들어가셔서 백일 도수를 마치셨도다. 마치신 날이 바로 신유년 七월 칠석날이라. 그때에야 종도들이 칠성경을 외운 뜻을 깨달으니라. 그들을 보시고 도주께서 “이곳이 바로 상제께서 천지신명을 심판한 곳이니라. 아직 응기하여 있는 것을 내가 풀었노라.”고 말씀하셨도다. (교운 2장 21절)
‘백일 도수’는 2가지 측면에서 그 의미를 주목하고자 한다. 첫째는 상제님의 대원사 49일 공부를 도주님께서 명확히 밝히시고 있다는 점이다. 증산 계열의 다른 종파에서는 49일 공부를 상제님의 대각(大覺) 또는 성도(成道)를 위한 수도로 규정하고 있다.07 그러나 유일하게 도주님께서는 이를 천지신명에 대한 심판 공사였다고 말씀하시고 있다. 그리고 도주님께서는 상제님의 심판을 받고 응기되어 있던 ‘천지신명을 풀었다’고 말씀하셨다. 왜 응기되어 있던 신명을 풀었을까? 단순히 도주님의 권능을 드러내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이후 행해진 도주님의 공부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즉 신명과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도주님의 공부와 신명이 풀리는 것이 관계가 있지 않을까 추정된다.
둘째는 7월 칠석과 칠성경의 등장이다. 칠성경은 일반적으로 복을 구하기 위해 읽는 경문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칠성경에서 복을 구하는 대상은 북두칠성을 관장하는 칠성대제이다. 그런데 상제님께서 천지신명을 심판하셨던 대원사에서 도주님께서는 공부를 하실 때 종도들에게 칠성경을 7월 칠석까지 읽게 하셨다. 이 관계를 연결하는 고리는 아마도 북두칠성에 있을 듯하다.
북두칠성은 칠정(七政) 또는 선기옥형(璇璣玉衡)이라고도 한다. 북두칠성은 “하늘의 정사(政事)를 총괄하는 역할을 한다 하여 붙여진 말인데, 북두칠성은 매우 밝은 별자리로서 북극의 중심부에서 일 년 내내 주천하면서 지상의 일들을 살펴 감독한다고 보았다.”08 특히 북두칠성의 다섯째 별은 저울대 역할을 한다고 하여 옥형이라 약칭하기도 한다.09 지상의 일을 감독하는 기준인 저울은 공정하고 공평무사한 것을 상징한다. 즉 ‘북두칠성-선기옥형-저울-공정’의 상징은 법과 관계가 있다.10
“『천문류초(天文類抄)』에 따르면 북두칠성은 법(法)을 주관하는 별로 하늘의 가운데를 운행하면서 사방의 별들을 주관하고 사시(四時: 사계절)를 세워 오행(五行)을 고르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하였다.”11 이렇게 북두칠성은 공정한 법으로 하늘의 질서를 주관하고 지상을 감독하는 역할을 담당한다고 여겨졌다. 이런 북두칠성의 역할이 도주님의 ‘백일 도수’에서 쓰인 칠성경의 의미가 아닐까 추측된다.
2) 둔 도수
도주께서 경신년에 재실에서 밤낮으로 불면 불식하면서 공부하시던 중 二월 열이레에 둔궤가 봉안된 곳에서 벼락 소리가 나더니 둔궤가 저절로 열려져 있었도다. 그 속에 호피 한 장과 반쯤 핀 국화 한 송이가 그려 있고 양피(羊血) 스물넉 점이 궤에 찍혀 있고 오강록(烏江錄) 팔문둔갑(八門遁甲) 설문(舌門)이란 글자가 궤에 쓰여 있었도다. 그 후 둔궤는 도주께서 함안 반구정(伴鷗亭)에서 공부하실 때 그곳에 옮겨졌도다. 그러나 당시 심복자이던 창원 사람 조 주일(曺周一)이 둔궤를 훔쳐 갔는데 훗날에 종도들이 이를 알고 매우 안타까워하니 도주께서 “그 시기의 도수에 쓰였으면 족하니라. 둔궤의 둔자는 도망 둔자이도다”고 그들에게 이르셨도다. (교운 2장 20절)
도주께서 계해년 정월에 함안 회문리를 순회하고 그곳에 잠시 머무시다가 밀양 종남산(密陽終南山) 세천동(洗川洞) 김 병문(金炳文)의 집에 가셨도다. 이때 배 문걸이 도주를 모시고 따르니라. 그곳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많은 종이에 글을 쓰셔서 둔 도수라 하시고 석 달 동안 행하셨는데 그 종이가 심한 바람에도 날리지 않았도다. (교운 2장 25절)
날로 도주를 흠모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므로 태인에 갑자년 四월에 도장이 마련되었도다. 도주께서 밀양 종남산 세천에서 보시던 둔 도수를 마치고 도장에 돌아와 치성을 올리시니라. 치성을 끝내고 칼을 자루에서 뽑아들고 육정신을 외우시면서 보두법을 행하고 종남산 세천에서 공부할 때 써놓았던 여러 글종이를 불사르셨도다. (교운 2장 29절)
이 도수 공부는 2번 이루어졌다. 하나는 밀양시 세천동 김병문의 집에서 행하셨던 1923년 1월~4월 사이에 3달 동안 하셨던 공부이고, 다른 하나는 1924년 2월~3월 사이에 태인 도장 치성 전에 행하셨던 공부이다. 이 둔 도수에 대하여 《대순회보》 15호 「교운 2장 연구」(이하 「교운 2장 연구」)에서는 둔궤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래서 “이 둔 도수의 시점은 20절의 둔궤가 도난당한 때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둔도수의 둔 자와 둔궤의 둔 자가 같은 둔(遁) 자이기 때문이다.”12라고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둔궤가 열린 시기가 1920년 2월 17일이고, 도주님께서는 둔궤를 다시 함안 반구정으로 옮겨져 공부에 쓰셨다. 그리고 이후 조주일이 둔궤를 훔쳐가서 행방을 알 수 없게 되고나서, 1923년 1월~4월과 1924년 2월~3월 사이에 둔 도수 공부가 있었다.
조주일이 함안 반구정에 있던 둔궤를 훔쳐간 일을 두고 도주님께서는 “그 시기의 도수에 쓰였으면 족하니라. 둔궤의 둔자는 도망 둔자이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의 내용은 2가지 측면에서 그 의미를 해석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둔궤와 관련된 공부가 마쳐졌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방식이고, 두 번째는 열린 둔궤를 통해서 상제님께서 짜놓으신 도수의 내용이 도주님께 전해지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그 의미를 해석하는 방식이다.
둔궤가 열리는 상황에 대한 교운 2장의 표현 내용(20절)은 첫 번째 보다는 두 번째 의미에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교운 2장 연구」에서 서술한 대로 둔궤의 둔 자와 ‘둔 도수’의 둔 자가 같은 글자라고 전제한 것도 두 번째의 해석 방식이다. 이 경우 ‘둔 도수’는 둔궤를 상제님께서 만드실 때 짜놓으신 도수와 관계있는 공부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둔궤를 선돌 부인이 ‘조화둔궤’라 칭한 점과 둔궤 속에 “호피 한 장과 반쯤 핀 국화 한 송이가 그려 있고 양피(羊血) 스물 넉 점이 궤에 찍혀 있고 오강록(烏江錄) 팔문둔갑 설문(舌門)이란 글자가 궤에 쓰여 있었다”13는 내용은 상제님께서 도주님께 전하시는 공부의 내용으로 해석할 수가 있어서 주목된다.
하지만 ‘둔 도수’의 공부 시점을 「교운 2장 연구」에서 “둔궤가 도난당한 때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기술한 점은 둔궤가 열린 사실과 ‘둔 도수’의 인과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둔 도수’ 공부의 시점은 둔궤가 열려 상제님의 공사가 도주님 공부로 이어지는 것(원인)과 둔궤가 열린 후 이루어진 도주님의 공부(결과)라는 연속성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이러한 공부의 연속성은 무극도장 건설과도 이어져 있다. 도주님께서는 1924년 4월에 도장터가 마련되어 치성을 드리신 후 밀양 세천의 김병문 집에서 ‘둔 도수’를 마치고 오셔서 공부하실 때 써놓았던 여러 글 종이를 불사르셨다.14 이것은 ‘둔 도수’와 도장 건설이 직접적인 연관성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나타내 준다.
3) 단 도수와 진인보두법
도주께서 청도 유천(淸道楡川)의 박 동락(朴東洛)의 집에서 단 도수를 행하시니 이것이 곧 진인 보두법(眞人步斗法)이니라. 이때 배 문걸이 시종을 들었도다. (교운 2장 27절)
계해년 九월에 이를 마치시고 도주께서는 十월부터 다음 해 二월 중순까지 청도의 적천사(磧川寺) 도솔암에 있는 칠성각 뒤에 돌단을 높이 쌓고 二十四방위를 정하고 천지신명을 응기케 하고 공부시간은 저녁 일곱 시부터 다음날 아침 여섯 시로 정하여 일분일초도 어김없이 넉 달 동안 계속하셨는데 낮에는 공부 행하실 때 쓰실 글을 많이 쓰셨도다. 이때에 공부는 단 도수라 하셨으며 시종한 사람은 배 문걸·이 우형·박 민곤이니라. (교운 2장 28절)
날로 도주를 흠모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므로 태인에 갑자년 四월에 도장이 마련되었도다. 도주께서 밀양 종남산 세천에서 보시던 둔 도수를 마치고 도장에 돌아와 치성을 올리시니라. 치성을 끝내고 칼을 자루에서 뽑아들고 육정신을 외우시면서 보두법을 행하고 종남산 세천에서 공부할 때 써놓았던 여러 글종이를 불사르셨도다. (교운 2장 29절)
‘단 도수’라 칭해진 공부는 1923년 6월~9월 사이에 3달 동안 박동락의 집에서 행하셨던 공부와 이어서 적천사 도솔암 칠성각 뒤에서 1923년 10월~1924년 2월 사이에 행하셨던 공부이다. 도주님께서 ‘단 도수’ 공부를 하실 때, 박동락의 집에서는 ‘진인보두법’으로 공부를 하셨고, 도솔암에서는 돌담을 높이 쌓고 24방위를 정하고 천지신명을 응기케 하고 공부를 하셨다. 공부하실 때의 이러한 상황을 볼 때, ‘단 도수’에서 ‘단(壇)’은 단이나 제단의 의미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진인보두법’은 일정한 공간 내에서 발걸음을 일정한 순서에 따라 행하는 공부이고, 돌담을 높이 쌓아 24방위를 정하여 천지신명을 응기시키는 것도 일정한 공간 내에서 이루어진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공통점으로 볼 때 ‘단 도수’의 단은 단이나 제단의 의미로 보인다.
이 공부에서 특히 눈에 띄는 점은 북두칠성과 24방위 신명의 등장이다. 진인보두법은 도교의 법술 중 하나로, 밝게 보이는 북두칠성과 어둡게 보이는 두 개의 별을 합한 9개의 별자리 모양을 순서에 따라 밟아 나가는 걸음걸이로 우보라고도 한다.15 이 진인보두법에 등장하는 별자리인 북두칠성은 칠성대제와 관련이 있다. 특히 칠성대제는 하늘의 정사를 총괄하는 위치로서 법과 질서를 관장하는 신명이다. 또 24방위는 24방위와 관련된 신명이기도 하지만 24절후의 신명과도 관계가 있으리라 추정해 볼 수 있다. 도주님의 공부가 신명과 함께하는 공부였기 때문에, ‘단 도수’에 등장하는 이들 신명과 함께 공부가 이루어졌다고 이해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신명의 이름이 직접 등장하는 구절(교운 2장 29절)은 1924년 4월 도장의 터에서 치성을 마치신 도주님께서 ‘칼을 자루에서 뽑아 들고 육정신(六丁神)을 외우시면서 보두법’을 행하셨다는 구절에도 나와 있다. 여기서 보두법은 ‘진인보두법’을 가리키기 때문에 칠성대제와의 관련성을 추측해 볼 수 있다.16 또한, 이 구절에서 육정신은 육정육갑(六丁六甲) 신장(神將)17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된다. 육정육갑 신장은 변화 도술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둔갑신장으로 칠성대제의 명령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진인보두법’을 다시 행하시며, 신장들의 상징인 칼을 드시고 육정신을 외우셨다는 것은 육정육갑 신장을 부르셨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신명이 등장하는 점이 ‘단 도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도주님의 공부가 도장 터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도주님의 공부와 태인 도장과의 연관성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앞으로 언급하겠지만, 치성 후 도주님께서는 ‘단 도수’에 등장시켰던 신명들은 모두 태인 도장에 봉안되었다. 즉 도주님의 연속된 공부가 어디로 귀결되고 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4) 폐백 도수
날로 도주를 흠모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므로 태인에 갑자년 四월에 도장이 마련되었도다. 도주께서 밀양 종남산 세천에서 보시던 둔 도수를 마치고 도장에 돌아와 치성을 올리시니라. 치성을 끝내고 칼을 자루에서 뽑아들고 육정신을 외우시면서 보두법을 행하고 종남산 세천에서 공부할 때 써놓았던 여러 글종이를 불사르셨도다. (교운 2장 29절)
갑자년 여름에 도주께서 배 문걸을 데리고 밀양 종남산 영성정(靈聖亭)에 이르시어 폐백 도수(幣帛度數)를 밤 열 시부터 다음날 아침 여섯 시까지 다섯 달 계속하시고 다시 함안 반구정으로 옮겨 마치셨도다. (교운 2장 30절)
갑자년 十一월에 태인도장에 가셔서 … 밀양의 이 우형·김 용국·박 민곤·안동의 권 태로·청송의 조 호규 … 등에게 말씀하셨도다. (교운 2장 31절)
을축년에 구태인 도창현(舊泰仁道昌峴)에 도장이 이룩되니 이때 도주께서 무극도(无極道)를 창도하시고 상제를 구천 응원 뇌성 보화 천존 상제(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上帝)로 봉안하시고 종지(宗旨) 및 신조(信條)와 목적(目的)을 정하셨도다. (교운 2장 32절)
이 도수는 밀양 종남산 영성정에서 1924년 5월~10월 사이에 행하셨던 공부로 다섯 달 동안 계속되는데, 이 공부는 함안 반구정으로 옮겨서 종결되었다. 공부의 시간 순서에서 언급하였듯이 ‘폐백 도수’ 이전의 도주님 행적은 1924년 4월 태인 도장 터(이하 태인 도장)에서 도주님께서 치성을 올리신 것이다. 그리고 치성 후 육정신을 외우며 보두법을 행하시고 세천 김병문의 집에서 ‘둔 도수’를 보실 때 썼던 글 종이를 불사르셨던 일이었다.(교운 2장 29절) 또한 ‘폐백 도수’ 이후의 도주님 행적은 공부를 마치신 다음 달인 11월에 태인 도장에 가셔서 종도들에게 설법을 하시는 것이었다.(교운 2장 31절) 그리고 다음 해(1925년) 4월에 무극도 창도를 선포하셨다.(교운 2장 32절) 이렇게 시간의 흐름 속에서 교운 2장의 ‘폐백 도수’ 앞과 뒤 구절을 보면, 모두 태인 도장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다른 공부와 마찬가지로 ‘폐백 도수’ 역시 태인 도장 혹은 무극도 창도와 연관되어 있음을 짐작케 한다. 이러한 내용에 대하여 다음 절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다.
Ⅲ. 폐백 도수
이 절에서는 영성정이 도주님의 공부 장소로 선택된 배경과 공부 방법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고전에서 쓰인 폐백의 용례를 통해 도주님의 ‘폐백 도수’의 의미를 이해해 보고자 하였다. 특히 영성정이 공부 장소가 된 배경을 검토하면서 영성정에 대해 잘못 알려진 내용을 고증하여 보았다. 그리고 ‘폐백 도수’와 다른 공부와의 방법적 유사성에 대해서도 이해해 보고자 한다.
1. 공부 장소
갑자년 여름에 도주께서 배 문걸을 데리고 밀양 종남산 영성정(靈聖亭)에 이르시어 폐백 도수(幣帛度數)를 밤 열 시부터 다음날 아침 여섯 시까지 다섯 달 계속하시고 다시 함안 반구정으로 옮겨 마치셨도다.18 (교운 2장 30절)
위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도주님의 ‘폐백 도수’는 밀양 종남산 영성정에서 행해졌다. 영성정의 위치는 경남 밀양시 상남면 남산리 종남산 7부 능선쯤에 있었다. 밀양은 도주님께서 탄강하신 함안 옆 지역이기도 하다. 영성정은 6·25 전쟁 때 소실되어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다. 도주님께서 공부하실 당시 영성정의 소유주는 선산 김 씨인 김용국의 재실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김용국은 당시 무극도 간부였다.
1925년에 조사된 ‘무극도 간부 일람표’19에 등장하는 김용국은 찰리(察理)와 연락(聯絡)이라는 두 직책을 겸하고 있었다. 찰리는 본부(本部)의 행정업무를 맡아 보는 직책이며, 연락은 최소 240명에서 최대 1만5천 명의 도인들을 이끌던 책임자를 말한다. 김용국은 약 4천 명 이상의 도인을 이끌던 책임자로 기록되어 있다. 무극도의 조직이 연운체계였던 점을 고려해 보면, 김용국의 소재지인 경남 밀양시 상남면 기산리 일대를 중심으로 연고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무극도의 연운체계 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성정이 위치한 상남면 남산리는 종남산의 남쪽 사면에 위치해 있고 김용국의 소재지인 상남면 기산리는 종남산의 동쪽 사면에 위치해 있다. 즉 남산리와 기산리는 산 너머 마을이었다. 기산리를 중심으로 4천여 명 이상의 도인을 이끌었던 김용국이 찰리로서 본부의 행정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도주님의 공부 장소를 알아보는데 일정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 추정해 볼 수 있다. 영성정이 김용국의 재실이었다는 설이 등장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김용국의 재실이었다는 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김용국이 선산 김 씨라고 하는데 상남면 남산리 마을에는 선산 김 씨의 후손이 한 사람도 없다. 또한 토지대장20을 보면 공부가 이루어졌던 1924년 당시 영성정 터 소유주는 한춘옥 씨였다. 만약 이곳에 재실을 지었다면 남의 땅을 빌려 재실을 지은 것이 되는데 이런 경우는 거의 흔치 않다.
‘무극도 간부 일람표’에 등장하는 무극도인들의 분포지역을 보면 전북지역의 김제, 경북지역의 안동, 김천, 예천, 밀양, 의성, 영주, 청도, 선산과 강원지역의 울진, 삼척 등이었다. 무극도 도인 중 부분원(府分員: 120명의 도인을 이끄는 직위)은 약 600여 명 정도였는데 이중에서 밀양을 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은 100명 정도였다. 즉 무극도인의 약 6분의 1이 밀양지역 사람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 밀양에서 행하신 도주님의 공부는 김병문의 집에서 행하신 ‘둔 도수’와 영성정에서 행하신 ‘폐백 도수’였다.
영성정(靈聖亭)의 한자 표기를 풀이하면, 신령하고 성스러운 정자이다. 정(亭) 자는 경관이 좋은 곳에 아담하게 지은 집을 뜻한다. 소실되었기 때문에 영성정의 모습을 찾을 수 없지만, 도주님께서 공부하셨던 함안 반구정(伴鷗亭)처럼 풍광이 좋은 종남산에 아담하게 지었던 집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예전에는 깊은 산중이어서 인적이 드물었고, 특히 남산리는 피난처로도 알려져 있던 곳이었다.
2. 공부 방법
‘폐백 도수’의 공부 시간은 밤 10시부터 다음 날 아침 6시까지였고, 기간은 5달이었다. 도주님께서는 5달 동안 영성정에서 공부를 계속하시다가 그 후 함안 반구정으로 공부 장소를 옮겨 마치셨다. 단 도수가 단을 쌓고 그 위에서 이루어졌던 공부 방법으로 진행되었던 것에 반해, ‘폐백 도수’는 ‘둔 도수’와 공부 방법이 비슷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단 도수’처럼 공부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서술이 없는 다른 공부들은 대개 종이에 글을 쓰시고 이 종이를 태우는 형태로 이루어졌었다. ‘폐백 도수’ 역시 공부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다른 서술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런 방법으로 진행되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공부 기간이 5달이었다는 사실로부터 도주님께서 공부하신 시기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영성정 공부 바로 앞 절(교운 2장 29절)의 시기가 1924년 4월(태인 도장에서 치성을 모심)이고, 바로 뒤 구절(교운 2장 31절)이 1924년 11월(태인 도장에 가심)이므로 대략 5월부터 10월 사이에 이루어졌던 공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공부 시기 때문에 영성정 공부에 대한 교운 2장의 첫 구절은 ‘갑자년 여름에’로 그 기술이 시작된다.
영성정에서 5달 동안 이루어진 후 공부 장소가 함안 반구정으로 옮겨진 이유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서술이 없어서 그 이유를 알기 어렵다. 다만, 밀양 세천 김병문의 집에서 행하셨던 ‘둔 도수’가 같은 장소에서 시기를 달리하여 두 번 이루어졌던 것과 비교해 보면, ‘폐백 도수’는 일정 기간 동안의 공부가 장소를 달리하여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대비된다. 영성정에서 함안 반구정까지의 거리는 약 50km 정도의 거리로 낙동강의 뱃길을 이용한다면 하루 안에 갈 수 있는 거리다.
3. 폐백의 의미: 고전(古典)에서 폐백의 용례(用例)
고전에서 폐백(幣帛)은 두 가지 용례로 쓰였다. 비단을 지칭하거나 혹은 귀한 예물을 가리킬 때 쓰였다. 원래 폐(幣)는 ‘선물로 주고받는 예’이고 백(帛)은 ‘비단’21을 뜻하는데 두 글자의 자의(字義)는 모두 비단이다. 고대에 비단은 돈으로 쓰일 만큼 귀한 것이어서 화폐(貨幣)의 어원이 되기도 하였다. 그만큼 고대에는 비단이 귀했기 때문에 예물로 주로 쓰였고, 예물을 주고받는 예법 절차에 쓰여 ‘선물로 주고받는 예(禮)’22를 나타내는 ‘예물’이라는 의미로도 쓰였다.
그런데 이 폐백은 비단을 지칭할 때도 있지만 당시 진귀하다고 여겨지는 여러 종류의 예물을 통칭하기도 하였다.23 또한 폐백은 예를 다하여 드리는 예물이었기 때문에 받는 대상은 ‘지극한 공경을 받았던 존재’였다. 예를 들면 하늘에 제사를 드릴 때 신명들께 올리는 예물이라든지 제후가 왕에게 올리는 예물이 폐백이었다. 또 귀빈을 초빙할 때 보내는 예물이나 혹은 신랑이 결혼할 때 신부 댁에 보내는 예물도 폐백이었다. 이렇듯 폐백은 ‘예를 다해 공경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점차 규범화 되어 예를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던 듯하다.
이에 대한 관련 내용을 좀 더 살펴보겠다. 『서경집전』 「우공」장에 보면 ‘오직 공손히 폐백을 받들어(惟恭奉幣)’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 글에 대한 주석 내용은 “주나라 성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후 새 도읍에서 제사를 거행하려 하였으므로 소공이 (폐백을) 받들어 제사를 도운 듯하다”24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 폐백은 제사의 예물을 지칭한다. 또 『춘추좌씨전』 「양공」편에서는 초나라가 정나라를 공격하려 하자 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던 중 “삼가 폐백을 바쳐서 쳐들어온 자를 기다리는 것이 소국이 택해야 할 길이다.”25라는 표현이 나온다. 여기서 폐백은 약소국이 강대국에게 바치는 예물이다. 우리나라의 『삼국사기』에서도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의 문무왕이 잔치를 베풀 때 춤을 잘 춘 15세 소년에게 폐백(비단)을 하사하는 내용이 나온다.26 특히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을 보면, 원단 제사에 오방신의 각 방위 빛깔(검은색, 청색, 붉은색, 흰색, 황색)에 따라 폐백을 올려야 하는데 흰색 폐백만 올린 책임자를 면직시켰다27는 내용이 나온다. 이때의 폐백은 신명들께 바치는 예물로 비단을 가리킨다. 또 예조(禮曹)에서 왕자나 왕녀 등의 혼례식에 폐백을 얼마나 보내야 하는지 논하는 내용도 나온다.
이처럼 폐백이라는 말은 비단이라는 뜻으로도 쓰였지만, ‘극진히 공경해야 할 대상’에게 예(禮)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드리는 예물이었다. 도주님께서 행하신 공부에도 ‘폐백 도수’라 하여 폐백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이때의 폐백은 비단과 같은 특정한 사물이 아니므로, ‘지극한 공경의 예를 정성으로 표현하신 공부’로 그 뜻을 추리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예를 표현하신 대상은 마땅히 상제님이라 할 수 있지만, 넓게 보면 무극도장에 봉안하신 천지신명을 포함한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그 정점에는 상제님이 계신다고 해야 할 것이다.
4. 무극도 창도와 폐백 도수
「교운 2장 연구」에서는 ‘폐백 도수’에 대하여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폐백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드리는 예물을 뜻한다. 따라서 이 도수는 상제님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도수라고 생각할 수 있다.”28 고전에서 사용된 폐백의 용례로 볼 때 이러한 접근은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이렇게 규정하기 위해서는 도주님의 ‘폐백 도수’가 ‘상제님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그 이유에 대한 분명한 설명이 필요하다. 그런데 아쉽게도 교운 2장에는 이에 대한 구체적 내용이 기술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른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 그 방법 중의 하나가 교운 2장 구절의 배열순서에 대한 맥락적 이해이다.
우선 결론부터 말하고 논지를 전개하여 보겠다. 교운 2장의 배열 순서를 바탕으로 도주님의 ‘폐백 도수’와 상제님과의 연관성을 검토해 보면, 무극도 창도가 그 핵심적 위치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도주님의 공부가 무극도 창도와의 연속성 속에서 진행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겠다.
먼저 ‘폐백 도수’(30절)의 앞뒤 구절(29절, 31절, 32절)이 모두 태인 도장과 무극도 창도 구절이다. 이러한 구절 배열은 ‘폐백 도수’가 무극도 창도와 직접적으로 관계있다고 해석할 수 있는 하나의 근거가 된다. 이를 맥락적으로 이해해 보면, ‘폐백 도수’가 태인 도장과 무극도 창도를 위한 공부였음을 말해준다. 또한 이전에 검토한 폐백의 자의(字義) 용례를 ‘폐백 도수’에 적용하면, ‘폐백 도수’는 ‘도주님께서 상제님께 폐백을 올리는 공부’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리고 ‘폐백 도수’의 앞뒤 구절에 배치되어 있는 태인 도장과 폐백의 한자 뜻을 결합하면, ‘폐백 도수’란 ‘상제님께 올리는 폐백’이라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선다. 즉 ‘폐백 도수’ 다음에 나오는 무극도 창도 내용에 상제님을 태인 도장에 봉안하였다는 사실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 이러한 구절의 연속성은 ‘폐백 도수’가 ‘무극도의 창도와 연관된 폐백’이라는 좀 더 포괄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무극도 창도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도수였다’는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분석이 타당하다면, 「교운 2장 연구」에서 ‘폐백 도수’를 ‘상제님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도수’라고 규정한 것은, 도주님 공부의 연속성과 무극도 창도와의 관계를 명확히 밝히지 못한 막연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폐백 도수’는 무극도 창도와의 관계에서 해석하는 것이 교운 2장의 배열순서와 폐백의 뜻을 고려할 때 좀 더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 무극도 창도는 ‘폐백 도수’를 해석하는 핵심적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도주님 공부에서 무극도 창도가 가지는 이러한 위치는, 도주님 공부의 연속성을 전제할 경우 ‘폐백 도수’와 마찬가지로 ‘둔 도수’와 ‘단 도수’에도 적용할 수 있다. 둔궤가 열리면서 상제님께서 짜놓으신 도수가 도주님에게 전해진 내용과 도주님께서 공부하신 ‘둔 도수’가 태인 도장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 연속성 속에서 이루어진 박동락의 집과 도솔암에서 도주님께서 행하신 ‘단 도수’와 ‘진인보두법’ 역시 태인 도장과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도주님께서 행하신 이들 공부가 무극도 창도와 관련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이들 공부가 무극도 창도와 관련이 있다고 추정되는 이유는 상제님과 더불어 봉안된 많은 신명들 때문이다. 무극도장은 두 건물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다. 하나는 상제님을 봉안하여 모신 영전(靈殿) 혹은 영대(靈臺)이고, 다른 하나는 성전(聖殿) 혹은 도솔궁(兜率宮)이었다. 특히 도솔궁에는 많은 천지신명들이 봉안되었다. 4층에는 옥황상제를 비롯한 신명들이 봉안되었고, 3층에는 칠성대제를 봉안하였으며, 2층에는 그 외의 천지신명을 봉안하였다.29 이렇게 신명들을 봉안하기 위해서 도주님께서는 지극한 정성을 드리셨을 것이다. 이러한 정성을 교운 2장에는 무극도 창도로 이어지는 도주님의 계속된 공부로 기록하고 있다고 해석해 볼 수 있다.
한편, 각각의 공부에는 어떤 신명들이 참여한 것일까? 도주님의 공부가 신명들과 함께 이루어졌기 때문에 많은 신명들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중에서도 무극도장에 봉안된 신명들은 공부와 관계가 있을 것이라 추측해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 교운 2장에 언급이 없어서 더 이상 알기는 어렵다. 다만 ‘단 도수’와 ‘진인보두법’에 등장하는 칠성대제와 24방위에 응기된 신명 그리고 1924년 태인 도장에서 치성을 마치고 이루어진 공부에서 등장하는 육정신 등은 직접 관련되어 있는 것 같다.
Ⅳ. 결론
이상에서 1924년에 5달 동안 지극한 정성으로 도수를 마친 도주님의 ‘폐백 도수’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논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폐백 도수’를 이해하기 위해서 두 가지 방식으로 접근하였다. 하나는 공부의 연속성을 전제로 한 접근이었고, 다른 하나는 폐백의 자의(字義)적 접근이었다. 먼저, 공부의 연속성은 1921년 대원사 ‘백일 도수’를 시작으로 김병문의 집에서 행해진 ‘둔 도수’, 박동락의 집과 도솔암에서 이루어진 ‘단 도수’, 박동락의 집과 태인 도장에서 행해진 ‘진인보두법’ 그리고 종남산 영성정에서의 ‘폐백 도수’로 이어졌다. 그런데 이 공부들은 태인 도장과 무극도 창도로 이어지는 흐름을 가지고 있었다.
‘둔 도수’의 경우 도주님께서 공부 때 쓰셨던 글 종이가 1924년 태인 도장 치성 후 태워지는 의식을 통해 그 공부의 흐름이 도장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단 도수’의 경우 박동락의 집에서 행해졌던 ‘진인보두법’이 1924년 태인 도장 치성 후 도주님께서 다시 행하심으로써 ‘단 도수’ 역시 도장과의 연관성 속에서 이해해야 함을 확인하였다. 또 ‘폐백 도수’의 경우 교운 2장 30절 ‘폐백 도수’의 앞뒤 구절이 모두 태인 도장으로 되어있고, 이어서 무극도 창도로 이어져 있음을 맥락적으로 살펴보았다. 그래서 ‘폐백 도수’도 무극도 창도와 관련된 도주님의 공부로 이해해 보았다. 그리고 도주님의 공부에 등장하는 신명들과 무극도 창도 당시 도장에 봉안되었던 신명들과의 관련성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다. 그 결과 도주님의 공부가 영대와 도솔궁에 봉안된 신명들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도 살펴볼 수 있었다.
다음으로 폐백의 자의적 접근방법에서는 폐백의 뜻을 규명하였다. 폐백은 비단이라는 본래 뜻으로도 쓰이고 예물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특히 이 예물의 뜻은 단순한 귀한 물건이 아니라 ‘존귀한 대상에게 예를 갖추어 드리는 규범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신명들께 드리는 예물이나 왕에게 올리는 예물 등을 모두 폐백이라 하였고, 혼례 때 보내는 예물도 폐백이라 하였다. 물론 폐백은 비단이라는 단순한 뜻으로도 사용되었다. 이러한 폐백의 의미는 도주님의 ‘폐백 도수’에도 그 뜻이 녹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상제님께 올리는 도주님의 정성이 비단과 같은 예물은 아니지만, ‘존귀한 대상에게 올리는 정성’이라는 의미에서 폐백의 자의적 의미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폐백 도수’는 대원사 ‘백일 도수’와 ‘둔 도수’, ‘단 도수’ 그리고 무극도 창도로 이어지는 역사적 연속성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또한 이 ‘폐백 도수’는 도주님께서 행하신 이전의 다른 공부와 마찬가지로 상제님과 무극도 창도로 이어지고 있다고 판단된다. 이렇게 볼 때, ‘폐백 도수’는 상제님께 올리는 도주님의 극진한 정성이라는 의미와 함께 무극도 창도를 포괄하는 공부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대순회보> 191호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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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대순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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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진정애, 「정산 조철제의 교리체계 형성에 관한 연구」 (대진대학교 대순종학과 박사학위 논문, 2011).
02 황희연, 「도주 감오득도에 관한 문헌적 고찰」 (대진대학교 대순종학과 석사학위 논문, 2015).
03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전경 다시 읽기」,《대순회보》 168호, 169호, 173호, 174호, 176호, 180호, 183호.
04 이종훈, 백종택, 장근환, 윤재근, 「교운 2장 연구」, 《대순회보》 15호 (1989), p.8.
05 도전님께서는 1967년 3월 《태극도월보》 3호, 〈종통 계승일을 맞이하여>라는 기념사를 내리셨다. “친애하는 도인 여러분! 오늘은 우리 도의 종통 계승일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오늘은 지금으로부터 만 50년전, 그러니까 서기 1917년(정사년) 오늘, 우리 도주님께서 오래동안의 입산수도하신 끝에 만주 봉천지방에서 상제님의 계시를 받으시고 득도하셔서 상제님께서 선포하신 무극대도의 종통을 계승하신 뜻깊은 날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도에는 일년중에 상제님과 도주님께서 강세하시고 화천하신 날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경축일과 기념일이 많이 있으며 그날마다 모두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읍니다마는 나는 오늘은 오늘이 가지는 특별히 중요한 의의를 다시 한번 여러분과 같이 되새겨 다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 참고로 《태극도월보》는 1967년 1월에 간행을 시작하였다. 《태극도월보》의 논조는 도전님께서 1968년 태극도에서 이궁하시는 시기를 기점으로 바뀌었다. 이궁하시기 이전까지는 도전님을 옹호하는 태도를 보이다가 이궁하신 이후부터는 도전님을 비판하는 논조로 입장이 바뀌었다.
06 『대순진리회요람』, p.14.
07 박용철, 「대원사 공부의 이해에 나타난 종통의 천부성에 대한 고찰」, 《대순회보》 68호 (2007), pp.99-106 참조.
08 서유구, 『임원경제지: 위선지2』, 김일권 역 (서울: 소와당, 2011), p.29.
09 같은 책, p.29, “북두칠성이 천극성을 안고 1년 내내 회전하는 별자리인 까닭에, 회전한다는 의미의 선(旋)과 기틀이 된다는 의미로 기(機)의 뜻을 취하였고, 여기에다 북두칠성이 매우 밝은 별이어서 마치 옥(玉)과 같이 빛난다는 수식을 붙여 선기(璇璣)라 이름하였다. 제5 형성(衡星)도 옥과 같이 밝은 데 저울대 역할을 한다고 보아 옥형(玉衡)이라 이름한다. 이들을 합쳐 선기옥형(璇璣玉衡)이라 약칭하며, 흔히 북두칠성의 별칭으로 사용한다.”
10 1907년 12월에 상제님께서도 선기옥형 도수 공사를 보셨다. 이것 역시 법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상제께서 여러 종도들의 집에서 선기 옥형(璿璣玉衡) 도수를 정하시니 신 경수의 집에 저울 갈고리 도수를, 황 응종의 집에 추 도수를, 문 공신의 집에 끈 도수를, 그리고 신 경수 집에 일월대어명(日月大御命) 도수를, 문 공신의 집에 천지 대팔문(天地大八門) 도수를 정하고 이 세 종도의 집에 밤낮으로 번갈아 다니시며 공사를 행하셨도다.”(예시 31절)
11 신상미, 「선기옥형」,《대순회보》 137 (2012), p.29.
12 이종훈, 백종택, 장근환, 윤재근, 「교운 2장 연구」, 《대순회보》 15 (1989).
13 교운 2장 20절.
14 교운 2장 29절: “날로 도주를 흠모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므로 태인에 갑자년 四월에 도장이 마련되었도다. 도주께서는 밀양 종남산 세천에서 보시던 둔 도수를 마치고 도장에 돌아와 치성을 올리시니라. 치성을 끝내고 칼을 자루에서 뽑아들고 육정신을 외우시면서 보두법을 행하고 종남산 세천에서 공부할 때 써 놓았던 여러 글종이를 불사르셨도다.”
15 “진인보두법이란 무엇인가? 도교 경전에 의하면, 보두(步斗)란 보강탑두(步罡踏斗)이다. 두(斗)라는 것은 곧 북두칠성(北斗七星)을 나타내며, 강(罡)이란 곧 북두칠성의 두병(斗柄)을 가리키는 것이다. 도사들이 행하는 술법에서는 보강탑두를 정식의 법으로 하는데, 이로써 천상성군을 감응하게 하여 신묘한 효과를 보고자 한다. 이러한 법술은 곧 우보와 동일한데, 보강탑두가 나타내는 기본적인 정신과 행법의 순서는 우보와 일치한다. … 중두는 아홉 개의 별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일곱 개으 별은 밝으며 나머지 두 개의 별은 어둡다고 한다. 별들의 원기(元氣)는 지계(地界)에 감응하며 구기(九氣)의 신명으로 변하는데 이를 일컬어 구령(九靈)이라 한다. 야(祂)로 남긴 발자국은 아홉 점의 흔적을 남겼는데 이러한 흔적은 곧 천상의 성수(星宿)와 대응하므로 이를 성강(星綱), 또는 성강(星罡)이라 일컫는다. … 우보란 발로써 성두의 종적을 따라 밟는 것인데, 우보라 약칭하기도 한다. 대우가 득도하여 진인이 되었으므로 우보는 곧 진인의 이두지보(履斗之步)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이를 진행하는 순서를 가리켜 진인보두법이라 일컫는 것이다.”, 詹石窗, <우보치령(禹步致靈)과 양생건신(養生健身)>, 《第二回 韓中 宗敎文化 學術會議 발표 자료집》 (2013). pp.14-15.
16 ‘보두법’을 ‘진인보두법’으로 이해하는 것에 대하여《대순회보》 15호, 〈교운 2장 연구〉에서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도주님께서 단도수를 행하신 구절은 각각 27절, 28절, 29절에 나타나 있다. 여기서 27절과 28절은 단도수라는 기록이 있으나 29절은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9절을 단도수로 분류한 것은 진인보두법에 근거한 것이다. 왜냐하면 「단도수를 행하시니 이것이 곧 진인보두법이니라」하신 말씀에 따라서 29절의 보두법을 진인보두법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17 “육정육갑신은 도교의 신명(神名)으로서, 12지신상(支神像)을 음과 양으로 나누어 불렀던 것으로 수호신ㆍ방위신이며, 장사(將師) 차림의 수두인신(獸頭人身)의 모습으로 그려진다고 한다. 육정육갑신은 북두칠성(北斗七星)의 명령을 받는다고 하며, 육정육갑신에 각기 6명씩의 귀신병사들이 배속된다고 한다.” 김승동, 『도교사상사전』 (부산: 부산대학교 출판부, 2004), p.1068.
18 교운 2장 30절.
19 『無極大道敎槪況』 (일본학습원대학 동양문화연구소 소장, 1925), pp.37-40. 『無極大道敎槪況』은 전라북도 고등경찰에 의해서 작성된 내부 보고용 비밀문건이다.
20 경남 밀양시 상남면 남산리 369번지가 영성정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이 번지 일대에 선산 김씨 소유의 토지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369번지 옆에 있었던 369-1과 369-2번지의 밭은 소유자가 김봉두인데 이 사람은 기산리에 살던 사람으로 무극도의 도인이었다. 김용국의 통솔을 받았던 인물로 추정된다.
21 『한국민속대백과사전』
22 『맹자집주』, 「만장장구」하: “만장이 여쭈었다. ‘감히 여쭙겠습니다. 교제하는 것은 어떤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까?’ 맹자가 말하기를 ‘공손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 이 구절에 대하여 주자(朱子)는 ‘교제는 사람이 예의와 폐백을 가지고 서로 사귀고 대접하는 것을 이른다.(萬章問曰 敢問交際何心也 孟子曰 恭也. 際接也 交際謂人以禮儀幣帛 相交接也.)’고 주석하였다.
23 『전국책』, 「제책」5: 소진(蘇秦)이 제나라 민왕(閔王)에게 부국강병에 대하여 유세하는 내용 중에 ‘폐백이 좀이 슬도록 다 입을 수 없을 정도가 될 것이다.(幣帛矯蠹而不服矣)’라고 말하는데 이때 폐백은 비단을 가리킨다. 그러나 『서경집전』 「우공」 19장의 집주 내용에 보면 폐백의 의미가 다르다. “공(貢)은 아랫사람이 그 지역에서 나는 것을 윗사람에게 바치는 것이다. 곤지역에는 옻나무와 뽕나무가 잘 자라므로 옻과 생사를 바친 것이다. 비(篚)는 대나무로 만든 그릇이니, 광주리 종류이다. 옛날에 폐백 등을 광주리에 담아서 바쳤으니, 경문(經文)에 ‘비궐현황(篚厥玄黃, 검고 누런 비단을 광주리에 담았다)’이 이것이다.(貢者 下獻其土所有於上也 袞地宜漆宜桑 故貢漆絲也 篚竹器 筐屬也 古者幣帛之屬 則盛之以筐篚而貢焉 經曰篚厥玄黃是也 織文者 織而有文 錦綺之屬也 以非一色 故以織文總之 林氏曰有貢又有篚者 所貢之物 入於篚也)” 여기서 폐백은 공물로 바치는 여러 종류의 진상품을 일컫는다.
24 『서경집전』, 「우공」 19장: “아마도 당시에 성왕이 장차 새 도읍의 제사를 거행하려 하였으므로 소공이 받들어 제사를 도운 듯하다.(蓋當時成王將擧新邑之祀 故召公奉以助祭云)”
25 『춘추좌씨전』, 「양공」: “敬共幣帛,以待來者,小國之道也.”
26 『삼국사기』권제6, 「신라본기」제6, 문무왕 6년 10월 25일: “(10월) 25일에 왕이 환국하여 욕돌역에 머무니 국원의 사신 대아찬 용장이 사사로이 잔치를 마련하고, 왕 및 여러 시종들을 대접하여 풍악이 시작되자, 내마 긴주의 아들 능안이 15세의 나이로 가야의 춤을 추었는데 왕은 용의가 단정하고 화려함을 보고서 앞에 불러 앉히고 등을 어루만지며 금장의 술을 권하고 폐백을 자못 후히 주었다.(二十五日王還國 次褥突驛 國原仕臣龍長大阿湌 私設筵 饗王及諸侍從及樂作 奈麻緊周子能晏 年十五歲呈加耶之舞 王見容儀端麗 召前撫背 以金盞勸酒 賜幣帛頗厚)”
27 『조선왕조실록』, 태종 12년 4월 20일: “내자 직장(內資直長) 황보인(皇甫仁)을 면직시켰다. 구례(舊禮)에 원단(圓壇)에는 오방(五方)의 신(神)에게 각각 방위 빛깔로 폐백을 올리는데, 지금 황보인이 다만 백색 폐백을 올렸던 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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