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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생의 길종단 대순진리회의 변천 과정과 무극 태극의 관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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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차선근 작성일2018.04.16 조회3,94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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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무극과 태극의 관계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무극도에서 태극도가 나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중 몇몇은 무극에서 태극이 나왔기에 무극도에서 태극도가 나온 것이라는 주장을 편다. 그러나 ‘무극에서 태극이 나온 것’이라는 철학적 논변(論辯)이 ‘무극도에서 태극도가 나온 것’이라는 종단 문제로 연결된다는 설정 자체에 이미 무리가 있다. 또 무극도에서 태극도가 나온 것도 아니다. 게다가 대순진리회에서는 무극에서 태극이 나왔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전자의 이야기는 이미 마쳤으므로, 이제 후자인 무극과 태극의 관계에 대해 좀 더 살펴보도록 한다.

 

  (1) 대순진리회에서의 무극과 태극

 

  유학자들은 무극에서 태극이 나온 것인지 아니면 무극과 태극이 같은지 하는 문제를 결론내지 못한 채 거의 800년 이상 계속 논쟁해 왔다.

   ① 원래 무극(無極)은 우주의 가장 근원적이며 형체도 모양도 없는 본체로서 우주 본질의 무형(無形)한 측면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이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노자(老子)로서 『도덕경(道德經)』에 그 용어가 보인다. 

     

  知其白 守其黑 爲天下式 爲天下式 常德不 復歸於無極(그 밝은 것을 알고 그 어두움을 지키면 천하의 모범이 되고, 천하의 모범이 되면 상덕(上德)에서 어긋나지 않고 무극(無極)에 복귀한다).29

      

  여기에서 무극은 ‘만물이 근본적으로 돌아가야 할 근원적인 도’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이후 이 말은 도가(道家)에서 우주의 본원(本源)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인식되었다.

  또 태극(太極)이란 우주 만물이 생성·전개되는 시원(始原)·근원으로서 천지가 아직 나누어지기 전 태초의 본원이자 동시에 우주 만물이 생성되고 순환하는 원리라는 뜻까지도 모두 포함하는 철학적 개념이다. 태극은 송나라 때 주렴계(周濂溪, 1017~1073)가 저술한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 우주의 궁극적 존재 근원으로 언명되면서부터 거의 천 년간 유학에서 중요한 철학 개념으로 자리 잡아 왔다.30 이 말은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易有太極 是生兩儀 兩儀生四象 四象生八卦 八卦定吉凶 吉凶生大業(역에는 태극이 있다. 태극은 양의를 낳고 양의는 사상을 낳고 사상은 팔괘를 낳고, 팔괘는 길흉을 정하니, 길흉은 대업(인간 만사에 존재하는 길흉을 다스리기 위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큰 법)을 낳는다).31

      

   『주역』이 원래 유가(儒家)만의 전유물은 아니었지만 공자를 비롯한 유학자들에 의해 그 내용이 크게 증설되고 사서삼경에도 포함되었기 때문에 유가의 고유한 서적이라는 이미지를 대내외적으로 주게 되었다. 도가(道家)의 『장자』에도 ‘태극’이라는 단어가 보이기는 하지만 이때는 만물의 근원을 나타내는 철학 개념이 아니라 공간적으로 가장 끝이라는 뜻에 지나지 않았고,32 그 외에도 부분적으로 도가에서 태극 개념을 끌어다 쓴 적이 있기는 했지만 전통적으로 태극이라는 용어는 유가적 분위기가 더 강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유가(儒家)의 용어로 받아들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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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② 무극과 태극은 각각 도가(道家)와 유가(儒家)의 용어이면서 동시에 우주의 근본을 뜻하는 개념으로 이해되어 왔다. 대순진리회에서는 도가(道家)의 무극이나 유가(儒家)의 태극을 서로 같은 개념으로 설정한다. 그것은 여주본부도장의 포정문(布正門) 옆에 새겨진 대순진리회의 창설 유래에서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

 

  대순(大巡)이 원(圓)이며 원(圓)이 무극(無極)이고 무극(無極)이 태극(太極)이라. 우주(宇宙)가 우주(宇宙)된 본연법칙(本然法則)은 그 신비(神秘)의 묘(妙)함이 태극(太極)에 재(在)한 바 태극(太極)은 외차무극(外此無極: 이[此] 바깥으로는[外] 극진함[極]이 없음[無])하고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진리(眞理)인 것이다. 따라서 이 태극(太極)이야말로 지리(至理)의 소이재(所以載: 실려 있는 곳)요, 지기(至氣)의 소유행(所由行: 운행시킬 수 있는 곳)이며 지도(至道)의 소자출(所自出: 나오는 바)이라.

… (중략) …

오직 우리들 가르침을 받드는 신도(信徒)와 인연(因緣)을 받고저 하는 중생(衆生)은 마땅히 수문수득(隨聞隨得: 따라가 듣고 본받음)하여 체념봉행(體念奉行: 직접 생각하고 받들어 행함)으로 각진기심(各盡其心: 각기 그 마음을 다함)하며 각복기력(各服其力: 각기 그 힘을 씀)하여 대덕(大德)을 계승(繼承)하고 대도(大道)를 빛나게 하여 대업(大業)을 넓힘으로써 대순(大巡)하신 유지(遺志)를 숭신(崇信)하여 귀의(歸依)할 바를 삼고저 함이 바로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를 창설(創設)한 유래(由來)인 것이다.33

      

   이 글은 도주님께서 내려주신 「취지서(趣旨書)」에 바탕하고 있다. 「취지서」가 처음 간행된 곳은 1956년에 발행된 『태극도통감(太極道通鑑)』이다. 이 문헌의 발행인은 ‘도인 대표 박경호(朴景浩)’이다. 도전님은 죽산(竹山) 박씨(朴氏)34이요, 존휘는 한경(漢慶), 존호는 우당(牛堂)이신데, 원명(原名)이 경호(景浩)이셨다. 즉 『태극도통감(太極道通鑑)』을 발행하신 분은 바로 도전님이셨던 것이다. 도전님께서 도주님으로부터 도전(都典) 직책을 부여받고 종통을 계승하신 때가 1958년인데, 1956년에 이미 도인들을 대표하고 계셨음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어쨌든 1956년에 발행된 『태극도통감』은 도전님께서 도주님의 뜻을 받들어 간행하신 것이 분명하므로 연구 자료로 삼기에 손색이 없다.

   여기에 실린 「취지서」와 포정문의 글을 비교해보면, 「취지서」는 한문이고 포정문의 글은 한글로 풀어쓴 점이 차이가 있을 뿐 그 내용은 동일하다. 다만 첫 구절 ‘대순(大巡)이 원(圓)이며 원(圓)이 무극(無極)이고 무극(無極)이 태극(太極)이라’는 부분이 추가되어 있고, 마지막 구절 ‘태극도를 창설한 유래’가 ‘대순진리회를 창설한 유래’로 바뀌어 있다는 점만 다르다. 바뀐 부분은 모두 도전님께서 해 놓으신 것으로서, 이에 따르면 ‘대순=원=무극=태극’의 관계가 틀림없다.

  ③ 또 도전님께서는 훈시(訓示)를 통해서도 무극과 태극이 서로 같은 것임을 밝혀주셨다. 

      

  모든 것이 진리 안에 다 들어 있다. 대순(大巡)이라 함은 막힘이 없다는 것이다. 대순이 무극이요, 무극이 대순이요, 무극이 태극이요, 태극이 무극이다. 태극이 무극에서 나왔다는 것이 아니다. 전 우주의 모든 천지일월이라든지 삼라만상의 진리가 대순, 태극의 진리다. 상제님 말씀을 가지고 정성하고 또 정성하면 삼라만상을 곡진이해하고 무소불능이 된다.(1991년 1월 3일)

      

  우리 종단의 명칭은 ‘大巡眞理會’이다. 대순은 동그라미다. 원(圓)이고 막힘이 없다. 진(眞)은 진리(眞理)의 진이다. 대순은 큰 大, 돌 巡 해서 크게 돈다는 것이다. 각(角)은 가다가 보면 꺾이고 막히는 데가 있다. 원은 걸리는 데도 막히는 데도 없다. 이것을 대순이라 한다. 원이 무극이다. 무극은 끝이 없다. 극이 없다. 태극은 무극이란 말과 동일하다. 태극의 太는 클 태이다. 대순은 아주 무궁무진하고 한이 없고 헤아릴 수 없는 무량한 것이다. 대순진리회는 크게 도는 참된 진리이다. 이것이 해원상생의 원리다.(1991년 9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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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6년에 발행된『태극도통감』. 좌측은 표지이고, 중간은「취지서」이며 우측은『태극도통감』의 끝부분이다.

 

   따라서 유학에서는 무극과 태극이 같다 다르다 하는 논쟁이 벌어져도 대순진리회 안에서는 무극과 태극은 서로 같은 것이기 때문에 별다른 논쟁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도 그랬듯이 우리 주변에는 의외로 무극에서 태극이 나온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이 문제에 대한 대순진리회의 입장이 분명하건만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추가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무극 태극 논쟁이 벌어진 발단과 그 전개 과정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2) 진박과 주렴계

 

   도가(道家) 『도덕경』의 무극과 유가(儒家) 『주역』의 태극을 서로 연결시켜 무극 태극 논쟁의 최초 씨앗을 심은 인물은 당말(唐末) 송초(宋初)의 진박(陳搏, ?∼989?)35이다.36 진박은

      

  無極者 太極未判之時 一點太虛靈氣 所謂 視之不見 聽之不聞也(무극은 태극이 아직 나타나기 이전 한 점의 텅 비고 신령스러운 기운으로서 이른 바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그것이다).37

      

라고 하여 무극을 태극보다 앞서는 개념으로 설정하였다. 그가 비록 유가의 사상을 잘 알았고 유불도(儒彿道)를 통합하려 했다고 하지만 본래 신선(神仙)의 조사(祖師)로 불리며 평생을 화산(華山)38에서 수도에 몰입한 도가의 사람이었다. 도가 사람인 진박으로서는 유가에서 말하는 우주의 근원 태극보다 도가에서 말하는 우주의 근원 무극이 먼저라고 언급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진박의 이론은 후대 주렴계에게도 영향을 주었다.39 주렴계는 도가와 불가(佛家) 사상의 영향을 받았으며 ‘신유학(新儒學)의 선구자’로 불리는 인물이다. 주렴계는 유명한 그의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 이렇게 말했다. 

      

  無極而太極, 太極動而生陽, 動極而靜, 靜而生陰, 靜極復動. 一動一靜, 互爲其根, 分陰分陽, 兩儀立焉, 陽變陰合, 而生水火木金土, 五氣順布, 四時行焉, 五行一陰陽也, 陰陽一太極也, 太極 本無極也(무극이면서 태극이니, 태극이 움직여서 양(陽)을 생성하고, 움직이는 것(動)이 지극해서 고요(靜)하며, 고요함이 음(陰)을 낳고, 고요함이 지극하면 다시 움직인다. 한번 움직이고 한번 고요한 것이 서로 그 뿌리가 되고, 음으로 나뉘고 양으로 나뉘어 두 가지 모양이 서게 된다. 양이 변해 음을 합하여 수화목금토(水火木金土)가 생성되며, 이 다섯 가지의 기운이 골고루 펼쳐져 사계절(四時)이 행해진다. 오행(五行)은 하나의 음양이요, 음양은 하나의 태극이니, 태극은 본래 무극이다).

      

   주렴계 역시 진박과 마찬가지로 무극과 태극을 서로 연결하였지만, 진박처럼 무극에서 태극이 나온 것이라 하지 않고 무극과 태극은 서로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에 대한 더 상세한 설명은 적어놓지 않아서 후대 학자들에 의해 논쟁이 벌어질 여지를 남겼다.

      

  (3) 주자와 육상산

 

   무극 태극 논쟁을 촉발시킨 장본인은 주자(朱子, 1130~1200)와 육상산(陸象山, 1139~1192)이다.40 1187년 겨울, 육상산(당시 49세)은 무극 태극에 대해 토론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주자(당시 58세)에게 서신으로 알렸다. 그러나 주자는 그 다음해인 1188년 2월 무극과 태극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정립한 『태극해의(太極解義)』와 『서명해의(西銘解義)』를 내면서, 자신이 20년 동안 연구한 내용이므로 무극 태극에 대해서는 더 이상 토론할 여지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럼에도 2개월 뒤에 육상산은 주자에게 무극 태극을 논하는 첫 번째 편지를 보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주자는 이 편지를 6월 하순에야 받아볼 수 있었는데, 토론의 여지가 없음을 천명했던 그는 고민 끝에 11월에야 답신을 보냈다. 이후 다음해 8월까지 서로간에 몇 통의 편지가 더 오고갔지만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한 채 이 논쟁은 그냥 끝나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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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 18개월에 걸친 서신 왕래를 종합해보면 논쟁이 되었던 부분은, 첫째 과연 주렴계가 『태극도설』을 지은 것이 맞는가, 둘째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에서 무극이라는 말이 필요한 것인가, 셋째 무극, 태극에서 극(極)은 중(中)의 의미인가 아니면 지극(至極)의 의미인가, 넷째 무극에서 태극이 나왔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이 논쟁 전체를 다루려면 내용이 복잡하므로 이 글에서는 넷째 문제만 살펴보도록 하겠다.

   육상산은 주렴계가 도가 사상을 익혔고 또한 무극이라는 말은 원래 도가의 용어일 뿐 유가에는 없는 용어라는 점을 들면서,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 무극은 태극이다)’을 ‘자무극이위태극(自無極而爲太極: 무극으로부터 태극이 나왔다)’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주자는 도가 철학에서는 유(有)와 무(無)를 둘로 나누어 보지만 주렴계는 하나로 보고 있기 때문에 태극과 무극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며,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의 무극은 ‘무궁(無窮)’의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반박하였다. 즉 ‘무극이태극’을 ‘무궁무진한 태극’으로 해석하여 ‘무극’은 ‘무궁무진’이라는 뜻으로서 태극을 수식하는 하나의 형용사 차원으로만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가와 도가의 사상을 익혔지만 철저하게 이 사상들을 배격했던 주자로서는 무극에서 태극이 나왔다는 것을 인정해버리면 우주의 근본에 대해서 도가가 유가보다 더 본질적인 차원의 개념을 설정했다는 것을 허용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이는 유학자로서 허락할 수 없는 문제였다. 주자가 도가 철학 개념인 무극과 유가 철학 개념인 태극은 서로 관계가 없으며, 주렴계가 「태극도설」에서 ‘무극’이라는 말을 쓴 것도 도가의 무극을 말한 것이 아니라 태극이라는 말을 꾸며주기 위해 ‘무궁무진’이라는 뜻으로 쓴 것일 뿐이라고 항변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주자에게 있어서 무극 태극 논쟁은 도가에 대한 유가의 자존심 문제였던 것이다. 

   이에 반해 같은 유학자이기는 하지만 학문에 대해 좀 더 유연한 입장이었던 육상산은 신유학의 창시자 주렴계가 도가 철학의 영향을 받았으며 유가 철학인 태극보다 도가 철학인 무극이 더 앞서는 개념이라고 말하고 있다. 서로가 입장을 바꾸지 않는 가운데 이 논쟁은 끝나버렸고, 이후 거의 800년 이상 주자 신봉 학자들과 육상산 신봉 학자들 사이에서 이 논쟁은 계속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1517년∼18년 사이에 이언적(李彦迪, 1491~1553)과 조한보(曺漢輔, ?∼?)가 무극 태극 논쟁을 벌인 일은 유명하다.

      

  (4) 모기령의 실수와 그 이후41

 

   무극 태극에 대한 주자와 육상산의 입장이 다른 가운데, 최근에는 무극에서 태극이 나왔다는 육상산의 주장이 크게 득세를 하고 있다. 김병환은 주자학 연구를 대표하는 서적으로 평가받는 후외로(候外廬, 1903~1987)42의 『송명리학사(宋明理學史)』나 진고응(陳鼓應, 1935∼)43의 『역전여도가사상(易傳與道家思想)』, 장입문(張立文, 1935∼)44의 『송명리학연구(宋明理學硏究)』같은 유명한 서적들이 ‘無極而太極(무극과 태극은 같다)’으로 시작되는 주렴계의 『태극도설』 첫 마디를 아예 ‘自無極而位太極(무극에서 태극이 나왔다)’으로 단언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 학자들은 주자와 동시대의 인물 홍매(洪邁, 1123∼1202)45가 저술한 『송사』 「주돈이46」전에 실린 주렴계의 『태극도설』에 ‘자무극이위태극’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점을 근거로, 무극에서 태극이 나왔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학계의 영향력이 큰 사람들이 이런 주장을 해 왔기 때문에, 국내외의 많은 학자들은 무극에서 태극이 나왔다는 입장을 지지하게 되었다. 최근 간행된 논문들이나 서적들 절대 다수가 무극에서 태극이 나왔다는 것을 당연한 사실로 취급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김병환은 이 학자들이 ‘자무극이위태극’을 고집하는 이유가 결국은 청나라 초엽의 학자 모기령(毛奇齡, 1623∼1716)47 때문이라고 한다. 후외로, 진고응, 장입문 같은 대가들의 주장도 원래는 모기령에 의해 제기된 설이었다는 것이다. 모기령은 홍매가 쓴 『송사』 「주돈이」전에 실린 주렴계의 「태극도설」에 ‘자무극이위태극’이라고 기록되어 있었으나, 홍매가 쓴 『태극도설』 판본 대신 주자가 ‘자(自)’와 ‘위(爲)’ 두 글자를 삭제하여 ‘무극이태극’으로 바꾸어 놓은 ‘장사건안본(長沙建安本)’을 주렴계의 『태극도설』 표준으로 널리 퍼뜨렸고, 그 결과 ‘무극이태극’으로 잘못 알려지게 되었다고 주장한 인물이었다. 

   물론 주자는 『대학(大學)』의 고전을 수정한 전례가 이미 있었기 때문에,48 그가 주렴계의 원래 저작도 뜯어 고쳤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는 있다. 하지만 주자(당시 59세)는 1188년 홍매(당시 66세)가 쓴 『송사』 「주돈이」전을 보고 거기에 실린 『태극도설』에 ‘무극이태극’ 대신 ‘자무극이위태극’이라 적혀 있는 것을 보고는 이미 전해져 내려오는 『태극도설』에 ‘무극이태극’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왜 엉뚱하게 기록하였는가 힐난한 사실이 있다. 그리고는 홍매에게 원래 전해져 내려오는 대로 ‘무극이태극’으로 수정할 것을 거듭 요구하였지만 끝내 관철시키지 못했다고 한다. 

      

  戊申(1188년) 6월, 나(주희)는 옥산에서 한림학사 홍매를 만나 그가 편수하고 있는 『국사(國史)』를 얻어 볼 수 있었는데, 그 중에는 주렴계, 정명도와 정이천, 장횡거 등의 전기와 주렴계의 『태극도설』이 포함되어 있었다. 주렴계의 전기는 여기에서 처음으로 씌어졌으니 이는 사관이 주렴계의 중요성을 인정하였다는 것으로 그 공이 있다 할 것이다. 그러나 『태극도설』의 본래 구절은 ‘無極而太極’인데 홍매는 ‘自無極而爲太極’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어떤 근거로 ‘自’와 ‘爲’ 두 글자를 첨가했는지 모르겠다. … 만약 이 두 자를 첨가한다면 주렴계같은 성인(聖人)에게 누가 되고 후학들에게 의구심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이에 두 글자를 삭제할 것을 요청했으나 불가하다고 한다.49

      

   홍매가 비록 한림학사이자 황실에서 지정한 중국사 저술 학자이기는 했지만, 주자의 학문과는 대립되는 입장에 계속 서 있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원래 ‘무극이태극’이었던 『태극도설』을 주자와는 반대 입장인 ‘자무극이위태극’으로 변형시킨 게 아닌가 하고 김병환은 의심한다.50

   또 주자는 1189년에 육상산에게 “근래에 홍매가 쓴 『송사』 「주돈이」전을 보았는데 거기에 실린 『태극도설』에는 ‘자무극이위태극’이라 되어 있었습니다. 만약 주렴계가 정말로 그렇게 썼다면 나는 무극에서 태극이 나왔다는 육상산 당신의 견해에 동의하고 더 이상 이견을 내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주렴계는 결코 『태극도설』에 그렇게 쓴 적이 없습니다”51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자무극이위태극’이라고 기록한 『태극도설』이 단 하나의 판본이라도 전해지는 것이 있다면 자신의 주장을 꺾을 것이니 보여 달라고 거듭 요구했다.

   만약 그때 주자의 편지를 받은 육상산이 ‘자무극이위태극’이라고 쓴 『태극도설』 판본을 하나라도 제시했다면, 무극 태극 논쟁은 육상산의 승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육상산과 많은 그의 제자들, 그리고 『송사』 「주돈이」전에서 ‘무극이태극’을 ‘자무극이위태극’이라고 바꾸어 기록한 홍매마저도 아무런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주렴계 사후 110년 정도가 지난 주자와 육상산, 홍매 당시에 ‘무극이태극’이라고 쓰인 판본의 『태극도설』만 있었지, ‘자무극이위태극’이라고 적힌 판본은 단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원래 『태극도설』은 ‘자무극이위태극’이었고 그것을 주자가 마음대로 ‘무극이태극’으로 뜯어 고쳐 세상에 퍼뜨렸다는 모기령의 주장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후외로, 진고응, 장입문 등 저명한 학자들은 모기령의 주장을 제대로 검증하지 않은 채 그냥 받아들였고, 따라서 무극에서 태극이 나온 것이 정설이라는 분위기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그 결과 별다른 전문 지식 없이 논문이나 서적을 본 사람들이 필자처럼 무극에서 태극이 나온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4. 정리하며

 

   부족하지만 필자는 이 글을 통해 무극도에서 태극도가, 태극도에서 대순진리회가 나온 것이 아니라, 무극도와 태극도, 그리고 대순진리회라는 세 개의 종단이 모두 종통이라는 하나의 핵심 매개체로 엮어진다는 점, 이 세 종단의 본질은 같다는 점, 결국 한 종단이 이름을 계속 바꾸어 온 셈이라는 점들을 설명하고자 했다.

   상제님의 친자종도들에 의해 설립된 종교 단체가 많을 때는 100개가 넘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52 우리 종단은 그런 종단들과 같은 차원으로는 묶여져서도 또 이해되어져서도 곤란하다. 우리 종단은 도주님께서 상제님으로부터 종통 계승의 계시를 받아 창설되어졌다는 점에서 여타의 다른 종단들과 그 궤를 달리 한다.

   우리 종단을 규정하는 핵심은 도장 건물이나 터 등 종단이 갖는 외형적인 모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종통에 있다. 종통 즉 상제님-도주님-도전님으로 이어지는 계보와 그 속에서 유지(遺志)·유법(遺法)·유훈(遺訓)이 부정되지 않고 살아있을 때 비로소 종단은 종단으로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이 종통은 종단 무극도와 태극도를 거쳐 현 대순진리회에까지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런 사실에 기반할 때 무극도에서 태극도가 나왔다거나 혹은 태극도에서 대순진리회가 나왔다는 차원으로 종단의 변천이 이해되어져서는 곤란하다. 무극도와 태극도는 도의 본체가 지나온 자취로 해석되어져야 한다. 종통(도의 본체)은 무극도·태극도·대순진리회를 통해 이어져 내려왔고, 1925년부터 1941년까지의 무극도나 1948년부터 1968년까지의 태극도, 1968년부터 지금까지의 대순진리회가 차례차례 도(道)를 현현(顯現)해 왔다는 점에서 이 세 종단은 모두 본질적으로 같은 종단으로 봐야 한다. 결국 하나의 종단이 차례차례 그 외형적 모습을 변화시켜 왔다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무극도가 곧 태극도요, 태극도가 곧 대순진리회가 된다는 것이다.53

   현재 부산 감천에 태극도장이 아직도 남아있지만, 도의 본체 즉 종통이 태극도에서 대순진리회로 넘어왔기 때문에 1968년 이후로는 무극도에서 시작된 종단이 태극도를 거쳐 대순진리회라는 외부 모습을 갖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부산 감천의 태극도장은 도의 본체가 사라진 채 다만 옛 건물들만 남아있는 유적지로서 이해할 수 있다. 

   무극도에서 태극도가 나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 일부가 그 주장의 근거로 삼는 무극에서 태극이 나왔다는 말도 대순진리회에서는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대순진리회에서는 도가에서 말하는 우주의 본원인 ‘무극’과 유가에서 말하는 우주의 본원인 ‘태극’이 서로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여주본부도장의 포정문에 새겨진 ‘대순이 원이며 원이 무극이고 무극이 태극이라’ 즉 ‘대순=원=무극=태극’이라는 글귀는 무극과 태극은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다. 그럼에도 일부 사람들이 무극에서 태극이 나온 것으로 오해를 하게 된 이유는 청나라 모기령의 잘못된 연구로부터 영향을 받은 학자들이 쓴 논문이나 서적들이 시중에 많이 출간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대순진리회의 종통은 도전님에게까지만 이어졌고, 도전님께서는 대순진리회라는 종단에서까지만 인세(人世)의 일을 보셨기 때문에, 우리의 종단은 대순진리회에서 그치고 더 이상의 변천은 있을 수 없다는 점도 상기해야 한다. 앞으로 그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종통을 바르게 알며 유지와 유법, 유훈을 따르고 대순진리회를 지켜나간다면 도통과 운수를 받는 마지막 순간을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대순회보> 9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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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도덕경』 제28장

30 성리학자들은 태극을 우주 만물의 리(理) 또는 기(氣)로 설명함으로써 태극에 대한 철학을 전개해 나갔다. 성리학은 천지가 생성되어 나오는 과정을 이기론(理氣論)으로 설명하는데, 이에 따르면 리(理)는 우주의 법칙·원리이자 사물 생성의 본체로서 형이상(形而上)의 것이고, 기(氣)는 직접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사물의 구체적 성질이자 사물 생성의 질료로서 형이하(形而下)의 것이라 한다. 성리학에서는 리(理)와 기(氣)의 선후(先後) 문제 등 여러 가지 사변(思辨)들이 다양하고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31 『주역』 「계사전」 상

32 김낙필, 「도교의 圓 상징과 무극·태극」, 『원불교학』 Vol 1, 한국원불교학회, 1996, pp.68∼69 / 『장자』 「대종사(大宗師)」에 ‘夫道有情有信 無爲無形 可傳而不可受 可得而不可見 自本自根 未有天地 自古以固存 神鬼神帝 生天生地, 在太極之上而不爲高, 在六極之下而不爲深, 先天地生而不爲久, 長於上古而不爲老(무릇 도는 실제로 나타난다는 작용이 있고, 그것이 존재한다는 증거도 있으나, 행동이 없고 형체도 없다. 그것을 전할 수는 있으나 물건처럼 주고받을 수는 없다. 터득할 수는 있으나 볼 수는 없다. 스스로 모든 존재의 근본이 되어 있고, 천지가 아직 생기기 전의 옛날부터 본래 존재하며, 귀신이나 상제를 영묘하게 하며, 하늘과 땅을 낳고 있다. 가장 높은 곳(太極)보다 더 위에 있으면서 높은 척하지 않고 가장 깊은 곳보다 밑에 있으면서 깊은 척하지 않는다. 천지보다 먼저 생겨났으면서도 오랜 세월이라 여기지 않고, 까마득한 옛날보다 더 오래되었으면서도 늙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 해석은 안동림이 번역한 『장자』(현암사, 1973)를 참고하였으며, 최근에 번역된 『장자』는 여기에 나오는 태극을 유가(儒家)에서 말하는 우주의 시원으로서의 태극으로 오인하여 잘못 번역해 놓은 것이 많으니 주의를 요한다.

33 해설은 필자가 주를 단 것임.

34 죽산 박씨 35세손, 문헌공파(文憲公派)로는 19세손이 되신다.

35 중국 북송 초기의 저명한 도사. 도호(道號)는 희이(希夷). 하남성 녹읍 출신.

36 경희태, 『道敎與中國傳統文化』, 복건인민출판사, 1989, p.140

37 각주 32 김낙필의 글, p.70 재인용

38 서악(西岳)을 말함. 섬서성 위수 근처 소재. 2,347m

39 『송사』 「유림전」 주진(朱震, 1072∼1138)의 전기에 따르면, “주진의 경학은 깊고 진실했는데 그는 『한상역해(漢上易解)』에서 ‘「선천도」는 진단이 충방에게, 충방은 목수에게, 목수는 이지재에게, 이지재는 소옹에게 전했다. 「하도낙서」는 충방이 이개에게, 이개는 허견에게, 허견은 범악창에게, 범악창은 유목에게 전했다. 목수는 「태극도」를 주돈이에게 전했다.’고 했다.”(풍우란 저, 박성규 옮김, 『중국철학사』 하, 까치글방, 2007, pp.444∼445)

40 9살의 나이차가 나는 이들이 처음 만난 곳은 아호사(鵝湖寺: 강서성 연산현)였다. 그 해는 1175년으로 당시 주자(46세)는 학문으로 명성을 얻어 이미 학계의 주류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고, 육상산(37세)은 명성을 이제 갓 얻기 시작하던 때였다. 아호 모임에서 두 사람은 학문하는 방법에 대한 논쟁을 벌였는데, 간단히 말해 육상산은 학문을 닦는 것이 수양의 기본 공부가 아니라고 주장했고, 주자는 학문을 닦는 것이 수양의 기본 공부가 된다는 입장이었다. 비교적 간단한 논쟁이었으나 서로가 한 발도 물러서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철학 사유 전반에 대한 본격적 논쟁은 시작되지도 못한 채 3∼4일 만에 아호 모임은 끝나고 말았다. 두 사람이 아호 모임에서 논쟁을 벌일 때는 서로 기분이 좋지 않았으나, 모임이 끝난 뒤에 육상산이 수양을 위해서는 학문도 닦아야 한다는 쪽으로 자신의 입장을 철회했고, 주자도 그간 학문만을 강조한 나머지 인격 수양에는 부족한 점이 있었던 점을 반성하며 역시 한 발자국 물러서는 입장을 취했다. 이후 두 사람은 화기애애하게 지내는 듯 했으나 근본적으로는 유학에 대한 서로간의 입장차를 가지고 있었기에 상대의 학문에 대해서는 좋지 않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진래 지음, 이종란 외 옮김, 『주희의 철학』, 상지사, 2002, pp.423∼492)

41 이 장은 각주 3과 각주 4의 글을 많이 참고하였음.

42 중국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명예소장, 서북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중국의 대표적인 역사학자 중 한 사람.

43 복건성 장정 출신. 북경대와 대만대 철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도교와 주역 연구로 명성을 얻음.

44 절강성 영가 출신. 중국인민대학 철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철학 전반과 유학 연구로 유명.

45 자는 경로(景盧), 호는 용재(容齋). 시호는 문민(文敏). 지방의 여러 벼슬을 역임하다가 나중에 한림학사가 되었다. 폭넓은 독서가였으며, 정치·사회·사상·역사·풍속·예술·의학·천문·수학 등 모든 방면의 사상에 관한 고증 연구를 하였다.

46 주렴계를 말함. 본명이 주돈이(周敦)이며, 염계(濂溪)는 그의 호이다.

47 자는 대가(大可), 본명은 신() 또는 초청(招請). 명이 망하자 산 속으로 들어갔으나, 강희 17(1678)년에 박학홍유(博學鴻儒)에 응시하여 한림원 검토에 임명되어 명사(明史) 편찬에 참여하였다.

48 「대학에 대하여」 1, 『대순회보』 65호, p.16

49 「記濂溪傳」, 荒木見悟 主編, 『晦庵先生朱文公文集』 下, 臺北 文化書局, 1985, p.5158

50 김병환은 중국 역사에서 사가(史家)의 주관적인 관점으로 중국 역사의 기록을 바꾸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지적한다.

51 「記濂溪傳」, 荒木見悟 主編, 『晦庵先生朱文公文集』 上, 臺北 文化書局, 1985, pp.2296∼2297

52 김홍철 외, 『한국신종교실태조사보고서』,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1997, p.152

53 물론 여기에서 태극도는 도전님께서 출궁하시던 1968년까지의 종단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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