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를 향한 일편단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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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정자 작성일2018.11.28 조회5,252회 댓글0건본문
춘산 방면 선감 박정자
어린 딸을 데리고 대구로 이사 온 지 9년. 그 사이 혼자 애를 키우는 것도 힘들었지만 이유 없이 아픈 몸은 저를 더욱 지치게 했습니다. 머리가 깨질 듯, 어깨는 돌을 올려놓은 것처럼 아프다가도 언제 그랬냐 싶게 힘이 넘쳐 설쳐대곤 했습니다. 점을 보러 가면 한결같이 신(神)을 받으면 대한민국 돈을 다 쓸어 모을 정도로 영험한 무당이 될 거라고 했습니다. 신을 받고 싶지 않은 마음에 종교를 갖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불교, 기독교, 천주교, 남묘호랑개교, 천도교를 전전했으나 마음에 맞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금 다니다 보면 더 아팠기 때문에 힘겨운 나날을 보내던 중이었습니다.
그때 이웃집 아주머니(이하 전도인)로부터 좋은 곳이 있는데 함께 다녀보자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어디라도 신만 받지 않을 수 있다면 가봐야겠다는 마음에 선뜻 그러겠노라 대답하고 연락을 기다린 지 한 달, 아버지 기일이라 제수를 준비하고 있는데 전도인이 오셨습니다. 전을 부치다 말고 전도인을 따라가 네다섯 명의 다른 입도인들과 함께 입도치성을 모셨습니다. 정성을 다해 예를 올리는 수도인들의 모습에 마음이 흡족해 기분 좋게 집에 왔는데 어머니께서 줏대 없이 이 종교 저 종교 다 한다면서 화를 많이 내셨습니다. 평상시 말씀이 없으셨던 어머니 꾸지람인지라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하면서 앞으로 대순진리회만 열심히 믿겠노라 마음속으로 다짐했습니다.
며칠 뒤, 자그마한 식당을 개업했습니다. 입도치성을 모신 뒤, 수도하는 곳에 가보자고 하는 분이 없어 장사하며 무심하게 한 달을 보냈습니다. 하루는 맥주 상자를 드는데 갑자기 코에서 피가 나기 시작하더니 막아도 멈추질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조그마한 대야에 밤새 피를 받았는데 그날따라 밤에 유난히 비가 많이 오셨습니다. 날이 새고 아침이 되어도 가게 문을 열지 않자, 이상히 여긴 집주인이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와서 피를 보더니 이사를 잘 못 와서 그런 것 같다며 돈을 내줄 테니 다른 집을 구해 이사하라고 했습니다. 며칠 후, 이사하고 나니 세 분의 선각자가 찾아오셨습니다. 저는 그분들께 서슴지 않고 얘기했습니다. “천지대도라고 하는데 입도하고 한 번도 안 갔으니 상제님께 벌 받은 것 같아요.”라고. 그분들도 그런 것 같다고 하시면서 인도자를 만나 회실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인도자와 함께 회실에 가서 경산 선감으로부터 처음으로 교화를 들었습니다. 신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입도 동기보다도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잘 사는 후천선경이라는 도(道)의 목적이 너무 좋아 포덕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성(誠)도 모시고 딸 공부도 시켜야 했기에 밤과 새벽에 일을 하고 낮에는 일 마치는 대로 회실로 가서 선각과 함께 포덕하러 다녔습니다. 대구에 연운이 별로 없었던지라 처음엔 포덕이 막막하였으나 한 사람을 포덕해서 그 앞으로 해나가면 된다는 경산 선감의 말씀에 힘입어 친정 식구부터 포덕해 동생들과 어머니를 입도시켰습니다.
그렇게 한 명, 두 명 포덕하다가 중곡도장으로 구천상제님 강세치성을 모시러 갔습니다. 질서 있고 엄숙하게 정성 드리는 모습을 보며 ‘이렇게 좋은 데가 있구나.’ 하고 크게 감화 받고 기운을 모시고 내려와 3일 만에 일꾼을 만났습니다. 직장 동료였던 그녀는 입도치성을 모시기로 한 날, 팔이 너무 아파 죽겠다며 절을 못할 것 같다고 했는데, 치성을 모시며 절을 할 때, 팔이 쑥쑥 잘 올라가는 것을 경험하고는 참 신기하다고 하였습니다. 그 후 저와 함께 포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경산 선감의 말씀처럼 그 후각 앞으로 사업이 되었습니다.
연말연시에 경산 선감께서 설 본부성을 모시고 내려오면 선무 임명을 모셔 줄 테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후로 소식이 없으셨고, 설이 지나고 보름이 되어 갈 무렵, 회실에 갔는데 당시 교령이 선무들을 수의하고 제게는 사업하러 나가라고 지시했습니다. 사업하러 나오면서 경산 선감께서 돌아가신 것을 알고 슬픈 마음과 황망함에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진리 보고 도를 닦지 사람 보고 도를 닦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라고 마음을 추스르고 사업에 임하였습니다.
두 달 뒤, 선무 임명을 모셨습니다. 일과 포덕사업을 병행하며 열심히 한 결과, 앞에 선무가 20명이 되었습니다. 일꾼이 불어나는 것에 바쁘고 힘든 것도 잊고 재미있고 신바람 나게 사업하며 몇 년을 보낸 어느 날, 갑자기 머리와 눈 주위가 아파서 안과에 갔더니 급성녹내장이라고 했습니다. 수술해서 눈을 제거하고 상처가 회복되면 인조 눈을 끼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입원해서 수술을 받았는데 어찌나 아프던지 한 달간 밥도 못 먹고 잠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이후로 아프고 힘들 때마다 이때를 생각하며 버틸 정도였습니다.
퇴원해, 친정집으로 갔습니다. 방면의 도움을 받아 매일 통원치료를 받았고, 교령(현재의 경산방면 수임선감)께서도 날마다 문병을 오셨습니다. 수반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을 돌보아야 할 교령까지 제게 신경 쓰시니 “저도 사업 못하고 있는데 교령까지 여기 오시면 어쩝니까?”라고 했더니 “왜? 내 맘이지.” 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도를 닦으면 잘 된다고 했는데 한쪽 눈을 잃는 시련을 겪었으니 도에 대한 원망과 불신이 생길까봐 걱정이 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전생에 남의 눈을 해코지해서 그것을 받는 것이라 생각했고 후각들을 돌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습니다. 수술한 눈의 상처가 아물자 인조 눈을 끼웠고 의사는 6개월 후에 다른 쪽 눈도 아플 것이니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눈 치료가 끝나고 다시 포덕을 나가려고 하자 도에 불신이 생긴 동생들이 완고하게 도 닦는 것을 말렸습니다. 일하랴 도 닦으랴 밤낮없이 뛰어다니니 몸이 성하겠냐는 것이었습니다. 딸과 함께 친정집에 얹혀 사는 입장이라 동생들 눈치를 보며 한 달간 집에 있었는데 두 달째 접어들면서 포덕에 대한 열망이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동생들에게 속에서 불이 나 못 살겠다고 하면서 내가 무당이 되지 않으려면 도를 닦는 길밖에는 없다고 강하게 호소했더니 동생들이 마지못해 허락했습니다.
이후로도 여러 차례 병마가 찾아들어 병원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그럴 때마다 크게 겪을 일을 양위 상제님과 도전님의 덕화로 작게 겪었다는 것을 느꼈으며 ‘전생에 남에게 못할 일을 많이 해서 이 세상에 와서 받는구나. 이 세상에서 다 받아야 다음 세상에서 올바르게 살지 않겠나.’라고 생각하며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기회로 삼아 더욱 일심(一心)을 다졌습니다.
그래서 이때도 나머지 눈을 잃을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개의치 않고 수도에 정진했으며 다음 해인 1986년, 후각과 나란히 선사 임명을 모셨습니다. 호수가 600호가 넘었으므로 당시 선감께서 제게 차선감 호수이니 다음에는 선사에서 바로 선감이 될 수 있다며 열심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해 경산 방면 회관이 개관되었고 도전님께서 납시셨습니다. 선사 이상 임원들이 방에 들어가 인사 올리니 도전님께서 회관도 지었고 경산에서 맏집이니 사업을 잘하라고 하셨습니다.
도전님의 행차로 인해 사기가 크게 진작되어 수도에 가일층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한 명, 한 명의 후각을 키우기 위해서, 한 달간 매일 후각 집에 찾아가 함께 기도를 모시기도 했고, 『전경』이나 『채지가』를 읽으며 교화해 주기도 했습니다. 또 공부나 수강을 들여보내기 위해 후각 집 안의 사소한 일부터 시작해 연로하신 후각 부모님의 대소변을 받아내는 일까지 온갖 궂은일을 해주기도 했습니다. 때론 그렇게 정성 들인 후각들이 떠나거나 일이 되지 않을 때는 수돗물을 틀어놓고 펑펑 울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종횡무진하며 3년이 흘러 상임원 임명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1,500호가 넘었으나 제 위로 선각자 두 분이 계셔서 두 분이 선감과 교감으로, 저는 보정으로 각각 임명 상신이 올려졌습니다. 당시에는 임명 상신이 올려지면 도전님 시안(侍顔)을 모셨고 방면 호도 신청한 대로 내려주셨기에 중곡도장으로 도전님 시안을 모시러 갔습니다. 선감, 교감 임명 모시고 제 차례가 되자 현재 경산 방면 수임선감께서 도전님께 저에 대해 불고가사하면서 사업도 정말 열심히 하는데 정원부로 키우기 안됐으니 교감으로라도 임명을 내주십사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도전님께서 “교감 있지 않나요?” 하시며 선감으로 임명 내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임원이 되어 설레고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본부성과 중곡도장 영대봉안치성을 모셨고 몇 개월 뒤에는 제주수련도장에 구천상제님 화천치성을 모시러 갔습니다. 치성 마치고 도전님께서 7박 8일간 임원 연수를 실시하셨는데 항상 저희 주위에 계시면서 점심과 간식을 사주셨습니다. 특별한 말씀은 없으셨지만 도전님을 뵐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훈시도 한 달에 한 번, 혹은 두 번 모셨는데 한 번 하신 훈시말씀은 3개월 간 반복하셨습니다.
구애받을 것이 없던 저는 임원으로서 해야 하는 도장 일과 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여할 수 있는 복을 누렸는데 복마(伏魔)의 발동으로 다른 쪽 눈에도 녹내장이 발병했습니다. 병원에서 검사하고 눈에 넣는 약과 먹는 약을 받아 왔습니다. 약이 독해 무가당과 우유를 같이 먹어야 했고 먹고 나면 몸이 떠다니는 것처럼 정신이 혼몽했는데 한번은 약을 먹고 잠들었다가 꿈을 꿨습니다. 산고개를 올라가는데 어떤 이가 산 중턱에 나 있는 오른쪽 길로 가라고 했습니다. 그 말대로 했더니 박이 주렁주렁 열린 초가집 한 채가 있어, 문을 열고 방에 들어가 누웠습니다. 꼭 맞아서 편하고 좋았는데 먼 곳에서 “엄마”, “엄마”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소리가 차츰 가까워지는데, 다름 아닌 딸이 우는 소리였습니다. 그 소리에 놀라 눈을 떠 보니 딸이 저를 부르며 제 몸을 흔들어 깨우고 있었습니다. 딸 말로는 한참을 그러고 나서 제가 깨어나더랍니다. 순간, ‘아! 정성을 올려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심고 드리고 기도 모시며 유공을 했습니다.
며칠 후, 또 꿈을 꾸었습니다. 숭도문 앞에 많은 임원이 한복을 입고 국궁자세로 서 있는 가운데 도전님께서 도포를 입으시고 갓을 쓰신 채, 종무소 앞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 그러시다가 뒤를 돌아보시며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선·교감이 많아서 다 몰라도 박선감은 눈이 그래서 내가 알아. 눈 그거 괜찮을 거야. 신경 쓰지마. 걱정하지 마.”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꿈이었습니다. 그리고 병원에서 받아온 나머지 약만 먹고도 눈이 나았습니다. 멀고도 가깝게 계시는 도전님…. 감사합니다.
이후로 토성수련도장이 지어지면서 외수 임원은 공사에 참여하였고, 내수 임원은 연수를 돌았습니다. 임원 연수에 2반으로 들어갔고 이때도 도전님께서 저희 주변에 계시면서 기운을 주셨는데 얼마 뒤 모습을 감추실 줄이야. 많이 놀랐으나 이치가 있을 거라 생각하며 마음을 추스르고 토성수련도장 영대봉안치성을 마치고 왔습니다.
당시 몸이 불편해서 도장출근을 못하고 계시던 방면 선감과 제가 도전님에 대해서 교화를 많이 했으나 수반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3년이 지나, 신위(神位) 문제가 발생하면서 방면에도 많은 시련이 있었고 저는 도장에서 2년간 수호를 서다가 방면 선감께서 입원하셔서 후각들과 문병을 갔습니다. 선감께서 제 손을 잡으시면서 후각들과 함께 마음 맞추어 잘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유언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며 동고동락했던 선감께서 떠나시고 나니 막중한 책임감과 허전함이 태산같이 밀려와 한동안 그 빈자리가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선감께서 별세하신 지도 10년이 훌쩍 지났고 이룬 것이 없어 면목이 없으나 오늘도 제 할 일을 묵묵히 할 따름입니다. 얼마 전, 종교문화답사를 다녀왔습니다. 힘든 줄 모르고 따라다녔는데 다녀와서는 몹시 힘에 부쳤습니다. 그래도 다음 날 수호 서고, 치성에 쓰일 밤을 깎고…. 몸으로 많이 겪었기에 아플 건 다 아팠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육신이 허락하는 날까지 상제님의 일꾼으로 본분을 다하며 마음 닦기에 힘쓰려 합니다. 이런 저의 활기찬 모습에 예전에는 반대했던 동생들도 보기 좋다며 누님은 도 닦기 잘한 것 같다고 합니다.
40년 홀로 살아온 제 인생의 낙은 양위 상제님과 도전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변하여 도를 떠나는 많은 사람을 보았고 ‘진실로 마음을 간직하기란 죽기보다 어렵다’는 상제님 말씀을 생각해 볼 때 방심해선 안 된다는 생각에, 선·후각 모두 마음 변치 않고 운수마당에 갈 수 있도록 늘 심고 드리며 도전님 말씀을 새겨 봅니다.
“운수는 살아서 받으나 죽어서 받으나 똑같다. 지금이라도 도통을 주고 싶어도 마음이 닦인 사람이 없어서 못 준다.”
<대순회보> 1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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