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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생의 길『典經』에 나타난 손병희(孫秉熙) 연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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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성호 작성일2018.04.05 조회3,95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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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위원 김성호

      

Ⅰ. 머리말

 

 

   『典經』을 읽다보면 천도교(天道敎) 3대 교주였던 손병희(孫秉熙, 1861~1922)와 관련된 내용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는데, 그 전반적인 내용은 그가 일으킨 사건이나 행위를 통해 상제님께서 그의 인물됨과 사상적인 면모를 평(評)하신 것으로 집약된다.  

   하지만 『典經』에는 손병희가 일으킨 사건의 정황과 행위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세세히 드러나 있지 않아 수도인들이 상제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여 필자(筆者)는 이에 관한 사실의 보다 세세한 연구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연구방법과 범위를 미리 상정한다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상제님께서 예견하신 ‘조선지말(朝鮮之末)에 손병희가 꾸민 난리’01를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사건의 전말(顚末)을 구체적으로 고찰할 것이고, 둘째는 ‘손병희가 사설(邪說)로서 교도를 유혹하여 그 피폐가 커진다는 상제님의 말씀’02에서 과연 손병희의 사설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고, 당시 그가 교도(敎徒)들에게 강연한 교설(敎說)의 어떠한 내용이 교도들을 피폐하게 만들었는지 이에 관한 자료를 찾아 제시하고자 한다. 

    

 

Ⅱ. 손병희가 일으킨 사건

 

   상제님께서는 “조선지말에 이란(吏亂)이 있으리라 하는데 그러하오리까”라고 묻는 사람에게 “손병희가 영웅이라. 장차 난리를 꾸미리니 그 일을 말함이나 그가 선진주(先眞主)라 박절하게 성돌 밑에서 턱을 괴고 앉아서 거의(擧義)하므로 성사치 못하리라.”고 하시며 조선 말기에 손병희가 꾸민 난리와 그 일의 성사여부까지 예견하셨다. 그렇다면 조선 말기에 손병희가 꾸민 난리는 무엇이며, 그 거사는 왜 성공치 못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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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암(義菴) 손병희는 천도교 3대 교주로서 3ㆍ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도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인물이다. 본관은 밀양, 본명은 응구(應九)이며, 의암은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으로부터 받은 도호(道號)이다. 그는 충북 청주(淸州)에서 아전(衙前)의 서자로 태어나 22세(1882년)에 조카 손천민의 권유로 동학에 입교하였다. 이후 1884년에 교주 최시형을 만나 그의 수제자가 되었으며, 1897년 12월 24일에 최시형으로부터 종통을 계승했다. 최시형으로부터 종통을 계승한 손병희는 후에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게 된다.

      

  1. 조선정부정복계획

 

   손병희가 사회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894년에 동학농민전쟁에 참가하면서부터이다. 당시 손병희는 북접(北接)03의 우두머리로서 농민군을 이끌고 남접(南接)04의 우두머리인 전봉준(全琫準)과 논산에서 합세하여 호남과 호서지방을 석권하고 북상하여 관군(官軍)을 격파하기도 하였지만 일본군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결국 1895년 원산(元山)ㆍ강계(江界) 등지로 피신하였다.

   한편 이 해(1895, 고종32)에는 고종의 단발령05과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주동이 되어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고 일본의 세력 강화를 획책한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시행되면서 국민들로부터 일본 및 친일내각에 대한 반발이 거세져 전국각지에서 의병(義兵)이 일어났다. 그러자 동학농민전쟁 후 관군에게 계속 쫓겨다녀야 했던 동학의 잔여세력들은 의병들의 봉기를 또 한번의 기회로 여기고 속속 의병운동에 가담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나가는 듯했던 의병운동도‘을미사변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가 1896년 2월 11일 급기야 왕궁을 버리고 러시아 공관으로 도피’06함으로써 그 활동도 시들해졌다. 이에 동학의 잔여세력들은 활로를 바꾸어 영학당(英學黨)07ㆍ남학당(南學黨)ㆍ활빈당(活貧黨)08등의 조직에 가담하여 항쟁을 계속했지만 그 결과는 동학에 대한 국가의 탄압이 가중되어 전국 각처에 동학 교인들이 피살되는 사례를 낳을 뿐이었다. 

   그로부터 2년 뒤(1897년) 그는 교주 최시형의 뒤를 이어 종통을 계승하고 3년 동안 교세확장에 총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1901년 동학의 지도급 인물인 손천민이 관군(官軍)에 체포되어 처형 당하고, 연이어 김연국 또한 체포되어 종신형에 처해지자 손병희는 제자들과 상의하여 손병흠ㆍ이용구와 함께 몸을 피해 일본으로 망명(亡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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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망명 당시 손병희와 그의 동지들. 앞줄 왼쪽으로부터 조희연ㆍ권동진ㆍ손병희ㆍ오세창. 뒷줄 왼쪽 첫 번째 인물이 손병희의 사상(思想)을 정리하여『천도교대헌』을 집필한 양한묵이다.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일본으로 망명한 손병희는 이름을 이상헌이라 개명(改名)한 뒤 국내에서 국헌 문란 죄로 망명해있던 오세창, 권동진, 조희연, 박영효, 이진호 등과 교류하면서 동학(東學)의 재건을 위해 여러모로 고심하였다. 그는 장차 한국에서 개화와 혁신운동을 이끌어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재육성이 시급하다고 판단하고 국내의 동학교도 자제들 중 뛰어난 인재 64명을 선발하여 유학시키기도 했다. 이것은 모두 젊은이들을 새로운 문명과 접촉시켜 세계적인 문명사조에 호응시킴으로써 부강한 독립국가의 기틀을 마련할 계획 아래 추진한 것이다. 

   한편 이 시기에 러시아와 일본은 한국과 만주지역의 지배권을 두고 한창 제국주의 야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시국이 이러하다보니 당시 두 나라에 비해 약소국이었던 조선은 러ㆍ일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 꼼짝없이 승전국에 예속되어야만 했다. 손병희는 장차 조선이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을 세계정세를 통해 미리 예견하고 있었고, 이에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의 운명을 넋 놓고 바라볼 수 없었던 그로서는 발 빠르게 그에 따른 대비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생각 끝에 그는 러ㆍ일 양국 간의 지리적 조건과 정신자세ㆍ군사전략의 차이 등을 들면서 러ㆍ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전국이 될 것이라고 결론내리고, 조선은 미리 승산이 있는 나라에 우의를 표하여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고 조정에 상소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것은 손병희 혼자만의 생각일 뿐 당시 친러파가 요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조선의 조정으로서는 결코 받아들이기 만무한 상황이었다. 이에 손병희는 국가의 대계를 세우기 위해서는 우선 국내의 친러파 정권부터 타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국내의 동학교도들을 결집시키는 한편 그의 계획에 일본군의 힘을 빌리고자 권동진으로 하여금 당시 일본군 참모장이던 다무라〔田村〕09를 대면하여 그의 의중을 떠보도록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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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자 곧 다무라는 손병희의 계획에 동참하겠노라며 흔쾌히 승낙해왔다. 이에 손병희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이 기뻐하며 장차 자신의 계획이 잘될 것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자신의 친동생인 손병흠을 불러 일본군과의 합동 거사계획을 상세히 설명하고 국내에 결집된 동학교도들에게 자신의 뜻을 전달해 달라고 당부하였다. 그 계획은 동학교도들이 모두 상인으로 가장하여 우리나라의 각 항구에 대기하였다가 다무라가 지원하기로 한 일본군이 상륙하게 되면 이들과 함께 도성(都城)을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듯하였으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거사를 목전에 두고 생각지도 못한 문제들이 그의 발목을 붙들었다. 고국에 건너가 자신의 거사계획을 전달하고자했던 동생 손병흠이 부산에서 원인모를 이유로 급사(1903년 8월 3일)한 것이다.10 이와 동시에 든든한 동조자 다무라마저 손병흠이 급사한 이틀 뒤 (1903년 8월 5일) 연이어 원인모를 이유로 사망하였다.11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에 손병희는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실망을 금치 못하였다.12

      

  2. 갑진개화혁신운동

   

   손병희가 다무라를 위시하여 일본의 군부세력과 국내교도들의 힘을 규합하여 시행하고자 했던 조선정부정복계획은 예기치 않은 동조자들의 급사로 시작도 못해보고 실패하였다. 하지만 그는 러시아와 일본이 한국을 침식하려 하는 위급한 상황에서 더 이상 실의에만 빠져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고국에 있는 법무대신 이윤용과 의정대신 윤용선을 시켜 독립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서는 동학을 국교로 지정하고 전국 360여 군에 민회를 설치해야 한다고 정부에 상소문을 보냈다.13

   그러나 당시는 군권(君權)이 통치이념과 방법으로 절대시 되던 시기였던지라 민회(民會:=1903.3 대동회→1904.7 중립회→1904.9 진보회 등으로 변경됨)를 설치하여 민권과 민주이념을 고취시키는 것은 애초부터 수용되기 힘든 사안이었다. 하여 손병희는 스스로라도 강력한 정당조직을 결성해야겠다고 다짐하고 동학교단의 중진들을 일본에 오게 하여 개혁에 관한 자신의 의사를 밝히고 민회(民會=大同會)14를 조직하였다.

   손병희의 지시를 받고 귀국한 중진들은 곧 그의 의사를 교인들에게 전달하고‘개혁(갑진개화혁신운동)’15에 동참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 표증으로 단발흑의(斷髮黑衣)차림을 할 것을 당부했다. 당시는 고종의 단발령이 철회되었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손병희가 이용구를 시켜 국내 교도들에게 명한 이 지시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교도들의 마음을 또 한 번 불타오르게 했다. 이는 삽시간에 전국으로 전해져 1904년 8월 30일 단 하루 만에 상투머리를 자르고 검은 색 옷을 입은 사람이 16만 명이나 되었는데, 이는 당시의 민중이 어지러운 사회풍토를 바로잡아 새로운 사회문화를 창조하려는 개혁의지가 손병희의 강한 영향력으로 인해 한순간에 폭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민중의 이 같은 노력도 잠시, 시간이 지나면서 정부에서는 그들이 조직한 민회가 동학의 잔여세력임을 알아차리고 탄압을 가해왔다. 이로 인해 손병희는 같은 해 9월 조직명을 진보회16로 개칭하고 자신은 여전히 일본에 머물면서 국내에 있는 이용구로 하여금 진보회의 조직운영을 전적으로 담당하게 하였다. 

   손병희의 지시를 받은 이용구는 지체 없이 동학교도들과 함께 전국적인 개화운동을 펼쳤지만 역시 관군의 탄압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진보회가 여러 번에 걸쳐 조직명을 개칭했다 하더라도 진보회의 구성원 자체가 10년 전 반란을 일으켰던 동학당이라는 것이 극명한 사실로 밝혀진데다, 더욱이 진보회의 강령에는 ‘현 정부를 개혁한다는 것’이 명확하게 명시되어 있어 정부와 진보회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상극적인 입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친일파 송병준에 의해 설립된 일진회(一進會) 측은 대중의 기반을 가지지 못한 명칭뿐인 일진회의 미약한 세력으로는 자신들의 일을 성사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매국행위를 일삼는 일진회측이 이 같은 고민에 빠져있을 당시 진보회가 과거 동학당이란 사실이 만방에 밝혀지자 그들은 이를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당시 다른 단체들에 비해 많은 교도들로 구성된 진보회의 세력을 흡수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다.   

   그리하여 일진회에서는 진보회장 이용구에게 지금 정부에서는 갑오동학란 토벌 때와 같이 일본군과 협력해 진보회를 소탕할 방침이니 진보회가 살아남는 길은 오직 일진회와 결탁하는 길밖에 없다고 유혹적인 합동제의를 해왔다. 이에 당시 관군의 탄압을 벗어날 길이 없었던 그로서는 일진회와의 결탁을 위기를 모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겨, 결국 동학교도들과 손병희를 배신하고 친일 매국행위를 일삼는 일진회와 손을 맞잡고 그들의 꼭두각시로 전락하고 만다.

   어찌 보면 이용구의 배신행위는 이미 예견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당시 그와 함께했던 동학교도들 사이에서는 이미 정평이 나있었던 그의 성품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이용구는 영리하긴 하지만 매사에 경솔하고 용맹 과감한 대담성과 인내심이 많이 부족하여 대단위의 단체를 통솔할 만한 역량이 되지못하였다고 한다.17 이런 그에게 손병희는 친러파를 타도하여 정권을 바로세우고 나아가 정략적으로 일본을 이겨야 할 너무나도 막중한 일을 부하(이용구)에게 일임(一任)하고 자신은 뒷전에서 턱을 괴고 앉아 물끄러미 지켜만 보고 있었으니 애당초 그의 거사는 성공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로써 손병희가 몇 차례에 걸쳐 혁신을 위해 조직명을 개칭하면서까지 추진하고자 했던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결국 조선지말에 손병희가 난리를 꾸미지만 실패할 것이라는 상제님의 예견대로 몇 차례에 걸쳐 시도한 손병희의 거의(擧義)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그가 실패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건 아마도 중요한 일을 자신이 몸소 뛰어들어 실행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시켜 처리하려 한 그의 태도였지 않았을까? 쿠데타의 경우에서 보듯이 일국의 운명을 좌우할 거사를 진행함에 있어 현장에 가 보지도 않은 채 일을 도모하려 하였고, 진보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대리인을 내세웠으며 러일전쟁(1904년)이 끝나 신변의 안전이 확인될 때까지 한국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典經』속에 기록된 상제님의 말씀과 부합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상제님께서 손병희가 거사를 실행에 옮김에 있어서 “박절하게 성돌 밑에서 턱을 괴고 앉아서 거사를 하였기에 성공치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신 바 있듯이 그는 스스로 죽음을 무릅쓸 각오로 희생정신을 발휘하지는 못한 듯하다. 물론 그의 지략적인 면모만을 보아서는 상제님께서 말씀한 바와 같이 가히 영웅이라 보여지지만 이렇게 손병희에게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결여되어 있었던 듯하다. 

      

  3. 3ㆍ1운동

 

   지도자로서 희생정신이 결여된 손병희의 면모는 그의 생애 마지막 거사인 3ㆍ1운동에서도 계속된다. 3ㆍ1운동이 일어나기 전, 1918년 당시 천도교 일각에서는 이종일(李鍾一)을 중심으로 민중봉기론이 제기되고 있었다. 이 봉기의 주된 내용은 천도교가 앞장서서 독립만세를 선창하면 9년 동안의 질곡과 신음 속에 있었던 민중들이 호응할 것이므로 대중시위운동을 펴야 한다는 것이었다.18 하지만 이종일이 처음부터 독립운동의 노선을 비폭력으로 정한 것은 아니다. 그는 이미 1910년대 초부터 천도구국단(天道救國團)을 조직하여 민중을 봉기, 무장투쟁을 통한 국권회복론을 손병희에게 지속적으로 주장하여왔다.19 이런 그의 의견이 1918년 이후 천도교단의 독립운동계획에 반영되기는 했지만, 그 운동노선이 비폭력으로 급선회된 데에는 나름대로의 계기가 있다.

   그 계기는 첫째, 손병희 및 대다수 천도교 중진들이 1918년 11월경 『오사카마이니치신문(大板每日新聞)』에서 미국 윌슨 대통령이 발표한 14개조의 강화원칙 가운데 ‘민족자결 조항’20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고21, 둘째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해서‘이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무력으로써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정부에 대해서 그 취지를 건의하고, 평화를 희망하는 세계의 현상에 맞추어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적절하다’22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손병희가 3ㆍ1 운동을 비폭력으로 추진한 것은 그들이 폭력적 민중시위를 할 경우 서구 문명국들의 동정을 얻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인데, 이러한 것으로 볼 때 그들이 추진한 3ㆍ1운동의 사전계획은 전적으로‘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희망을 걸고 추진된 것’23이라 할 수 있다.24 이처럼 손병희를 비롯한 천도교 중진들이 3ㆍ1운동을 계획하게 된 데에는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제창과 이에 호응한 상해ㆍ미주ㆍ동경 등지의 독립운동 소식이 직접적인 요소로 작용했다.25 

   윌슨의 민족자결론이 제창되자 천도교의 중견간부인 권동진ㆍ오세창ㆍ이종일ㆍ최린 등은 그해 12월에 이르러 민족자결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다. 그 후 1919년 1월 20일이 되어 그들은 천도교 교주 손병희의 사저인 상춘원(常春園)을 찾아가 독립선언과 독립운동에 관해 상의하고 이를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손병희는 이를 허락하였고, 구체적인 사항은 천도교의 중견간부들에게 위임되었다. 이에 권동진과 오세창은 천도교 내부의 일을, 최린은 천도교 외부와의 관계를 담당하여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1919년 2월 초순경부터 구체적인 준비 활동에 들어가 많은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기독교도와 불교 측의 동참을 이루어 냈다.26 이처럼 각계 종교인사들의 합동거사계획이 성사되자 그들은 곧 민족대표 33인의 서명이 날인된 독립선언서의 초고작성을 계획하였는데, 이는 최남선27에 의해 비밀리에 준비되었다. 최남선에 의해 작성된 독립선언서는 후에 만해 한용운의 검토에 의해 추가 작성된 후 천도교에서 경영하는 보성인쇄소 이종일에 의해 인쇄, 전국의 배포담당자에게 전달되어 3월 1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주요도시에 일제히 배포되었다.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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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 때 종로 거리에서의 만세 시위 모습.

 

   모든 인쇄물이 배포 된 거사 당일인 1919년 3월 1일. 손병희를 비롯한 민족대표들은 고종의 인산일(因山日:국장)인 3월 1일을 기해 많은 사람들이 모일 것을 예상하여 종로의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손병희를 포함한 민족대표들은 거사를 실행하기로 한 오후 2시에 약속을 어기고 처음 계획과는 다른 태화관(泰和館) 요릿집으로 거사장소를 변경했다.29 이 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로 했던 원래의 계획까지도 변경,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지 않고 만해 한용운의 간단한 식사(式辭)로 이를 대신하고서는 간단하게 만세삼창을 외친 후 곧 축배를 들었다. 더군다나 그들은 자신들의 이 같은 행위를 거사당일 처음부터 조선총독부에 보고한 후 진행하였는데, 그래서인지 그들은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일본경찰에게도 단 한 번의 저항 없이 의연하게 연행되기까지 했다.30 거사를 처음부터 계획하고 주도했던 인물들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일제에 투항함으로써, 그들은 사실상 운동을 끝까지 책임지고 지도해야 할 더욱 더 중요한 사명은 포기해 버린 것이다.31 그들의 이 같은 행위 즉, 3ㆍ1운동 이후 대중운동으로의 확산단계에서 지도력 행사를 포기한 것은 오늘날에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32 이 같은 민족대표들의 애매모호한 투쟁에도 불구하고33 파고다공원에 모인 학생 및 일반 민중들의 독립만세 시위운동은 높이 고양되어 갔으며, 그 열기는 이윽고 각 지방에까지 파급되었다.34 이로 인해 민족대표들은 반일운동에서 스스로 지도성을 잃어버렸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단재 신채호 또한 3ㆍ1운동은 힘의 중심이 결여된 것이었으므로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한 운동이라고 말한 바 있다.35 이렇듯 이 운동은 거사를 주도한 천도교 손병희를 비롯한 민족대표들의 자진 연행으로 인해 실패로 일단락되었다. 물론 3ㆍ1운동이 실패하였다 하더러도 이 운동이 독립운동의 점화점으로 작용하여 대중의 독립의지를 일깨우고 전국적인 반일 항쟁의 계기를 마련한 점에서는 높이 살만하다. 하지만 손병희가 거사과정에서 운동을 끝까지 책임지고 지도해야 할 사명을 포기한 것은 거사를 계획한 총책임자로서 희생정신이 결여된 것이라 하겠다.36 

  <대순회보> 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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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상제께서 “조선지말에 이란(吏亂)이 있으리라 하는데 그러하오리까”고 묻는 사람에게 말씀하시기를 “손 병희가 영웅이라. 장차 난리를 꾸미리니 그 일을 말함이나 그가 선진주(先眞主)라 박절하게 성돌 밑에서 턱을 괴고 앉아서 거의(擧義)하므로 성사치 못하리라.”(예시 60절)
02 천도교 손 병희(孫秉熙)가 호남 일대를 순회하고자 전주에 내려와서 머물었도다. 상제께서 공우에게 “네가 전주에 가서 손 병희를 돌려보내고 오라. 그는 사설로 교도를 유혹하여 그 피폐가 커지니 그의 순회가 옳지 않다”고 분부를 내리셨도다. 이에 그가 복명하였으되 이튿날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씀이 계시지 않으므로 이상히 여겼느니라. 며칠 후에 손 병희는 예정한 순회를 중지하고 경성으로 되돌아갔도다.(권지 1장 33절)
03 충청도 지방의 동학 교단 조직.
04 전라도 지방의 동학 교단 조직.
05 조선 고종 32년(1895) 11월, 상투 풍속을 없애고 머리를 짧게 깎도록 한 명령.
06 아관파천(俄館播遷).
07 1898년 12월과 1899년 5월 두 차례에 걸쳐 전라남북도 일부 지역에서 봉기한 무장농민조직. 영학당은 동학당(東學黨)의 잔여 세력들이 1898년 전라도 지역에서 ‘동학’ 대신 ‘영학’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재건한 조직이다.(『브리테니커백과사전』, 한국브리테니커회사, 1999~2004.)
08 1900년 충청남도 일대에서 시작하여 남한 각지에서 반봉건주의와 반제국주의의 기치를 들고 봉기했던 무장민중집단. 활빈당에는 동학혁명군과 화적(火賊) 출신들이 많이 가담해 있었다. 출신지는 일정 지역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 모인 혼합부대였다. 또한, 활동 범위도 제한된 지역이 아니라 각지를 기동적으로 움직여 다니는 게릴라부대였다.(『브리테니커백과사전』, 한국브리테니커회사, 1999~2004.)
09 『天道敎會月報』, 1922년 6ㆍ7월호, p.11.「聖師一代記」에 ‘참모총장 다무라(田村怡與助)’로 표기되어 있는 것을 감안하여, 일본 측 군사관련 자료를 검토해 본 결과 당시 육군 참모총장의 위치에 있었던 다무라란 참모차장 田村怡與造(たむらいよぞう)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陸軍主要ポスト遷表」, 1890年~1945年 참고. / 최기영, 「韓末 東學 天道敎로의 개편에 관한 검토」, p.101 참고.
10 天道敎中央宗理院, 『天道敎創建史』, 1933, p.33~34. / 손병흠의 죽음에 대한 원인을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는 이도 있다. ‘손병흠은 손병희의 지시를 받고 본국에 이르러 여러 두목과 상의하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는 도중 8월 3일에 부산과 쓰시마 해협에서 일본 구축함과 러시아 순양함이 충돌한 파편에 맞아 죽음을 당하였다.’(李光淳, 『偉大한 韓國人 5 義菴孫秉熙』, 太極出版社, 1979, p.161.) 
11 天道敎中央宗理院, 『天道敎創建史』, 1933, pp.33~34 참고. / 당시 육군 참모차장을 역임하고 있었던 다무라(たむらいよぞう)의 사망경위와 사망시기, 그리고 당시 그의 계급에 관련된 문제는 천도교 측 자료와 일본 측의 자료가 서로 상반(相反)된다. 먼저 당시(1903~1904) 다무라의 계급을 조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천도교 자료에 의하면 그는 당시 육군 참모총장의 계급에 있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일본 군사기록이나 일본에서 발행된 대부분의 인명사전에 의거하면 당시의 육군 참모총장은 오가오 마타지였고, 다무라는 그의 수하로서 참모차장의 계급이었는데, 사망 후에 육군중장으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다무라의 사망경위와 사망시기에 대해서도 천도교에서는 다무라가 1903년 8월 5일에 원인모를 이유로 사망하였다고 주장하나, 일본 측의 자료에 따르면 다무라는 1903년(메이지36년) 10월 1일에 과로, 또는 파상풍에 의한 심장앙진증에 의해 일본 적십자병원에서 사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新撰大人名辭典』4, 平凡社, 1937, p.219. / 『新聞集成明治編年史』,12, 財政經濟學會, 1936, p.114. / http://ja.wikipedia.org 田村怡與造./相邦衛 『日露陰の主役田村怡造』, 山梨ふるさと文庫. / 篠原昌人, 『知謀の人田村怡造』, 光人社 / http://www007.upp.so-net.ne.jp 田村怡與造. / 軍人デ一タベ一ス 『サクラタロウ DB (Purunus DB)』 田村怡與造. / http://imperialarmy.hp.infoseek.co.jp 田村怡與造.] cdc53af01bf0eb5fa81850dedd400ed2_1535258

12 위 각주 7과 9의 내용에 의거하여 1903년 손병희가 다무라의 세력 즉, 일본의 군사세력에 기대어 계획한 쿠데타(조선정부정복계획)의 진위여부를 살펴보면 일본 측의 자료가 좀 더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일본 측과 천도교 측의 기록에 나타난 다무라의 사망시기가 약 두 달 정도의 차이가 나는 점을 감안 할때 만약 일본 측의 자료가 정확한 것이라면, 사실상 천도교 측에서 주장하는 다무라와 합동거사를 계획하여 조선의 친러파정부를 타도하고자 한 손병희의 정부정복계획은 실상 일본군과는 무관하게 손병희와 망명객들이 국내의 동학세력을 전제로 하여 계획한 논의에 불과했던 일로 생각되기도 한다. 하지만 일본 측에서 장차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그들의 식민지로 두려했던 조선을 그것도 일개 망명객의 말에 일본의 군사가 합동거사를 도모하다 갑자기 사망했다는 기록은 일본당국에서 수치로 여겨 관련기록을 삭제하고 사망시기를 조작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또한 손병희가 실제로 정부전복계획을 실행하였다 하더라도 민족의 독립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일본의 세력을 등에 업고 친러파 정권을 타도하여 동학을 국교로 지정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이해된다.
13 李光淳, 『義菴 孫秉熙』, 太極出版社, 1979, pp.163~169 참고. / 義菴孫秉熙先生紀念事業會, 『義菴孫秉熙先生傳記』, 1967, 183~188 참고. / 『근대 인물한국사 손병희』, 동아일보사, 1995, pp.70~71 참고. / 『皇城新聞』 1903년 7월 29일 참고. 
14 泰仁 郡守 孫秉浩氏가 東匪巨魁 李利老 爲名漢 捕捉하여 所謂 錄名冊子를 取得 하였는데, 從黨이 數千名이더라. (『황성신문』, 1904년 6월 2일.) 이 기록은 당시 민회에 가입된 회원의 수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15 손병희가 일으킨 이 개혁에 관해서는 사전류에서도 내용이 서로 다르게 기술되어 있는 부분도 있다. 1904년 동학교도를 주축으로 전국적으로 추진되었던 대중문화혁신운동. (『파스칼세계대백과사전』, 동서문화, 2002.) / 동학교단이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와 합동하여 1904년 8월부터 1906년 9월까지 추진한 근대화 개혁운동. (『브리테니커백과사전』, 한국브리테니커회사, 1999~2004.) / 광무 8년(1904)에 동학 신도들이 주축이 된 진보회가 전국적으로 추진한 대중문화 혁신운동. (『네이버국어사전』)
16 당시 진보회의 전국 회원 수는 117,735명이었다. 회원들 중에는 역원이 무려 881명으로 벼슬아치로 관리를 지낸 자가 20명, 진사(進士)가 4명, 사인(士人)이 403명, 농민이 316명, 상인이 138명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회원 60%는 평안도에 분포되어 있어 당시의 교세확장이 서북지방에 편중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新人間』, 2005년 1월호, pp.101~102.) 
17 『新人間』 379호, 신인간사, 1980, pp.22~25 참고.
18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47』, 탐구당문화사, 2000, p.308.
19 강만길 외, 『한국사 15』, 한길사, 1994 p.101(「묵암이종일선생비망록」3) / 한국사상연구회, 『한국사상 18』, 1981. 
20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주장. (『두산세계대백과사전』, EnCyber, 2003.)
21 강만길 외, 『한국사 15』, 한길사, 1994 p.101(市川正明編, 「권동진 경찰신문조서」) / 『3ㆍ1獨立運動』1, 「朝鮮獨立運動」 별권, 1984, p.46(「이승훈 지방법원 예심신문조서」), p.288. 
22 『3ㆍ1독립운동』1, p.12(「최린검사신문조서」), p.202(「손병희 고등법원예심조서」). 
23 손병희를 비롯한 최린ㆍ권동진ㆍ오세창 등은 당초 윌슨의 민족자결을 ‘자치’로 이해, 자치운동을 추진하려고 했으나 해외의 독립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비로소 독립운동으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그들은 애초부터 이 일을 계획하면서 설사 독립이 안 된다 하더라도 최소한 ‘자치’나 ‘총독정치의 개선’은 이루어질 것이라고 전망하고 이 일을 추진하였다고 한다. [강만길 외, 『한국사 15』, 한길사, 1994 p.100. / 『3ㆍ1독립운동』 2, p.48(「손병희 고등법원예심조서」), p.228(「권동진 지방법원예심조서」), p.241(「오세창 지방법원예심조서」)]. 
24 강만길 외, 『한국사 15』, 한길사, 1994 pp.97, p.100~101 참고. / 1919년 5월 8일 京城地方法院 「한용운심문조서기록」에 의하면 당시 만해 한용운은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을 하면 일본은 반드시 이를 승인하여 줄 것이라 믿고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의 이 같은 확신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호응한 해외의 독립운동과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 한국민족은 국내외에서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오면서 대대적인 독립운동을 일으킬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노심초사 고대하고 있었다. 이때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제창은 암흑 속에서 헤매던 우리민족에게 갈 길을 제시하여 주는 이정표가 된 것이다.(大韓民國功勳史發刊委員會, 『大韓民國功勳史』1, 1986, p.146.) 
25 강만길 외, 『한국사 15』, 한길사, 1994 p.97 참고. /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역사』, 역사비평사, 1992, pp.295~296 참고.
26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47』, 탐구당문화사, 2000, p.320 참고.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46』, 탐구당문화사, 2000, pp.207~208 참고.
27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이다. 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민족대표 중 한 사람이었지만, 이어 친일 활동을 하였다. (『두산세계대백과사전』, EnCyber, 2003.) 
28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46』, 탐구당문화사, 2000, pp.207~208 참고. / 『두산세계대백과사전』, EnCyber, 2003 참고. / 大韓民國功勳史發刊委員會, 『大韓民國功勳史』1, 1986, p.150 참고.
29 이 부분에 관해 몇몇 사전류와 단행본에서는 ‘폭동이 우려되었기 때문에 갑자기 거사장소를 변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독립운동사연구」8집에 기록된 1919년 8월 21일 고등법원의 「손병희심문조서기록」을 참고하면, 그는 스스로 ‘지금 지방법원의 예심결정서를 보면 우리들이 선언서를 발표하기 때문에 각처에서 폭동이 일어났다고 써 있으나, 나는 이러한 일이 있으리라고는 조금도 예기치 않았다.’ 라고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폭동의 우려 때문에 거사장소를 변경한 것은 아닌 듯하다. 게다가 손병희는 이 날 심문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는 것을 ‘지식정도가 앝은 사람들이 오해해서, 되지 않는 일을 한다고 할까봐서 주의를 하고 있었다’ 고 밝히고 있다. 
30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민족문화대백과사전 11』, 1995, p.379 참고. / 『파스칼세계대백과사전』, 동서문화, 2002. / 『두산세계대백과사전』, EnCyber, 2003 참고. / 역사학연구소, 『바로보는 우리역사』, 서해문집, 2004, pp.307~308 참고. / 韓國宗敎協議會, 『韓國社會와 宗敎』, 1989, p.93 참고.
31 역사학연구소, 『바로보는 우리역사』, 서해문집, 2004, pp.307~308.
32 한국사특강편찬위원회, 『한국사특강』, 서울대학교출판부, 1990, p.238. / 한국사연구회, 『韓國史硏究入門』 2판, 1987. 
33 민족대표들의 애매모호한 투쟁방식에 대해서는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엄격한 비판이 있어왔다. 대표적인 비판으로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姜德相, 「3ㆍ1運動における民族代表と朝鮮人民」, 『思想』537, 東京, 岩波書店, 1969년 3월호./ 康成銀, 「3ㆍ1運動における民族代表の活動に關する一考察」, 『朝鮮學報』130. 
3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46』, 탐구당문화사, 2000, pp.208~209. 
35 이우성, 『韓國의 歷史認識』, 창비, 1976, PP.444~445. 
36 이 부분에 관해서는 아래과 같이 주장하는 이도 있다. 이들은 민중을 생각이 천박한 존재로 불신하여 민중의 주체적 역량에 의거하여 독립을 달성하려는 의식을 결여하였다. 따라서 3월 1일 당일에도 독립선언식 거행장소를 민중들이 운집한 파고다공원에서 일방적으로 명월관 종로분점인 태화관으로 변경하여, 민중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투쟁적인 역량을 결집시켜 운동의 목적을 끝까지 관철시키는 것을 포기하였다. 이러한 자세 때문에 그들은 3ㆍ1운동이 진행되어나가는 과정에서 점차 민중들과 유리될 수 밖에 없었고, 운동을 끝까지 지도하지 못하였다. 민족대표들은 이러한 대외의존적이고 무저항주의적인 이념과 자세 때문에 3월 1일의 독립선언과 시위를 계획하고 운동을 촉발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그 평가에 있어서 많은 비판의 여지를 갖고 있다. (강만길 외, 『한국사 15』, 한길사, 1994, p.10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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