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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보름을 준비하는 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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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도언정 작성일2018.12.06 조회3,69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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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릉15 방면 선사 도언정


  뭔가를 정성스럽게 준비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배워 본적이 없는 제가 수도를 한지도 벌써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늘 말로는 ‘정성을 들여야 한다, 정성이 빠지면 안 된다.’라고 하면서 정말 정성을 들여 어떤 일을 준비한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제가 무슨 복이 있었는지 운 좋게도 치성이 있는 주에 맞춰 금강산 연수를 가게 되었습니다. 매 식사 때마다 음복이 반찬으로 나오는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만큼 할 일도 많았습니다. 치성 모시고 음복 마치자마자 앞치마 입고 장화 신고 밀려오는 설거지와 한바탕 전쟁을 해야 했습니다. 누가 알았겠습니까? 제가 이렇게나 일에 요령이 없을 줄. 허둥지둥 설거지를 어떻게 끝냈는지도 모르게 마무리 짓고는 오전 내내 끙끙 앓았습니다. 


  한번은 식당 작업을 하는데 대보름에 쓸 나물을 썰게 되었습니다. 아직 대보름은 한 달 반이나 남았는데 보름나물을 벌써 썰어서 말려 둔다는 거였습니다. 커다란 도마에 쥐고 있기도 무거워 보이는 큰칼이 떡하니 제 앞에 등장했고, 표고버섯이며 가지에 애호박까지 썰어야 하는 재료들이 나왔습니다. 재료들이 도톰하고 예쁘게 보이는 것이 한눈에 봐도 정성껏 키운 것인 듯 값비싸 보였습니다. 식당 종사원의 시범을 보고 또 다시 어떻게 하는지 물어보고 나서야 저도 조심스레 칼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건 자세부터가 안 잡히는 겁니다. 식탁에 앉아도 팔이 들려 불편하고, 서서 하자니 허리가 아프고, 어떻게 썰기는 해야겠는데 써는 데 집중하자니 자세가 불편하고, 자세가 편하자니 써는 것이 잘 안 되고, 진퇴양난이란 것이 이런 느낌일 겁니다. 서른 넘어 이 나이 먹도록 학교 공부 말고는 해본 일이 없는 것이 제 현실이었으니까요. 


  집에 있을 때는 이모들이 “여자애는 시집가면 평생 할 일인데 뭘 어려서부터 시켜.”하면서 청소며 빨래며 다 해주셨고, 그러다 보니 저 혼자서 음식 한 번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던 겁니다. 더군다나 칼이라곤 잡아 본 것이 과도가 전부인 제가 보기에도 겁나는 주방용 칼을 잡고 뭘 썬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내정에서 쓰일 나물이라 하니 정성껏 썰었습니다. 반듯하게 예쁘게 썰어진 것만 쓰인다며 삐딱하게 썰어진 것이 바로 다른 그릇에 담기는 순간, 긴장이 저절로 되었습니다. ‘내가 썬 것은 다 내정에 쓰여야 될 텐데, 좋은 재료가 양도 얼마 안 되는데 잘 못 썰어서 못쓰게 되면 안 되는데…….’ 마음 졸이며 옆 사람 써는 것도 중간 중간 봐 가며 무사히 썰기를 마쳤습니다. 정성껏 하려고 노력하니까 나름 잘 된 것 같다는 뿌듯함이 밀려왔습니다.


  하지만 이게 보름 나물의 마무리가 아니었습니다. 썰어 둔 재료를 식당 뒤 공터에 펴서 말려야 하는 일이 남았습니다. 평상같이 생긴 틀에 깨끗한 망사를 펴고 재료들을 일일이 펼쳐 널었습니다. 뭐라도 묻을세라 바람에 날아갈세라 망사를 덮어 사방에 이쑤시개를 끼워 두는 겁니다. 애호박은 하나하나 따로 일렬 대오를 정비해서 널어 두었다가 어느 정도 마르면 다시 뒤집어서 말리는 수고까지 해야 된답니다. 이런 것이 정성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름 잘했다고 순간이나마 만족한 제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이래서 『대순진리회요람』에 “정성이란 늘 끊임이 없이 조밀하고 틈과 쉼이 없이 오직 부족함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이름이다.”라고 하셨나 봅니다. 


  대보름을 준비하는 현장에서 보았듯이 미리미리 하나하나 반듯하게 썰어 말리는 수고처럼 제 마음도 차근차근 반듯하게 닦아서 도통군자의 자질을 갖춰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대순회보> 9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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