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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수 포덕하기? 조상들 꿈에 나타나게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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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차선근 작성일2017.02.16 조회3,88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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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사 1방면 선감 차선근



  상제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하늘과 땅을 뜯어 고쳐 물샐틈 없이 도수를 짜 놓으셨으니, 이로부터 천지는 제 한도에 돌아 닿는 대로 새 기틀이 열리게 되었다. 그리고 상제님께서는 사람도 신명으로 하여금 뱃속을 드나들게 하여 다 고쳐 쓰신다고 하셨다.

  신명이 사람에게 드나드는 것은 곧 그 사람의 ‘마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사람의 마음이 악하면 악한 신이 들어오고 선하면 선한 신이 들어오는 관계로,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닦고 간직해 나아가느냐에 따라 거기에 걸 맞는 신명을 모시게 된다.

  이치가 이러하다보니 자연 수도인들의 수도생활 모습은 ‘마음의 좌충우돌 여행기’ 즉 ‘마음의 다큐멘터리’에 다름 아니며, 이로 인해 수도인들은 실시간으로 자신만의 수많은 감동 드라마를 만들어내곤 한다. 그러므로 수도인들이라면 누구든지 간에 두꺼운 책 한 권 분량도 모자랄 정도로 수도에 얽힌 저마다의 사연이 있기 마련이다.

  아직 가야할 길이 너무도 많이 남아 있기에, 뒤를 돌아본다는 것 자체는 어쩌면 자기만족에 따른 자기정체를 예약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감정적인 집착이 아니라 자기성찰을 토대로 한 회고(懷古)는 스스로의 초심(初心)을 잊어버리지 않게 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것이 타인의 수도생활에 지표가 되는 교훈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나의 옛이야기를 글로 털어낸다는 것은 실로 부끄럽기 그지없지만, 상제님의 진리에 대한 확신에 고민하는 몇몇 도의 입문자들에게 하나의 작은 격려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없는 용기를 꾹꾹 짜내어 보았다.

지금부터 17년 전인 1990년의 어느 봄날, 당시 대학 4학년이었던 나는 수도와 학업을 병행하고 있었다. 입학할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전액 장학금(당시 한국통신이 전국 몇몇 대학에서 1명씩 선정해서 졸업 때까지 무상으로 장학금을 주는 제도가 있었다)을 받을 정도로 주변에서 인정을 받고 있던 터였고, 어릴 때부터 대한민국의 과학기술 발전에 나름대로 일정한 기여를 하리라는 포부를 갖고 있었기에, 나는 수도 생활의 지속 여부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되었다. 바로 그 무렵 나는 두 가지의 신기한 사건을 경험하였고, 그땐 잘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내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수도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한 해 전, 도서관에서 엎드려 잠을 자다가 잠결에 우연히 얼굴만 알고 지내던 어떤 사람을 따라 나가 입도를 하였고,(지금도 입도 순간을 생각해보면 제정신은 아니었던 것 같다) 직감적으로 수도가 나의 학업에 방해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도인들을 피해 다닌 끝에 그들로부터의 연락을 피하기 위해 집에서 나와 학교 앞에서 자취를 하게 되었다. 그때야 휴대폰은 커녕 삐삐도 귀했던 시절이니 자취를 하는 것은 도인들을 피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마침 같은 학과의 교수님(지금 대진대학교에 계시는 신윤기 교감으로 당시 선사이셨다)께서도 수도를 하고 계셨고, 우연히 그 분을 만나 교화를 듣게 되었다. 그동안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막연히 내가 동경해왔던 어떤 진리를 찾은 느낌이 들었고, 수도가 곧 내가 가져야 할 천직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웃 방면이었지만 신윤기 교수님은 방면을 떠나 같은 도인으로서 친절히 열정적으로 교화를 하여 주셨고(지면을 잠시 빌려 너무 감사했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선각 분들의 따뜻한 배려 속에 문득 어느 날 ‘최후의 그 순간까지 대순진리회의 깃발을 사수하는 마지막 한 사람이 되겠노라’는 깊은 다짐을 하였더랬다.

그러다가 우연히 포덕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첫 포덕이 같은 과 동기였는데(지금은 교감이 되어 있다), 훗날 왜 나를 따라 입도했느냐고 물어보니 그 친구 대답이, 앉으나 서나 도에 대한 이야기만 하길래 짜증이 나서 일단 한번 따라가 주면 다시는 그런 이상한 이야기를 안 하겠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사실 그때는 포덕이 있는지 조차 모를 때라서 선각에게, 같이 교화를 들어보고 싶다는 사람이 있는데 데리고 와도 되겠느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그때는 이렇게 좋은 공부를 왜 나만 하는가 하는 생각에 만나는 사람마다 도 이야기를 하고 다녔던 것인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마음이 어쩌면 포덕에 대한 가장 순수한 초심(初心)은 아니었나 한다.

  들인 공은 별로 없었는데도 조상 공덕은 있었는지 제법 쏠쏠하게 짧은 시간에 포덕 호수가 급격히 늘어 나갔다. 당연히 도인들을 피하기 위해 만든 학교 앞의 자취방은 불과 한 달만에 도인들의 소굴로 변했다. 그때만 해도 부산에는 부전회관이 없고 연산동 회의실만 있었던 시절이었다. 회의실은 면적은 넓었으나 바로 아래층에 나이트클럽과 카바레가 같이 있어서 회의실에서 앉아 있으면 밑층에서 쿵덕쿵덕 소리가 들려 도인들을 데리고 가기 좀 민망할 때도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학교 앞의 자취방은 도인들을 키우는 데 있어 소중한 장소로 애용되었다.

1990년 봄이 되자, 나에게는 두 가지의 고민이 생겨 있었다. 하나는 왜 외수들만 입도가 되고 내수들은 입도가 안 되는가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남들은 잘만 꿈에 보인다는 조상들이 왜 나에게는 보이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습기 그지없는 문제지만, 당시 나로서는 수도생활 자체를 돌이켜 보아야 할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다.

  숫기가 없었던 나는 남자들은 잘 입도를 시키는데, 당최 여자들에게는 도에 대한 이야기를 할 자신이 없었다. 물론 도심(道心)이 부족했기에 생긴 문제였으나, 도의 이치가 음양인데 외수들만 커 나가서야 어디 균형이 맞겠는가 싶었고 이는 나의 수도가 결국 한쪽으로 편중된 기형이 되고야 말 것이라는 걱정이 들게 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한 가지 방법을 고안해 내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내수 응감지위’를 부르는 것이었다. 내수가 입도가 안 되니 일단 내수 신명을 먼저 나에게 응기시켜 데리고 다니면 자연 여자들이 입도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로부터 밤 9시만 되면 아무도 없는 깜깜한 학교 뒷산에 들어가서 바위 위에 앉아 주문을 읽고 심고를 드리면서 맨 마지막에 ‘내수 응감지위’를 부르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사람 냄새를 맡은 무시무시한 산모기가 덤벼들어도 잠바를 둘러쓰고 모기의 침을 피해가면서 내 딴의 정성 드리기를 한 달! 하루는 선각이 오더니 요즘 무엇을 심고 드리느냐고 물어보기에 별 생각 없이 ‘내수 응감지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그야말로 야단 야단이다. 도법에 있지도 않은 것을 하다니 당장 허령(虛靈)이 붙어서 큰일난다는 것이다. 도법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었던 나는 그 말을 듣고 제법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한 달간 헛정성을 들인 것에 대해 통한해 했다.

  그날 밤 교화를 마친 뒤 도인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자취방에서 혼자 잠을 자게 되었다. 한참이 지난 듯했을 때 갑자기 주위가 너무 밝아서 문득 잠을 깼다. 그랬더니 내 옆에 어떤 한복을 입은 여인이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아닌가! 무척 놀랄 일이었지만 잠결에 그냥 “당신 누구요?” 했더니 “밥 해주러 왔습니다.” 하는 것이다. “배도 안 고픈데 밥은 무슨 밥?” 하고는 또 그냥 잠이 들어버렸다. 계속 자고 있는데 이번에는 주변이 너무 시끄러운 것이다. 왜 이리 시끄러우냐하고 또 눈을 뜨니, 갑자기 자취방의 방문이 드르륵 열리면서 그 여인이 상에 음식을 가득 차려 들어오는 것이다. 밥이니 먹어야지 하는 생각에 일어나서 수저를 들었는데, 바로 그때 번쩍 정신이 들었다. 나는 그냥 누워있었고, 방에는 아무도 없었으며, 방문은 닫힌 채였고, 음식이 차려져 있었던 상은 접힌 채 그냥 옆에 세워져 있었다. 그 상은 교화를 할 때 항상 사용했던 것이었다. 이게 뭐야? 꿈이야 생시야? 좀 전의 그 생생함에 더 이상 누워있을 수 없었던 나는 벌떡 일어나서 방문을 열어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얼떨떨했다.

그로부터 이틀 후 드디어 내수가 입도를 하였고, 황당하게도 그때부터는 거의 압도적인 비율로 내수들이 주로 입도가 되는 것이다. 사정을 들으신 선감께서는 앞으로 내수들이 많이 크겠다고 하셨지만, 괜한 짓을 해가지고 쓸데없는 일을 벌였다는 생각이 ‘뼈저리게’ 들었다.

  어쨌든 내수 문제는 일단 해결되었으니, 이제 남은 문제는 꿈에 조상이 보이게 하는 것이었다. 도의 이치야 너무도 좋건만, 도대체 그 조상이라는 것을 볼 수가 없으니, 이거 우리 집안의 조상들은 내가 도 닦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나로서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수도인들을 상대하다보면 신기한 신명의 조화라는 것을 간혹 느끼게 되지만, 내가 바란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꿈에 조상이 나타나서 ‘너 욕본다. 열심히 해라’고 말해주는 것이었다.

이 문제로 이리 저리 고민하고 있던 시절, 시법공부(훗날 기도공부로 이름이 변경되었다)를 가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공부반의 외수 자리가 거의 모두 비는 일이 생겼고, 급작스럽게 거의 내 앞의 외수들로 해서 공부반이 꾸려졌다. 선각이 와서는 너 혼자서도 들어가기 어려운 공부를 수반들까지 몽땅 해서 한 반으로 공부를 들어가다니 엄청 큰 복을 받겠다고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가! 또 공부방에 들어가면 전생이 보일지도 모르니 절대로 발설해서는 안된다는 기대를 엄청 가게 하는 이야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어린 마음에 ‘그렇지! 이번에야 말로 무언가를 볼 수 있을 거야’하는 생각이 절로 들어 부푼 기대에 마음이 한껏 들떴다.

  드디어 공부에 들어갔다. 24시간 공부를 마쳤는데… 아! 그러나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것이었다! 잠을 못자고 주문만 냅다 읽다보니 몸만 엄청 피곤하고 아무런 기운도 못 느끼고, 전생은 커녕 깜깜한 공부방에서 보이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으나 수반들은 그래도 내가 선각이라고 공부가 어땠느냐고 물어보는데, 체면 때문에 아주 큰 기운을 느꼈노라고 떨떠름하게 말해야 했다.

공부를 마친 나는 터덜터덜 지친 몸을 이끌고 새벽에 집으로 향했다. 나는 2남 1녀의 막내였는데, 그 무렵 부모님들은 내가 수도를 하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3대 동안 천주교 집안인 데다 천주교 신앙인 친목모임 회장까지 지내신 부모님들이 내가 대순진리회에서 수도를 하는 것에 대해 반대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으므로, 나는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한 후 부모님들을 설득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새벽에 잠깐 잠을 자고 난 뒤, 간밤에 내가 공부를 들어간 사실을 전혀 모르시는, 심지어 내가 수도를 한다는 사실조차 모르시는 어머니, 누나와 같이 아침밥을 먹게 되었다. 그때 갑자기 밥상머리에서 어머니가 간밤에 이상한 꿈을 꾸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아, 간밤에 우리 집에 도대체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엄청 나게 집으로 몰려와서 이 집에 정말 아들 잘 두었다고 칭찬하면서 집에 큰 잔치를 벌리더라. 그리고 갑자기 공중에 선녀들이 나타나서 이번에 당신 아들이 지은 복이요 하면서 학교 운동회 공 굴리기할 때 쓰는 큰 공같이 생긴 복덩어리들을 집에 엄청나게 던져 재는데, 그 높이가 하늘 끝까지 닿더라. 풍악이 울려 퍼지고 너무 좋아 춤을 덩실덩실 추는데, 갑자기 어디에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나더라. 그 소리를 따라가 보니 하얀 안개가 걷히면서 궁궐 같기는 한데 궁궐은 아니고 절 같기는 한데 절도 아닌 이상한 한옥 건물이 보이고, 그 안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더라. 그래서 그 집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문이 열리지 않아서 빙빙 돌다가 잠을 깼다. 이게 무슨 꿈인지 도대체 모르겠다.”

막 내 입에 들어가던 밥숟가락이 덜컥 거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그런데 누나도 한 술 더 떠 자기도 간밤에 이상한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바닷가에 내가 두 남동생을 데리고 놀러가서 모래 장난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한복을 입은 남자와 여자들이 줄을 서서 왔어. 이상하게도 앞장을 어떤 아주머니가 섰더라. 남자들도 있는데 왜 아주머니가 앞장을 섰는지 모르겠다. 그것을 보고 갑자기 막내 동생이 춤을 덩실덩실 추면서 나는 저기 가야 한다 하면서 한복을 갈아입고 가 버리데. 너무 놀라서 큰 동생보고 빨리 가서 막내 동생을 데리고 와라고 했는데, 큰 동생이 나도 저 사람들에게 빚진 게 있다 하면서 사라지더라. 할 수 없이 내가 막내 동생을 데리고 오려고 갔는데, 도대체 그 사람들을 따라 잡을 수가 없었어. 한참을 가더니 그 사람들이 남자, 여자 줄을 서서 앉는데, 노래 같기는 한데 노래는 아니고 무슨 이상한 소리를 입으로 웅얼웅얼 내더라. 그 속에 막내 동생이 들어 있어서 빨리 데리고 나오려고 발만 동동 굴렀다.”

  모르는 척, 고개 팍 숙이고 열심히 수저질만 하던 나는 등에 식은 땀이 다 났다. 어머니와 누나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상한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학교 간다고 가방 들고 후딱 나와 버렸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하도 내가 꿈에 조상 보기를 바라니까 어머니와 누나가 나대신 꿈을 꾸게 해 주신 것 같았다. 다시는 쓸 데 없는 욕심을 부리지 않으리라 반성하였지만, 꽤 시간이 지나 지금 생각해보니, 1990년 봄날에 있었던 그 두 가지의 사건은 내가 수도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만들어 준 하나의 계기로 작용했었던 것 같다.


<대순회보 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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