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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논단상제님 생가터의 고증과 종교문화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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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인규 작성일2019.09.20 조회3,33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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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 생가터의 고증과 종교문화적 의의01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종교문제연구소 연구원 박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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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 1871-1909)께서는 한국 신종교의 주요한 종교 지도자로 알려져 있다. 여러 종교 단체에서는 증산 상제님을 신앙대상화하며 그 가르침을 봉행하고 있으며, 학계에서도 그동안 증산의 사상·종교 활동·교리 등에 관한 많은 연구가 이뤄졌다.

  증산께서 1909년 화천하신 후 직계 종도(從徒)들과, 종도는 아니지만 증산으로부터 계시를 받거나 종교적 영감을 얻은 여러 인물이 각각 증산에 대한 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 단체를 조직하였다.02 즉 증산께서 화천하신 이후 다수의 창교주(創敎主)는 증산께서 남기신 새롭고 독창적인 종교적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종교 조직을 구성하고 증산에 대한 신앙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증산의 영향력을 고려할 때 한국종교사, 특히 일제강점기 이후의 전개 및 특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 증산 신앙운동에 대한 고찰이 제외되면 한국종교사에 대한 온전한 이해라고 볼 수 없다.

  학계에서의 증산 신앙운동에 대한 평가의 흐름은 크게 두 가지로 언급할 수 있다. 하나는 한민족의 뿌리를 중심으로 하고 주체적인 이미지를 표방하였다는 점에서 다른 신종교와 더불어 ‘민족종교’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견해와 다른 하나는 한국 민중에 의해 일어난 개혁적·혁신적 종교운동으로서의 ‘민중종교’라고 보는 견해다. 즉 해원상생으로 표방되는 증산의 가르침이 일제강점기 국권을 피탈당한 조선 민중에게 민족적 자긍심과 구원의 희망을 제시한 민족주의적 측면과 민중 해방의 특성을 살펴볼 수 있다는 말이다. 곧 증산께서는 외세의 침략에 따른 민족적 고통의 시대에 상실감과 암울함에 빠진 우리 민족에게 종교적 희망의 논리를 제시하고 더 나아가 창생을 살리고 천하를 구하려는 이상을 품은 선각자라고 볼 수 있다.

  제반의 학술연구를 바탕으로 증산을 민족적 고난과 시대의 아픔을 극복하고 인류 구원의 이상을 펼친 종교가라고 보는 그동안 관심의 외연이 역사학계에까지 넓어지고 있다. 이러한 관심의 확장선상에서 2018년에는 증산의 생애와 사상을 재조명하고 정읍에 있는 그의 생가터 및 주변을 정비하며 역사문화적으로 재조명하고자 하는 취지의 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발표된 연구논문에서 특히 증산 생가터에 대한 정비의 필요성, 의의, 기대효과, 추진 계획에 관한 내용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본 글의 연구 목적은 앞에서 서술한 한국의 주요한 종교 인물이자 사상가인 증산의 생가터 정비와 관련하여 생가터의 정확한 위치를 고증하고 그 종교문화적 의의와 가치를 고찰하려고 하는 것이다. 먼저 2장에서는 증산 생가터의 위치를 고증하여 추론하고자 한다.03 고증할 만한 사진, 유물 등은 확보하지 못하였으며 문헌자료(교단자료, 공문서)와 생가터 인근 지역 주민의 인터뷰를 통해 후보지를 선정하고 이 가운데 가장 유력한 지역을 추정하고자 한다.04 3장에서는 이러한 생가터가 지닐 수 있는 종교문화적 의의를 살피고 그 가치를 규명하여 생가터의 정비와 활용에 대한 필요성을 제기할 것이다.  

  

   

Ⅱ. 생가터 위치 고증

1. 증산 생가터 후보지

  증산 생가터의 명확하고 실증적인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먼저 증산 종단의 경전, 종교연구 서적, 일제 공문서에 기재된 증산 탄강지에 대한 기록을 통해 후보지를 선정하고 이를 차례대로 고찰·검증해 보고자 한다.

 

1) 신월리 504번지 

  신월리 504번지에는 현재 ‘강증산 상제 강세지(姜甑山 上帝 降世地)’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이 지번에는 강세지를 표명하는 현판이 걸려있어 대개 이곳이 증산의 생가터인 걸로 알려져 있다. 현재 504번지는 바로 옆 지번인 412-1번지와 합쳐져 신송길 32로 되었으며 한 집에 속한다. 2012년 당시 412-1번지에는 유정자가 살고 있었는데, 유 씨는 바로 증산의 양자인 강석환05의 부인이다. 유 씨의 증언에 따르면 진영을 봉안하기 전 504번지 가옥에는 강석환의 당숙인 강천식이 살았다고 한다. 이곳에 강석환이 증산의 진영을 모시고 ‘강증산 상제 강세지’라는 현판을 걸었다고 한다.06 강석환이 이곳에 증산의 진영을 봉안하고 현판을 걸어 강세지라고 알리게 된 근거는 무엇인가? 그러나 특이하게도 그가 1978년 작성한 「무오동지 치성심고문(戊午冬至 致誠心告文)」이라는 글을 살펴보면 강석환은 이곳 504번지가 증산의 탄강지가 아님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다른 지번을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신월리 435-1번지

  강석환은 1978년 무오년 동지에 치성을 올리면서 심고문을 작성하였는데, 그 심고문에서 증산의 탄생지를 435-1번지라고 기록하였다. 아래는 해당 심고문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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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帝님이 九天에서 人世로 地上에 降臨하사 저의 姜氏 門中에 誕降하심이 姜門의 榮光이옵니다. 小子 不敏하와 歸天하신지 於焉 七十年이 되도록 이러타 할 孝行을 받들지 못하옵든 次 上帝님 誕生地인 現 井邑郡 德川面 新月里 435의1 所在 聖地를 이제까지 他人이 領有하여 오든바 今日 冬至日 后에 小子의 名儀로 確保하기로 하고 힘자라는 대로 아버님 誕降地를 聖地化할 計劃이오니 아울러 心告하나이다.07

 

 

  인용문에서 보듯, 강석환은 증산의 탄생지를 신월리 435-1번지로 특정하면서 그곳을 타인이 영유한 사정을 언급하였다. 즉 강석환은 435-1번지가 증산의 탄생지임을 알고 있었으나 사정상 그곳을 확보할 수 없어 골목 맞은편 당숙의 집인 504번지에 증산의 진영을 봉안하고 ‘강세지’라는 현판을 세웠던 것이다. 강석환의 발언 외 토지대장을 살펴보더라도 504번지는 증산의 생가터로 보기가 어렵다.

 

 

3) 신월리 436번지

  신월리 436번지는 위 「무오동지 치성심고문」에서 언급된 신월리 435-1번지와 바로 옆 지번이다. 이 지번은 2013년 7월 15일 당시 마을주민 전대식의 집터에 소속된 곳이다. 전대식의 가옥은 437번지에 있으며 435-1번지와 436번지는 가옥의 마당에 해당한다. 435-1번지에는 창고 및 비닐하우스가 있고 마당 일부가 포함되어 있으며, 436번지는 집의 텃밭으로 사용하고 있다. 전대식과의 두 차례 인터뷰에서 증산 생가터에 관련된 중요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문: 현 집이 예전에 증산 선생님의 생가였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까?

전대식: 상제님이 태어나신 곳인지는 잘 모르겠고 상제님 가족이 살았다고 선친(전태식, 1906년생)께 들었다. 강석환씨가 계속 이 집을 팔라 했었다. 정확한 위치는 436번지이다. 내가 이곳에 왔을 때는 대략 27평 정도의 밭으로 되어 있었다. 현 집은 437, 436, 435-1 등 세 번지가 합쳐져 있다. 집 밖으로 길에 6평 정도가 나와 있다. 그 6평인 땅은 유치순 씨의 명의로 되어 있다.

 

문: 옛날의 집 구조와 면적은 어떻게 됩니까? 혹시 사진이 있습니까?

전대식: 사진은 없다. 437번지가 원래 우리 집이었고, 435-1번지에 집 한 채가 있었고, 436번지에는 27평의 밭이 있었는데 세 번지를 사서 합쳤다. 436번지 앞으로 우물이 있었다. 27평인 436번지의 작은 초가집에서 상제님 가족이 살았었는데, 기어 나왔다가 기어 들어가야 할 정도로 집이 작았다고 들었다.08

 

문: 증산 선생님의 가족이 사셨다는 곳이 436번지가 맞나요?

전대식: 대문 밖에서 집을 바라보는 방향에서 왼쪽이 상제님께서 사셨던 곳이다. 당시에는 27평 정도였다. 강석환 씨가 27평 되는 이곳을 팔라고 찾아 온 적이 있었다. 이 집 앞으로 원래 길이 좁게 있었는데, 박대통령 때 새마을운동하면서 길이 넓게 만들어졌다. 그러면서 6평 정도가 길에 편입되었다.

 

문: 1차 인터뷰 때 집 구조 설명을 듣고 그렸는데 확인 부탁드립니다.

전대식: 우리 집이 이 지도처럼 반듯하지 않고 나와 있었다. 길은 지도와 같으며 우물은 옛날부터 있던 곳이다. 대문은 세 집에 각각 있었으며, 우리 가족이 살던 집(437번지)이 끝집이었다. 길난 그대로 또랑이 있었고 대문은 길 끝에 있었으며, 대문 옆에 잿간이 있었다. 그 당시 강석환 씨가 텃값을 좀 줬었어도 이 땅을 줬을 것이다. 그런데 조금 주고 팔라하니 부친께서 팔지 않았다. 그래서 강석환 씨가 이곳에 비석을 세우려고 했는데 못 세운 것이다.09

 

문: 강석환 씨가 비석을 세우고 싶다고 한 곳이 435-1번지인가요? 436번지인가요?

전대식: 436번지다. 강석환 씨가 부친을 찾아와서 대화하는 것을 보고 들어서 안다. 섭섭지 않게 좀 돈을 챙겨 준다고 했으면 비석이라도 세울 수 있게 하셨을 텐데, 강석환 씨가 그렇게는 안 하면서 해달라고 하니 부친께서 반대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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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내용에서, 전대식은 1906년생인 부친 전태식으로부터 증산의 생가터가 436번지라는 내용을 들었다고 했으며 436번지가 증산의 생가터라고 주장했다. 또 생가의 모습에 대해서는 작은 초가집으로 기어서 드나들어야 할 정도로 작고 허름한 집이었다고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전대식은 강석환이 자신의 부친 전태식으로부터 436번지의 땅을 사려고 했으며 그곳에 비석(증산의 생가터임을 알리는)을 세우고자 했다고 한다. 또 부친 전태식이 강석환에게 토지를 팔지 않은 것은 가격 문제가 주요 원인이었음을 말했다.

  위와 같은 전대식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여러 곳 중 436번지가 증산 생가터로 가장 유력한 후보지가 아닐까 한다. 전대식의 부친 전태식이 1906년생으로 증산의 부친 강문회의 생전 인물인 점, 증산의 양자인 강석환이 436번지를 구매하려고 하였고 비석을 세우고자 하였던 점, 그리고 다른 이들의 증언과 경전 기록 등을 통해 436번지가 가장 가능성이 크다.

 

 

4) 신월리 433번지11

  433번지를 증산의 생가지라고 지칭하는 증산 종단의 경전 및 종교연구 서적은 없으나, 1914년 일제가 작성한 토지대장에 이 지번의 소유주가 증산의 부친인 강문회(姜文會)로 기록되어 있다. 마을인 신월리 전체 지번 중 유일하게 강문회가 소유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토지대장을 살펴보면, 1914년 10월 10일 강문회(姜文會) → 1918년 10월 18일 권양덕(權良德)12 → 1918년 10월 18일 김성연(金成淵) → 1953년 장영주(張榮柱)(이하 생략) 등으로 되어 있다. 433번지의 소유주가 강문회로 되어 있는 것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겠다. 첫째, 증산의 부친이 이곳에 계속 살았으며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하면서 소유주로 등기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곳이 증산의 생가터라면 증산이 탄생한 1871년 이전부터 강문회가 이곳에 살았으며 1914년 등기하였다는 말이다. 둘째, 강문회가 다른 곳에 살다가(예를 들어 436번지) 이곳으로 옮겨 왔으며 1914년 등기하였을 가능성이다.

  경전 기록에 의하면 “본댁의 살림살이와 약간의 전답을 팔아 그 돈으로 전주부중에 가셔서 지나가는 걸인에게 나누어 주시니라”(교운 1장 5절)고 하여 증산께서 1904년 음력 7월경 본댁의 살림살이와 약간의 전답을 판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본댁은 곧 증산 부친의 집을 말한다.13 증산께서 천지공사를 위해 본댁의 살림살이를 팔아 이후 본댁의 가세는 크게 기울게 되었다. 다른 기록에서는 “어느 종도가 상제의 본댁이 너무 협착함을 송구히 생각하여 좀 나은 집을 사드렸도다.”(교운 1장 43절)라고 하여 종도가 본댁의 곤궁함을 알고 증산의 부친을 위해 집을 사준 것으로 되어 있다. 종도가 집을 사준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강문회 명의로 등기된 433번지가 종도가 사준 집일 가능성이 크다. 등기의 변천 과정을 추정해보면, 강문회는 1916년 서거하였으며 상속 과정에서 1918년 부인인 권양덕에게 이전되었다고 추정되며 같은 날 권양덕은 김성연(金成淵)에게 다시 이전 등기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관련 문헌에 따르면 토지대장의 김성연은 증산의 종도로 추정된다. 이 추측대로라면 종도 김성연이 강문회에게 집을 사주고 강문회 서거 후 돌려받은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정리하자면, 증산의 종도가 본댁이 협소하여 집을 사주었다는 기록, 토지대장에서 김성연이 증산의 종도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433번지는 증산의 생가터라 보기 어려우며 나중에 강문회가 이사하여 살았던 곳이라 짐작된다. 또 어떤 기록과 증언에서도 이곳이 증산의 생가터라 언급되고 있지 않다.

 

 

2. 증산 생가터 추정지  

  이상 살펴본 504번지, 435-1번지, 436번지, 433번지 가운데 필자는 436번지가 증산의 생가터로 가장 유력하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전대식 외 다른 이의 증언과 기타 경전의 기록이다. 먼저, 증언으로는 전대식 외에 강석환의 부인인 유정자가 436번지를 증산의 생가터라고 하였다. 1928년생인 유정자는 1944년에 당시 25세였던 강석환과 결혼하였고 강석환의 부친인 강영탁의 집(438-1번지)에서 살림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러다 그 집이 좁고 412-1번지에 빈터가 있어 이 번지에 집을 짓고 살게 되었다고 하였다.14 436번지를 증산의 생가터라고 말하는 유 씨의 증언을 인용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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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편에게서 우물이 옹달샘이었는데, 그 옆에 오두막같이 작았다고 들었다. 그런데 새마을 사업한다고 거기가 길로 들어갔는지 어떤지는 모른다.…그저 가난하게 사셨다는 것밖에는 잘 모른다.15

 

 

  우물 위로 오두막집이 있었는데, 거기가 강세지라고 들었다. 새마을 운동할 때 길을 넓혔는데 그곳에 집이 있었다고 한다.…전대식 씨 집이 지금 새로 지으면서 넓혀서 그렇지, 봉춘댁이 사는 초가집하고 사서 합친 것이다. 전대식 씨 집인지는 모르겠고 우물 위로 상제님 강세하신 곳이 있었다고만 들었다. 여기서 말하는 우물은 지금 있는 우물이다.16

 

 

  위 증언을 종합해보면, 유 씨는 현재 위치한 우물 옆에 작은 오두막집이 있었다고 전해 들었고 그곳에서 증산이 탄강하였다고 말하였다. 436번지가 1979년에서야 전대식의 소유가 된 점을 감안할 때, 유 씨의 발언에서 과거 당시 전대식의 소유가 아니며 우물 옆에 해당하는 곳은 436번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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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6번지가 원래 도로쪽으로 6평 더 넓었다는 전대식의 발언 그리고 강석환의 부인 유정자의 발언을 종합해보자. 그러면 현 우물이 도로에 수용되기 전 본래 436번지의 마당과 인접하므로 두 사람의 증언과 이 경전 기록이 합치된다. 또 증산의 생가가 매우 협소하였다는 증언과 기록을 통해서 볼 때 435-1번지의 대지보다 면적이 훨씬 적은 436번지가 생가터일 가능성이 크다. 일제가 1915년에 작성한 지적원도에서도 마을에서 대지로 표시된 지번 중 436번지가 제일 면적이 작고 또 436번지 바로 앞에 마을의 우물(井)이 위치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436번지의 토지대장에 증산의 부모 또는 증산의 성함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등기 기록이 시작된 1914년 당시 앞서 밝힌 433번지를 증산의 부친인 강문회가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즉 1914년에는 강문회가 살았던 곳(본댁)은 436번지가 아니라 433번지였다. 이러한 제반 정보를 종합할 때 결론적으로 436번지가 증산의 생가터로 가장 유력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강석환이 왜 「무오동지 치성심고문」에 증산의 탄생지를 435-1번지라고 기록하였느냐 하는 것이 의문이 간다. 이는 그의 부인인 유정자가 우물 옆 작은 집이라 한 발언과 전대식도 그가 436번지를 구매하려고 하였다고 증언한 내용과 앞뒤가 맞지 않는다. 435-1번지가 우물과 다소 거리가 있지만 우물 위쪽에 있는 점, 강석환의 기록 등을 고려해 볼 때 증산 생가터로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러 내용을 종합할 때 436번지가 가장 유력하다고 판단한다.

 

 

Ⅲ. 생가터의 종교문화적 의의

  세계의 많은 저명한 관광지, 유적지 등이 종교문화와 관련이 있음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특히 현재에도 살아 숨 쉬며 수많은 신앙인을 거느리고 있는 종교의 유적지는 성소로서 인식되고 기념되며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강력한 중심 공간으로 기능한다.17 일례로 예수 탄생지로 알려진 베들레헴(Bethlehem)은 예루살렘 남쪽의 작은 도시이지만 수많은 신앙인이 방문하는 성지 순례지이다. 특히 예수가 탄생한 장소로 전해지는 동굴 위에 세워진 ‘예수탄생 기념성당(Church of Nativity)’은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영향력을 끼쳐온 기독교 성당 중 한 곳이다. 이곳은 신자들에게 있어 지극한 성소(聖所)이자 거룩한 순례지로 여겨지고 있으며 201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우리나라도 불교, 천주교, 개신교 등의 기성종교는 해당 종교 전통 내의 주요한 인물들의 탄생지, 수행지, 종교적 깨달음을 얻은 장소 등 의미 있는 장소를 성역화하거나 문화콘텐츠로 개발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신종교의 경우 상대적으로 문화콘텐츠화 할 수 있는 종교 문화의 원형적 요소의 발굴과 활용이 아직은 미흡한 실정이다. 특히 증산계 신종교의 교조인 증산의 생가터에 대해서는 정비·성역화·문화콘텐츠화 등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증산계 신종교는 국외에서 수입된 종교가 아닌 이 땅의 한국인인 증산에 의해 창시된 자생종교이자 민족의 고유성과 주체성을 역설한 민족종교, 민중의 아픔을 치유하고자 하였던 민중종교로서 그 가치가 인정되고 있는 현실에서 그의 생가터에 대한 정비·복원은 중요한 과제라 할 수 있다. 증산과 관련된 종교문화는 정읍의 주요한 문화유산이며 더 나아가 전라북도 및 국가적 차원에서의 가치 있는 문화콘텐츠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증산 생가터를 정비·복원할 때 향후 어떠한 가치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까? 첫째, 신앙인들에게 증산 생가터는 주요한 성지 순례지로 기능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증산의 활동지인 정읍은 수많은 신앙인이 찾고 방문해오고 있는 순례지이자 성지이다. 보천교를 세운 차경석이 교단의 본부를 정읍군 입암면 대흥리로 하면서 일제강점기 정읍은 수백만 신도를 거느린 대교단의 중심지였다. 보천교 다음으로 교세가 컸던 무극도(无極道)도 1925년에 정읍군 태인면 태성리에 도장을 준공하며 종교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36년 편찬된 『정읍군지』에는 정읍의 명승지 중 하나로 무극도 도장의 사진을 게재하며 “동면 태흥리 1등 도로변에 2-3층의 화려한 누각이 공중에 우뚝 솟아있으니, 이것이 즉 무극도 본사이다. 그 웅장함은 보천교 본부와 조금 차이가 있으나 구조의 정교함은 그에 별로 손색이 없다. … 건물의 명칭은 중앙의 3층은 도솔궁, 2층은 영대라 하고 부속건물 수십 동이 있으니 그 장치의 찬란함이야말로 참으로 장관이다. 역시 원근 각지의 관람객이 끊이지 않는다.”18라고 소개하였다. 이렇듯 정읍에는 보천교와 후속주자인 무극도가 교세를 확장하고 있었는데, 당시 신문은 이를 비꼬아 보천교의 교주 차경석을 차천자로 무극도의 교주 조철제는 조천자라 부르면서 “一郡에 所謂 天子가 둘이나 잇는 곳은 아마 朝鮮에도 井邑이엇슬 것이다.”19라 하기도 하였다. 위의 기록 등에서 일제강점기 정읍은 증산 신앙운동의 산실, 구심점, 성지, 순례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유사종교로 핍박받고 해산되었던 증산 종단은 해방 이후 다시 일어났다. 여러 증산 종단의 신도들은 포교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정읍 및 인근 성지를 순례하여왔다. 특히 근래에는 증산 종단 가운데 가장 큰 교세를 지닌 대순진리회 수도인들의 종교 활동과 순례지 방문이 활발하다. 수도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의 대상인 증산의 생가가 위치한 덕천면 신월리, 증산께서 공부하셨다는 마을 뒤편의 시루봉, 증산이 방문하였던 여러 직계 종도들의 집터 등을 순례하며 증산의 가르침을 되새긴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할 때, 정확한 증산의 생가터를 고증하고 이를 정비함으로써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종교문화유산으로 변모시킬 필요가 있다.

  둘째, 생가터를 중심으로 한 증산의 성적지(聖蹟地)를 기존 정읍지역의 여타 종교문화콘텐츠와 융합함으로써 보다 보편적인 문화콘텐츠를 양산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정읍은 고부 동학농민운동의 중심 지역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매년 ‘황토현 동학농민혁명 기념제’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최근 동학농민혁명을 기리는 국가기념일이 제정되었는데, 황토현 전승일인 5월 11일로 확정되었다는 점에서 정읍은 동학의 중요한 상징성을 더욱 확보하게 되었다. 이처럼 동학이라는 상징을 가진 정읍에 증산 신앙의 모태이자 중심지라는 특성을 결합함으로써 정읍 지역의 문화콘텐츠를 향상 발전시킬 수 있다. 동학이 단지 정읍지역에 국한된 동학이 아니라 우리 민중을 크게 울렸던 동학이듯, 증산에 대한 신앙운동이 정읍에서 싹을 틔웠지만, 그 신앙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는 점에서 일반 대중을 위한 문화콘텐츠로 개발한다면 지역성과 특수성을 넘어 그 보편성을 널리 향유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본다.

  즉 생가터를 중심으로 한 증산의 성적지는 종교적 신성성과 아울러 정읍의 향토문화유산 더 나아가 근대문화유산이나 문화재로 성장시킬 수 있는 문화적 보편성을 함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향후 증산 생가터에 대한 정비와 성역화가 속히 이루어져 한국종교문화의 주요한 성적지로 발전하기를 기대해본다.

 

 

 

 

 

01 본 글은 서울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에서 간행하는 학술지 『종교와 문화』 제36호(129-161쪽)에 게재된 논문 「증산 강일순의 생가터 고증과 종교문화적 의의」를 축약하여 편집한 것이다. 《대순회보》에 맞추어 수정하였다.

02 무라야마 지쥰(村山智順)의 『朝鮮の類似宗敎』에서는 총 11개 단체가 훔치계(증산계) 단체로, 1970년 간행된 『한국 신흥 및 유사종교 실태조사보고서』에는 10개 단체가, 1971년 발행된 『증산종단개론』에는 33개 교단이 1985년 『한국 신종교 실태조사보고서』에는 전체 신종교 155개 단체 중 가장 많은 단체인 총 47개 단체가 증산계 신종교로 조사되었다.

03 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 교무부 연구원 신상미는 증산 생가터에 대한 글을 발표한 바 있다.(신상미, 「상제님 강세지」, 《대순회보》150 (여주: 대순진리회 출판부, 2013), pp.32-45.) 이 글에서는 435-1번지와 436번지 두 곳을 생가지로 추정하였다. 본 연구는 문헌 자료와 인터뷰 자료를 보강하여 이 글에서의 몇 가지 오류를 수정하고 생가터 추정지를 규명하고자 하며 학술연구로서 종교문화적 의의를 밝히고자 한다.

04 인근 지역 주민의 인터뷰 녹취 자료는 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 교무부에서 다년간 수집한 자료이며 필자에게 제공해 주었다. 자료를 제공해 준 교무부 관계자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본 논문의 인터뷰 내용은 이 녹취 자료를 기록한 것이다.

05 증산은 슬하에 독녀인 강순임(姜舜任, 현 증산법종교의 창시자)만을 두었다. 강석환(1920-1993)이 증산의 대를 이었는데, 그가 증산의 양자가 된 것은 증산의 언설과 관련된다. 증산은 재종숙되는 강성회(姜聖會, 강석환의 조부)의 집에 가서 강영탁(姜永鐸, 강석환의 부)에게 “장차 나를 대신하여 가사를 돌보라. 고목에 꽃이 피리라”고 하였었다. 증산의 이러한 언설로 강영탁은 그 아들인 강석환으로 하여금 증산의 가계를 잇게 한 것으로 보인다. 이외 증산은 또 친히 쓴 병풍을 강성회에게 주었고 강석환의 종형인 강계형이 이를 간수하다가 1920년에 태어나 증산을 후계한 강석환에게 전달되었다. 강석환이 병풍 속을 뜯어보니 “吾家養白鶴, 飛去月蘆夜”란 글귀가 쓰여 있었다고 전한다. 『전경』, 예시 55절ㆍ64절 참고.

06 유정자(1928생) 인터뷰 2012년 5월 29일.

07 강석환, 「무오동지 치성심고문」, 1978, pp.17-18.

08 전대식 인터뷰 2012년 12월 27일.

09 전대식 인터뷰 2013년 7월 15일.

10 전대식 인터뷰 2013년 8월 17일.

11 이 지번에 대한 자료를 대순종교문화연구소 박상규 소장으로부터 제공받았다. 지면을 빌어 감사의 뜻을 전한다.

12 권양덕은 증산의 모친이다.

13 『전경』, 행록 5장 36절, “…부친이 고부 객망리 본댁으로부터 동곡에 오시고…”

14 유정자 인터뷰 2012년 5월 10일.

15 유정자 인터뷰 2012년 5월 29일.

16 유정자 인터뷰 2013년 8월 17일.

17 Mircea Eliade, Patterns in Comparative Religion, translated by Rosemary Sheed (New York: New American Library, 1963), pp.382-384.

18 張奉善, 『井邑郡誌』 (全北: 履露閣, 1936), pp.20-21.

19  『無極道의正體』, 《동아일보》, 1928년 8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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